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3부 3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63)

by 태양을 품은 별

얼마쯤 잤을까, 문현아가 흔들어 깨웠다.

“오빠, 일어나, 얼른 밥 먹어.”

“응, 그 그래.”

“어제 시험은 잘 봤어?”

“대충, 대충 봤어.”

“열두 시까지 안 자고 기다렸는데, 언제 온 거야?”

“열두 시 조금 넘어서.”

“피, 거짓말. 밥 먹어, 엄마가 빨리 오래.”

문경준과 이항리는 아침을 먹는 동안 일언반구 없었다. 문승협은 사사건건 묻는 것보다 마음이 편해야 할 텐데 심적 부담이 가중되었다. 중요한 시험을 치른 아들이 어제 안 들어왔는지도 모르는 눈치여서 가슴이 답답하였다. 진짜 무관심인지 알아서 잘하라는 자율인지, 도대체 부모마음을 알 수 없었다.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탔다. 라디오에서 전날 치러진 대입학력고사분석뉴스가 나왔다. 객관식일변도 출제라느니, 창의력을 저하시켰다느니 비판일성이었다. 학력고사점수로 대학을 서열화시켜 대학자율성을 저해했다며, 고교 간 내신 형평성과 객관성 문제를 지적하였다. 입시전문가들이 앞으로 있을 대학원서지원에서 치열한 눈치작전과 배짱지원을 우려했다.

입시진풍경도 소개하였다. 후배학생들과 수험생가족들이 응원하려 한날한시 시험장을 찾았다. 수험생들이 시험을 치르는 동안, 엄마들은 교문 밖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두 손을 모았다. 대입학력고사를 앞두고 시험에 착 붙으란 의미의 엿과 찹쌀떡이 불티나게 팔렸다. 합격기원을 위해 자동차브랜드마크를 몰래 떼어내 소장하는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다. 1980년 7∙30 교육개혁조치 이후 나타난 새로운 풍속이라고 했다.

교문을 들어가는 학생들 발검음이 유난희 무거웠다. 교실마다 공부깨나 하는 학생들 중심으로 가채점하며 웅성거렸다. 대부분 자유시간이었다. 담임성향에 따라 학생들을 교무실로 불러 예상점수를 확인하였다. 일부선생들이 학력고사문제를 풀어주려다 원성을 샀다. 어떤 반에서는 장기자랑으로 시간을 보냈다. 드문드문 학생들이 엎드려 그동안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였다.

3학년들은 정규수업만 했다. 밤늦게까지 야자를 하는 2학년후배들이 일찍 하교하는 선배들을 부러워하였다. 김부일이 운동장을 지나가는 문승협을 쫓아가며 불러 세웠다. 시험 끝난 기념으로 회포를 풀자며, 토요일 오후 2시에 코롬방제과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가타부타대답도 듣지 않고 여자친구 채영이와 약속이 있다면서 쏜살같이 앞질러 갔다.

문승협이 교문을 나서 버스를 탔다. 정처 없이 가다 도착한 곳은 독서실 앞. 아니나 다를까 이담과 천영기가 와있었다. 약속 없이도 만났다며 서로 칭찬하였다.

“야, 너희들 어제 너무한 거 아냐?”

“뭐가야?”

“치사하게 나 혼자 두고 갔잖아.”

“그라믄 술 취한 놈을 놔두고 가제, 업고 가리?”

“깨워서 같이 가면 되지?”

“아야, 안 그래도 담이가 니를 몇 번 깨웠는디, 니 학교친구들이 그냥 내비두라드라.”

“어휴, 그래,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넘어가자.”

“음마, 니가 안 넘어가믄 으짤것인디?”

“뭘 으짜긴 으째, 한 대씩 쥐어박든지 해야지.”

“와따 무섭다잉.”

“하하하, 까불면 죽는 수가 있다잉, 알겄어?”

“네 성님, 앞으로는 꼭 모실랍니다.”

“허허허, 느그 시방 조폭놀이하냐?”

“네 성님, 말씀만 하십쇼 성님.”

“어이, 시다바리 영기야, 뭐 하고 노끄나?”

고3들은 대입학력고사 이후 곤혹스러운 일이 하나 생겼다. 방과 후와 휴일에 뭘 할지 고민이었다. 할만한 놀이나 문화가 부족다. 야자시간과 독서실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집에 일찍 들어가는 것이 영어색하였다. 인생중대사 대입시험이 끝났단 명분을 내세워 밤늦게까지 밖에서 배회했다. 부모들도 딱히 관섭하거나 제재하지 않았다.

