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14)
공무원연금관리공단이 설립되었다. IOC가 88서울올림픽부터 테니스와 탁구 등을 정식종목에, 태권도를 시범종목으로 채택하였다. 에로영화 ‘애마부인’이 종로서울극장에서 개봉되어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렸다.
문승협이 소개팅한 지 10여 일 지났다. 여느 때처럼 음악학원을 가다 버스정류소에 서있는 정난희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서로 피할 이유는 없었으나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정난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어디 가세요?”
“아, 음악학원에요.”
“음악학원이요?”
“네, 뭐 좀 배우고 있어서. 그때는 잘 들어갔어요?”
“네, 덕분에.”
“그럼 안녕히 가세요.”
문승협은 음악학원에 늦기도 하였지만, 서로 바삐 가는 길에 오랜 대화는 실례라고 생각했다. 도로상에서 집중되는 이목에 가는 길을 재촉하였다. 정난희가 30여 미터쯤 걸어가는 문승협을 불러 세웠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쪽지를 건넸다.
“전화번호를 잃어버렸어요, 다음엔 편하게 할게요, 그래도 되죠?”
“네?”
“어, 버스 온다, 저 갈게요.”
문승협은 버스에 오르는 정난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버스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쪽지를 펴보았다. 숫자가 쓰여있어서 전화번호로 추측했다. 쪽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음악학원으로 갔다.
기타 교습이 끝날 즈음, 천영기와 이담이 점심을 먹자며 찾아왔다. 천영기가 근처에 싸고 맛있는 짜장면집을 발굴하였다며 앞장섰다. 짜장면곱빼기 세 개를 주문했다.
“헤실아, 정난희한테 연락 없디야?”
“연락은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 학원 가다가 우연히 정난희를 만났어.”
“뭐라 하디?”
“우리 집전화번호를 잃어버렸대.”
“딴 말은 안 하고?”
“참, 이 쪽지 주면서, 다음엔 편하게 하겠다더라?”
“뭔디?”
“아야, 전화번호그만.”
“나도 전화번호로 생각하는데, 어쩌라는 걸까?”
“예끼 멍충이, 그 걸 몰라서 묻냐? 전화하라는 뜻이 잖애, 이 멍충한 시끼야.”
“그래, 나 멍청하다, 내가 너처럼 똑똑한 연애박사를 어찌 이기겠냐?”
“아그야, 잘 들어봐잉. 다음에 편하게 한다는 말은, 꼭 다시 만나겠다는 의미여.”
“정말 그런 의미일까?”
“이 성아 말 믿고, 이따가 꼭 전화해, 알겄냐?”
“근디, 그 콧대 높은 정난희가 뭔 일이까?”
“긍께 말이어,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란께. 어허, 우리 승협이 한 건 했다잉.”
“근데 꼭 전화해야 하냐?”
“아따 썩을 놈, 뭔 생각이 그리 많냐? 씨잘데없는 생각 말고, 오늘 시간 내서 꼭 전화해라잉?”
“내일 우리가 와서 확인할 것이어, 알았제?”
문승협은 천영기와 이담의 종용에 의무로 느껴졌다. 오후에 전화해 보기로 하였다.
짜장면이 시내중화반점에 비해 반값인 반면 두 배로 맛있었다. 천영기가 문승협에게 계산하라고 했다. 정난희에게 전화번호를 받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짜장면곱빼기 세 갯값으로 600원을 지불하였다.
천영기와 이담은 독서실로 갔다. 문승협이 음악학원으로 가면서 정난희에게 몇 시에 전화할지 고민했다. 학원을 마치고 전화하기로 마음먹었다. 저녁식사시간쯤이면 집에 있을 거라 생각하였다.
저녁 7시쯤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갔다. 망설이다 다이얼을 돌렸다. 너무 떨린 나머지 신호 가는 소리가 나기 전에 얼른 끊었다. 무슨 말을 할지 머릿속으로 시나리오를 정리했다. 심호흡을 몇 번하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굵직한 어른남자음성이 들려왔다.
“여보시오?”
“안녕하세요, 정난희씨 집이죠?”
“그런디요.”
