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3부 6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66)

by 태양을 품은 별

문교부가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매큔-라이샤워표기법을 수정한 한국어로마자표기법개정안을 확정하였다. 일반국민들은 일상과 밀접함에도 명확히 인식하지 못다. 1939년이래 외국서 가장 널리 쓰였고, 영어기록 한국학 관련자료 대부분이 매큔-라이샤워표기법으로 작성됐기에 숙지가 필수였다. 미래를 내다본 새로운 규범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공용표준이었다.


대입학력고사성적발표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3학년교실이 여느 때보다 숙연하였다. 오전정규수업시간에 진학진로상담을 했다. 1교시 전기대학, 2교시 후기대학, 3교시 전문대, 4교시 취업반. 선생들 편의로 배정하였지만, 몇 교시 상담이냐에 따라 친구들 앞에서 공공연히 구분당하는 굴욕을 맛보았다.

3반 학생 중 20명가량이 대학지원예정이었다. 나머지 40여 명은 자의든 타의든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문승협은 생각보다 많아 깜짝 놀랐다. 담임선생이 상담을 마치고 전후기대학합격에 8명 정도 예상하였다. 전문대는 지원자가 몰리지 않는 이상 웬만해선 합격한다며, 적극적인 원서제출을 독려했다.

5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 김영후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작년도 전국대학교합격커트라인자료를 펼쳤다. 전후기대학지원예정자들이 몰려들어 정보 구하기에 바쁜 반면, 나머지 50여 명은 본체만체하였다.

문승협이 방과 후 습관처럼 독서실에 들렀다. 천영기와 이담은 없고, 취업준비생으로 보인 2명만 있어 씁쓸히 나왔다. 혹시나 해서 변두리당구장을 찾아갔다. 역시나 친구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갈 곳 잃어 착잡한 와중에 교훈을 얻었다. 친구들과 헤어질 때 다음 만남을 약속하지 않으면 찾아 헤맨다. 집에 가기 싫었으나 별수 없었다. 모처럼 일찍 들어가자는 심정으로 무심코 천영기집을 거쳤다. 인쇄소문을 여니 뜻밖에 이담이 혼자 만화를 보고 있었다. 친구 찾아 삼만리를 실감한 나머지 너무 반가웠다.

“담이야, 여기서 혼자 뭐 해?”

“음마, 배신자가 나타나셨네?”

“와, 너희들 한참 찾아다녔어.”

“어디 갔었는디?”

“독서실 하고 당구장.”

“독서실은 뭐 한다고, 거그 졸업한 지가 언젠디.”

“영기는?”

“백미정이 만나러 갔어, 곰방 올 것이다.”

“뭐 보는 거야?”

“보물섬이라는 건디, 아기공룡둘리가 여간 재밌다야.”

“아이들 잡지 아냐?”

“잉, 영기조카들이 보는 거여.”

작년 10월 육영재단이 발행한 만화잡지‘보물섬’이었다. 지난 4월부터 ‘김수정의 아기공룡둘리’가 연재됐다. 초기엔 그다지 인기 끌지 못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의 소시민‘고길동’ 집에 갑자기 군식구가 생겼다. 빙하시대 냉동된 아기공룡‘둘리’와 타임코스모스고장으로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도우너’, 서커스단에서 탈출한 타조‘또치’등의 일상을 코믹하게 그려내면서 입소문 탔다.

잠시 후, 천영기가 만화를 한 아름 안고 들어오며 문승협을 힐끔 째려보았다.

“으째서 우리 집에 배신자가 들락거리까?”

“하하, 아직도 삐쳤냐?”

“배신자께선 뭔 일로 우리 집에 오셨소?”

“그냥 집에 들어가려다 들러본 거야.”

“영기야, 저 시끼 독서실하고 당구장까정 들러서 왔단다야, 불쌍한께 봐줘라.”

“내가 맘이 허벌라게 넓어갖고, 아무리 배신자여도 우리 집서는 안 쫓아낸다잉?”

“미안해, 그럴 일이 있었어.”

“그래, 그럴만한 일이긴 하드라.”

“뭐야, 네가 어떻게 알아?”

“니는 여그 목포서 원투데이 사냐? 하루 지나믄 동네방네 모르는 사람이 없어. 채영이동생 채정이랑 만나고, 이정국하고 당구 쳤제? 다 내 손바닥 위여.”

“와 무섭다, 너 나 미행 붙였냐?”

“잉, 내가 안기부목포지부 아그들 쪼까 풀었다.”

문승협은 속이려 엄두도 못 냈다. 소문이 금세 퍼진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이야.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였는지 빠삭해 놀랐다.

“근디, 뭣 땀시 채정이를 만났냐?”

“김부일이 가자고 해서 따라갔더니, 채정이가 있더라.”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그냥 그랬다고.”

“어이 친구, 나는 자네가 채정이하고 다시 잘해보는 거에 무조건 찬성일세.”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안이고 껍딱이건 간에, 니도 곧 서울로 갈 것인디, 객지서 둘이 만나믄 좋잖애.”

“나는 현진이 친구가 괜찮드만. 아야 승협아, 유은정이를 한번 꼬셔보란께?”

“둘 중에도 아니믄, 내가 미팅시켜주까?”

“미팅 같은 소리 한다, 난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

“염병, 다들 대입학력고사 끝났다고, 미팅 소개팅 고고팅 한다믄서 난리법석이어.”

