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65)
아침에 간신히 일어나 등교했다. 전날 야간활동으로 못 잔 잠을 수업시간에 보충하였다. 수업시간은 졸려 죽겠더니, 쉬는 시간에는 이상하리만치 초롱초롱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김부일이 들이닥쳤다.
“가자, 니 체포하러 왔다.”
“무슨 약속이길래 그래?”
“미리 알믄 김빠지잖애, 가보믄 알어.”
“에휴, 오늘 토요일처럼 항상 오전수업만 하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오까?”
“그러게, 차라리 주 5일제 수업해서, 토요일일요일 이틀을 쉬면 더 좋겠지?”
“니가 그런 말을 하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일이다야.”
둘을 태우고 가던 버스가 목화여고정류소에서 정차하였다. 문승협이 무심코 차창밖을 내다봤다. 정난희와 꼭 닮은 여학생이 교문으로 들어갔다. 양갈래머리를 딴 모습까지 비슷했다. 정난희로 확신한 순간 버스가 다시 출발하였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목을 쭉 빼고 바라보았다. 서로 다른 처지의 이질감에 불편한 감정이 불쑥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아직도 이별의 수렁에서 허덕이며 힘겨워하는데, 너는 참 밝아도 너무 밝구나’. 머쓱해서 김부일을 살폈으나 다행히 듣지 못한 듯했다. 한참 동안 정난희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부일이 다 왔다며 내리자고 하였다.
토요일 오후 2시 즈음 코롬방제과점 주변은 학생들로 붐볐다. 약속장소의 대명사다웠다. 대입학력고사를 치르고 졸업을 앞둔 고3들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문승협과 김부일은 한걸음 옮길 때마다 후배들에게 인사를 받았다. 공부든 싸움이든 또래들 사이에 알려진 선배라면 의당 있는 일이었다. 제과점 2층으로 올라가니 한 무리가 눈에 띄었다. 문승협은 과거 있던 일처럼 기시감을 느꼈다. 2층 창가 긴 테이블에 이달순과 유승민, 유도무제한급국가대표 이정국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맞은편에 앉은 채영이와 채정이가 고개를 돌렸다.
“승협 오빠.”
“어, 정이도 왔네? 어떻게 된 거야?”
“뭐야, 나 온지 모르고 왔어?”
“응, 부일이가 가보면 안다고만 해서.”
“피, 그래서, 나 안 반가워?”
“아 아냐, 엄청 반갑지, 잘 있었어?”
“아야 승협아, 니 눈에는 이 엉아가 안 보이냐?”
“그럴 리가, 덩치가 산만한 이정국이 안 보일리 있냐?”
“그람 언능 와서 거목한테 앵겨야제, 이 매미 시끼야.”
“야, 숙녀들께 먼저 인사드려야지. 영이야, 안녕?”
“역시, 승협이가 신사는 신사여. 그란디, 니는 얼굴이 무자게 수척해져부렀다?”
“아, 시험 끝나고 매일 밤늦게까지 놀아서 그런가 봐.”
“다른 뭔 일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다 다른 일?”
채영이가 무슨 까닭인지 아는 마냥 물었다. 문승협은 정난희와 이별 때문에 마음한구석이 찔렸다. 화제를 돌리려 이달순과 유승민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오늘 이 상황이 왜 낯설지 않을까?”
“작년 부일이 생일 때, 여그 이 자리서 만났었잖애.”
“맞어, 그날 정이를 쫓아다닌 아그들이 화장실서 승협이한테 깝치다 혼났제.”
“하하, 달순이 너는 별 걸 다 기억한다.”
종업원들이 쟁반에 수북한 빵과 음료수를 가져왔다.
“정이가 주문한 거여, 새로 나온 고로케하고 에그샌드위치도 있은께 골라 묵어.”
“정국이 너는 유도대학?”
“잉, 거그로 정했다.”
“너 지금은 몇 키로야?”
“시방 126키로, 매미 니랑은 내년에 서울서 보겄다잉?”
“일단은 서울에 있는 대학을 지원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될런가 모르겠다.”
“어디, 서울대?”
“몰라, 성적 나와봐야 알지.”
“부일이 니는 으짤래?”
“전남대 아니믄 조선대에 낼까 했는디, 영이랑 떨어지기 뭐해서 목포대 갈라고.”
“와따메, 열부 나셨네.”