셋은 특별한 아이디어가 없어 막연히 시내중심가로 나갔다. 생각보다 많은 고3들이 모여들어 또래들만의 세상 같았다. 길거리를 거닐다 아는 친구를 마주치면 시험 잘 쳤냐는 말로 인사를 대신하였다.

천영기와 이담이 전자오락실로 방향을 잡았다. 가전제품대리점 TV앞에 한 무리 어른들이 모여 떠들었다. 어깨너머 TV화면아래자막이 문승협눈에 들어왔다. ‘버마경찰국장, 아웅산묘소폭탄테러사건 발표. 북한정찰국소행, 전두환대통령과 수행원 암살획책’. 무시무시한 폭탄테러가 국가원수를 제거하려는 북한의 짓이었다. 실로 엄청난 뉴스였지만, 대입학력고사를 마친 고3들은 관심 갖지 않았다. 당장 놀기에 혈안이었다.

이담이 빨리 오라며 문승협을 불렀다. 천영기는 이미 오락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원래 변두리우범지대와 학교 근처에 허술한 오락실이 많았다. 상시관리자가 없어 불미스러운 일이 자주 발생했다. 불량배들이 나타나 시비 걸고 금품을 갈취하였다. 학생들이 기피하다 보니, 근래 들어 번화가에 최신전자오락실이 하나 둘 생겨났다.

문승협은 전자오락에 문외한이었다. 학교건너편 문방구에서 몇 번 해본 ‘갤러그’가 전부였다. 또래들 사이에 유행한 게임이름과 요금조차 몰랐다. 전자오락은 칼라흑백을 가리지 않고 1회 20원이었다. ‘제비우스, 1942, 타이거헬리’등 슈팅게임이 인기였다.

문승협이 벽돌격파게임에 몰두한 사이, 옆에서 자꾸 훈수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허, 아따 그것이 아닌디. 진짜 못하그만잉’. 참다못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책가방을 멘 국민학생이 옆에 딱 달라붙어 일침을 날렸다. ‘내가 깨주까라우’. 답답하고 한심하단 표정이었다. 문승협이 한마디 하며 자리를 내줬다. ‘그래, 너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국민학생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꿰차더니 실력을 발휘했다. 문승협은 자신보다 고수임을 인정하였다. 국민학생을 앞세워 제비우스와 1942까지 전자게임을 두루 섭렵했다. 천영기와 이담이 출출하다며 밥 먹으러 가자고 하였다.

셋이 전자오락실을 나서면서 한현진을 만났다. 친구와 식사하러 간다고 하여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코롬방제과점을 지나가다 백미정과 마주쳤다. 우연이라기엔 미심쩍었으나 증거가 없었다. 누구도 어느 식당으로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삼겹살집에 들어갔다.

천영기가 익숙하게 삼겹살을 주문하였다. 잠시 뜸 들이다 큰소리로 소주 세 병을 시켰다. 문승협이 흠칫 놀란 반면, 친구들은 무덤덤했다. 식당주인이 밑반찬과 소주잔을 가져왔다. 백미정이 태연히 잔을 하나씩 배분하자, 한현진이 수저를 놓았다.

“야, 우리 소주도 먹는 거야?”

“시끼, 으째 조용한가 했다.”

“니가 암만 범생이라도, 학력고사 끝났은께 한잔 해야제, 어제 맥주도 마셨잖애?”

“맥주 하고 소주하고 같냐?”

“뭣이 다른디, 둘 다 알코올이여?”

“그래도, 어제는 우리끼리 몰래 마셨잖아.”

“아따 염병하네 참말로, 숨어서 마시믄 술이 아니고, 식당서 마시믄 술이어?”

“허허, 숨어서 묵으믄 알코올이 날아가분디, 여그서 묵으믄 몸으로 들어간갑다잉.”

“그런 말이 아니잖아.”

“으째, 단속에 걸릴까 비 겁나냐?”

“응, 아직 졸업도 안 했는데. 에이 그래, 나도 모르겠다.”

“자, 우리 이쁜 아가씨들도 한잔씩 받드라고.”

