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69)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서 내려 시청입구까지 걸어갔다. 다행히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이번에도 물어물어 세브란스병원정류소에서 하차했다.
문승협은 연세대학교정문에 서자 압도됐다. 대학이라곤 처음 가본 건국대학교와 비슷할 줄 았았다. 쭉뻗은 백양로와 좌우 건물들이 조화롭게 정돈된 인상이었다. 정문에서부터 부착된 안내이정표를 따라가니 대학입학원서접수처가 나왔다. 건국대분위기와 달리 사람들이 바삐 움직였다. 여기저기 모여서 신문지상에 발표된 대학별 예상커트라인정보를 보고 의논하였다. 무슨 학과에 몇 명 지원했다며 수군거렸다.
“으째, 사람들이 많은께 쫄리냐?”
“응, 덜컥 겁이 난다.”
“아야, 어차피 낼 원서인디 뭘 망설여?”
“그 그러게, 내가 지금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여그 와서 갑자기?”
건국대에서도 있었지만, 눈치작전을 피부로 느낄 만큼은 아니었다. 상경대학 원서접수창구 앞 여러 갈래 줄이 눈에 띄었다. 하필 경제학과줄에 사람이 제일 많았다. 눈대중으로 세어보니 경영학과지원자도 만만찮았다. 그나마 통계학과가 두 학과에 비해 적었다. 상경대학 학과경쟁률이 높아 보였다. 천영기에게 등 떠밀려 줄을 섰다. 초조하면서도 주위사람들을 의식해 태연한 척하였다. 점점 순서가 다가왔다. 써온 원서를 지금이라도 다른 학과로 바꿔야 할지 고심이 깊었다.
“저기요, 학생, 원서 안 낼 거예요?”
“아야 뭐 하냐, 언능 드려라.”
“아, 네, 여기 있습니다.”
“상경대학에 지원하셨고. 1지망 경제학과, 2지망 경영학과, 3지망 통계학과. 맞나요?”
“네.”
“여기 접수증 하고, 이거 받으세요. 원서접수 이후 일정이니까, 꼭 읽어보세요.”
“네, 감사합니다.”
“아야, 배고프다, 원서 냈은께 빨랑 가서 점심 묵자.”
“그 그래, 그러자.”
“승협아, 야, 문승협.”
“어? 강원종.”
“니도 여그 원서 냈냐?”
“응, 방금 냈어.”
“나는 1지망에 경제학과 썼어, 니는?”
“나 나도 1지망에 경제학과.”
“니 내신 2등급에 283점이잖애, 난 1등급에 298점인디도 떨어질까 비 겁나드만.”
“…….”
“니 배짱 좋다잉, 그러다 떨어지믄 으짤라고 그냐?”
“폴쎄 내부렀는디 인자 별 수없제, 하늘에 맡겨 부러.”
“…….”
“아야, 원서마감일이 아직 3일이나 남았는디, 뭔 지원자들이 이러코롬 많대?”
“연대를 지원할 정도믄, 다들 합격할 자신 있은께.”
“그 그라냐, 확신 있으믄 마감일이 상관없긴 하겄다.”
“우리 점심 먹으러 가는데, 원종이 너도 같이 갈래?”
“나는 오전에 원서 내고 아까 묵었어, 사전답사차원으로다가 여그 학생식당에서.”
“그랬냐, 우린 원서 낸 뒤 맘 편히 묵을라고 아직이어.”
“그라믄 나중에 또 보자.”
“그래, 원종아 잘 가.”
“저 시끼 은근히 자랑질한다잉, 누가 지 내신이랑 학력고사점수를 물어봤냐고?”
“그런 애 아냐, 나를 걱정해서 한말일 거야.”
“저것이 연대상징이냐?”
“응, 독수리.”
“근디, 날아 갈라는 거여, 막 내려앉은 거여?”
“비상하는 거야.”
“아니어, 추락하는 거 같은디?”
“참나, 누가 추락하는 독수리를 상징물로 만들겠냐?”
“어허, 고정관념을 버리고 자세히 봐봐,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은께.”
“난 창공을 향해 날아가려는 독수리로 보인다.”
“그래 맞어, 승협이 니도 저 독수리멩키로 비상할 것인께, 너무 걱정 말어.”
“…….”
“시끼, 니 지금 나한테 감동했냐?”
“가자, 밥은 내가 살게.”