“저는 문승협이라고 합니다, 정난희씨랑 아는 친구인데, 통화할 수 있을까요?”
“친구믄 학생인가?”
“네.”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왜 여학생집에 전화한가?”
“아, 죄송합니다.”
“자꾸 쓸데없이 전화해서 불란 일으키지 말고, 학생 본분에 맞게 공부나 열심히 해, 알았는가?”
“네, 알겠습니다.”
문승협이 최대한 예의를 갖춰 공손하게 답하였다. 수화기너머에서 짜증석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나머지 황급히 전화를 끓었다. 정난희의 아버지가 무척 보수적이어서 또 전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어긋난 통화를 뒤로하고 씁쓸히 집으로 갔다.
다음날, 천영기와 이담이 궁금함을 못 참고 문승협을 찾아갔다. 이야기를 들은 천영기가 입을 열었다.
“아야, 딸 꼬실라는 전화를 허구한 날 받아봐라, 열받겄냐 안 받겄냐?”
“하긴, 그런 아부지들이 어디 한둘 이간? 현진이네 아부지는 욕까지 하드란께, 전화하지 마라고.”
“그래, 이해해야지 뭐. 우리가 이해 안 하면 어쩌겠어, 아버지들 마음이 그런데.”
“기다리고 있어 봐, 내가 난희랑 약속 잡아주께.”
“야 됐어, 이제 그만할래.”
“아따, 뭔 사내시끼가 요로코롬 체념이 빠르냐?”
천영기는 포기를 몰랐다. 재차 정난희와 약속하여 문승협에게 알렸다. 이틀 뒤 오후 5시에 독일제과점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문승협이 약속시간 10분 전에 도착했다. 어떤 대화를 할지 생각하다 설렘을 느꼈다. 소개팅 첫 만남부터 꼬여선지 한 시간을 기다려도 정난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프런트옆 메모판에 기다리다 간다는 메모를 남기고 제과점을 나섰다. 따뜻한 제과점안과는 달리 세찬바람까지 불어 몸과 마음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어젯밤 기온이 뚝 떨어진 탓에 아침부터 내린 눈이 쌓여 길이 미끄러웠다. 지나가는 차량들도 엉금엉금 기었다. 실망을 달래며 음악학원으로 향하였다.
천영기가 30분쯤 지나 음악학원합주연습실문을 열었다. 다짜고짜 잠깐 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싫다는 문승협 팔을 강제로 잡아끌었다. 윙스멤버들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 우르르 따라 나왔다. 천영기가 문승협을 억지로 이끌고 1층으로 내려갔다. 뜻밖에도 정난희가 건물입구에 미안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따라온 윙스멤버들이 그 광경을 보고 환호하였다. 천영기가 호들갑 떠는 윙스멤버들을 2층으로 밀어 올리며, 둘이서 빨리 다른 곳으로 가라고 소리쳤다. 문승협은 정난희와 건물밖으로 나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저 추워요, 어디라도 들어가요.”
문승협이 창백해 보이는 정난희를 가까운 분식점으로 데려갔다. 오뎅을 주문하고 뜨거운 오뎅국물을 컵에 담았다. 추위에 떠는 정난희에게 건넸다.
“이거 손으로 감싸고 있어요, 좀 나을 거예요.”
“고마워요.”
“후후 불어서 마셔봐요, 뜨끈한 국물이 속에 들어가면 온기가 돌아요.”
“미안해요, 약속시간에 늦어서.”
“괜찮아요, 이렇게 만났으면 됐죠.”
“왜 늦었는지 안 물어봐요?”
“그럴만한 일이 있었겠죠, 그런 건 급한 거 아니니까 일단 몸 좀 녹여요.”
“광주에서 버스 타고 오는데, 눈 때문에 길이 막혀 차가 연착됐어요.”
“저런, 광주에 갔어요?”
“네, 조선대교수님에게 무용안무콘티를 받으러요.”
“수고했어요, 이거 오뎅 먹어봐요, 용경이네 오뎅이 아닌지 모르겠네.”
“호호, 내 친구 부현지네 오뎅이겠죠.”