문승협이 소주를 제지하였지만, 이담까지 마시자고 가담해 불가항력이었다. 천영기가 소주병을 흔들어 따서 여자친구들 술잔에 먼저 따랐다. 문승협도 망설이다 잔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양철원통테이블중앙의 연탄불위에 불판을 얹고 삼겹살을 올렸다, 이담이 먹기 좋게 구워 가장자리로 옮겼다.

“아그들아, 어제 시험은 잊어 불고, 앞으로 우리의 청춘을 위해서 건배하끄나?”

“그라자, 청춘을 위하여.”

“위하여.”

“크으, 오매 쓴 거.”

“와따 삼겹살 맛나다잉, 여그가 맛집이그만.”

“아야 언능 묵어봐, 진짜 죽인다야.”

다들 어른흉내 내느라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고 구운 삼겹살을 안주 삼았다. 문승협은 소주잔에 입술만 살짝 대고 내려놓았다. 마뜩잖게 한점 집어 맛봤다. 언제부턴가 돼지고기를 먹으면 배탈 나거나 속이 불편했다. 질겅거리는 돼지비계식감도 께름칙하였다. 김치찌개의 돼지껍질에 털이 나있고, 파란색 도장이 찍힌 걸 본 후로 꺼렸다. 천영기가 다시 소주를 따랐다.

“현진아, 너 소주 마셔도 돼?”

“잉, 시험도 끝났고, 인자 어른이나 마찬가지잖애.”

“저기, 괜찮아요?”

“내 이름은 저기가 아니고요, 현진이랑 얼척없는 친구 은정이라고 하요, 유은정.”

“아 네, 은정씨는 괜찮아요?”

“뭐 으짠다우, 우리끼리 이럼시롱 한잔 하는 거제.”

“오메오메, 내가 깜빡해 갖고 소개를 못 시켰는디, 느그들끼리 인사 잘한다잉.”

“허허, 둘 다 임자 없은께, 서로 잘해보드라고.”

“담이야, 그런 말 좀 하지 마.”

“승협아, 정난희는 그만 잊으란께.”

“야, 너 벌써 취했냐?”

“어이 문승협씨, 으째 나한테는 안 물어본가?”

“아, 미정이 넌 많이 마셔봤을 거 같아서.”

“뭣이라고야, 니 나에 대한 선입관이 솔찬이 잘못됐다잉, 나 이것이 첨이어.”

“에이 거짓말.”

“음마, 진짜란께?”

“맞어, 우리 미정이가 날라리라고 소문이 많제만, 술은 태어나서 오늘이 첨이다잉.”

“아따 승협아, 우리 가시나들도 마신디 한잔해부러.”

문승협은 여자애들 부추김에 못 견뎌 반 잔쯤 마셨다. 오만상 찌푸리고 소주를 삼켰다. 옆에서 삼겹살상추쌈을 건네자, 입으로 날름 받아 씹으며 쳐다보니 유은정이었다. 소주 반 잔에 어질어질했다. 맥주는 보리맛이라도 있지 소주는 쓰디썼다. 친구들은 괘념치 않고 술을 부어라 마셔라 하였다. 유은정이 계속 음식을 챙겨줬고, 문승협은 거북하나 싫진 않았다. 술 취해 졸린 와중에도 삼겹살김치볶음밥이 기막히게 맛있었다.

여섯이 소주 세 병을 못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승협이 술기운에 살짝 비틀거리자, 유은정이 슬쩍 부축해 주었다. 길거리 밤공기가 차가웠다. 천영기와 백미정이 나이트클럽에 가보자며 앞장섰다. 문승협이 학생입장불가라고 반대했으나 무시됐다. 친구들 등쌀에 따라간 곳은 디스코텍‘유니콘’. 4층에 자리한 디스코텍서 새어 나온 음악이 쿵쾅쿵쾅 건물을 흔들었다. 또래로 보인 젊은 남녀들이 1층부터 4층 입구까지 계단에 길게 줄 섰다. 8시부터 입장한 줄이 9시가 돼도 거의 그대로였다. ‘마이클잭슨의 Billie Jean, Beat It, Thriller’를 들으며 지루함을 달랬다. 10시가 넘어가면서 조금 줄더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신디로퍼의 Girls Just Want To Have Fun, 유리드믹스의 Sweet Dreams’가 흥을 돋웠다. 줄 사이에 드문드문 아는 얼굴이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쳐다보며 수군거리는듯해 창피하였다. 사람들 시선에 잘 띄지 않도록 몸을 돌려 섰다. 아까 마신 소주냄새가 속에서 느껴졌다. 왜 술을 마시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영기야,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긍께, 시험 끝났다고 대목이라서 그런 갑다.”

