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13)
문승협은 그룹사운드 윙스 3기 멤버가 되고 도서관에 가는 일이 뜸하였다. 명성윤과 장기원 등 학교친구들은 밴드연습 때문이라는 걸 알았지만, 천영기와 이담처럼 다른 학교친구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천영기와 이담이 음악학원에 바삐 가는 문승협을 우연히 목격하였다.
“아야 승협아, 어디를 그리 바삐 가냐?”
“영기야 담이야, 오랜만이다.”
“못 본 지 한 3주쯤 됐나, 허벌라게 오랜만이다잉.”
“요즘 도서관도 안 오고, 뭐 한디 잠수 탔냐?”
“잠수는 무슨, 뭐 좀 배우는 게 있어서 그래.”
“뭐 배운디?”
“전자기타.”
“연설하네, 너 그러다 그룹사운드 한다고 하겄다?”
“하하, 맞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진짜로?”
“응, 우리 학교 그룹사운드.”
“느그 학교 그룹사운드믄, 문일고 윙스?”
“응.”
“오메오메, 인자 스타 나셨네.”
“스타는 무슨, 그냥 배워보는 거야.”
“어디서 배운디야.”
“저기 북교음악학원.”
“우리 놀러 가도 되냐?”
“응, 놀러 와. 근데, 너흰 어디 가는 거야?”
“요즘 시립도서관이 만원이라, 저그 독서실 끊었어.”
독서실은 북교음악학원 큰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있었다. 천영기와 이담이 심심할 때마다 놀러 왔다. 눈치 빠른 아이들이라 가끔 먹거리를 사 왔고, 가급적 연주에 방해되지 않도록 조심했다.
문승협손에 기타 연습으로 잡힌 물집이 아물어갈 즈음, 저녁을 사주겠다며 천영기가 찾아왔다. 때마침 연습을 마치는 시간이어서 따라나섰다. 근처 분식집으로 갔다.
“구정 때는 뭐 했냐?”
“설에 떡국 먹고 세배하고 그랬지 뭐, 너는?”
“나도 뭐 똑같제 다른 거 있겄냐.”
“그때 그 서울친구들은 잘 갔어?”
“참 일찍도 묻는다, 폴쎄 지나간 일인디. 다음날 철종이랑 담양 가서 하루 놀고 서울로 갔어.”
“김철종이?”
“잉, 부용경이랑 깨복쟁이 친구여.”
“아 그렇구나, 철종이 본 지도 오래됐다야.”
“그건 그렇고, 니 가시나랑 사귈 맘 있냐?”
“뭐여, 뜬금없이 뭔 말이대?”
“어허, 어설픈 사투리 쓰지 마라잉, 비토 상한께.”
“하하, 갑자기 웬 여자친구?”
“성이 생각이 있은께 한 말이어, 한번 사귀어 봐.”
“에이 싫어, 난 여자친구 관심 없어, 너나 사귀어라.”
“염병하네, 나는 있어. 담이는 오늘 만나고.”
“진짜? 너는 그런다 치고, 그 순딩이 담이가 여자친구를 만난다고?”
“아따, 니는 이 성 말을 뻘로 듣냐? 담이가 맘에든 가시나가 있었는디, 내가 여차저차해갖고 소개시켜줬잖애. 인자 니만 사귀믄, 우리 셋 다 있는 거여. 누구든 말만 해, 이 성이 으짜든지 만나게 해 줄 텐께.”
“하하하, 난 됐어, 괜찮아.”
“연설하지 말고야, 가시나들까지 해서, 우리 여섯 명이 같이 만나믄 여간 재밌겄냐?”
때마침 주문한 떡라면 2개와 만두가 나왔다. 천영기가 음식을 먹으면서도 여자친구를 사귀라고 치근댔다. 문승협은 시종일관 웃어넘겼다.
“헤실헤실 웃지만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란께? 대신 니가 좋아하는 순대도 시켜주께.”
“순대만 맛나게 먹을게, 하하하.”
“연설하네 진짜. 아짐, 여그 순대 한 접시 주쑈.”
“그나저나 담이는 잘 만나고 있을까?”
“니가 궁금하기는 한갑다잉. 내일 독일제과로 와, 담이랑 만나기로 했은께.”