문승협은 연세대정문을 나서면서 건국대와 공통점을 발견했다. 학교 근처 군데군데 모여있는 전투경찰들. 데모진압으로 뉴스에 나온 모습 그대로였다. 천영기가 횡단보도를 건너며 두리번거렸다. 전투경찰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째려보았다.
“잠시 검문하겠습니다.”
“예?”
“신분증 좀 보여주시죠.”
“우리 고등학생인디 으째 그라요?”
“고등학생이 저기 대학교는 왜 들어갔지?”
“여그 내 친구가 원서 내는디 따라갔어라.”
“근데 길을 건너면서 왜 좌우를 살폈어?”
“저그 세브란스병원이 연세대학병원이랑 같은지 궁금해서라우, 뭐가 잘못됐소?”
“같은 거야, 가봐.”
천영기가 주민등록증을 받아 지갑에 넣었다. 굴다리를 다 지나가서야 말문을 열었다.
“오매 심장 떨린 거, 싸가지없는 시끼, 전경이믄 다여?”
“죄지은 것도 없는데, 심장이 왜 떨려?”
“고등학생이란께는 바로 반말 까불고 말이어, 가서 확 그냥 조져불란께.”
“하하, 쫄아서 벌벌 떨더니만, 금세 기고만장해졌네?”
“내가 법 없이도 살 사람인께 이만한 줄 알어.”
“그런데 연세대학병원은 왜?”
“우리 국민학교 다닐 적에 최선경 있잖애?”
“최 최선경?”
“잉, 그 가시나가 아펐을 때 입원했던 병원이 아마 연세대학병원이었을걸?”
“너 뜬금없이 최선경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뭐야?”
“뭔 이유가 있겄냐, 그냥 퍼뜩 생각났어.”
문승협은 따져 물으려다 무덤덤한 천영기표정에 그만뒀다. 걸으면서 세브란스병원 쪽을 뒤돌아봤다. 기차가 지나가는 철로둑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 아래 굴다리를 오가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왔다.
국민학교5학년 때 연세대학병원은 특별하였다. 최선경이 한 달간 입원해 정밀검사와 치료를 받았었다. 당시만 해도 심장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약을 복용하며 꾸준히 관리해야 했다. 과격한 운동은 물론 심장에 무리 가는 모든 활동이 금지됐다. 이후 계속 병치레를 하다 치료와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이민 갔으나, 중학교2학년 15세 생일을 맞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였다.
문승협은 최선경유품을 정리한 날을 기억했다. 세상이 무너진듯한 큰 슬픔이었다. 유달산에서 최선경을 하늘나라에 보내던 추억으로 옮겨가는 찰나, 천영기가 식당골목입구에서 멈춰 섰다.
“미안하다.”
“응?”
“세월이 지나다 본께, 내가 말실수했어.”
“뭐를?”
“최선경 말이여. 니한테는 아픔인디, 내가 깜박했다.”
“아니야, 다 지난 일인데 뭐.”
“뭐 묵으까?”
“저기 가자, 방금 먹고 싶은 게 생각났어.”
문승협이 가리킨 곳에 ‘떡라면, 라볶이, 순대’가 쓰여있었다. 천영기대답도 듣지 않고 앞장서 들어가 그대로 주문하였다. 세로 기다란 종이에 써서 벽에 붙여놓은 메뉴들이 정겨웠다. 점심참이 지난 시간이라 손님이 없었다. 음식이 나오자, 둘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영기야, 이 라볶이 이름을 누가 최초로 붙인 줄 알아?”
“뭔 자다가 봉창 두드리냐?”
“최선경. 선경이가 국민학교5학년 때 붙인 이름이야.”
“아따, 아까 미안하다고 했잖애, 미안하단께?”
“하하, 화나서 그런 거 아니야.”
“원래부터 있었던 이름 아니어?”
“내가 떡라면처럼 떡볶이라면, 라면떡볶이라 했더니, 선경이가 라볶이라고 했어.”
“니 그래서 저 벽에 붙은 메뉴들 보고 실실 쪼갰냐?”
“순대도 찍어 먹어봐, 맛있어. 최선경이 좋아했었는데.”
“음, 묵을만하네.”
유선국민학교 앞 분식집에서 최선경과 일화였다. 문승협이 순대를 라볶이국물에 찍어먹으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천영기가 약속시간이라며 일어나자고 했다.
