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64)
문승협과 친구들은 국내외정세엔 관심 없었다.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경험해보지 못한 성인놀이 찾기에 바빴다. 그 방면에 해박한 천영기가 주동하였다. 이번에는 당구였다. 첫발을 들인 당구장은 선창가 근처 2층. 시내중심가는 당구비가 비싸고 손님이 많았다. 처음 배울 땐 넉넉지 않은 용돈에 저렴하고 한가한 변두리 당구장이 제격이었다.
천영기가 앞장서 당구장문을 열었다. 희뿌연 담배연기가 가득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팔뚝문신이 있거나 시커먼 어른들이 당구 쳤다. 주인으로 보인 아저씨가 어서 오란 인사도 없이 흘깃 봤다. 셋은 지레 겁먹고 구석자리로 갔다. 여자종업원이 당구공 4개를 갖다 놓았다. 문승협과 이담은 어찌할지 몰라 멀뚱멀뚱했다. 천영기가 호기롭게 당구채를 가져왔다.
“이것이 큐대라는 거여, 이걸로다가 백구를 쳐서 적구 두 개를 맞추는 거제.”
“백구는 뭐고 적구는 또 뭐대?”
“흰색당구공이 백구고, 빨간색당구공을 적구라 해.”
“니는 당구를 어뜨크롬 아냐?”
“실은 나도 잘 몰라.”
“연설, 난 또 할 줄 안다고.”
“저그 온다, 내가 우리 갈쳐줄 선생을 불렀어.”
“아야, 느그 오랜만이다잉.”
“어허, 청화고등학교 고스톱도사 김일광씨 아니어?”
“왐마 왐마, 목포 싸움짱이신 문승협씨도 왔그만잉, 여그까정 어인 행차시요?”
“야 씨, 좀 조용히 말해,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으째, 주먹은 아직 쓸만하고?”
“쓸데없는 소리 하는 것이, 너도 여전하구나.”
“허허, 다들 시험은 잘 쳤냐?”
“시험 끝난 지 언젠디 아직도 들먹이까잉.”
“가만 본께, 느그들 스승님 모실 준비가 안 됐는디?”
“염병하네, 그깟 당구 좀 친다고 가오 잡기는. 아야, 하기 싫으믄 꺼져 부러.”
“뭔 소리여, 이 귀하신 몸이 바쁜 시간 쪼개서 왔는디, 그냥 헛걸음할 순 없제.”
“알았은께, 그만 뻐기고 언능 갈쳐주기나 해.”
“오늘은 우리들이 항시 치는 4구 다마를 갈쳐주께, 이것이 당구의 기본이어.”
김일광이 거들먹거리긴 하였으나, 부리부리한 눈을 크게 뜨고 사뭇 진지했다. ‘다이, 큐대, 다마, 초크’등 당구도구를 알려줬다. 전부 생소한 일본말이었다. 자세를 시범 보이며 큐걸이가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어리바리한 이담에게 개인강습하듯 했다. 왼손 엄지와 검지 끝을 맞대어 곧추세우고, 중지약지새끼손가락을 벌려 당구대에 안정적으로 받치라 하였다. 큐걸이를 하고 큐대로 초크를 치면서 당구대를 한 바퀴 돌게 했다.
곧바로 게임규칙을 대략 설명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백구의 상하좌우당점을 겨냥하는 법. 적구 두 개의 위치에 따른 두께조절법. 큐대로 백구에 회전주는 법. 백구를 밀어 치고 끌어당기는 법. 문승협과 천영기는 곧잘 따라 하였지만, 이담은 실수를 연발했다. 곰배팔이 고문관이라고 핀잔 들으면서도 열심이었다.
“나미, 히네루, 갸쿠, 오시, 히키를 배웠은께, 인자는 쓰리쿠션을 갈쳐주께.”
“오매, 생전 첨 듣는 일본말 땜시 머리가 쥐난다야.”
“첨엔 다 그래, 몇 번 치믄 금방 알어.”
“쓰리쿠션은 또 뭐대?”
“당구공이 이 다이에 한번 맞으믄 원쿠션이고, 세 번 맞으믄 쓰리쿠션이라 해.”
“별것이 다 있다잉.”
“아까침 말했듯이, 자기 다마수를 다치고, 마지막에 쓰리쿠션을 치믄 이기는 거여.”
“어찌케 치는 건디?”