“부일이 니는 공부 갈쳐준 승협이한테 한턱내라잉?”
“으째 영이 니가 그런 말 하냐?”
“내가 산 증인인디, 나 아니믄 누가 한대?”
“하하, 영이 너는 어떻게 됐어?”
“나는 한국은행 목포지점에 취직했어.”
“와, 축하한다, 그거 엄청 어려운 일인데.”
“달순이는?”
“나는 우리 압씨가 손을 꼭 잡드만, 제발 부탁이라고 목포대만이라도 가라드라.”
“승민이는 결정했냐?”
“나는 딴따라나 하까 생각 중이다.”
“딴따라?”
“우리 영훈고그룹사운드 영웅들 드러머랑, 엊그제부터 밤무대 몇 군데 뛰고 있어.”
“싱어로?”
“잉, 공부는 실력이 안된께, 노래 밖에 할 것이 없다야.”
“아야, 대학야그 그만하자, 머리에 지진 난다.”
“그래, 그냥 놀자고 만난 건께.”
“뭐야, 나왔다고 집합시킨 거 아니었어?”
“그 그라제, 우리 이쁜 채정이 왔은께 모인 거제, 맞어.”
“일단 밥이나 묵자, 배고프다.”
“하여튼, 덩치 값을 한단께.”
“나는 친구들이랑 약속 있어, 금방 얘들 올 거야.”
“아따 처제, 승협이도 있는디 같이 가세,”
“난 여기 빵이면 되니까, 오빠들끼리 만난 거 드셔.”
“주인공 빠지믄 우리가 섭하제.”
“나도 오랜만에 목포 왔으니까, 친구들도 만나야제?”
“허허, 유명인이라고 우리 무시하는 거여?”
“응, 오빠들은 좀 무시해도 돼, 안 그래?”
“허허, 알았네 알았어, 처제 하고픈 대로 해부러.”
“근데, 승협이 오빤 나랑 있으면 안 돼?”
“우리도 승협이랑 오랜만에 같이 놀고 싶은디?”
“에이, 오빠들은 내일 또 만나면 되잖아, 나는 내일 서울가야 한단 말이야.”
“승협이 니가 선택해라, 친구냐 아니믄 가시나냐?”
“달순 오빠, 가시나가 뭐야 가시나가?”
“아이고, 지송합니다요 배우님.”
“그래라 그라믄, 승협이 니는 정이랑 같이 있어, 우리는 우리끼리 놀 텐께.”
“그라자, 우린 내일도 시간 있은께.”
“정이 니, 아직도 승협이 좋아한갑다잉?”
“당연하지, 그 마음이 변하면 되겠어?”
“음마, 서울서 연예부기자들 불러다가 대문짝만 하게 스캔달 한번 내보까?”
“내, 내고 싶으면 내, 내가 그런 거 무서워할까 봐?”
친구들은 예쁘면서 귀엽고 당돌한 채정이를 어쩌지 못했다. 둘을 남겨둔 채 식사하러 갔다. 때마침 채정이 친구들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오 마이 갓, 승협 오빠가 여그 으짠 일이요?”
“오랜만, 조여주랑 공현정, 맞지?”
“와따, 이름을 기억해 주다니, 무자게 영광스럽소.”
“내 보디가드로 불렀어, 너희들 싫어?”
“뭐 그런 것은 아닌디, 친구 전 남친을 어뜨크롬 대해야 할지 쪼까 난감해서.”
“야, 전 남친이 다시 현 남친도 되고 그러는 거야.”
“혹시, 너희들 불편하면 나는 갈게.”
“뭔 소리요, 오빠가 가불믄 저년, 아니 저 가시나가 뭔 히스테리 부릴지 모른디.”
“너희들 오랜만에 만나는 거 같은데 미안해서.”
“호호, 옛날에 비하믄 오빠호감도가 떨어지긴 했는디, 아직까정은 괜찮해라우.”
“정이야, 이번 광고는 뽀샤시하니 이쁘게 나왔드라?”
“요즘 여학생잡지는 다 그래, 사진보정을 많이 하거든.”
“다음 연속극은 언제 나온대?”
“내년 봄쯤 촬영 들어가.”
“이번에는 주연이냐?”
“아니, 조연도 감지덕지다야.”