문승협은 다음날 기타 교습을 마치고 독일제과점으로 갔다. 천영기 앞에 이담과 여학생이 앉아있었다. 천영기와 이담이 어서 오라며 문승협을 반겼다. 여학생이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문승협도 인사하고 천영기 옆자리에 앉았다. 천영기가 남동생커플을 마주한 마냥 흐뭇해했다. 이담이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귀에 걸린 입으로 여자친구를 소개했다. 여학생은 수줍어하며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안녕하세요, 담이 친구 문승협입니다.”
“처음 뵈어요, 저는 한현진이어라.”
“어디 학교 다녀요?”
“인혜여고, 우리랑 동갑이어.”
“그렇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아야 담이야, 승협이가 현진씨한테 물어 본건디, 으째 니가 답하냐?”
“아따 초면인께 안 그냐.”
“아니 현진씨가 입이 없냐 귀가 없냐? 승협아, 니 오기 전까지야, 나 닭살 돋아 죽는 줄 알았다잉.”
“야, 첫 대면인데 그럴 수도 있지, 무안하게 면전에서 그러면 되냐.”
“승협아, 영기 저시끼가 계속 놀려갖고야, 나는 니 오기만 기다렸다잉.”
“하하, 너도 현진씨가 말할 기회를 줘야지, 네가 대변인 할 거야?”
“승협이 니는 좀 다를 줄 알았드만, 니도 똑같다잉. 느자구 없는 시끼들, 느그들은 으짠지 두고 보자.”
“허허, 두고 보잔 놈 하나도 안 무섭단께. 이따가 내 짝지 오믄 많이 봐라.”
“네 여자친구도 와?”
“잉, 곧 올 거여.”
“제가 같은 재단 덕일중 나와서 인혜여고 잘 아는데, 등교할 때 오르막길이 힘들죠?”
“아침마다 깔끄막 오르느라 단련 돼갖고, 여학생들 다리가 다 무시돼서 학교가 무밭이어라.”
“하하, 그러고 보니, 현진씨 피비케이츠 닮았네요.”
“음마, 그라고 본께 피비케이츠 좀 닮았다잉.”
“응, 담이가 피비케이츠사진코팅한 책받침을 항상 갖고 다니잖아.”
“니 그래서 현진씨 소개시켜달라고 그렇게 졸랐냐?”
“아따 부끄럽게시리, 현진씨 앞에서 그만 좀 해라.”
“저 승협씨 알아라우, 별명이 헤실인디.”
“음마, 승협이 별명을 어뜨크롬 아요?”
“어지간한 여학생들은 다 알제라. 요즘은 담이씨랑 영기씨랑 해서, 빼빼로삼총사라고도 불러라우.”
“빼빼로삼총사?”
“셋이 똑같은 SS패션 빼빼로네 가방을 들고 다닌다 해서, 여학생들이 붙였답디다.”
“가시나들이 별 걸 다 관심이다잉.”
연초 교복과 두발자율화가 화두였을 때, 천영기가 문승협과 이담을 꼬드겨 ‘SS패션의 페페로네’ 메이커 가방을 함께 샀었다. 문승협은 파란색, 천영기는 빨간색, 이담은 노란색으로 색깔만 다르고 가방모양은 같았다. 셋이 도서관이든 음악학원이든 외출할 때마다 어깨에 메고 다녔다.
천영기가 내친김에 여학생들 사이에서 세 사람의 세평을 물었다. 예쁘장한 모범생이라는 점엔 만족했으나, 다소 여성스러운 이미지라는 평판에 불만스러워하였다. 바람둥이라는 소문은 없는지 다시 물었다. 한현진이 그런 말은 못 들었다고 했다. 천영기가 찔린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하였다. 자신의 소문에 신경 쓰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성교제에 조숙하여 중학생 때부터 무용하는 여학생과 두 차례 교제했다. 정난희를 잘 알고, 부용경의 동생 부현숙이 바람둥이라 하는 것도 그래서였다. 그때 제과점에 들어선 여학생이 천영기를 향해 돌진하듯 다가왔다. 문승협이 얼떨결에 일어나 자리를 비워주었다. 옆테이블의자를 하나 끌어왔다.
“왔냐, 여그 안거.”
“안 늦었제?”
“잉. 인사해라, 여그는 승협이고, 여그는 담이랑 담이 여자친구 한현진씨여.”
“얘기 많이 들었어라, 나는 류연경이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우리 편하게 말 놓자, 같은 학년에 나이도 같은디.”