“쓰리쿠션은 니주, 오마, 우라, 하코는 기본이고,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
김일광이 쓰리쿠션종류 뒤에 ‘돌리다’란 일본어‘마와시’를 생략하였다. 당구대눈금점 활용법을 자세히 알려주며, 쓰리쿠션만 30분가량 이어갔다.
“와따 복잡한 거.”
“그나저나, 당구용어를 한국어로 순화하면 안 되냐?”
“긍께 말이어, 아까 우리말로도 설명하드만.”
“내가 언제 그라디?”
“나미는 얇게, 오시는 밀어, 히끼는 끌어.”
“그것은 느그들 쉽게 알아들으라고 한 거여.”
“그니까 쉬운 한국어로 하면 돼잖아.”
“아이 시끄러, 당구를 배울라믄 원래 용어를 알아야제.”
“말이 그렇다는 거여, 그런다고 신경질이냐?”
“느그들 또 겐세이 하믄, 더 이상 안 갈친다잉?”
김일광이 유세부리면서도 ‘히로, 빠킹, 니꾸, 후루쿠, 갬빼이’등 게임 시 소통언어들을 알려줬다. 응용기술로 넘어가 ‘히까끼, 기레까시, 쪼단쪼, 다대, 빵꾸, 가라꾸’를 보여줬다. 마지막에 묘기다마라며 실력을 뽐냈다. 강하게 밀어 쳐서 같은 쿠션을 두 번 이상 부딪히는 ‘황오시’ 쓰리쿠션과 당구공을 모아 치는 ‘가야시’였다.
“아참, 꼭 명심할 것이 하나 있어, 300점 이하는 절대로 맛세이 금지다잉.”
“맛세이가 뭣이가니 300점 이하는 안 된대?”
“이렇게 큐대를 세워서 찍어 치는 기술인디, 잘못하믄 나사가 찢어져부러.”
“나사?”
“여그 당구다이바닥에 깔린 천인디, 허벌라게 비싸.”
“근디, 니는 당구 몇 치냐?”
“나? 나는 짠 100이제. 남들은 150치란디, 게임비 아낄라고 짜게 놓은 거여.”
“뭔 당구에 짜고 싱거운 것도 있대? 이 당구장서 젤 잘 치는 사람이 몇 친디야?”
“여그 당구장주인 다마수가 1,000점이어.”
“그럼, 천 개를 쳐야 끝나는 거야?”
“아니. 쩌그 점수대 보이제? 저 주판알멘키로 생긴 것이 하나에 10점 이어.”
“와 대단하다, 그래도 백 개를 치는 거잖아?”
“잉, 맞어.”
“당구 시작하믄 몇부터 놓는디야?”
“30에서 시작해 갖고 50까지는 쓰리쿠션이 없어, 80부터는 쓰리쿠션이 있고.”
“30점이면 세 개 치는 거네?”
“그라믄, 일광이 니 실력도 별거 아니 그만?”
“뭔 소리까, 나 만침 칠라믄 당구장에다 수억 받쳐야 써, 잘 알지도 못하는 것이.”
“시끼, 으째 허풍 같은디?”
“염병하네, 없는 시간 쪼개서 애써 갈쳤드만, 즈그 스승님을 모독하그만잉.”
“아이고 스승님 지송합니다요, 밴댕이속갈딱지모냥 삐치믄 안 되지라. 우리 셋이서 한 게임해 볼란께, 옆에서 지도편달 쪼까 해주쑈?”
“알았어. 게임을 시작할 땐 적다마와 백다마를 이렇게 놓고, 자, 하수가 먼저 쳐.”
“우리 셋 다 30인디?”
“세상서 가장 공평한 거 있잖애, 짱개미뽀.”
“가위바위보.”
“영기, 담이, 승협이 순서로 치믄돼.”
“이렇게 하믄 되냐?”
“아니어, 히네루를 갸꾸 줘야제, 반대로 하라고.”
“이렇게야?”
“잉. 다음 담이 차례.”
“나는 어뜨크롬 치리?”
“무시 주고 다대 쳐.”
“그것이 뭔디?”
“세로로 길게, 회전 먹지 않게 가운데 주고, 무히네루.”
“윽박지르지 마야, 첨부터 당구 잘 치는 사람 있냐?”
“알았다 알았어. 다음, 승협이 쳐.”
“당구공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어찌할지 모르겠다.”