“에휴, 저는 됐습니다요 영기씨. 그나저나, 영기씨하고 담이씨는 어제 뭐 했소?”

“뭐 하긴 뭐 해야, 일광이네 아그들이랑 카드 돌리고 당구도 치믄서 놀았제.”

“그래도 다행이다, 심야포르노보단 건전한 거 같아서.”

“말 나온 김에 오늘 심야다방포르노나 한편 때리까?”

“야 시끄러, 그 빌려온 만화나 줘봐.”

천영기가 ‘이현세작 공포의 외인구단’과 ‘박봉성작 신의 아들’을 양손 가득 건넸다. 문승협이 대입시험공부 때문에 보다만 만화책이었다. 6권까지 봤던 공포의 외인구단을 골랐다. 배를 깔고 엎드려 7권부터 펼쳤다.

야구천재‘까치 오혜성’이 투수로 성공가도를 달리다 치명적 부상을 입고 좌절했다. 세상에서 소외받은 반항아들과 외인구단을 결성하였다. 팀원들과 고통을 감수하며 야구에 대한 불굴의 집념으로 분연히 일어섰다. 문승협의 감성을 자극하는 몇 가지 요소가 있었다. 혹독한 훈련을 통해 타자로 부활한 오혜성과 사회적 약자들의 대변신. 어린 시절부터 짝사랑한 ‘최엄지’와 엇갈린 운명. 라이벌‘마동탁’과의 삼각관계. 비극적이고 맹목적인 첫사랑을 헌신적 사랑으로 승화시킨 대목. 현세에서도 그런 사랑이 존재하길 바란 마음이 감동을 배가시켰다. 자신만큼은 불가능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의지의 사람으로 빙의됐다. 현실과 비현실사이 괴리도 눈물샘을 자극했다. 특히 까치와 엄지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아 애절하였다. 정난희에게 했던 말이 만화에 나왔다. ‘난 상관없어, 네가 좋아하는 거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어’. 친구들 몰래 눈물을 훔쳤다.

15권까지 나온 공포의 외인구단을 다 보고, 박봉성작품 신의 아들을 집어 들었다.

“영기야, 여기 이 만화책들 엄청 인기 많던데, 어떻게 전부 다 빌려왔어?”

“내가 빽이 쎄잖애, 이 엉아의 능력이다.”

“만화방을 찾는 손님들이 무자게 찾을 텐디?”

“오늘 날밤 까믄서 보고, 낼아침에 갖다 주기로 했제.”

“와, 나는 16권부터 108권까지 언제 다보냐.”

신의 아들은 108권까지 전편출간됐다. 문승협이 봐야 할 만화만도 93권이었다.

권투스포츠와 재벌기업을 그린 만화였다. 삶과 죽음, 도전과 용기, 처절한 복수. 종국적으로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이었다. 주인공 최강타는 고아원출신 비운의 시한부복서였다. 신장과 두 눈을 기증받고, 기증자동생의 간호 속에 기적처럼 살아났다. 삶의 기반을 무너트린 악덕기업주에게 복수는 통쾌하였으나, 이식부작용으로 사랑하는 여인 진보배와의 죽음은 허탈했다. 모두 이뤘지만 아무것도 갖지 못한 인생무상자체였다.

천영기의 형수가 새벽녘에 라면을 끓여줬다. 셋이 맛있게 먹고 곧장 만화책에 빠졌다. 형광등 불빛아래 밤새워 만화 보는 모습이 형설지공이었다. 반딧불과 눈에 반사된 달빛으로 글을 읽는다는 고사성어와 흡사하였다. 몽롱한 정신에 아침을 맞이했다.

문승협은 친구집서 첫 외박을 경험하였다. 부모에게 허락받지 않고 무단외박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잠은 집에서 잤었다. 물론 집에선 관심밖이었다.

천영기의 형수가 아침상을 차렸다. 셋은 감지덕지 먹고 각자 학교로 출발하였다.

문승협은 등교하면서 기분이 묘했다. 잠시 외계행성에 다녀온 사람처럼 지구가 낯설었다. 버스승객들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다. 무단외박을 한 자격지심에 죄스러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서울올림픽조직위가 88올림픽공식상징인 휘장과 호랑이그림을 확정하였다. 올림픽개최권을 획득하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이 세상밖으로 흘러나왔다. 뜬금없는 아시안게임반납사건이 언급됐다.

우리나라가 서울아시안게임을 유치했던 직접적 배경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중 일으킨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후 바닥을 쳤다. 아이러니하게도 6.25한국전쟁을 발판 삼아 일어나더니, 1964년 도쿄올림픽을 개최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일본을 바라본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은 억장이 무너졌다. 정부는 일본에 뒤질세라, 충분한 능력과 실력을 가진 나라임을 세계만방에 입증하고 싶었다. 아시안게임유치를 통하여 ‘가난한 나라, 도움이 절실한 나라’란 인식을 불식시키려 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66년 아시아경기연맹총회에서 서울이 1970년 개최도시로 선정됐다. 국가로서 큰 기회였으나, 정부·서울시·체육단체간생각이 달랐다. 당시 서울시는 고가도로와 아파트건축·세운상가건설과 여의도확장·지하철공사가 숙제였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150달러도 안되어 아시안게임을 개최하기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최악의 경우 서울시가 파산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하필 1968년 1월 ‘김신조사건’이 터졌다. 북한특수요원들의 청와대습격으로 안보가 흔들렸다. 결국 벌금을 감수하며 아시안게임개최권을 반납키로 결정했다. 아시아경기연맹이 급히 일본에 개최를 제안하였지만 거절당했다. 최종 1966년 아시안게임을 치른 방콕이 떠맡았고, 연이어 1970년에도 시행하게 됐다. 재정적자우려에 달가워하지 않았으나, 다른 나라들의 기부금을 받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개막하였다. 방콕입장에선 열불 터지는 일이라, 한국선수들 경기 때마다 야유가 빗발쳤다. 와중에 우리나라성적이 일본에 이어 종합 2위고 태국은 3위였으니, 감정이 좋을 리 만무했다.