“여자친구들도 있는데, 막연히 있기 좀 그렇다야.”

“승협아, 니랑 나랑 안에 들어가보까?”

“가서 뭐 하려고?”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믄 이런가 보게.”

문승협은 어쩔 수 없이 천영기를 뒤따라갔다. 디스코텍을 들어가려는데 웬 남자가 가로막았다. 기도라고 하기엔 순해 보였다. 천영기가 안을 잠깐 보겠다고 하니 비켜섰다. 디스코텍문을 연순간 엄청난 음량이 튀어나와 지축을 흔드는듯했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정신없이 움직이며 별천지풍경이 펼쳐졌다. TV에 가끔 나왔지만 실제로 보니 경이로웠다. 남녀들이 뒤죽박죽 섞여 흥겨운 음악과 현란한 조명아래서 들썩였다. 다들 무아지경에 빠져 열정적으로 춤췄다.

“워메, 겁나게 시끄런거.”

“정말 사람 많다, 다들 춤에 미쳤나 봐.”

“와따메, 발 디딜 틈이 없그만.”

“음악과 조명을 제거하고 보면, 정신 나간 사람들 같아. 영기야, 오늘은 그만 가자.”

“그라까?”

이담이 문승협에게 디스코텍소감을 물었다. 대혼돈 속에 질서 있는 신천지라고 하자, 무슨 뜻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 함께 밖으로 나와 어디 갈지 의논하였다. 유은정이 가까운 음악다방을 추천했다.

대학생들이 주손님으로 음악을 틀어주고 술도 팔았다. 이담이 눈치를 살피며 DJ박스옆좌석을 잡았다. 짝을 이뤄 자리하다 보니, 자연스레 문승협과 유은정이 나란히 앉았다. 천영기커플이 맥주를 시키고, 나머지 네 명은 오렌지주스와 파인애플주스를 주문하였다.

유은정이 음악을 신청하자며 필기구를 꺼냈다. 종이에 뭔가 끄적거린 뒤 문승협에게 돌렸다. ‘Yazoo의 Only You’가 쓰여있었다. 문승협은 ‘Eagles의 Hotel California’를 적었다. 한현진이 마지막에 쓴 후 DJ박스바구니에 가져다 놓았다.

웨이터가 맥주와 주스를 가져왔다. 디스크자키가 문승협일행의 메모지를 읽었다. ‘드디어 대입학력고사가 끝났습니다, 이젠 친구들과 즐기고 싶어요. 네, 신청곡뒤에 신나는 노래를 들려드리께요. 모두 좋은 성적 받길 빌어봅니다. Yazoo가 부르요, Only You.’

디스크자키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일부손님들이 문승협일행을 향해 격려의 박수를 쳤다. 문승협은 쑥스러워 고개 숙이며 유은정에게 물었다.

“처음 듣는 데, 어떤 노래예요?”

“우리 편하게 말 놓으믄 안 되까요?”

“아, 그래요 그럼.”

“영국신디팝밴드가 불러, 작년엔가 나왔제.”

“노래 괜찮은데?”

“듣기 편해갖고 집에서 가끔 즐겨, 가사도 좋고 한께.”

“밴드이름이 생소하다.”

“DJ가 이곡다음에 신나는 노래 야그하드만, 그거 나오믄 니도 분명 기억날 것이여.”

유은정짐작대로 ‘Don’t Go’가 이어졌다. 문승협이 생각났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거리나 롤러장에서 많이 틀던 곡이었다. 남자손님들이 머리를 까딱거렸다.

노래가 끝날즈음, 디스크자키가 마이크를 당기며 문승협일행을 바라보았다. ‘우리 뮤직다방은 원래 고등학생출입이 안 되는디, 대입시험도 끝났은께, 오늘만큼은 마음 편히 즐기게 예외로 하겄습니다. 참 듣기 좋은 곡이죠잉, Eagles의 Hotel California.’

글렌프레이의 기타 연주가 나오자, 유은정이 문승협에게 Yazoo의 Only You중간가사라며 건넸다. ‘내가 필요했던 건 당신 사랑뿐, 내가 필요했던 건 또 다른 하루, 내가 알고 있었던 건 오로지 당신. PS : 승협아, 인자 내려놔. 우리 친구처럼 지내자’.