“우라 쳐라, 오른쪽에 히네루 주고, 첫 포인트가 여기로 오게 해서 이렇게 돌려.”
“근데, 아까 가르칠 때랑 용어가 다른 거 같다?”
“잉, 동네나 지방에 따라 표현이 쪼깐 달라.”
30분 정도 실전당구를 지도받았다. 막 입문한 터라 쓰리쿠션은 생략했다. 총 3시간 가까이 배웠다. 셋이 당구비를 똑같이 나눠냈다. 열정적으로 가르쳐준 김일광에게 보답하려 근처 생맥주집을 찾았다.
“일광아, 오늘 당구과외비는 이걸로 끝이다잉?”
“뭔 소리여, 그거는 그거고 이거는 이거제.”
“니가 생맥주 사달라고 했은께, 이걸로 퉁쳐야제?”
“연설하네 진짜, 그라믄 나 이거 안 마실란다.”
“느그 뭔 소리하냐?”
“저 씨끼가 당구 갈쳐주믄, 가시나 소개시켜준다고 했는디, 이제 와서 쌩깐다야.”
“나는 그럴라고 했는디, 니가 생맥주 사달라매?”
“아따, 생맥주는 기분이고, 가시나 소개가 진짜제.”
“내가 미쳤냐, 하나만 들어주믄 되제, 둘 다 들어주게?”
“일광이 너는 예나 지금이나 여자한테 관심은 많은데, 아직 여자친구가 없구나?”
“영기야, 소개시켜줘라, 이놈 시끼 불쌍타야.”
“그것이 맨입으로 되겄냐?”
“영기씨, 이 스승님이랑 게임할 영광을 주께.”
“언제야?”
“내일 어때?”
“그렇다믄, 내가 고려해 보께.”
“하하하, 일광이 얼굴 좀 봐라,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아참, 나 얼마 전에 우장일이 봤다잉.”
“어디서야?”
“저그 오거리 지나가다가.”
“모영욱이 소문은 모르냐?”
“전에 누가 뒷개에서 봤단 소린 들었는디.”
“일광아, 갑자기 그런 이야길 왜 해?”
“승협이 니가 옛날에 우장일아구창을 날려부렀담서?”
“언제 적 야그냐, 1년도 넘었다.”
“때린 놈은 잊어도, 맛은 놈은 평생 기억한다드라.”
“야 김일광, 여기 노가리 엄청 맛있다,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노가리나 씹어.”
“느그 여그서 나가믄 어디 가냐?”
“글쎄다, 가는 곳이 우리 놀이터제.”
“갈데없으믄 우리 집 가까?”
“느그 집 가서 뭐 하게?”
“친한 친구들 몇 명이서 고스톱 치기로 했걸랑, 영기 니는 김일성이 알제?”
“우리 청화고 김일성이믄, 즈그 아부지가 선주잖애?”
“선주가 뭐야?”
“배주인 말이어, 아마 큰 배가 대여섯 척은 될 것이다.”
“그라믄 여그서 노가리 그만 까고, 느그 집이나 가자.”
문승협은 친구들 없이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따라갔다. 김일성이 넉살 좋게 김일광가족과 고스톱판을 벌이고 있었다. 김일광의 엄마와 형제들이 천영기를 무척 반겼다. 문승협과 이담은 첫 대면이라 공손히 인사하였다. 김일광엄마가 천영기를 품에 안고 토닥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먼저 세상을 등진 천영기엄마와 오랜 동네친구였다.
“어무니, 건강하시지라?”
“그람 그람, 건강하제. 영기 니는 잘 있었냐?”
“그라제라, 밥 잘 묵고 잘 놀고 그라요.”
“우리 영기 왔은께 먹을 것 좀 가져와야 쓰겄다.”
“아따 아니어라 어무니, 쪼까 전에 밖에서 묵고 왔어라, 그냥 앉아 있으쑈.”
“오매오매, 우리 엄니가 인쇄소집아들이 왔다고, 무자게 좋아라 하그만잉.”
“연설하네, 내 친구아들인께 그런 거여.”
“엄니, 내방서 놀란께, 맛난 거 있으믄 갖다주쑈.”
“그래라 그래, 언능 가서 놀아.”
“영기야, 아그들이랑 먼저 가있어.”
천영기가 문승협과 이담을 데려갔다. 김일성이 모포 위 화투를 싸들고 뒤따랐다.