아시안게임개최를 반납한 대한민국은 국제적 신뢰를 잃었다. 나쁜 전례가 있는 국가가 올림픽을 유치하기란 불가능하였다. 더욱이 1988년 올림픽개최를 놓고 일본나고야와 경쟁해야 했다. 국가위상과 환경뿐 아니라 준비와 능력도 부족하였지만,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독재정권이 국민이목을 돌리려는 정치적 이유에서 강행했다. 올림픽유치경쟁에 난항은 불 보듯 뻔하였다. 마침내 정주영현대그룹회장을 민간추진위원장으로 위촉하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신의 한 수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이던 정주영은 취임과 동시에 국제경제에서 일본견제론을 설파했다. 개도국인 한국개최당위성을 피력하며 불철주야 세계를 누볐다. 또한 유명인사들을 88서울올림픽유치홍보에 동원하였다. 베를린올림픽영웅 손기정, 한국인최초분데스리거 아인트라흐트프랑크푸르트 차범근, 사마란치 IOC위원장아들의 태권도사범까지 앞장 세웠다. IOC위원들 마음을 사로잡으려 서독소도시 바덴바덴 IOC위원숙소에 매일 꽃을 배달했다. 태극부채 3만 개 배급, 대한항공항공료 40% 할인 등 심혈을 기울였다. 정부노력도 있었으나, 민간외교의 성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불안정한 남북관계와 북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일본나고야를 52대 27로 꺾어 기적적으로 승리했다.

이런저런 비하인드스토리들이 전해지면서, 재작년 1981년 9월 30일 사마란치 IOC위원장선언이 새삼 주목받았다. ‘88 까트라 빌드라 아나빌드 쎄울 꼬레아’.

88서울올림픽개최소식이 전해진 2개월 후, 뉴델리 AGF총회에서 86서울아시안게임개최까지 확정되었다.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2년 간격 연속으로 치르는 경사였다. 어찌 보면 1970년 아시안게임개최권반납이 전화위복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88서울올림픽마스코트 ‘호돌이와 호순이’가 선보인 다음날, 대한민국국민들은 여느 때처럼 삶의 터전으로 출근하였다. 서울시내 모처 삼성그룹기자실에 삼성반도체통신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회견장은 상공부와 과학기술처 출입기자들로 만원이었다.

“무슨 중대발표라도 있나?”

“혹시, 64KB D램 개발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게 6개월 만에 가능하겠어?”

삼성반도체통신사장이 사진기자들의 플래시에 긴장했다. 준비한 발표문을 꺼내 차분하게 읽었다. 모든 사람들이 쥐 죽은 듯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삼성반도체통신은 64KB D램의 제조·조립·검사까지 완전히 자체개발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미국과 일본에 비해 10년 이상 뒤떨어졌던 한국의 반도체기술 수준을 3~4년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지난 8월 초 삼성반도체통신의 국내최초 64KB D램개발시작소식이 사실로 확인된 순간이었다. 대한민국경제발전에 희망으로 떠올랐다. 국민들에겐 장밋빛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크나큰 위안거리였다.

반도체는 구리와 유리 같은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 물질로, 모래의 규소결정에 불순물을 넣어 생산한다. 대부분 증폭장치와 계산장치 등을 구성하는 집적회로를 만드는 데 쓰였다. 미국샌프란시스코 SiliconValley도 반도체소재 규소Silicon 때문에 유래됐다.

삼성의 대규모 반도체투자계획은 올해 2월 8일 ‘도쿄선언’으로 알려졌다. 삼성그룹창업주 이병철회장이 신년사업구상을 위해 묵었던 도쿄오쿠라호텔에서 발표하였지만, 실상은 ‘삼성가 왕자의 난’ 이후 후계자로 지목받은 삼남 이건희가 주도한 사업이었다.

왕자의 난은 1969년 말 이병철회장의 차남이 일으켜 삼성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1966년 사카린밀수사건으로 독박쓰고 감옥에 다녀왔는데도 대우해주지 않아 반기를 들었다. 아버지를 회장자리에서 축출해야 한다는 투서를 박정희대통령에게 보냈다. 청와대는 아들의 아버지비리의혹고발을 패륜이라 여기는 등, 갖가지 정치경제적이유로 모른척했다. 이병철회장이 차남과 연루됐다고 의심받은 장남까지 내쫓아버리면서, 삼남 이건희가 후계자로 급부상하였다.

도쿄선언 한 달 후로 시계를 돌려보면, 이병철회장은 반도체사업을 대내외천명할 만큼 확고했다. 그러나 주변분위기는 기대와 달리 처참하였다. ‘3년 안에 실패할 것이다. TV도 제대로 못 만드는데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재계의 반대여론과 냉소들이 넘쳐났다. 초고밀도집적회로VLSI는커녕 가전제품용 고밀도집적회로LSI를 겨우 만들었으니 당연한 이치였다. 인구 1억 명, GNP 1만 달러 이상 등 여러 조건을 충족해야 가능한 사업이었다. 한국은 반도체사업을 펼칠만한 환경이 아니란 평가가 주류였다.