서울친구들과 만날 장소는 신촌로터리 크리스탈백화점이었다. 두 번 물어 찾아갔다. 해가 저무는 백화점정문에 사람들이 많았다. 여럿이 또는 남녀혼자 누군가를 기다렸다. 간혹 손목시계를 보면서 목을 길게 빼고 이쪽저쪽 살폈다. 동성친구를 만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연인사이로 보였다. 누구를 만나든 하나같이 표정이 밝았다. 만남의 광장이 따로 없었다.
20분쯤 지나 어둠이 깔렸다. 박상인과 박정진이 왔다.
“어이, 목포촌놈들.”
“아야, 사람들도 많은디 목포촌놈이 뭐냐, 쪽시럽게.”
“왜, 목포촌놈을 목포촌놈이라고 한 게 잘못이냐?”
“아따 그만하란께, 사람들이 쳐다보잖애.”
“하하하, 너희들 밥 먹어야지?”
“점심 늦게 묵어서 괜찮긴 한디, 지금 묵어도 되고.”
“가자, 이 두 촌놈들 서울밥 한번 먹여야지.”
“어허, 우리 벌써 두 끼나 묵었다잉, 맛도 벨로드만 연설하네. 저그 최봉수 온다.”
“하, 요녀석들, 이게 얼마만이야?”
“봉수는 2년쯤 됐고, 너희 둘은 1년 반인가 그럴걸?”
“맞아, 지난해 초하고 여름방학 때 목포서 봤지.”
서울친구들이 천영기와 친하였으나, 문승협과는 아직 서먹했다. 만난 횟수와 기간에 비례하였다. 서로 안부를 물으며 저녁 먹으러 갔다. 박상인이 천영기와 어깨동무하고 앞장섰다. 박정진과 최봉수는 문승협을 양쪽에서 연행하듯 뒤따랐다. 지하도를 건너 연세대 쪽 시장통 식당에 자리 잡았다.
박상인이 이것저것 주문하고 익숙하게 소주도 시켰다. 큰 키에 덩치가 있어 대학생처럼 보여선지, 이상히 쳐다보거나 제지한 사람은 없었다. 식당아저씨가 연탄불을 테이블가운데 뚫린 구멍에 넣고 석쇠를 올렸다. 식당아주머니가 밑반찬과 고기를 가져왔다.
“승협아, 오랜만이다야, 술 한잔 받아.”
“나 술 못해, 너희들끼리 마셔.”
“너는 어째 서울샌님보다 더 샌님 같냐?”
“아야, 서울친구들 만났는디 한잔해라.”
“나도 술이 안 맞지만, 오늘 같은 날은 마셔야지.”
“나도 마찬가진데, 친구들끼리 먹을 땐 한잔씩 해.”
“봉수랑 큰박도 너 왔다고 한잔한다야, 빨리 잔 받아.”
“그래 그래 알았다.”
“시끼, 진작 그럴 것이지 빼고 있어.”
“큰박아, 작은 박정진은 뭐 해?”
“작박은 아마 원서 쓴다고 바쁠 거다.”
“느그들은 안 쓰냐, 으째 이러코롬 한가하대?”
“너희 때문이잖아, 목포촌놈들 접대한다고 말이야.”
“왐마, 느그 대학 못 가믄 우리 땜시여?”
“그럼, 당연하지.”
“허허, 우리도 내일부터 원서 내러 다닐 거야.”
“자, 건배하자. 목포친구들을 서울에서 보니 더 반갑다, 우리의 우정을 위하여!”
“위하여!”
“크, 이렇게 쓴걸 왜 먹는지 모르겠다.”
“그 쓴맛에 마시는 거야, 인생 자체가 쓰잖아.”
“승협아, 정난희는 잘 있냐?”
“응? 응.”
박정진이 한때 구애했던 정난희근황을 묻자, 천영기가 당황한 문승협을 보더니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야, 봉수 니 바클 멋지다잉?”
“요즘 유행하는 버클이다, 무척 구하기 힘든 거야.”
“우리 모두 하나씩 장만했어.”
“어디서 판다냐, 나도 하나 사야 쓰겄다.”
“이태원 가면 살 수 있어, 원서 쓴 다음에 같이 가보자.”
서울친구들이 너나없이 윗옷을 걷어올리며 손바닥반만 한 버클을 자랑하였다. 천영기가 부러워하며 유심히 봤지만, 문승협은 무덤덤했다.