“일광이 집서 빼빼로삼총사를 만난다잉.”
“언제 적 빼빼로냐, 그 시절 다 지나가부렀다.”
“문일고 윙스, 헤실이, 맞제?”
“하하 그래, 만나서 반갑다.”
김일성과 문승협이 인사하는 사이, 김일광의 큰형이 불쑥 들어오며 물었다.
“누가 문승협이냐?”
“제가 문승협인데요.”
“아 그래, 니가 태선화학 박동후회장 손자여?”
“아따 뭔 말을 못 하겄네. 형은 이방서 나가, 언능.”
“왐마, 재벌집 손자가 이런 누추한 곳을 오다니.”
“어허,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란께.”
“장난이여 장난, 동생친구한테 장난도 못하냐?”
김일광이 큰형을 등 떠밀어 쫓아내고, 어리둥절한 문승협에게 눈을 찡긋했다.
“우리 엄니랑 형들이 느그 둘을 처음 본다 해서, 니를 태선화학손자라고 했어.”
“일광이 너는 어떻게 안 거야?”
“아, 전에 영기한테 들었제.”
“왜 째려보냐, 못할 말도 아니고 틀린 말도 아닌디.”
“영기야,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 내가 싫어.”
“염병, 별것을 다 신경 쓰네 진짜.”
“야 천영기.”
“알았다 알았어, 안 하믄 될 거 아니여. 아야 일광아, 다른 아그들은 언제 온대?”
“잉, 금방 올거여. 아그들아, 편히 안거.”
문승협과 이담이 어정쩡하게 앉았다. 김일광이 기다리던 친구 두 명이 들어왔다. 한 명이 문승협을 보자마자 휘둥그레진 눈으로 악수를 청하였다.
“정난희?”
“응?”
“야 시끼야, 문승협이여 문승협.”
“아참, 그래 문승협, 여그서 만난다잉.”
“승협아, 오해 말어라잉, 저노무 시끼가 한때는 정난희를 무자게 좋아했단다야.”
“맞어, 좋아했어, 나는 김영삼이여.”
“난 김종필이어.”
“와따 반갑다잉, 나는 이담이여. 느그 친구 중에 김대중, 전두환, 박정희는 없냐?”
“전두환은 없는디, 김대중하고 박정희는 있어, 오늘 일이 있어서 여그는 못 와.”
“허허허, 진짜로?”
“진짜란께, 근디 실지와 다르게 우린 다 친해.”
“우와, 3김씨에 박정희와 김일성까지, 한반도를 쥐락펴락한 무소불위 권력이그만?”
“허허, 무소불위 권력인디 승협이한테 정난희를 뺏겨불겄냐? 저것들 암것도 아니어.”
“정난희 야그는 인자 그만해라잉, 잊은 지 오랜께.”
“아야 승협아, 저 시끼 정난희상사병까지 걸렸었단다.”
“염병, 그만하란께, 승협이한테 실례여 실례.”
“아그들아, 이러다 날 새겄다, 언능 판 벌이잔께?”
천영기와 이담이 정난희이야기에 흠칫 놀라 문승협표정을 계속 살폈다. 문승협은 태연한 척했다. 김일성이 재촉하여 군용 담요를 중심으로 둘러앉았으나, 문승협과 이담은 화투를 잘 몰라 뒤로 빠졌다. 천영기를 포함한 다섯 명이 고스톱을 쳤다. 판이 거듭되며 점당 1원에서 10원으로 올랐다. 고3학생들에겐 큰돈이었다. 김일성이 무료해서 하품하는 문승협을 힐끔 보았다.
“승협아, 내 아들이름이 뭔지 아냐?”
“뭐야, 너 결혼했어?”
“잉, 폴쎄 했제.”
“정말?”
“진짜여, 으째 사람말을 못 믿으까.”
“혹시, 김정일?”
“음마, 어뜨게 알았냐?”
“그럼, 네 아내가 김정숙이고?”
“어허, 니 자리 깔아야 쓰겄다, 진짜 용하다잉.”
“하하, 일성이 너 웃긴다, 이왕 맞춘 김에 며느리와 손자들 이름까지 맞춰볼까?”
“그것보다 내 아들 김정일이 다음 후계자를 맞혀봐.”
“성혜림아들 김정남이냐, 고영희아들 김정철이냐?”
“말하자믄 그런 셈이제.”
“맞추면 어떡할 건대?”