문승협은 여러모로 헷갈렸다. ‘노래가사는 무슨 뜻이지? 뭘 내려놓으라는 거지? 친구처럼 지내자?’. 애매한 글에 의례적 인사치레로 미소 지었다. Hotel California가 절정을 향할 때, 불현듯 정난희가 떠올랐다. 유은정이 써준 가사에 대입해 봤다. 정난희를 생각하는 자신의 마음 같았다. 자의적 해석일지언정 인자 내려놔란 뜻도 이해됐다. 친구처럼 지내잔 말이 고마웠다. 잠시 상상 속에서 Hotel California를 다녀왔다.

디스크자키가 한현진신청곡을 소개했다. ‘BobDylan, RollingStones, Beatles, BeachBoys 등과 수십 년 걸친 사회혁명으로 반문화의 아이콘이 됐죠잉. Simon&Garfunkel의 Bridge Over Troubled Water 하고요, 작년 이맘때 한참 인기를 끌었던 The Sound Of Silence가 연속 나갑니다.’

문승협일행은 ‘The Sound Of Silence’를 배경음악으로 다방을 빠져나갔다. 길에서 또 어디 가서 놀지 의논하였다. 한현진과 유은정이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밤새워 놀자던 천영기와 백미정이 무척 아쉬워하였다. 이담이 음흉한 천영기욕망을 간파했다.

“느그 둘은 뭐 할라고 그냐, 무자게 의심스럽다?”

“뭐 하긴 뭐 해, 그냥 놀제, 이때 아니믄 언제 놀겄냐?”

“현진아, 나 느그 집 가서 자도 되까?”

“안될 거야 없는디, 미정이 니는 외박해도 되냐?”

“잉, 오늘 친구집서 잔다고 말하고 나왔어.”

“그래라 그라믄. 은정아, 니도 우리랑 자자?”

“안돼, 집에 안 들어가믄 머리끄댕이 뜯겨부러.”

“아따 내가 울엄니한테 말해갖고, 느그 집에 전화해서 허락받아달라고 해주께야?”

“아, 그라믄 가능하제.”

한현진꼬임에 넘어간 유은정까지 셋이 자기로 하자, 천영기가 백미정을 째려보았다. 이담이 꿍꿍이가 틀어져서 실망한 천영기를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늦은 시간이라 한현진집까지 모두 동행하였다.

세 남자는 바래다주고 길거리를 정처 없이 거닐었다. 셋다 집에 들어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승협아, 깜씨 으짜디?”

“깜씨?”

“유은정이 별명이 깜씨여.”

“왜 깜씨야?”

“나는 들은께 금방 알겄다. 까무잡잡 피부라 깜씨제?”

“잉 맞어.”

“난 여자가 까무잡잡하믄, 무자게 쎅시하던디.”

“영기 니는 꼭 그쪽 방면으로 생각하드라잉.”

“근데, 은정씨 으짠지를 왜 나한테 물어?”

“니가 맘에 들믄 소개시켜줄라고.”

“굿아이디어다야. 승협아, 한번 사귀어봐, 키 크고 몸매 잘빠졌고 얼굴도 이쁘드만.”

“거그다가 성격도 허벌라게 좋고 진짜 착하대, 현진이가 백프로 보장한다드라.”

“아까 나랑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어.”

“진짜? 잘했다 잘했어.”

“언제 진도를 거그까지 뺐냐?”

“너희들 왜 오버하고 그래, 그냥 친구처럼 인데.”

“아야, 다 친구로 시작하는 거여.”

“기분이다, 내가 오늘 심야다방 쏘께. 저그 내가 새로 개발한 데가 있어, 언능 가자.”

문승협과 이담은 거절할 수 없었다. 오히려 천영기말에 솔깃했다. 역시 경험이 무서웠다. 서로 눈치 보고 부끄러워하였던 이전의 태도는 없었다. 이담이 한술 더 떠 어떤 장르 포르노일지 궁금하다고 했다.