삼성은 결심이 어려웠지 대규모투자를 속전속결했다. 통상 18개월 이상 걸리는 반도체공장을 6개월 만에 지어버렸다. 첫 번째 메모리제품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D램을 선택하였다. 세계 D램시장의 주력제품인 64KB D램을 5월 착수하여 6개월여 만에 국내최초로 개발했다. 세계 세 번째 반도체생산국가가 된 셈이다. 도쿄오쿠라호텔에서 파산직전‘한국반도체’를 인수해 반도체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할 당시만 해도, 일본과 미국 등 앞선 반도체기업들이 비웃었다. 불과 1년도 채 되지 않아 보기 좋게 역전시켰다.

한국이 다이오드진공관과 트랜지스터를 거치며, 고밀도집적회로를 성장시켜 가는 수준에서, 초고밀도집적회로 64KB D램개발은 불가항력이었다. 고밀도집적회로는 1960년대에 트랜지스터 수백 개가 하나의 칩에 들어갔다. 1970년대엔 수천·수만 개로 도약하였다. 집적도는 기하급수증가해 1980년대에 들어서 백만 개가 넘었다. 30년 후 10년 단위로 수천만·수십억·수백억 개를 예상가능한 상황이었다. 삼성은 이 단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곧바로 초고밀도집적회로생산에 성공한 엄청난 기술발전을 이뤄냈다. 64KB D램은 새끼손가락손톱(2.5×5.7㎜)크기 칩에 머리카락 1/50 정도의 800만 개를 집적한 초정밀제품으로, 15만 개 소자를 넣어 8000자를 기억하는 첨단반도체였다.

세계유수반도체기업이 있었다. 미국의 IBM,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모토로라, 인텔. 유럽의 필립스, 지멘스. 일본의 NEC, 도시바, 히타치. 이들 업체가 세계반도체수요를 독점했다. 삼성이 반도체개발과정을 세 단계(4KB, 16KB, 32KB)나 건너뛰자, 선두업체들이 몹시 당황하였다. 가장 놀란 나라는 한 수 아래로 깔본 일본이었다. 64KB D램생산에 최소 1년 6개월은 걸릴 거라며 무시했지만, 삼성이 3분의 1로 대폭 줄였다. 자체기술이 전무한 상황에서 눈물겨운 기술정보전쟁과 기술습득과정이 있어 가능하였다. 성공기회를 얻은 비결은 삼성가 삼남 이건희의 끊임없는 R&D투자였다. 외발자전거를 타다 멈추면 넘어진다는 말처럼, 반도체사업성패에서 지속적 투자원칙이 중요했다. 반면 일본기업들은 저조한 투자로 소걸음 걷듯 하였다. 그렇다고 삼성반도체사업앞날에 서광만 비치는 것은 아니었다. 반도체수출에 나선 삼성을 견제하려 선두업체들이 반격을 채비했다. 일본은 덤핑공세를 예고하고, 미국은 통상법 301조를 들먹였다. 반도체전쟁의 암운이 감돌며, 반도체가격폭락이 예고됐다. 삼성이 다가올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시험대에 놓였다. 연속적자로 자본잠식되어 경영난에 시달리는 미운오리새끼가 될지, 잘 이겨내서 세계시장을 석권할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삼성반도체사업밑바닥에 이병철회장의 경영철학‘사업보국事業報國’이 있었다. ‘기업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나아가 인류에 공헌하고 봉사한다’는 의미였다. 반도체가 나라의 미래를 바꿀 ‘국리민복國利民福’에 기여할 사업이라고 판단하였다. 사업보국꿈을 실현할 삼성반도체신화의 서막이 열렸다.

삼성반도체통신은 제품개발발표 후, 각 신문 1면 5단에 대대적인 광고를 실었다. ‘미국과 일본에 이은 세계 세 번째 64KB D램 개발성공.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의 기수로서 최첨단미래산업을 통해 선진조국창조의 일익을 담당하겠습니다’. 곧바로 액면가 5,000원짜리 주식이 널뛰었다. 국민들은 삼성그룹만 돈 버는 사업이라며 시큰둥했다. 반도체가 생소한 데다, 당장 일상생활을 좌지우지할 일이 아니어서 무덤덤하였다.

같은 날 ‘일해재단’이 설립되었다. 버마아웅산묘소테러사건의 순직자유자녀를 위한 장학단체였다. 이틀 후 ‘아마농구대제전 점보시리즈’가 처음 개막했다. 대간첩대책본부가 부산다대포에 침투한 무장간첩선을 격침해 2명을 생포하였다고 밝혔다.


또래학생들처럼 문승협도 세상뉴스에 관심 없었다. 여전히 친구들과 노는 것에만 집중했다. 천영기와 이담을 따라 하루가 멀다 당구장을 드나들었다. 항상 친구끼리 게임비내기를 하였는데, 천영기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처음 본 당구손님에게 담배 한 보루를 걸고 갬빼이게임을 하자고 했다. 이담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며 말렸으나 소귀에 경 읽기였다. 배운 지 얼마 안 된 당구 80점들의 객기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이겼다. 덕분에 딴 담배를 당구장카운터에서 돈으로 교환하는 지혜까지 터득하였다. 천영기가 의기양양해서 시내당구장진출을 선언했다.