“현진씨 생각은 으짜요?”
“담이씨 하자는 대로 하께요, 난 암시랑 안 해라.”
“오케바리, 다 말 놓읍시다.”
“사귄 지는 얼마나 됐고, 학교는 어디 다니요? 영기가 통 말을 안 해갖고.”
“아야 숨 넘어가겄다, 하나씩 물어. 금방 말 놓자드만 또 존대하냐, 예끼 시끼.”
“호호, 목원여상 다니고 사귄 지는 3개월 됐어.”
“나쁜 시끼, 3개월이나 됐는디 일언반구 없었냐?”
“목원여상이면, 채영이 아는데.”
“호호, 당연히 알겄제, 채정이 언닌디. 승협이 니 채정이랑 사귄다고 소문났잖애.”
“아, 그래서 아는 게 아니고, 채영이 남자친구가 우리 학교 친한 친구야. 그리고, 채정이랑 사귄다는 말은 다 헛소문이야.”
“하여튼, 승협이는 유명인이어. 인자 그룹사운드까지 한디, 가시나들 난리 나겄다.”
“그룹사운드도 한데?”
“잉, 문일고 윙스 싱어란다야, 미리 싸인 받아놔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야, 그리 거창한 거 아니야, 취미로 하는 거라고.”
“주목받기 싫어하는 놈이, 그룹사운드를 취미로 한다고야, 니도 참 희한하다.”
“나도 사실 그게 걱정이야, 거절하지 못해서 맡긴 했는데, 내가 과연 무대에 설 수 있을까?”
“니는 국민학교 때 방송부했은께, 하믄 또 잘할 것이다, 중학교 때는 합창부도 했잖애.”
“나름 열심히 연습 중이긴 한데, 좀 불안해.”
“그란디, 승협이는 으째 여자친구가 없대?”
“인혜여고에 예쁜 내 친구 있는디, 소개시켜주까?”
“하하, 아니야. 난 여자친구 사귈 맘 없어,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연설하지 말고, 연경이도 예쁜 친구들 많은께, 소개팅을 하든가 맘에 둔 가시나 이름을 대든가 해.”
“영기 넌 왜 나한테 여자친구 사귀라고 하는데?”
“오늘도 봐라야, 니만 혼자잖애. 뭐여, 청승맞게.”
“영기야, 전에 코롬방제과점에서 만난 후밴가? 그 가시나 이쁘드만, 걔 소개시켜줘라.”
“언제야?”
“크리스마스이브 때 우리 만나는디, 그 가시나가 인사했잖애.”
“누구까?”
“아따, 무용한다고 양 갈래머리에다, 눈이 황소만 한 후배 말이어.”
“아, 정난희. 승협이 니도 정난희 알잖애, 으짜냐?”
“뭐가 어쩌긴 어째, 됐다니까.”
“그라고 본께, 정난희가 부용경집서 니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드라.”
“아이고 영기씨, 나는 됐은께요, 옆에 있는 연경씨나 신경쓰쑈잉.”
“아야, 정난희가 얼마나 콧대 쌘지 아냐? 숱한 남자들이 사귀자고 덤벼들었는디, 눈 하나 깜짝 안 해.”
“그러니까 됐다고요, 나도 자신 없다니까요 영기씨.”
“지랄하지 말고, 내가 다리 놓을 텐께, 일단 한번 만나서 도전해 봐. 내 머리에 딱 꽂힌 게 있어서 그란께, 모레 금요일저녁 7시에 일로 나와, 알았냐?”
천영기가 막무가내로 약속을 잡았다. 문승협에게 거부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허스키한 목소리의 여자친구 류연경이 작년에 데뷔한 MBC신인탤런트 최명길을 닮았다는 둥, 남강선배 여자친구 황선희가 소피마르소를 닮았다는 둥, 나라와 장르를 넘나드는 연예계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천영기는 외삼촌이 모델협회회장이라 연예계 소식과 풍문에 관심 많았다. 방학 때 서울 외삼촌회사에 놀러 가 실제로 많은 연예인을 만났었다. 모델활동을 하는 채정이도 천영기의 외삼촌회사소속이었다.