정난희는 부드럽게 대해준 문승협에게 따뜻함을 느꼈다. 마음이 데워지자 몸도 풀렸다. 문득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문승협이 다 이해해 줄 것 같았다.
“우리 처음 만나기로 한날, 약속 엉킨 거 알고 있었는데, 괜히 심통이 나더라고요.”
“하하, 나라도 기분 상했을 거예요.”
“저번에 만났을 때 제가 좀 심했죠? 이해해 주세요.”
“지나간 일이잖아요, 진심도 아니었고.”
“제 사과받아주시는 거예요?”
“사과를 주셔야 받죠?”
“호호, 알았어요, 다음에 꼭 사과 가져올게요.”
문승협뇌리에 ‘다음에’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우리에게 다음이 있는 건가’라고 생각했다.
정난희는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처음에는 소개팅에 바람맞아 자존심 상하였고, 늦은 시간에 다시 나오라 해서 짜증 났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무용 때문에 이성교제를 엄금한 상태라, 남자친구를 사귈 생각이 없어서 그랬다고 했다.
문승협은 다른 것도 아닌 무용을 이유로 교제를 반대한다는 대목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무용 때문에 남자친구 사귀면 안 돼요?”
“무용연습하기도 빠듯한데, 남자친구 사귀면 연습시간이 줄어들 테고, 남자친구에 빠지면 무용을 등한시한다고요. 오죽하면 무용하는 여학생에게 남자친구는 방해자라고, 쥐약이라는 속설도 있어요.”
“와 무시무시하다, 그럼 무용에 방해 안 되는 남자면 되는 거 아닌가요?”
“호호, 부모님과 선생님 본인들 경험에 비춰보니, 그런 남자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하하, 여기 있잖아요.”
“진짜요? 그럴 수 있어요?”
문승협입에서 뇌를 거치지 않은 사심석인 말이 튀어나왔다. 정난희는 그 말을 덥석 물었다. 순간 오묘한 공기가 둘 사이에 흘렀다. 문승협이 대답 없이 얼른 말을 돌렸다.
“지난번 길거리에서 만났을 때, 다음엔 편하게 한다고 했는데, 무슨 뜻이에요?”
“아,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네? 아, 네.”
“싫은 가봐요?”
“아 아니요, 조금 뜻밖이라서.”
“내가 호적상은 오빠보다 세 살 적어요, 원래 67년생인데 한해 늦게 68년으로 호적에 올렸죠. 학교는 한해 빨리 간 거니까, 실제 나이는 두 살 차이예요.”
정난희에게서 이전의 쌀쌀했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말을 많이 하였다. 많은 남학생들이 집 앞에 기다리고 끊임없이 전화가 와서 무섭다며 푸념할 때는 몸에 밴듯한 도도함이 흘렀다.
문승협은 여동생이 두 명이나 있어 둔감할 법한데도, 오빠라고 부르는 정난희와 무척 친밀한 느낌이었다. 정난희는 자기 이야기에 집중해 주는 문승협이 궁금해졌다
“오빠, 다 다음 주 토요일에 뭐해요?”
“음, 특별한 일은 없어요.”
“그럼 그날 두 시에 독일제과에서 만나요.”
“네, 알았어요.”
“이제 집에 가야 해요, 엄마가 걱정할 거라서.”
문승협이 배웅해 주려고 따라 일어났다. 정난희가 이전과 다르게 문승협과 나란히 걸었다. 얼핏 얼핏 주위를 살폈다. 문승협은 무용선생과 부모로부터 주입받은 무의식적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세차게 불던 바람은 멈췄으나 도로곳곳에 눈이 쌓여 스산하였다.
큰길에서 작은 길로 들어섰다. 정난희가 문승협집전화번호를 물었다. 알려준 번호를 되뇌어 암기하려 애쓰다 문승협과 눈이 마주쳐 머쓱해했다. 작은 길에서 왼쪽으로 빠지는 길에 다다라 뭔가를 보고 멈춰 섰다. 잠깐 망설이다 여기서 헤어지자고 하였다.