날씨가 끄물끄물한 일요일, 문승협은 별로 내키지 않은데도 이담에게 끌려갔다.

“어, 은정이도 있네?”

“나는 니 오는지 알았는디, 니는 몰랐는갑다잉?”

“응, 담이가 현진이 만나러 같이 가자고 졸라서 왔어. 나는 볼링장에 처음이야.”

“승협아, 다 은정이 덕인줄 알아라.”

“현진이랑 담이는 와봤어?”

“잉, 이번이 세 번째여.”

“난 볼링 못 치는데.”

“내가 갈쳐주께, 걱정 붙들어 매.”

“은정이 넌 언제 배웠어?”

“한 일 년 됐는디, 우리 아빠랑 다녔제.”

대화를 나누는 사이 1,2번 레인에 자리가 났다. 모두 유은정을 뒤따라 프런트로 갔다.

“신발은 몇 신냐?”

“250.”

“키도 큰 것이, 뭔 남자가 발이 그렇게 작대?”

“내발이 작은지 어떻게 알아, 혹시 전 남자친구?”

“뭔 소리여, 나 남자친구 사귄 적 없단께는.”

“아참 그랬지, 그럼 어떻게 알아?”

“내발이 245고, 우리 아빠가 275거든.”

유은정이 문승협에게 볼링화를 빌려주고, 볼링공들이 놓여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이담과 한현진은 와본 경험이 있어 각자 볼링칠 준비를 하였다.

“여그서 골라, 머시마들은 14에서 15파운드 쓰드라.”

“와, 무겁다.”

“13파운드로 하든가, 12파운드를 해도 되고, 치다가 거시기하믄 바꿔도 된께.”

“그럼 12파운드로 한번 써볼게.”

“손가락이 거그 구멍에 꽉 끼고 헐렁하믄 안 된다잉. 공이 안 빠지거나 놓쳐부러.”

“볼링공 고르기도 쉽지 않구나. 넌 몇 파운드야?”

“난 여잔께 8파운드여. 가자, 저그 1번 레인으로.”

유은정이 친절하게 볼링공을 골라주고 앞장섰다.

“은정아, 저번엔 10파운드 쓰드만, 으째 8파운드대?”

“이번에는 쪼께 가벼운 공으로 칠라고.”

“승협이한테 니 몸무게 들킬까 비 그런 건 아니고?”

“가시나, 뭔 소리하냐?”

“호호, 니 얼굴 빨개졌다야.”

“몸무게라니?”

“보통 볼링공 고를 때 자기 몸무게랑 맞춘다드라.”

“니는 으째 9파운드냐, 니 몸무게믄 11파운든디?”

“볼링공이 8파운드면, 몸무게가 어떻게 되는데?”

“35에서 40킬로 정도여.”

“11파운드는?”

“아따 가깝시럽게 뭐 한디 자꾸 묻냐?”

“아마 55에서 60킬로는 될 것이다.”

“아니어, 50에서 55킬로여.”

“현진아, 이러다가 우리 둘 다 망한다잉, 우리 그만 떠들고 볼링이나 치끄나?”

한현진과 이담이 2번 레인에서 몸풀기하는 동안, 유은정은 1번 레인에서 문승협에게 볼링을 가르쳤다. 볼링이 막 보급된 시기라 일요일인데도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문승협이 볼링의 파지법과 스텝을 배우며 어느 정도 공을 굴리자, 넷이서 연습경기를 했다.

한현진이 한게임 마치고 커플경기를 제안하였다. 이담이 한수 더 떠 볼링비와 볼링화대여료내기를 걸었다. 문승협은 초보인 데다 갖은 돈이 얼마 없어 내심 꺼렸지만, 유은정이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다. 1년 이상 볼링을 친 유은정을 빼곤 애버리지가 무의미했다. 유은정 100점, 문승협 60점, 이담과 한현진이 80점씩. 핸디캡을 고려해 각각 160점을 목표로 게임이 성사됐다.

문승협이 배운 것을 상기하며 출발선에 섰다. 볼링공에 오른손중지약지엄지를 넣고 왼손으로 받쳐 들었다. 포스텝을 밟으며 앨리에 표시된 세 번째 점으로 굴렸다. 볼링공이 1,3번 핀을 향해 돌진하였다. 경쾌한 소리가 났으나 7번 핀이 남았다. 두 번째 시도에서 왼쪽가장자리홈에 빠트려 9점을 획득했다. 이담이 또랑에 빠졌다고 놀렸다. 유은정은 처음치곤 잘한 거라며 손뼉을 쳤다. 문승협을 북돋으려 파이팅 하였다. 이담이 2번 레인에서 스페어처리하고 앞서갔다. 유은정이 조금 떨린다며 볼링공을 집어 들었다. 긴장한 탓에 2,8번 핀을 남겼고 스페어도 놓쳤다. 문승협이 아쉬움에 코를 찡긋하며 박수로 응원했다. 한현진차례가 되었다.

“승협아, 담이가 또랑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시궁창이라고도 한디, 원래 용어는 아니어.”

“그럼 뭐라고 해?”

“거터, 거터라고 해.”