문승협은 어느 순간 커플들 사이에 끼어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친구들 데이트에 방해되지 않으려고 먼저 일어났다. 더 있다 가라는 만류에도 즐거운 시간 보내라며 나왔다. 실은 두 커플사이에서 뜻밖의 소외감을 느꼈다. 천영기와 이담에게 묘한 부러움이 스멀스멀했다. 천영기와 약속에 나갈지 고민되었다.
하루가 지나 약속시간이 다가오는데도 결정하지 못하였다. 소개팅이 내키지 않았지만, 자신이 가지 않으면 기다리는 사람들이 실망할까 봐 걱정되었다. 하는 수 없이 독일제과점으로 향했다.
제과점문을 열면서 잠깐만 있다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7시가 다가오자 긴장되었다. 약속시간 20분이 지나고 떨리던 가슴이 조금 편안해졌다. 제과점벽에 걸린 전자시계가 7시 40분을 표시하자, 약속 날짜와 시간이 맞는지 다시 생각해 보았다. 또 10분이 지나고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갈까 말까 망설였다. 그래도 약속이니 예의상 한 시간은 기다리기로 하였다. 전자시계가 20:00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하고 일어났다.
기타 연습을 더할 요량으로 음악학원을 향해 걸었다. 내키지 않던 소개팅이 기다리는 동안에는 떨리더니, 무산되자 왠지 서운했다. 인간의 마음이 참 간사하였다. 음악학원에 거의 다 달았을 때, 천영기가 뛰어오면서 불렀다. 약속을 어긴 죄로 꿀밤을 한대 주려고 주먹을 쥐었다. 천영기가 도리어 화냈다.
“야, 니 진짜 그따구로 할래?
“뭔 소리야?”
“아무리 싫어도 그러제, 니가 빵꾸를 내? 얼마나 어렵게 잡은 약속인지 알어?”
“누가 빵꾸를 냈다고 그래? 나 한 시간 기다리다 방금 나온 거야.”
“뭣아, 내 메모 못 받았어?”
“무슨 메모?”
“내가 점심 먹고 독서실 가다가, 느그 학원프런트에 메모를 남겼단 말이시.”
“못 받았어, 무슨 메몬데?”
“염병 환장하겄네, 잠깐 있어봐 봐.”
천영기가 가까운 공중전화를 찾았다. 황급히 다이얼을 돌리고 누군가와 통화하였다.
통화를 끝낸 뒤 문승협을 다시 독일제과로 데려갔다. 제과점점원에게 이름을 알려주며 찾는 전화가 오면 알려달라고 했다. 자리에 앉아 엽차를 한 모금 들이키고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천영기는 문승협과 약속한 7시가 아닌, 정난희가 가능한 시간에 맞춰 6시로 약속 잡았다. 바뀐 약속시간을 메모하여 음악학원프런트여직원에게 부탁했으나, 문승협에게 전달되지 않아 약속이 어긋났다.
제과점점원이 ‘손님 중에 천영기씨, 전화 받으쑈’라고 외쳤다. 천영기가 급히 가서 전화를 받았다. 한참 옥신각신 통화하고 돌아와 하던 말을 이어갔다.
“소개팅이 싫다는 정난희를 어렵게 설득했는디, 니가 약속시간에 안 나타나분께 무자게 곤란했다잉. 정난희가 엄청 자존심 상해갖고 집으로 가부렀어, 방금 통화서도 안 나온단디 내가 사정사정했다야.”
“그러면, 아까 공중전화는 누구한테 한 거야?”
“아, 정난희집에 남자들 전화가 허벌나게 와서, 남자가 전화하믄 난리 난단다. 그래서, 부현지한테 정난희랑 통화해 갖고, 10분 뒤에 여그 독일제과로 전화해 달라고 부탁한 거여.”
“아, 부용경동생 부현지랑 정난희가 친구였지.”
“난희네 집이 여그서 가까운께, 아마 10분쯤 있으믄 올 것이다.”
“뭐? 지금 나온다고?”
“잉, 쇠뿔도 단김에 빼부러야제, 안 그냐?”
“야, 진짜 소개팅 싫다니까 왜 그냐?”
“연설하네 진짜, 씨잘데없는 소리 말고, 한번 잘해 보란께?”
“어휴, 나 이제 어떡하냐.”
“걱정 붙들어 매. 정난희가 소개팅이 싫다믄서도, 상대가 니라고 한께, 그제사 순순히 알았다고 하드라.”