서울또래들 사이에 독특한 문양과 형태의 벨트버클이 인기를 탔다. 개성이 넘친 세계적 헤비메탈그룹멤버들, ‘주말의 명화, 명화극장’등 TV서부영화에 나온 카우보이들을 모방하였다. 청바지에 황갈색소가죽벨트와 버클을 착용한 멋 부림으로 과거 깜짝 유행한 것과 비슷했다. 최근 마이클잭슨 때문에 일어난 복고열풍이었다. 아직 목포에 전해지지 않은 패션트렌드였다.
서울친구들이 주도해 권커니 잦거니 하였다. 연탄불에 구운 고기를 안주 삼았다. 박정진이 담배를 꺼내자, 박상인과 천영기도 덩달아 입에 물었다. 서로 다정히 불을 붙여주며 의리를 뽐냈다. 담배를 피우지 않은 문승협과 최봉수를 제외하고 손님들 전부 피워댔다. 식당주인이 자욱한 연기를 환기시키려 출입문을 반쯤 열었다. 찬 공기가 밀려와 오싹해지면서 방광을 자극했다. 서울친구들이 화장실 간다며 일어섰다.
“니는 거짓갈도 못해서 얼굴이 빨개져 갖고는 그냥.”
“뭔 소리야?”
“아까 정진이가 난희안부 물을 때 말이어.”
“그럼 헤어졌다고 해야 되냐?”
“언젠가는 알 거 아니여.”
“…….”
“에이, 나도 모르겄다.”
천영기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일어났다. 곧이어 서울친구들이 들어와 앉았다. 식당구석테이블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상인아, 박상인 맞지?”
“어? 소준이, 박소준.”
“야 반갑다, 여기서 다 만나네.”
“그러게, 중학교 이후로 처음 보는 거지?”
“그렇지, 친구들이랑 왔어?”
“응, 넌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아, 나 오늘 여기 연대에 원서 썼거든.”
“그렇구나. 참, 여기 내 친구도 오늘 연대에 원서 냈어.”
“그럼 나랑 경쟁자인가, 하하.”
박상인이 문승협을 가리켰으나, 서로 통성명 없이 눈인사만 건넸다. 박정진과 최봉수도 가볍게 목례하였다. 화장실에 다녀온 천영기가 엉거주춤 서있었다.
“아, 이번에 입시 끝나고 한번 보자.”
“그래, 연락해.”
“실례했습니다.”
“괜찮해라우, 친구의 친구는 또 친군께.”
“상인아, 누구야?”
“중학교동창이야, 홍제중학교.”
“술을 마셔서 그란가, 알딸딸하다.”
“얘들아, 더 먹을 거 아니면 동네로 넘어갈까?”
“그래, 홍은동으로 가자.”
“홍은동이 어디여, 아리까리하다?”
“너 비틀거리는 것이 취했구나?”
“세상이 취했으믄 취했제, 내가 취할 리는 없어.”
천영기가 부축하려는 문승협을 밀어냈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중에 이 친구 저 친구 옮겨 다니며 어깨동무했다. 친근감과 우정을 격하게 표현하였다.
서울친구들이 버스에 올라 어디 갈지 왈가왈부했다. 홍은동에 도착하여 당구장을 찾아갔다. 서울팀과 목포팀으로 나눠 맥주내기 갬빼이당구를 쳤다. 최봉수의 칼 같은 심판으로 목포팀이 이겼다.
“얘들아, 호프집 갈까? 저녁도 대접받았는데, 게임결과와 상관없이 내가 살게.”
“승협아, 마음만 받을게. 밖에서 헤매지 말고, 안주랑 맥주사서 우리 집으로 가자.”
“그래 그러자, 그게 좋겠다.”
모두 박정진제안을 받아들였다. 슈퍼에 들러서 취향 것 골라 한 꾸러미 사들었다.
박정진집은 신축아파트였고, 가족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박정진아버지는 관급토목공사회사를 경영하였다. 수려한 어머니에 고등학교1학년 남동생과 중학교2학년 여동생이 있었다. 하루가 멀다고 놀러 온 장남친구들이라 허물없이 대했다.
박정진이 친구들을 방으로 데려갔다. 박정진어머니가 과일을 가져다 놓고 나가면서 한마디 던졌다. 냉장고를 다 털어도 되니 달라지 말고 알아서 찾아먹으라 하였다. 박상인이 과자들을 펼치는 사이, 최봉수가 부엌에서 쥐포를 구어 왔다. 빙 둘러앉아 맥주를 따랐다. 막 건배하려는 순간, 박정진아버지가 방문을 열었다. 문승협이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무슨 일인지 살폈다.