유은정이 양쪽가장자리홈명칭을 알려주며 다정히 대하였다. 때마침 한현진이 오른쪽홈에 빠트렸다. 문승협이 거터에 빠졌다고 하니, 유은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문승협순서에서 야심 차게 볼링공을 굴렸다. 양쪽 끝 7,10번 핀이 남아 최악이었다. 유은정이 둘 다 맞추는 건 불가능하다며, 하나만 겨냥하라고 했다. 문승협이 신중히 7번 핀을 겨눴지만 한가운데로 굴러갔다. 이담과 한현진이 좋아하며 낄낄거렸다. 문승협은 겸연쩍게 내려오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응징하였다. 유은정이 괜찮다며 하이파이브로 맞아주었다.

“방금멩키로 송곳니 같이 양쪽 끝 7번과 10번 핀이 남은 것을 스네이크아이라고 해.”

“스네이크아이? 생각해 보니 모양이 진짜 뱀눈 같다.”

이담이 비교적 쉬운 1,3,6번 스페어처리에 나섰다. 하필 거터에 빠지면서 실패했다. 유은정과 문승협이 터져 나온 웃음을 억지로 참는 시늉을 하며 복수하였다. 아까 전 놀리고 비웃은 대가였다. 유은정이 연달아 스트라이크와 스페어를 처리하여 역전했다.

문승협은 유은정이 멋있어 보였다. 볼링 치는 자태에 자꾸 눈이 갔다. 청치마를 무릎 위 한 뼘쯤 짧게 입은 날씬한 다리. 볼링스텝을 밝으며 살짝살짝 흔드는 엉덩이. 볼링공을 던지는 슬라이드동작에서 드러난 허벅지. 쓰러진 볼링핀을 확인하고 돌아선 유은정과 마주할 때는 움찔하였다. 나쁜 짓을 숨기려 박수와 파이팅을 과장되게 했으나, 하이파이브하면서 느낌이 야릇하였다. 음란마귀를 쫓으려다 보니 시선이 부자연스러웠다. 이담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승협아, 은덩이랑 한번 사귀어봐, 키 크고 몸매 잘빠졌고 얼굴도 이쁘드만’. 혹시라도 속마음을 들킬까 볼링에 집중하려 애썼다.

어느덧 마지막 10프레임에 이르렀다. 문승협이 스플릿 된 3,10번 핀을 커버하지 못해 한번 더 던질 찬스를 놓쳤다. 한현진이 기막힌 스페어처리로 세 번째 기회를 얻었다. 8점 앞선 문승협유은정팀을 이기려면 9점 이상이 필요하였다. 볼링공이 느릿느릿 5번 킹핀을 향해 굴렀다. 볼링핀을 하나 둘 슬렁슬렁 쓰러트렸다. 맨 나중 9,10번 핀이 비틀거리다 극적으로 넘어졌다.

“이야호, 이겼다, 우리 한현진 멋져부러.”

“은정아, 미안해서 으짜스까, 내가 운이 좋다야.”

“아야, 운도 실력이어. 우리가 져부렀다, 인정.”

“와 대단하다, 그걸 스트라이크 치다니, 승리 축하해.”

“다 승협이 니 덕분이여, 고맙다잉.”

“하하, 그러게 말이야, 내가 거터에 한 번만 덜 빠트렸으면 우리가 이겼을 텐데.”

“아니어, 내가 쬐깐 쫄아갖고 졌어, 니 탓이 아니어.”

“아따, 느그 보기 좋다잉.”

“긍께, 우리 같으믄 서로 니 땜시 졌다고 할 것인디.”

“으째, 아쉬우믄 한판 더 붙으까?”

“좋아, 이번에는 저녁내기 하끄나?”

“은정아, 우리가 이긴 마당에 우째 거절하겄냐, 까짓것 원하는 대로 다 받아주께.”

“와따 현진이 니, 한번 이겼다고 무자게 유세 떤다잉.”

문승협은 2점 차로 져서 거터에 빠트린 몇 차례 실수를 아쉬워했다. 극구 자기 책임으로 돌린 유은정을 다시 봤다. 일반적인 여자들과 뭔가 달랐다.

한현진과 유은정 합의로 경기를 재개하였다. 이번에도 문승협이 볼링공을 거터에 두 번 빠트려서 졌다. 이담과 한현진이 기세등등한 반면 문승협은 한풀 꺾였다.

“나 웬만한 운동은 다 잘하는 편인데, 좀 아쉽다.”

“아니어 승협아, 처음치고는 허벌나게 잘한 거여.”

“그라제, 그렇게라도 서로 위로해야제 으짜겄냐?”

“오늘 이쁜 현진이 입이 쪼까 거시기하다잉?”

“음마, 우리 이쁜 은정이가 으째 뿔따구 났으까?”

“아야, 나한텐 뭐라 해도 암시랑 안 한디, 승협이 야코죽이믄 내가 가만 못 있제.”

“승협이가 니 애인이라도 되냐, 뭐 한다고 싸고도까?”

“애인만 그란대,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여.”

“호호호, 애인하고 남자친구하고 똑같은 거 아니어?”

“틀리제, 애인은 사랑하는 남자고, 남자친구는 친한 남자사람친구란다 아그야.”

“왐마, 살다 살다 그런 말은 첨 들어본다야. 그냥 애인해, 뭔 남자랑 여자랑 친구여.”

“어허, 언어적 해석에 감정을 대입하믄 곤란하제.”

유은정과 한현진이 볼링화를 반납하면서 옥신각신했다. 문승협이 이담과 볼링공을 가져다 놓으며 대화를 들었다. 난생처음 편이 생긴듯하고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유은정을 힐끗 바라봤다. 깊은 배려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면이 있었다. 남자사람친구든 애인이든 문승협이 처음이라던 유은정말이 기억났다.