문승협은 정난희가 나온다는 말에 갑자기 긴장되었다. 소개팅에 대한 천영기의 이런저런 코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정말 10분쯤 지나자 정난희가 들어왔다. 얼른 일어나 맞이하였다. 정난희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천영기가 정난희에게 순진한 놈이니까 놀리지 마라며 당부했다. 문승협에게도 소개한 사람입장을 생각하라고 하였다. 바쁜 일이 있다는 핑계로 자리를 떴다. 문승협은 든든했던 지원군이 가버리자 당황한 모습이 역력하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정난희는 별말 없이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문승협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소개받은 문승협입니다.”
“아까 왔을 때는 안녕했는데, 지금은 좀 그러네요.”
“네?”
“호호, 농담이에요. 제 이름 아시죠, 정난희예요.”
“네, 반가워요. 제가 이렇게 바보는 아닌데, 소개팅이 처음이라 떨리네요.”
“호호, 바보니까 소개팅약속도 잊으신 거 아닌가?”
“네? 아 그건, 아무튼 실수가 있었어요, 미안해요.”
“그래도 변명은 안 하네요?”
“하하, 뭐 드실래요?”
“아까 기다리다 먹어서 생각 없어요.”
“그럼 마실 거라도 좀 시킬까요?”
“아니요, 독일제과에서 하루에 엽차를 두 번 먹는 건 처음이라, 또 마시면 물배 차겠어요.”
“여기 파르페 맛있더라고요, 그거 한번 드셔보세요.”
“생각 없으니까, 아무거나 알아서 시키세요.”
정난희는 난생처음 남자에게 바람맞아 불쾌하였다. 감정이 가시지 않아 퉁명스레 가시 돋친 말을 계속했다.
문승협은 부용경집에서 얼핏 봤던 정난희태도와 달라 난감하였다. 화나서 그러는지 억지로 그러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얼떨떨했지만 침착하려 노력하였다. 종업원을 불러 파르페를 주문한 뒤, 약속이 어긋난 사정을 설명하고 재차 사과했다.
정난희는 자기 언행이 비호감이라 생각하면서도, 생각과 달리 거침없이 나와 머쓱하였다. 그렇다고 갑자기 상냥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시당초 소개팅도 싫은 데다, 남자친구를 사귈 마음이 없어 자제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는 어디로 결정됐어요?”
“목화여고요.”
“버스 타고 다녀요?”
“그럼 걸어 다닐까요?”
“하하, 아뇨. 집이 이 근처면, 걷기도 버스 타기도 애매한 것 같아서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문일고면 버스 타고 다니죠?”
“하하, 네.”
“등하굣길 버스가 만원일 텐데 힘들지 않아요?”
“일단 한번 타보시라니깐요.”
“호호호, 지금 코미디언 이주일 흉내 낸 거죠?”
“처음 해보는 건데, 비슷했나요?”
“별론 데요. 혹시, 옥떨메가 무슨 뜻인지 알아요?”
“무슨 뜻이에요?”
“옥상에서 떨어진 메주. 아더메치유는요?”
“아, 그건 알아요, 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유치하다.”
“스타는요?”
“그건 모르겠는데요?”
“그것도 몰라요? 스스로 타락한 사람, 호호호.”
문승협은 딱딱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한참 유행 중인 이주일성대모사를 하였다. 의외로 정난희개그코드와 맞아떨어졌다. 정난희가 언제 화냈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줄임 말 유행어를 이어갔다.
“그럼 선구자는요?”
“선천적으로 구라만 치는 자식?”
“에이 아니에요, 선천성 구제불능 자기 밝힘 증. 특공대는요?”
“음, 특공대라, 뭐예요?”
“특별히 공부도 못하는 게 대가리만 커, 호호호.”
정난희는 계속 웃는 문승협 얼굴에 경계심이 풀렸다. 당황해하는 표정이 귀여웠다. 순진한데 속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곤란한 상황에 좀처럼 화내지 않고, 잘난 척이나 잘 보이려 하지 않았다. 문승협과 짧은 대화나마 자신에게 접근했던 남학생들과 다르게 느껴졌다. 익히 들은 소문과 비슷하여 마음이 놓였다.