“네가 내 아들 목포친구냐?”
“네, 밤늦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허허허, 이름이 문승협이라고 했던가?”
“예.”
“너는 저놈들하고 친구 하지 마라.”
“네?”
“친구아빠가 방에 들어왔는데 앉아서 멀뚱멀뚱 쳐다보고, 예끼 예의 없는 놈들.”
“에이 아버지, 우리가 처음 본 사이도 아닌데 왜 그러세요. 맥주 한잔 드려요?”
“시끄러, 상인이 너는 찌그러져 있어, 너희들 전부 여기 승협이를 좀 본받아라.”
“아버님, 저도 일어났는디요?”
“허허, 그래, 뒤늦게라도 따라 했으니 다행이다.”
“아빠 무슨 일인데, 왜 내 방에 와서 행패야?”
“아빠한테 말하는 말버릇 봐, 쯧쯧쯧.”
“우리 술 마시게 빨리 가.”
“담배 있냐? 아빠 담배 하나만 주라.”
박정진이 서너 까치 빼놓고 담뱃갑채 건넸다. 박정진아버지가 적당히 마시라며 방을 나갔다. 문승협은 눈앞에서 벌어진 풍경이 충격적이었다. 부자간 나눈 대화라곤 믿기지 않았다. 세상에 저런 아버지가 있다니, 더구나 아들친구들도 있는데. 박정진아버지가 예의를 따지면서도 격의 없었다. 마음대로 냉장고음식을 가져다 먹으라던 박정진엄마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상인아, 정진이네 부모님 대단하시다. 아들이랑 친구처럼 지내는 집은 처음 봐. 정진이부모님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너희들도 신기하고.”
“아, 우리도 처음에는 놀랐어, 이젠 많이 겪어서 그런가 별로 아무렇지 않아.”
“아들한테 담배를 달라고 하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화목해 보여서 부럽다야.”
“박정진의 유일한 장점이다.”
“정진이아빠가 멋있는 건디, 으째 정진이가 부러우까?”
“야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술이나 마셔, 내일부터 원서 쓰러 다니려니 골치 아프다.”
최봉수와 박상인은 자정쯤 각자 집으로 갔다. 문승협과 천영기는 박정진방에서 잤다.
박정진엄마가 소고기뭇국에 불고기로 아침상을 차려줬다. 문승협과 천영기는 아침을 먹은 후 서울친구들을 따라다녔다. 국민대학교, 동국대학교, 단국대학교, 세종대학교를 유람했다. 입학지원서를 내러 가는 줄 알았는데 지원자수와 지원점수 등을 조사하였다. 속된 말로 눈치작전이었다. 대학을 가려고 발품을 마다하지 않는 서울친구들에게 뭉클했다. 될 대로 되라며 배짱지원한 자신들과 달라 부끄러웠다.
서울친구들이 동향을 살피며 입시정보파악에 열중하는 동안, 문승협은 잠시 빠져나와 공중전화박스를 찾았다. 적어온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수화기건너편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채정이?”
“승협이 오빠?”
“와, 난 줄 어떻게 알았어?”
“그냥 느낌이 빡 왔어, 나도 내가 신기해.”
“잘 있었어?”
“응, 오빠는?”
“잘 있었으니까 이렇게 전화하겠지?”
“피, 어디야, 혹시 서울?”
“당장 자리 깔아야겠다, 도사가 되셨네?”
“정말? 정말 서울 온 거야?”
“응, 원서 내러 왔어.”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안 바빠?”
“응, 바빠도 안 바빠. 어디서 볼까, 내가 갈게.”
“톱스타께서 뭘 그리 급해, 도도하게 빼고 그래야지.”
“아무한테 그러긴 하는데, 오빤 아무나가 아니잖아.”
“하하, 오늘은 좀 그렇고, 내일 시간 괜찮아?”
“내일 오전엔 스케줄 있으니까, 저녁 6시에 보자.”
“근데, 나 아는 곳이 없어, 어디서 만나지?”
“음, 그럼 종로1가에 있는 종각 앞에서 만나자, 거긴 모르는 사람 없으니까.”
지난번 목포에서 채정이를 송별할 때 약속한 의무감에 건 전화였다. 통화가 안될 수 있어 마음을 비웠는데, 단번에 연결돼 땡잡은 기분이었다.
문승협이 공중전화박스를 나오자, 마침 천영기와 서울친구들이 원서접수처에서 나왔다.