볼링화끈을 풀다 빈약한 지갑사정이 생각났다. 프런트에서 볼링비용을 정산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볼링화를 반납하고 화장실로 갔다. 돈이 부족하면 유은정과 나눠내자고 해야 할지 고민됐다. 마침 따라 들어온 이담에게 빌려달라 하였다. 다행히 군말 없이 줬다.

화장실을 나와 곧장 프런트로 가 얼마냐고 물었다. 이미 지불됐다는 대답에 당황했다. 재차 확인하려는데, 유은정이 다가와 살며시 팔을 끌었다.

“내가 계산했어.”

“왜, 왜 네가 내?”

“우리 둘이 같은 편이잖애, 운명공동체인디 니가 내든 내가 내든 상관없잖애?”

“아 아냐, 그래도 그건 아니지.”

“혹시, 자존심 상한 것은 아니제?”

“기분이 이상해, 여자에게 돈 내도록 한 적이 없어서.”

“기분상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잉, 니한테 돈 주믄 안 받을 거 같아서 그랬어.”

“내가 줄게, 전부 얼마야?”

“아따, 꼭 그래야 쓰겄냐?”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

“정 그러믄, 이따 저녁을 니가 사, 그라믄 되잖애.”

“뭐? 그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우리 아빠가 애인이랑 있을 때, 나보고 직접 돈 내지 마라드만, 니도 그런 주의냐?”

“그게 무슨 말이야?”

“남자들이 자존심 상해한다고, 몰래 남자한테 줘서 남자가 계산하게 하라드라?”

“꼭 그런 건 아닌데,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니도 공감한다는 말이어?”

“공감이라기보단 그런 상황이 이해된다고.”

“알았어, 다음부턴 몰래 니한테 주께, 그라믄 되제?”

“왜 나한테 줘, 내가 너 애인도 아닌데.”

“아 맞다, 자 잠깐 착각했어.”

유은정이 무안해서 도망치듯 한현진 옆으로 갔다. 두어 걸음 걷다 휙 돌아보더니 메롱하였다. 문승협은 귀여워 피식 웃었다. 이담이 먼발치서 문승협을 기다렸다. 한현진과 유은정이 이야기 나누며 앞장섰다. 씩씩하게 돌진한 식당은 경양식집이었다.

주문한 돈가스와 햄버거스테이크가 나왔다. 문승협이 유은정접시를 가져다 먹기 좋게 잘라 줬다. 이담도 따라 했다. 한현진과 유은정은 마주 보며 흡족해하였다. 소소한 이야기로 식사하는 중에 한현진이 들락거렸다. 후식디저트가 비워질 즈음, 클래식음악이 멈추고 안내방송이 나왔다. ‘한현진씨, 프런트에 전화 왔네요’. 한현진이 전화받으러 갔다 금방 돌아왔다. 다짜고짜 이담에게 가자고 재촉했다. 놀란 유은정이 영문을 물어도 소지품 챙기기에 바빴다.

“우리 급작스런 일이 생겨 갖고 먼저 갈란께, 둘이 좋은 시간 보내다 가라잉?”

“무슨 일이야, 나쁜 일이야?”

“자초지종은 나중에 야그해주께, 우리 일은 신경 끓고, 느그 둘이서 즐겁게 보내.”

“아야, 뭔 일인지도 모른디 우리가 즐겁겄냐?”

“은정아, 나중에 연락하께잉. 승협아, 먼저 간다.”

문승협과 유은정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어안이 벙벙하였다. 친구에게 급한 일이 생겼다는데, 둘이 태평스레 시간 갖기에도 무척 어색했다. 서먹하게 5분쯤 멀뚱멀뚱 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어났다. 문승협이 프런트에 가니, 먼저 간 한현진이 계산하였다고 했다. 문승협은 이래저래 어리둥절하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다잉, 볼링비를 우리가 냈다고, 저녁식사값은 즈그들이 냈는갑다.”

“걔들은 내기해 놓고 그러냐, 그것도 약속인데.”

“니 돈 안 쓰고 잘됐그만 그냐?”

“나는 이런 게 좀 부담스럽고 불편하더라?”

“왜, 뭣 땀시?”

“딱 꼬집어 말할 순 없는데, 아무튼 기분이 좀 그래.”

“별 걸 다 그런다, 다음에 니가 사믄 되제?”

“바로 그거야, 내가 살 때까지 기억해야 하는 거.”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까?”

“그런 것도 있고, 뭔가 빚진 느낌도 들어.”

“그냥 호의로 받아들이기 힘드냐?”

“그런가 봐, 호의를 신세 진 거로 생각하나 봐.”

“하기사, 신세 지기 싫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니제. 근디, 꼭 좋은 것만도 아니여.”

“그러게, 잘난 것도 없는 주제에.”

“어허, 비약이 너무 나갔다야. 승협아, 우리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하다잉.”

“집이 어디야?”

“산정동인디?”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진짜? 우리 버스 타끄나?”

“당연하지, 학생인데.”

“저그 버스 온다.”

“버스비라도 내가 낼 테니까, 그냥 타라.”

유은정이 바래다준단 말에 화색만연했다. 어린애마냥 신나서 버스에 올랐다. 둘은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대화가 이어질 분위기였음에도 차창만 바라보았다. 유은정이 한정거장을 남겨놓고 입을 열었다.