문승협이 정난희시선이 닿는 곳을 보았다. 50여 미터 떨어진 가로등밑에 남자 서너 명이 있었다. 문승협과 정난희 쪽을 보면서 ‘어떤 시끼냐?’며 웅성거렸다. 정난희집 앞에 남학생들이 문전성시라는 천영기말을 실감했다. 불안해하는 정난희를 보호하려 집 앞까지 가겠다고 하였다.
정난희는 오히려 문승협이 해코지당할까 봐 걱정됐다. 혼자 다녀도 아무 일 없었다며 빨리 가라고 했다.
문승협은 사귀는 사이도 아닌지라 바래다주겠다고 억지 쓸 수 없었다. 어서 가라며 채근하는 정난희말을 거역하기 어려웠다. 걱정스러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을 끝으로 마지못해 발길을 돌렸다. 이 추운 날씨에도 기다리는 남학생들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러니 소문처럼 정난희콧대가 높을 수밖에 없다고 이해하였다. 자꾸 염려되어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정난희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헤어졌던 가로등 있는 곳으로 다시 갔다. 아까 봤던 남자 서너 명이 반대편길로 멀어져 갔다. 비로소 안심되었다.
문승협은 집으로 가면서 정난희에게 보호본능을 느꼈다. 이제껏 없었던 오묘하면서도 즐거운 기분이었다. 심장에서 몽실몽실 핑크빛이 피어났다. 최선경과 홍지아 그리고 채정이를 회상했다. 문승협에게 세 명은 각기 다른 이성적 감성이었으나, 정난희는 또 달랐다. 정난희에 대한 정서를 정의하려 하면 할수록 미로에 빠졌다.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이 감정은 무슨 의미인지 궁금하였다.
다음날, 음악학원에서는 문승협의 여자친구가 찾아왔었다며 너나없이 수군거렸다. 급기야 윙스멤버들이 문승협을 가운데 앉혀두고 청문회를 열었다. ‘그 유명한 정난희가 맞냐, 애인이냐, 언제부터 만났냐, 어디까지 갔냐’는 질문으로 난리법석이었다. 문승협은 얼렁뚱땅 둘러대고 독서실로 줄행랑쳤다.
일일이용권을 끊고 들어간 독서실은 칸막이된 일인용 좌석으로 빼곡했다. 햇빛과 소음을 차단하는 암막커튼이 쳐졌고, 형광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였다. 문승협이 좌석을 찾아가다 같은 모양에 빨간색과 노란색 페페로네가방 두 개를 발견했다. 칸막이책상다리 옆에 나란히 있는 것이 천영기와 이담의 자리로 짐작하였다. 책상에 책이 펼쳐있는데 둘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문승협 자리는 이와 등진 쪽이었다. 소음이 날까 봐 조용히 의자를 들어 내 앉았다. 책과 연습장을 꺼내는 사이 누군가 뒤통수를 툭 쳤다. 장기원이 싱글거리며 검지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문승협어깨깃을 끌며 나오라고 고갯짓 했다. 독서실문을 나와 천영기와 이담이 위층휴게실에 있다며 가자고 하였다.
“오우 헤실이, 언제 왔냐?”
“방금, 공부는 안 하고 뭐 하셔 들?”
“하하, 노가리 까고 있었제.”
“아야, 느그 셋은 가방색깔만 다르고 똑같드라잉.”
“아, SS패션에서 빼빼로네 메이커로 같이 샀어.”
“긍께 가시나들이 느그를 빼빼로삼총사라 하그만?”
“영기가 하도 보채서 같은 거로 샀는디, 가시나들이 괜한 이름 지어갖고는 말이어, 쪽시럽게스리.”
“연설하네, 느그도 그러자고 했잖애, 들고 댕기믄서 좋다고 지랄할 때는 언제고.”
“근디, 승협이는 독서실 일권 끊었냐, 월권 끊었냐?”
“50원 내고 일일권 끊었어, 왜?”
“예끼 시끼, 한 달 월권 끊으믄 1,200원인께, 월권으로 끊어야제.”
“야, 30원 주고 반일권 끊으려다, 시간이 애매해서 그냥 일일권 끊었다.”
“헤실아, 계속 같이 다니게 니도 월권 끊어라, 공부도 같이 하고 좋잖애.”
“하하, 퍽이나 좋겠다, 허구한 날 어울려 놀러 다니고 잡담이나 할걸?”