“니를 형님으로 모시께.”
“내가 너 형님 돼서 뭐 하게?”
“에헤이, 자신 없으믄 짜그라지시든가?”
“음, 둘 다 아니야. 나의 선견지명으론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 아마 곧 태어날 거야.”
“뭐여, 맞춘 것도 아니고, 안 맞춘 것도 아니네?”
“하기사, 먼 미래야그인께 당장 답을 알 순 없제.”
“승협이 니 북한공산당 하고 내통하는 거 아니어?”
“긍께, 일성이네가계도를 쫙 끼고 있는 것이, 안기부 가서 조사 쪼까 받아야 쓰겄다.”
“안전가옥에 데꼬 가 갖고 통닭구이랑 물고문하믄, 금방 술술 불텐디 말이여.”
“아야 정신 사납다잉, 신경 끓고 화투나 쳐.”
“그래, 나 신경 쓰지 말고 고스톱이나 열심히 쳐라, 너희들 돈 나가는 소리 들린다.”
김일성말장난에 하나 둘 참전하였다. 가족친지나 친구들 모임에서 북한공산당비판과 안전기획부의 무고한 시민탄압을 빗댄 농담들이 무수히 오갔다. 천영기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고스톱에 짜증 냈다.
12시가 넘어가자, 빨리 승부를 가리자며 포커로 바꿨다. 배팅금액이 몇 백 원에서 몇 천 원을 오갔다. 흡사 도박장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문승협은 정난희를 좋아했다는 김영삼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딱히 악감정이 없으면서도 원하는 카드가 가지 않길 바랐다.
친구들 카드놀이는 새벽 3시가 가까워도 끝날 기미가 없었다. 문승협은 기다리다 지쳐 이담과 먼저 일어났다. 또다시 새벽공기를 마시며 귀가하였다.
아들이 들어오든 말든 늘 불 꺼진 집이었다. 방에 들어가 이부자리에 누우니 고독감이 밀려왔다.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 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새날이 밝아도 어제 같은 오늘이었다. 방과 후 천영기와 김일광이 만나기로 한 당구장을 찾아갔다. 몇 게임 치르면서 재능에 따라 당구실력이 엇갈렸다. 문승협과 천영기는 일취월장한 반면, 이담은 어리바리했다. 김일광이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당구수를 조정해 주었다. 문승협과 천영기는 80점, 이담은 50점. 결국 쓰리쿠션을 헤맨 이담이 꼴찌 하였다. 천영기가 손 씻으면서 하수취급했다. 이담이 식식거리며 프런트에 가 계산하였다. 김일광집으로 또 놀러갔다.
약속이나 한 듯 김일성과 김종필이 와있었다. 잠시 후 처음 본 친구가 등장했다.
“아그들아, 저 아그가 어제 못 온 박정희여.”
“아따, 대통령각하를 여그서 알현하다니 반갑소.”
“어험, 어려워 말고 편하게들 있어.”
“어제 이야기 들었어, 반갑다.”
“옴마, 진짜 문승협이네?”
“김영삼은?”
“어제 정난희 땜시 승협이 니한테 무자게 쪽팔려갖고, 오늘은 안 온다드라.”
“이런 찌질한 시끼, 말로는 대도무문이라고 지껄이믄서, 실지론 소심하그만?”
“어허, 언행불일치해야 정치인이제, 안 그냐?”
“가만있어봐, 그라믄 김종필이랑 니는 뭔 사이여?”
“김종필이가 내 조카사위여. 안 그런가 임자?”
“예 처삼촌. 염병, 여그서도 2인자네.”
박정희가 김종필을 ‘임자’라고 부르듯 흉내 내며 호응하였다. 둘은 처삼촌박정희와 조카사위김종필관계처럼 정치인행세를 하며 장난쳤다.
“김대중은 안 오냐?”
“그 아그는 미국에 있어서 못 와.”
“아, 전두환이한테 쫓겨서 미국으로 망명 갔제?”
“하하하, 너희들 다 모이면 정말 재미있겠다.”
김일광엄마가 차려준 진수성찬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김일성이 밥상을 물리고 군용 담요를 폈다. 김일광이 빌려 논 만화책을 문승협과 이담에게 줬다. 화투를 못한 둘을 빼고 자기들끼리 고스톱을 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리짓고땡과 섰다로 바뀌었다. 이윽고 카드를 꺼내더니 훌라와 블랙잭을 거쳐 포커판이 벌어졌다. 12시 가까운 시각에 야참으로 라면을 한 솥 끓여 먹었다. 문승협과 이담은 만화를 다 보고 포커를 구경하였다.