예전에 갔던 곳보다 시설이 좋았다. 손님 끌기 경쟁을 하는지 소파나 환기시설이 쾌적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많고 포르노도 시리즈물이었다. 문승협은 푹신한 소파에 안기듯 깊숙이 앉았다. 주위시선을 피하려고 드러눕다시피 했다. 술기운과 피로에 자꾸 눈이 감겼다. 충혈된 두 눈을 비벼가며 집중해서 보려 애썼다. 어느 순간 현실을 자각하였다. ‘나는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여기는 어디지?’. 내면에서 타락과 도덕이 다투고 이율배반을 느꼈다. 결국 새벽 4시쯤 집으로 향다.

비디오를 보다 잠든 천영기와 이담을 두고 나와 미안하였다. 집 가는 길 곳곳에서 메케한 냄새가 미간을 찡그리게 했다. 11월 말 쌀쌀한 날씨 탓에 집집마다 연탄을 땠다. 숨 쉴 때마다 나온 콧김이 얼어 콧속이 따끔하였다. 뭔지 모를 답답함이 가슴에 가득 찼다. 길게 뿜어낸 한숨과 함께 입김이 사라졌다. 음악다방에서 유은정이 써줬던 Yazoo의 Only You중간가사가 기억났다. ‘내가 필요했던 건 당신 사랑뿐, 내가 알고 있었던 건 오로지 당신’. 당신은 곧 정난희라는 생각에 울컥했다. 애처로운 슬픔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직도 갈피를 못 잡는 스스로를 직시하면서 괴로움이 밀려왔다. 여전히 사랑은 영원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있었다. 사랑은 변할 수도 있다는 해방을 맞이할 준비가 안되었다. 뿌리째 흔들리는 방황 속으로 점점 더 빠져들어갔다. 자문자답하듯 중얼거렸다. ‘이런 나를 정난희가 알면 뭐라 할지 뻔하다. 왜 소중한 것은 꼭 나중에 알게 될까? 그래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너와 나의 추억도, 우리의 사랑까지도’.

집 앞에 도착하니, 짙은 어둠에 휩싸인 적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걱정할까 봐 그나마 서둘러 왔는데, 정작 집에선 아무 근심걱정 없어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학교에 등교할걸 그랬다며 자조하였다. 씁쓸히 웃으며 대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갔다. 역시나 아들이 들어왔는지 나갔는지 관심밖이었다. 새벽에 들어온걸 알리만무했다. 대입시험이 끝난 후 어떤 생활을 하는지 남의 자식일이었다.

두어 시간 자고 등굣길에 나섰다. 버스에서 북한을 규탄하는 라디오방송이 계속됐다. 어제 전자오락실에 들어가다 TV로 얼핏 봤던 뉴스와 유사하였다. 아나운서가 근엄한 목소리로 낭독하듯 했다.

‘버마경찰국장이 아웅산묘소폭탄테러사건을 북한정찰국에서 파견한 암살단소행으로 발표하였다. 전두환대통령과 수행원을 살해하려 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폭탄테러이틀 전 10월 7일, 북한정찰국특공대소속장교 3명이 지령을 받고 버마주재북한대사관에 은거했다. 전두환대통령일행의 버마도착하루 전 새벽, 아웅산묘소에 잠입하여 2개의 폭탄을 지붕에 설치하였다. 10월 9일 테러를 저지른 후, 군추격을 따돌리며 양곤강으로 향했다. 테러범들이 북한으로 귀환할 계획이었지만, 양곤강에 약속된 고속정과 화물선이 없었다. 북한당국이 애초부터 이들의 탈출에 신경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버마정부는 사건발생즉시 암살범추적에 총력을 다하였다. 10월 11일과 12일에 북한정찰국특공대소속대위 1명을 사살하고, 소좌와 대위 2명을 체포했다. 10월 17일 북한특수공작원에 의해 자행됐음을 이미 공표하였다. 11월 6일 북한에 대한 국교단절과 북한외교관을 추방하는 조처를 취했다. 북한은 암살사건과 무관함을 강변하였다. 11월 22일 버마검찰이 체포된 범인들을 수사하여, 북한에서 전두환대통령과 수행원들을 살해하기 위해 인민군장교들로 구성된 암살단을 밀파했다는 전모를 밝혀냈다.’

대한민국국민들에게 충격이었다. 두 달 전 9월 1일 소련의 대한항공여객기격추사건이 있던 데다, 아웅산묘소폭탄테러사건발생당시 이산가족찾기생방송이 100여 일 연속진행 중이었다. 또다시 반공과 멸공 열풍이 무서운 기세로 전국을 덮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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