“아야, 우리 공부할 때는 공부해. 안 그냐 담이야?”
“난 뭐라고 말 못 하겄다, 틈만 나믄 바람 쐬자 해서 쪼까 고달프긴 하다야.”
“염병하고 자빠졌네, 독서실사환한테 맨날 들락거린다고 혼난 건 니여.”
“그라고 본께, 지가 무슨 사감선생멩키로 굴드라잉, 사환주제에 얼척없어갖고.”
“야 기원아, 그래도 우리보다 한참 형 뻘인데, 그렇게 말하면 되냐. 사람 무시하면 안 돼.”
“아따 꼰대시끼, 임금님도 없으믄 욕한디, 우리끼리 무슨 말을 못 하겄냐.”
“오늘은 독서실환경도 좀 보고 분위기는 어떤가 해서, 일단 일권 끊었어.”
“하기사, 니는 그룹사운드 연습한다고 바쁜디, 월권 끊기는 쪼께 아깝겄다.”
“그룹사운드는 잘 돼가냐?”
“응, 4월 달에 공연한다고, 다들 열심히 하고 있어.”
“공연한께 생각났는디, 영화 애마부인 소문들었냐?”
“기원이 니는, 야시꾸리한 데만 관심이 많드라잉?”
“아야, 그 여배우 안소영말이여, 아조 끝내줘부러.”
“쌩까고있네, 학생관람불가인디 니가 봤냐, 봤어?”
“내가 본건 아닌디, 서울서 몰래 본 친구가 무자게 삼삼하다드라, 허허.”
“그 영화는 언제 여그에 내려오까?”
“으째, 개봉하믄 담이 니도 볼라고? 순진한 괴데기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드만.”
“아따 궁금한께 그라제.”
“근디 헤실아, 이 성님한테 보고할 거 없냐?”
“뭐, 없는데?”
“어허, 모른체끼하는거 보소. 제수씨랑 어찌 됐는가 소상히 보고해야제, 뭔 소리까잉.”
“제수씨? 승협이 애인 생겼대? 누구데?”
“정난희라고 있어.”
“정난희믄, 목원여중 나오고 무용하는 그 가시나?”
“헤실아, 언능 을퍼봐라, 우째 됐냐?”
“또 만나기로는 했는데, 아직 잘 모르겠어.”
“그 가시나 콧대 높아서 허벌라게 도도하다드만, 헤실이가 자빠뜨린 거여?”
“뭘 자빠뜨려야, 하여튼 장기원이 니는 말을 꼭 그따구로 하드라잉.”
“뭐 으짠데, 우리끼린디. 승협아, 그라믄 나 홍지아 소개시켜주라.”
“홍지아? 뜬금없이 여기서 홍지아가 왜 나와?”
“니 정난희랑 사귀믄, 인자 홍지아는 상관없잖애?”
“홍지아의사도 물어봐야겠지만, 내 친구한테 너 같은 바람둥이를 소개해줄 순 없어.”
“오메 시원한 거, 속이 다 후련하네, 하하하.”
문승협은 작년가을 도서관에서 홍지아를 만났을 때 음흉하게 표정 짓던 장기원을 기억하였다. 갑자기 나타나 홍지아에게 호감을 보이던 느끼한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관심 갖지 못하게 차단했다.
장기원이 거절하는 문승협을 쏘아보았다. 천영기와 이담이 고소하다며 웃었다. 양쪽에서 문승협과 어깨동무하고 독서실로 내려갔다. 장기원이 씩씩거리며 뒤따랐다.
내무부가 민방위훈련연령을 50세까지 연장하고, 경로우대제실시를 고지하였다. 보사부는 의료보험임의적용대상을 5인 이상 사업장까지 확대했다.
며칠뒤 점심시간이 지나고, 천영기와 이담이 그룹사운드연습을 구경한다며 음악학원에 놀러 왔다. 합주연습이 한창일 때 프런트여직원이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윙스리더 강동우가 합주연습을 중단하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누가 찾아왔다는 말에 천영기가 따라나갔다. 윙스멤버들은 잠시 쉬기로 하였다.