문승협도 점차 안정을 찾으면서 정난희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양 갈래로 길게 딴 중3에서 고1로 올라가는 여고생이었다. 무용을 해서인지 성숙하고 세련되어 보였다. 청바지에 회색라운드티를 입고 흰색목도리와 모자가 달린 흰색파카를 걸쳤으며, 흰색발목토시를 신고 있었다. 유난히 커 보이는 눈과 동그란 금테안경을 쓴 모습은 배우‘강주희’를 생각나게 하였다.
정난희와 닮은 강주희는 1977년 영화‘고교얄개’에 출연했다. ‘이승현, 김정훈’과 주연을 맡아 고교생들의 사랑과 명랑시리즈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1976년 ‘이덕화와 임예진’ 주연의 ‘진짜진짜 잊지 마’에 이은 후속작이었다. 진짜진짜시리즈 완결편인 1978년 ‘진짜진짜 좋아해’도 흥행에 성공하였다. 이덕화가 안타까운 교통사고로 참여하지 못했지만, 동제목의 가수‘혜은이’ 노래까지 인기 있었다. 특히 영화촬영지가 박동후회장저택과 덕일학원이었던 ‘진짜진짜 잊지 마’는 문승협에게 남다른 의미였다.
“전에 용경이네서 봤을 땐, 안경 안 썼던 거 같은데.”
“책 볼 때만 써요, 시력은 괜찮은데, 난시가 있어서.”
“얼굴이 작은데 큰 안경을 쓰니까, 엄청 귀여워요.”
“예쁘진 않고요?”
“하하, 예뻐요.”
“호호, 왠지 엎드려 절 받기 같은데?”
“아 아니에요, 진짜 예뻐요.”
“어, 지금 무지 당황한 거 같은데, 거짓말하면 표 나는 스타일이구나?”
“맞아요, 제가 거짓말을 좀 못해요.”
“호호, 뭐라고요?”
“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정말 예뻐요.”
“피.”
“어때요, 이제 기분 좀 풀렸나요?”
“아직이요, 한 일 년은 걸릴 거예요.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근데, 왠지 신경 쓰라는 말로 들려요, 하하하.”
“저 이제 가봐야 할거 같아요, 시간이 늦었어요.”
“어, 기분 나빴어요?”
“아뇨, 집이 엄해서 늦게 들어가면 혼나요.”
문승협은 가겠다는 말에 갑자기 조급해졌다. 뭔가 할 일이 있는데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아까 소개팅코치를 해줬던 천영기말을 돌이켜보았다. 헤어지기 전에 다음 약속을 잡든지 꼭 전화번호를 교환하라는 당부가 떠올랐으나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보내면 예의에 어긋난다는 생각에 집전화번호를 메모하여 건넸다.
정난희가 메모를 호주머니에 구겨 넣고 휑하니 제과점을 나섰다. 애프터신청을 하지 않은 데다 연락처도 묻지 않은 문승협이 집전화번호를 적어주어 어이없었다.
문승협은 허겁지겁 계산하고 배웅하러 나갔다. 정난희는 앞만 보고 씩씩하게 걸었다. 걸음걸음마다 찬바람을 일으켰다. 문승협은 열심히 쫓아가다 천영기가 일전에 했던 말이 기억났다.
‘정난희가 인기가 많아 갖고 콧대가 높아야. 잘 나가는 아그들이 사귀자 했는디, 눈길은커녕 콧방귀도 안 뀌어부러. 그 도도함을 꺾을라고 도전하는 시끼들까지 생겨서, 학교하고 집 앞에는 사내시끼들이 늘 서성인다잉’
정난희라는 여학생과 유명세를 그때 처음 알았지만, 눈이 동그랗게 크다는 인상 외엔 관심 없었다. 오늘 만나고서도 여자친구로 사귈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던 정난희가 큰길에서 작은 길로 접어드는 어귀에 멈춰 섰다. 뒤따라오는 문승협을 향해 ‘제가 알아서 갈게요, 안녕히 가세요’라고 했다. 문승협은 무안해하며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문승협은 소개팅이 딱히 좋고 싫을 이유는 없었다. 숨은 그림 찾기 라면 그림에 한정해 살피고 집중하는 재미라도 있겠으나, 사람을 막연히 살피고 관심사를 찾아내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다시는 부자연스러운 소개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정난희에게 예의상 집전화번호를 줬지만 기대하지 않았다. 행여 전화 오면 뭐라 말해야 할지 난처했다. 차라리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다. 바람대로 정난희에게서 전화는 오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