채정이와 친구들이 연예계활동을 소재로 회포를 푸는 사이, 문승협은 잠자코 있었다. 여고생들의 학교생활 등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다 화장과 옷차림으로 넘어갔다. 채정이가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는 문승협을 이따금씩 살폈다. 최근 유행 뷰티와 패션은 여고생들에게 최대관심사였고, 한 시간가량 계속됐다. 채정이가 미안해서 문승협손을 슬며시 잡았다. 순간 조여주시선이 빙긋 웃는 두 사람에게 꽂혔다.
“정이야, 몰래 연애는 하냐?”
“아야, 연예인이 연애하다 들키믄 으짤라고?”
“긍께 몰래라고 묻잖애?”
“서울에 멋있고 잘생긴 남자는 엄청 많은데, 하나같이 내 맘에 차지 않더라.”
“근디, 으째 그 말하믄서 승협이 오빠를 쳐다보냐?”
“니 혹시, 승협이 오빠한테 미련 있는 거 아니어?”
채정이가 거듭된 친구들 질문에 당황하였다. 때마침 김부일과 채영이가 올라왔다.
“우리 밥묵고 당구장 간다잉, 승협이 니도 올라믄 와, 저그 대각선 건물 3층이여.”
“부일아, 당구장은 느그 남자들끼리 가그라, 난 여그서 정이랑 승협이랑 놀란께.”
“뭔 소리까, 서방 가는디 각시가 따라가야제?”
“니가 바늘인지는 몰라도, 나는 실이 아니어.”
“아따 같이 가자.”
“당구장에 담배냄새 풀풀 나고 다 남자인디, 나 혼자 거그 앉아있기 싫단께?”
“알았어, 그라믄 이따가 봐.”
김부일이 나가고, 채영이가 언제 화냈냐는 듯 환한 표정으로 문승협건너편에 앉았다.
“참, 오빠 배 안 고파?”
“응 괜찮아, 빵 먹었잖아.”
“느그들 뭔 야그하고 있었냐?”
“언니, 정이가 승협이 오빠한테 미련 있는 갑소.”
“잉, 내 동생 정이가 이쁘긴 한디 미련하긴 해.”
“그라믄 단도직입적으로다가 물어봅시다.”
“아야, 니는 당사자도 아니믄서 으째 니가 설치냐?”
“정이 친군께 그라제. 오빠랑 정난희랑 헤어졌다는 소문이 있던디, 맞소?”
“…….”
“으째 말을 안 하요?”
“내가 왜 대답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따 모양새가 거시기 하그만잉.”
“뭔 모양새야?”
“딱 그러잖애, 사귀던 여자한테 차이고, 꼭 옛날 여자 찾아온 거 멩키로.”
“야 공현정, 말이 심하잖아.”
“아그들아, 이 언니가 화장품 하고 옷을 사야 한디, 같이 가서 좀 봐주라.”
“예?”
“느그들 언능 인나. 우리는 잠시 요 앞에 옷 가게랑 화장품가게 좀 갔다 오께.”
채영이가 조여주와 공현정을 억지로 데려갔다. 채정이와 문승협 둘만 남았다.
“저기 오빠, 실은 영이언니한테 이야기 들었어, 정난희언니랑 헤어졌다고.”
“그랬구나. 그래 맞아, 나 난희랑 헤어졌어.”
“미안해, 이러려고 그런 건 아닌데.”
“아니야, 괜찮아, 다 사실인데 뭐.”
“나 거의 1년 만에 목포 온 거야.”
“그래, 네 소식은 부일이 통해서 들었어.”
“아까 학교이야기할 때 들었는데, 오빠 서울로 대학 가면 우리 서울서 자주 볼까?”
“정이야, 나도 염치는 있어야지.”
“우리 사이에 그런 염치가 왜 필요해, 그리고, 그냥 시간 날 때 만나는 건데 뭘.”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아.”
“오빠도 내가 싫지 않으니까 지금 나랑 있는 거 아냐?”
“…….”
“정난희언니와 헤어졌다고 절대 내 눈치 볼 필요 없어.”
“그럼 내가 난희를 깨끗이 잊고, 너도 남자친구 없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자.”
“알았어, 그러자.”
채정이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서울생활 중 재밌었던 일화들을 꺼냈다. 30분쯤 지나 채영이가 쇼핑백 하나를 흔들며 동생친구들과 왔다. 자리에 앉으면서 은근슬쩍 문승협과 채정이를 살폈다. 조여주와 공현정도 어찌 결론 났는지 알고 싶은 건 마찬가지였다. 채정이가 언니와 친구들의 시선을 느꼈다.