“우리 친구 하자.”

“응. 전에 친구 하기로 했잖아?”

“아참, 그랬제.”

“너 은근히 좀 싱겁다?”

“그라믄 짠맛도 보여주까?”

“하하하, 다음에.”

“니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냐?”

“많지, 너무 많아서 탈이지.”

“뭔디, 야그해봐, 다 답변해 주께.”

“싫어, 말 안 할래, 그냥 천천히 알아갈 거야.”

“오호, 그 말 솔찬이 마음에 든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난 친구로서 말하는 건데.”

“칫, 누가 뭐라 하냐, 나도 그런 뜻으로 말한 거여.”

“짜식, 너 생각보다 재밌다?”

“호호, 내 생전에 별말을 다 듣네잉. 다 왔어, 내리자.”

유은정이 빨개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하차하였다. 문승협도 빙긋 웃으며 뒤따랐다.

“느그 집에 갈라믄, 여그서 다시 버스 타믄 돼.”

“너희 집은 어딘데?”

“여그서 가까워, 저그, 저만치 있어.”

“앞장서 그럼, 집 앞까지 같이 가줄게.”

“우리 집까정?”

“응, 싫어?”

“아 아니, 처음이라서 그란가 쑥스러워갖고.”

“너, 내 앞에서만 그런 거야?”

“뭐가야?”

“나한테만 귀여운 거냐고?”

“세상에 세상에나, 나보고 귀엽단 머시마도 있그만잉.”

“하하하, 너 왜 비비 꼬는 거야, 너 놀려먹기 재밌다.”

“뭐 뭣이어? 오매오매 챙피해서 으짜스까잉, 나 혼자 무담시 자발떨어부렀네.”

“아냐 아냐, 농담이야. 너 진짜, 정말 귀여워.”

“시끄러, 그만해, 인자 안 속아.”

“은정아, 오늘 진심으로 고마웠어.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야, 볼링도 배우고.”

“그라믄 고로코롬 맨입으로 뭉개믄 안 되제?”

“뭐 바라는 거 있어? 말해봐, 들어줄게?”

“언제 시간 되믄, 같이 롤러장에 가까?”

“롤러장?”

“잉, 롤러스케이트 타게, 아그들이 재밌다드라.”

“그래, 그러자.”

“와따, 나 오늘 계 타부렀네.”

“하하, 오늘 계는 내가 탄 거 같은데?”

“여그여, 나 여그서 살아.”

아담한 정원이 달린 일본가옥을 현대식으로 개량한 2층주택이었다. 문승협이 작별인사를 하려는 순간, 자동차가 멈춰 서더니 차창을 내렸다.

“거그, 은정이냐?”

“아빠.”

“내 딸 옆에 있는 남자분은 누구시까?”

“안녕하세요, 은정이 친구 문승협입니다.”

“오호라, 우리 외동딸한테 드디어 남자가 생긴 거여?”

“아빠가 생각한 그런 남자 아니고, 그냥 친구여.”

“어찌 됐든 반갑소, 내 딸 잘 부탁하요.”

“아닙니다, 제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언제 정식으로 인사 올란가?”

“아빠, 그런 거 아니란께?”

“어허, 남자끼리 말한디, 우리 딸은 끼어들지 마쑈.”

“다음에 기회 되면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버님.”

“내 손꼽아 기다림세.”

“아빠, 차 세우고 먼저 들어가쑈, 나는 요 앞까지 승협이 바래다주고 들어가께.”

“은정아, 나는 여기서 혼자 갈게, 아빠랑 들어가.”

“아니어, 저그까지 같이 가자.”

“괜찮아, 얼른 들어가.”

“그럴래, 그래라 그라믄.”

“아버님, 안녕히 계세요.”

문승협은 공손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버스정류소로 걷다 뒤돌아봤다. 정답게 아빠팔짱을 끼고 집으로 들어간 유은정표정이 밝았다. 왠지 흐뭇하였다.

버스가 도착해 다급히 뛰어갔다. 올라타자마자 출발하여 엉거주춤 가까운 좌석에 앉았다. 창밖을 보며 한숨 돌렸다. 유은정부녀사이가 퍽 좋아 보였었다. 외동딸이라선지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났다. 딸을 대하는 유은정아빠에게 인자함을 느꼈다. 양복을 입어 직장인 같았지만, 고급승용차여서 사업가로도 추측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라 그러려니 하였다.

불현듯 오늘 벌어진 일들이 뭔가 부자연스러웠다. 하나하나 복기해 보았다. 한현진을 만나는데 굳이 데려간 이담. 볼링장에 와있던 유은정. 한현진이 경양식집서 전화받고 뜬금없이 가버린 정황. 아무래도 계획된듯한 의혹이 짙었다. 이담과 한현진이 갈 때, 둘이 좋은 시간 보내다 가라고 했었다. 여러 언행으로 보아 우연을 가장한 모종의 작전이란 확신이 생겼다. 유은정과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주선한 의도로 읽혔다.

버스에서 내리니 차가운 겨울바람이 전신을 휘감았다. 시린 양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아까 화장실서 이담에게 빌린 천 원짜리가 잡혔다. 뒷주머니에 지갑을 꺼내 지폐를 펴 넣었다. 요즘 계속된 방황과 유흥으로 부쩍 지출이 많았다. 부족한 용돈을 어찌 충당할지 고민거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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