“너희들 이렇게 항상 모여서 카드랑 화투치고 그래?”
“아니, 대학시험 끝났은께 그런 거여.”
“우리가 맨날 이러믄, 엄니아부지들이 가만 놔두겄냐?”
“친구들이랑 놀고는 싶은디, 특별히 할만한 게 없은께.”
“그래도, 부모님들이 뭐라 안 해?”
“우리가 나가믄 딴짓하다 사고 친께, 부모들 보는 앞서 맘껏 놀으라는 거제.”
이야기하는 중에 판돈이 만원으로 커졌다. 점점 도박양상이 되면서 긴장감이 돌았다. 다들 괜찮다곤 하나 잃고 딴 친구사이에 좋은 감정만 있을 순 없었다. 서로 자극하며 날카로운 말들이 오갔다. 문승협은 싸울까 걱정스러웠으나, 다행히 친구들끼리 규칙이 있었다. 최종 끝나면 본전만 챙긴 뒤 딴 돈을 고스란히 내놓았다. 친목경비를 남기고 비율에 따라 잃은 친구에게 돌려줬다. 도박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더치페이문화가 정착되지 않은 현실에서 나름 합리적이었다. 함께 어울려 놀면서도 비용부담 때문에 마음 편치 않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인정할만했다.
“우리가 이미 정한 대로, 오천 원은 빼고, 나머지는 잃은 사람한테 나눠주께잉.”
“일광아, 오천 원은 뭐 하는 거야?”
“어제 모은 돈까지 합쳐서, 우리 8명이 놀 때 쓸거여.”
“나랑 담이는 돈 낸 게 없는데?”
“느그는 옆에서 지켜보느라 고생했은께 면제여.”
“아니야, 나도 조금 보탤게.”
“아야 승협아, 참어, 이것이 우리 룰이어.”
“니가 카드나 화투 칠 줄 알았으믄, 지루하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겄냐?”
“야, 미안해서라도 화투랑 카드를 빨리 배워야겠다.”
“지금 두 시도 안 됐는디 자기도 뭐 하고, 으짜까?”
“내친김에 새벽당구 한판 때리까?”
“오케바리, 가자.”
“어디 가는 건데?”
다들 김일성말에 동조하며 일어났다. 문승협과 이담은 반신반의하며 따라갔다.
김일광이 어슴푸레 불빛이 새어 나온 동네당구장문을 익숙하게 두드렸다. 누군가 안에서 커튼틈으로 빼꼼히 쳐다보더니, 주위를 경계하며 자물쇠를 풀어줬다. 밖에서 봤을 땐 분명 불이 꺼졌었으나, 환히 밝고 의외로 손님이 많았다. 당구손님이 세 팀, 카드와 화투손님이 두 팀이었다. 문승협이 토끼눈으로 두리번거리자, 김일광이 당구손님들 게임을 설명해 주었다. 화투숫자를 뺀 만큼 점수를 쳐야 하는 ‘식스볼과 나인볼’. 3개 당구공으로 쓰리쿠션만 치는 ‘죽방’. 다 돈 따먹기였다. 세상이 잠든 시간에 이렇게 밤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니, 문승협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김일광주도로 100에서 150점 친구들 넷이 큐대를 잡았다. ‘갬빼이’를 친다며 두 명씩 편을 갈랐다. 팀당 천 원씩 걸고, 당구비는 공동경비에서 지불키로 하였다. 문승협과 천영기, 이담은 내기 없이 쳤다.
셋이 친선으로 치른 개인전은 30분쯤 지나 끝났다. 이담이 꼴찌를 한탄하며 큐대를 놓지 못했다. 문승협과 천영기는 고수들의 갬빼이를 관람하면서 눈으로 배웠다. 김일광팀이 졌지만 복수전을 요구해 2차전이 시작됐다. 천영기가 지켜보다 문승협에게 1대 1로 붙자고 하였다. 이담은 자청해서 게임돌이를 했다. 문승협이 10분 만에 이기자, 천영기가 씩씩거렸다.
“영기야, 넌 나한테 안돼, 실력 좀 더 쌓아서 오니라.”