“뭐야, 무슨 표정들이 그래?”
“몰라서 묻냐, 안 궁금한 것이 더 이상한 거 아니어?”
“왜 이렇게 남의 연애사에 관심들이 많으실까, 우리 그냥 내버려 두세요 좀.”
“뭣이여? 니 시방 우리라고 했냐?”
“말꼬리 그만 잡아라잉, 내 동생이 잘 알아서 할 것인께, 걱정들 꽉 붙들어 매.”
“아따 언니는 동생을 너무 모르요.”
“시끄러 그만해, 내가 동생은 몰라도 승협이는 믿은께.”
“호호, 언니, 그래도 그 말은 좀 서운한데?”
“니도 그 입 다물어라잉, 나랑 통화 때마다 승협이 으짠지 물어본 것이 누군디?”
채영이 말에 모두 놀란 눈으로 채정이를 쳐다봤다. 문승협이 머뭇머뭇 수습에 들어갔다.
“괜히 나 때문에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한데, 너희들이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진짜지라, 만약에 정이 울리믄 가만 안 있소잉?”
“그래, 믿어도 돼. 맞지 정이야?”
“예, 맞습니다 맞고요. 여러분들은 신경 끓으시고, 그냥 우리 둘한테 맡겨두쑈.”
“하기사, 정이가 승협이 오빠 쳐다볼 때 보믄 알제.”
“내가 뭐 어쨌는데?”
“니는 꼭 말을 해야 아냐. 사람눈에서 그러코롬 꿀이 떨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단께.”
“호호호,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정이야, 이제 친구들하고 놀아라.”
“왜, 가려고?”
“친구들에게도 시간을 줘야지, 나한테 계속 질투하던데. 우린 나중에 또 연락하자.”
“언제?”
“음, 대학원서 쓰러 서울 가면서 전화할게.”
“그게 언젠데?”
“다음 달 5일부터 시작해서 12일에 마감이니까, 그쯤.”
“꼭 연락해야 해, 알았지?”
“응, 조심이 올라가고, 잘 지내.”
“응, 오빠.”
“오메오메 으짜쓰까잉, 아조 눈꼴시려서 못 보겄네. 응, 오빠, 오매 간사스런 거.”
“호호호, 연설한다 진짜.”
“영이야, 나는 당구장 가서 부일이랑 친구들 만나보고 갈게, 다음에 보자.”
“응, 오빠. 호호호, 으짜냐, 정이랑 비슷하냐?”
“언니, 언니까지 왜 그래 진짜.”
채영이가 사슴눈빛으로 채정이를 흉내 내 모두 웃었다. 조여주와 공현정이 자리에서 일어난 문승협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시종일관 걱정한 태도와 딴판이었다.
문승협이 당구장을 들어가니, 낯익은 후배들이 인사하였다. 덩치 큰 이정국이 바로 눈에 띄었다. 갬빼이당구를 치던 친구들이 어서 오라며 반겼다. 김부일이 곧 끝난다고 했다. 문승협은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최신식 큐대·점수대·당구공·당구대, 무제한 음료서비스. 시설과 환경이 변두리당구장과 차원이 달랐다.
“오매 분한 거, 한게임 더해.”
“허허, 승민아, 졌다고 열받지 말어. 승협이도 왔은께, 다 같이 개인전하자.”
“다섯이서 치믄, 시간만 오래 걸리고 재미없는디.”
“그럼 너희 넷이 계속 갬빼이쳐라.”
“니 당구 못 치냐?”
“배우긴 했는데, 너희들하고 같이 칠 정도는 아니야.”
“염병, 큐대만 쓸 줄 알믄 되제, 친구들끼리 치믄서 뭔 실력까지 필요하대?”
“아니 아니야, 그래도 어느 정도는 칠 줄 알아야지, 그냥 너희들 넷이서 쳐.”
“심심할 것인디?”
“저 시끼가 괜히 씨잘데없는 소릴 해갖고.”
“괜찮아, 나는 구경 좀 하다 갈게.”
문승협이 미안해하는 유승민에게 괜찮다며 눈을 찡긋하였다. 넷이 갬빼이를 다시 쳤다. 이정국이 순서를 기다리다 내일 3시에 여기서 만나자고 했다.