천영기가 합주실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문승협을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천영기 뒤에 정난희가 따라 들어왔다. 문승협뿐 아니라 이담과 윙스멤버들까지 깜짝 놀랐다.
“어, 어쩐 일이에요?”
“지나가다 잠깐 들렀어요, 실례인가요?”
“아따 뭔 실례 겄소, 우리가 영광이제.”
“아참, 소개할게요.”
문승협은 정난희에게 이담과 윙스멤버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여긴 정난희씨야.”
“안녕하세요.”
“소문은 허벌라게 들었는디, 실제로는 처음 뵙소잉.”
“아따, 소문보다 무자게 이쁘신디?”
“그란께, 저로코롬 이쁜 줄은 몰랐다야.”
“호호, 제 소문이 어떻게 났길래, 부끄럽네요.”
“아야, 다리 아프시겄다, 의자 없냐?”
“아니에요, 금방 갈 거예요.”
“뭐가 그리 급하요, 왔으믄 한숨 돌리고 가야제.”
“연습에 방해되니까 얼른 가야죠.”
“아야, 오늘 연습은 여그서 쫑내자.”
“호호, 아녜요, 저 지금 갈 거예요. 승협오빠, 이거.”
“뭐예요?”
“초콜릿이요, 발렌타인데이잖아요.”
정난희가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한 초콜릿바구니를 문승협에게 건넸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가나초콜릿’을 하나씩 주었다. 나오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천영기가 문승협 등을 떠밀었다.
“난희씨, 내가 바래다 줄게요.”
“아니요, 초콜릿 주려고 잠깐 들른 거예요. 지금 서둘러 갈 곳이 있어요, 다음 주 두 시에 거기서 봐요.”
정난희가 바삐 갈 곳이 있다면서 약속을 상기시키고 걸음을 옮겼다. 문승협은 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음악학원으로 들어갔다.
“뭐시어, 으째 우리는 쪼코렛이 달랑 이거다냐?”
“니가 애인이냐, 바랄걸 바래라, 이거 준 것만도 감지덕지해야제.”
“그란디, 발렌타인데이가 뭐시대?”
“가시나가 머시마한테 쪼코렛 주믄서,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거라드라.”
“그라믄, 그 도도한 정난희가 승협이한테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여?”
“하하하, 승협이는 좋겄다, 왐마 부러운 거.”
“머시마가 가시나한테 고백하는 날은 없다냐?”
“있제 으째 없겄냐. 다음 달 3월 14일이 화이트데이라고, 그때는 반대로 머시마가 가시나한테 사탕을 선물하믄서,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어.”
“그런 씨잘데없는 날은 누가 만든 지 모르겄다잉, 애인 없는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겄냐?”
“아야, 그거 일본쪽발이들이 쪼코렛 하고 사탕 팔아묵을라고 만든 날이란다.”
“우자지간에 어디 쪼코렛 주는 가시나 없으까?”
“니가 사탕 줄 가시나를 찾는 것이 더 빠를 것인디?”
“그라믄, 담이랑 영기도 쪼코렛 받았냐?”
“아직 못 받았는디, 이따 만나자는 것이, 쪼코렛 줄라고 그란갑다.”
“아야, 느그 아까 들었냐, 승협이한테 오빠라고 부른 거? 나는 그 말 듣고 심장이 뽀개지는 줄 알았다잉.”
합주실 안에 있는 친구들은 초콜릿을 까먹으며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이야기하였다. 저마다 이성에 대한 로망과 기대를 토로했다.
문승협은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젊은이들이 이성을 갈망하는지 궁금하였다. 사랑이라는 말에 하늘나라에 있는 최선경과 행방을 알 수 없는 서수연선생이 떠올랐다. 홍지아와 채정이는 사랑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있었고, 정난희는 이도 저도 아닌 물음표였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 사랑한다고 하지, 사랑받는다고 하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최선경과 서수연선생, 홍지아와 채정이는 문승협마음을 어떻게 느꼈고, 또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했다. 뫼비우스 띠처럼 심경이 복잡해졌다.
윙스멤버들이 멈추었던 합주연습을 다시 이어갔다. 천영기와 이담은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