“저런 곰배시끼한테 지나디, 오매 열불 난 거.”
“담이야, 내가 게임돌이 할게, 네가 영기 손 좀 봐줘라.”
“싫어. 영기 니도 혼자서 분풀이 연습이나 해.”
“야 김일광, 느그는 언제까지 치는 거여?”
“쪼까 지둘려, 우리 팀이 지믄 바로 끝난디, 이기믄 똘똘마리 결승전 해야 한께.”
문승협이 시계를 보았다. 벌써 4시 가까이 되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친구들 눈이 야행성동물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천영기가 훈수두기에 나섰다.
“히까끼나 기레까시 쳐, 거기 걸든가 비껴 치란께?”
“하수주제에 가만있어, 이거 지믄 2천 원 나간다잉.”
“다마 쪼까 친다고 거만떨기는, 참나 더러워서.”
“꼬우믄 고수하든가, 다마수를 짤짤이로 딴 거 아녀.”
“염병, 돈으로 따나 짤짤이로 따나, 거그서 거그제.”
“당구장에 돈 갔다 받쳐봐라 된가, 다 실력이어 실력.”
“얘들아, 나 먼저 집에 가면 안 될까?”
“쪼께만 지둘려, 곰방 끝내께.”
“미안, 먼저 갈게, 아무래도 집에서 걱정할 거 같아.”
“집에다 말 안 하고 왔냐?”
“응, 이렇게 늦어질지 몰랐거든.”
“그래라 그라믄, 어쩔 수 없제.”
“그래, 다들 당구 잘 치고 잘 들어가.”
“아참 승협아, 오늘 학교 끝나믄 이 당구장으로 와, 우리 다 같이 또 만나서 놀게.”
“글쎄, 약속이 있어서 어떨지 모르겠다, 아무튼 집에 가면서라도 한번 들를게.”
문승협은 새벽당구를 물리치고 서둘러 집으로 갔다. 역시나 집은 고요한 어둠 속에 덮여있었다. 친구들에게 걱정할 것 같다고 말한 것이 부끄러웠다.
가족들이 깰까 봐 살금살금 들어가 잠자리에 누웠다. 한동안 덮어뒀던 고민이 들썩였다.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할수록 잡다한 상념들이 활개 쳤다. 가정과 가족의 의미, 당면한 대학진학문제와 미래의 모습. 생각의 나래를 펼쳤으나 쉬이 결론 나지 않아 괴로웠다. 천당과 지옥을 오가다 종착지는 결국 정난희였다.
정난희에게 이별통보를 받은 이후,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이 끓어진 상실감과 슬픔에 허덕였다. 이별의 아픔과 분노에 사로잡혔다. 이별을 거부하며 외로움과 우울의 늪에 빠졌었다. 헤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숱하게 반복하였다. 이별감정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강한 자아를 찾진 못했지만, 고통스러운 치유의 시간이 충분히 경과됐다고 여겼다. 탈선 같은 부적절한 매개가 있었어도, 어찌 됐든 정난희와 결별하였다고 믿었다. 얼마 전만 해도 이별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줄 알았으나, 현실은 달랐다.
발악하며 잊으려 했던 정난희존재가 다시 정면으로 튀어 올랐다. 최근만 돌이켜봐도 여전히 정난희그림자에 휩싸였다. 어제와 그제는 김일광친구 김영삼 때문에, 엊그제는 우연히 유은정을 통해서. 하물며 대입학력고사장에서 재수생이라는 선배마저 정난희를 소환하였다. 어쩌면 스스로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을 뿐, 무의식 속에서 정난희를 붙잡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별의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정난희가 따라다닌단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더욱이 유은정메모에 대입해 보며 재차 확인까지 했다. ‘내가 필요했던 것은 정난희사랑뿐이고,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오로지 정난희’. 유은정조언대로 내려놔야겠다고 다짐도 하였지만, 정난희를 보고픈 미련이 꿈틀댔다. 미련과 벗어나려는 의지가 충돌해 머리가 욱신거렸다.
답답해서 눈을 떴다. 불현듯 김일광말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처음 당구를 배우면 천장이 당구대로 보인다더니 진짜였다. 자연스레 이런저런 상황을 만들어 당구 치는 상상을 했다. 잡념을 떨치는데 효과만점이었다.
문승협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이별의 아픔을 승화시키는 중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계기가 필요하였다. 비몽사몽 어느 순간 잠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