문승협은 당구장을 나서면서 김부일의도를 깨달았다. 오늘 약속에 데려온 이유가 채정이 때문이었다. 정난희와 이별을 자신만 숨겼을 뿐, 모두 알고 있어 허탈하였다. 더구나 공식적으로 인정한 꼴이어서, 어떤 나비효과가 나타날지 신경 쓰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도착한 곳은 김일광이 오라던 변두리 당구장이었다. 시내당구장과 비교되어선지 입구부터 풍긴 냄새가 달랐다. 손님들도 뱃사람이나 동네서 껄렁대는 아이들 같았다. 왠지 처음 왔을 때보다 행색이 남루하고 거칠어 보였다. 담배연기로 가득한 당구장 안쪽에 천영기와 이담이 있었다. 김일광의 친구들까지 6명이서 생소한 당구를 쳤다. 검은색당구공이 당구대 한가운데에 올려있고, 빨강노랑파랑하얀색당구공이 널려있었다. 당구대 모퉁이에는 분필로 쓴 숫자 쪽에 화투 몇 장이 엎어져있었다.
“왔냐?”
“응, 아직도 있었네?”
“아직이라니, 인자부터 시작인디.”
“이건 뭐야, 당구대에 무슨 화투야?”
“아야 건들지 마, 건들믄 안 돼.”
“이것이 내가 갈차줬던 당구공 9개로 치는 게임이어.”
김일광이 나인볼규칙을 설명했다. 문승협은 그제야 화투짝역할을 알았다. 친구들이 몇 차례 게임을 하다 저녁을 시켰다. 문승협은 생애 최초 당구장짜장면을 체험하였다. 중국집서 먹는 것과 다른 뭔가 특별한 맛이었다. 자기 순서에서 당구에 집중하고, 다른 사람이 칠 땐 짜장면 먹기에 바쁜 친구들 모습이 신기했다.
두 시간쯤 지나 김종필과 박정희가 약속 있다고 가면서 나인볼을 끝냈다. 김일광이 하수들을 모아 특별교습에 나섰다. 쿠션과 가라꾸 치는 법을 가르치며 직각∙예각∙둔각 등 수학을 들먹였다. 천영기가 잘 이해하지 못해 쫑코를 듣고 울그락불그락하였다. 한 시간쯤 배운 뒤 김일광을 잡겠다며 자존심 걸린 한판을 도전했다. 일방적으로 지자 신경질 부리며 재도전하였다.
“얘들아, 나 갈게, 벌써 11시가 넘었다.”
“야, 어제도 먼저 갔으믄서 오늘도 배신 때린다고?”
“그래, 배신해서 미안해.”
“내일은 아?”
“내일 오후에 김부일이랑 만나기로 했어.”
“그라믄 진짜 배신인디?”
“내일도 여기 들릴까?”
“그러시든가 마시든가, 댁 맘대로 하쑈, 우리는 인자 배신자하고 안 놀라요.”
“하하, 삐치기는. 간다, 내일 봐.”
문승협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었지만, 계속된 야행성활동에 무척 피곤했다. 집에 들어가 씻지도 않고 뻗어버렸다. 12시간가량 다음날 점심까지 죽은 듯하였다. 눈을 비비고 일어났을 땐 아무도 없었다. 입이 꺼끌꺼끌해 라면을 끓여 먹었다.
일요일 시내당구장은 어른들보다 또래학생들이 많았다. 김부일과 이정국이 4구 게임 중인 가운데, 이달순은 게임돌이를 보았다.
“승민이는?”
“그 시끼는 어제 밤일해서 퍼질러 잘 것이다.”
“밤무대?”
“잉, 딴따라 한다고 새벽까지 고생하드라.”
“승협이 왔은께 다 같이 갬빼이 치까?”
“승협이는 당구 몇이냐?”
“80치라던데?”
“언제 배웠는디?”
“3일 됐나, 엊그젠가 그래.”
“푸하하하, 예끼 시끼, 니 홀려 묵을라고 한 말이어.”
“배운 지 3일 됐는디, 80치는 놈이 세상에 어딨다냐?”
“그라믄 일단 50 놓고 쳐, 친 것보고 또 정하믄 되제.”
“부일이랑 달순이가 120씩인께 둘이 편묵고, 내가 150인께 승협이랑 한편 하께.”
“그라믄, 240점 대 200점. 24개 대 20개, 딱 좋네.”