“어디다 전화했냐?”
“있어, 아는 사람.”
“휴, 돌아다니기도 힘들다, 이제 동네로 가자.”
“느그들 원서는 언제 낼 건디?”
“내일 마지막으로 한번 더 돌아보고, 모레는 내야지.”
“모레가 원서마감날이잖애?”
“야, 너희처럼 우리가 공부 잘하는 얘들이 아니잖아, 이게 다 공부 못한 죄다.”
“염병, 우리가 뭐 공부를 잘해서 그랬가니, 그냥 배짱으로다가 확 질러분 거여.”
“우린 공부도 못했는데, 배짱마저 없어서 그런다 왜?”
“나는 너희들의 신중함에 동의해, 최대한 심사숙고해서 원서 내는 게 맞는 거 같아.”
“승협아, 아주 아름답게 포장해 줘서 감사하다, 사실은 우리 눈치작전하는 거야.”
“난 너희들처럼 수고와 노력을 하지 않은 내가 좀 창피하다, 인생이 걸린 문젠데.”
“인생 뭐 있가니, 인생 한방이여 한방.”
“부모님 눈치 보이니까, 오늘 낼은 조신하게 지내고, 원서마감날 저녁에 신나게 놀자.”
다 같이 서울친구들 동네로 이동하였다. 홍은동사거리 유진상가시장통에서 돼지국밥을 먹고, 당구장에 들러 어제처럼 호프내기 갬빼이를 쳤다. 통닭구이에 생맥주를 한잔씩 마신뒤 오락실로 갔다. 문승협은 잠깐 빠져나와 케이크를 하나 샀다. 오락을 마치고 박상인과 최봉수는 집에 갔다. 나머지는 박정진집으로 향했다.
“케이크는 왜, 누구 생일이냐?”
“아니, 내가 먹을라고. 정진씨, 얼른 문이나 여시오.”
“다녀왔습니다.”
“그래 수고들 했다, 어서 들어와.”
“어머님, 이거.”
“어머, 웬 케이크야, 나 주려고 산 거야?”
“재워주고 먹여주시는데 비하면 약소합니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아들친구에게 케이크를 선물 받다니.”
“엄마, 우리 저녁 먹고 왔어.”
박정진이 기뻐하는 엄마에게 퉁명스레 말하였다. 문승협에게 묘한 질투를 느꼈다.
“손 씻고 와, 같이 케이크 먹자.”
“엄마, 승협이 오빠가 진짜 센스 있네, 이렇게 예쁜 케이크를 사 올 생각을 다하고.”
“호호, 그러게 말이다, 얼굴도 잘생긴 아이가 마음씨까지 고우면 큰일인데.”
“왜 큰일이야, 좋은 거 아니야?”
“나도 내 사위로 욕심나는데, 여자애들이 가만두겠어?”
“어허, 난 승협오빠처럼 예쁘장한 남잔 싫어.”
“야, 승협이가 너 같은 애 거들떠나 보겠니?”
“엄마 너무해, 나 엄마 딸 맞아?”
“나도 승협이를 내 매제 삼기 싫거든?”
“아들 어서 와 앉아, 우리 승협이도 앉고.”
“어머님, 저도 정진이친구 천영기입니다만, 으째 승협이만 그러코롬 편애하까요?”
“에이 그런 거 아니야, 영기도 어서 앉아.”
“승협이는 우리 승협인디, 저는 그냥 영기네요잉?”
“어머, 내 속마음을 들킨 거야?”
“풋, 영기오빠랑 엄마랑 둘이 쌍으로 웃기네.”
“그라고 본께, 내일이 승협이 니 생일이잖애?”
“그럼 그렇지, 자기 생일을 축하하려고 사 왔구먼?”
“와, 어머님께 감사해서 준비한 건데, 나는 내일이 내 생일인 줄도 몰랐어.”
“호호호, 승협아 걱정 마, 이 엄마는 승협이의 순수한 마음을 믿으니까.”
“승협이 오빠는 대학원서 어디에 썼어?”
“아, 여 연세대.”
“뭐야, 공부까지 잘한 거야? 세상이 왜 이리 불공평해? 우리 큰오빠 불쌍해서 어째?”
“우리 승협이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구나?”
“엄마, 아주 이 기회에 승협이를 아들삼지 그래?”
“호호호, 그럴까 진짜?”
박정진이 엄마를 사랑한 만큼 유쾌하게 시샘했다. 다들 즐겁게 케이크를 먹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