“그냥 치믄 심심한께, 뭐라도 내기해야제?”
“당구비 내기하자.”
“쿠션 둘 가락 하나?”
“당연하제.”
“그게 무슨 뜻이야?”
“아, 알다마를 다치고, 쓰리쿠션 두 개랑 가라꾸 한 개를 쳐야 이긴다는 말이어.”
“어이, 제일하수, 승협이 니부터 쳐.”
문승협이 큐대에 초크를 묻혔다. 이달순이 백구를 들어내 쉽게 치도록 하수를 배려했다. 문승협은 적구좌측 3분의 2쯤 겨냥하여 백구우측당점을 큐대로 밀었다. 힘차게 출발한 백구가 적구좌측을 때리고 쿠션을 돌아 또 다른 적구를 맞췄다. 초구 우라마와시가 적중하였다. 연거푸 두 번을 더해 3점을 쳤다. 같은 편 이정국은 놀라면서도 좋아라 했으나, 상대편 김부일과 이달순은 어이없었다. 문승협이 네 번째 차례 만에 7점을 보태 4구를 끝냈다. 다시 돌아온 순서에서 쓰리쿠션 두 개 중 남은 한 개를 마무리하였다. 마지막 가라꾸를 이정국이 알려준 대로 히까끼를 걸어 이겼다. 김부일과 이달순은 절반을 남긴 상태라 얼빠진 사람처럼 서로 바라봤다. 이달순이 뒤통수를 맞았다며 80점을 놓으라 했다.
240점 대 230점으로 재개하였다. 김부일팀이 먼저 쓰리쿠션에 들어가 한 개를 쳤다. 뒤이어 문승협팀이 한 개를 따라잡았다. 막상막하 긴장된 순간, 이달순이 남은 쓰리쿠션과 가라꾸를 연달아 성공하여 승리했다.
김부일이 지금까지 탐색전이었다며 짜장면 내기 3판 2승을 제안하였다. 첫 게임은 이정국활약으로 싱겁게 이겼다. 둘째 게임을 시작하는데 짜장면이 배달됐다. 문승협은 당구 치랴 짜장면 비비랴 눈코 뜰 새 없었다. 어제 구경하면서 먹던 맛과 비슷했지만, 조급한 마음에 체할 것 같았다. 양 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4구를 마쳐 팽팽하였다. 이정국이 쓰리쿠션을 연달아 치는 바람에 유리했다. 김부일도 심기일전하며 따라잡았다. 문승협순서에 이정국이 빵꾸가라꾸를 강하게 치라고 훈수 뒀다. 냅다 지른 백구가 첫 번째 적구와 당구대 사이 구멍을 통과하여 두 번째 적구를 비켜나 한 바퀴 돌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첫 번째 적구와 부딪히더니 두 번째 적구를 살짝 스쳤다. 갬빼이 두 게임을 잘 치면 한 시간 걸리는데 40분 만에 끝나버렸다.
“나이스.”
“뭐여, 이거 사기 아니어?”
“이씨, 후루쿠로 이기냐?”
“아야, 쫑도 뽀록도 실력이여.”
“끝난 거야?”
“잉, 우리가 뽀록쿠로 이겨부렀어, 허허허.”
“야, 너희들 당구 언제부터 친 거야?”
“고2 때부터 쳤다, 왜?”
“하하, 당구 별거 아니네?”
“아까 당구비 내기는 승부가 안 났은께, 짜장면값이랑 똘똘말이 단판 으짜냐?”
“으짜스까, 시간이 협조 안 한다야, 나 기차시간 됐어.”
“오늘 우리 팀이 이겼으니까, 당구비는 내가 낼게.”
“아야, 짜장면값보다 당구비가 더 비싸야.”
“괜찮아, 이겼는데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야지.”
“허허허, 승자의 아량, 우리 승협이 멋져부러.”
이정국이 광주집에 가야 해서 7시 조금 넘어 당구장을 나왔다. 만나서 특별한 대화 없이 당구만 쳤으나, 함께 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우정이 쌓였다. 셋이 목포역까지 이정국을 배웅하였다. 대학입학원서가 마무리되면 뭉치기로 하고 헤어졌다.
문승협은 집 쪽으로 걸었다. 어제와 오늘 자리를 만들어준 김부일과 채영이에게 감사했다. 채정이와 그 친구들 그리고 이정국까지 모두 고마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