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70)
다음날 아침, 문승협이 울컥하였다. 평소 대수롭게 생각지 않은 터라, 생일상은 뜻밖이었다. 객지에서 그것도 친구엄마가 차려준 인생밥상에 감격했다. 다정다감한 천사엄마를 둔 박정진이 또 부러웠다.
“차린 건 없다만 많이 먹어. 미리 알았으면 시장에 다녀왔을 텐데, 조금 아쉽다.”
“아 아닙니다, 진수성찬인데요. 감사히 먹겠습니다.”
“엄마, 지금 대입원서 내는 기간인데 미역국이 뭐야?”
“야, 미신에 연연하면 큰사람 못돼. 시험당락 걱정 말고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야.”
식사가 끝날 즈음, 최봉수와 박상인이 왔다. 문승협은 밥상 치우는 것을 도왔다.
“승협아 그냥 둬, 곧 파출부아주머니 올 거야.”
“아 그래요?. 이것만 가져다 놓을게요.”
“어제도 그러던데, 집안일 돕는 게 몸에 뱄네, 우리 집 남자들은 좀 본받아야겠다.”
“하하, 아니에요, 저도 저희 집에서는 안 해요.”
“솔직하기까지 하다니, 우리 승협이는 단점이 뭐야, 도대체 흠결을 찾을 수 없네?”
“엄마는 승협이의 모든 행동이 예뻐 보이는구나?”
“예쁜 짓만 하잖아.”
“아이고, 울 엄마 승협이한테 아주 푹 빠졌네 빠졌어.”
“호호호, 어여 나가봐. 오늘도 다들 힘내고, 화이팅!”
문승협은 박정진엄마에게 칭찬받아 더욱 기분 좋았다. 파이팅 넘친 격려를 등에 업고 친구들과 집을 나섰다. 오늘은 중앙대학교와 서강대학교를 알아보기로 하였다. 홍은동사거리서 흑석동행 버스에 올랐다.
중앙대학교도 원서마감을 하루 앞둔 날이라 학생과 학부모들로 붐볐다. 여기저기 분주한 것이 어제 대학교들 사정과 다르지 않았다. 박정진과 최봉수는 인문사회과학등 문과계열학과에 집중했다. 박상인은 공과대학중심으로 살폈다. 문승협은 천영기에 이끌려 예술대학을 구경하였다. 천영기가 연극영화과에 원서 내는 여학생들을 훔쳐보며 흐뭇해했다. 혹시 유명연예인은 없냐며 채신머리없게 두리번거렸다. 학생회관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서강대학교로 이동하였다.
“상인아, 서강대서 종각은 어떻게 가?”
“서강대 앞에 버스 있어, 왜?”
“이따 아는 동생을 만나기로 했거든.”
“몇 시? 저녁약속이야?”
“6시인데, 아마 그럴 거 같아.”
“그럼 8시에 종로 1가 연타운서 만나면 되겠다.”
“아니, 종각을 어떻게 가냐고?”
“그니까, 후배 만나기엔 충분한 시간이잖아?”
“그 글쎄, 그건 가봐야 알 것 같은데?”
“늦어도 괜찮아, 우리가 연타운에 있으면 되니까.”
“무슨 말이야?”
“아, 너한테는 말 안 했나 보구나, 저녁에 다른 친구들도 만나기로 했거든.”
“친구들?”
“응, 작은 박정진이랑, 네가 말로만 듣고 못 봤던 서울친구들 두세 명 올 거야.”
“종각은 나 혼자 가야 하는데?”
“그래? 함께 가면 될 것을 왜 물어보나 했다.”
“조금 난감하다야.”
“난감하긴, 그 후배 만나고 오든가, 아니면 데려와도 되고. 친구끼리 뭐 어때?”
문승협은 약속이 겹쳐 당황했지만, 채정이와 만남에 2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서강대학교를 둘러보다 5시 가까이 되어 먼저 가겠다고 하였다. 박상인이 버스토큰을 건네며 종각과 연타운위치를 알려줬다.
문승협은 서강대입구서 버스를 타고 종로로 향했다. 퇴근시간에 가까워질수록 차량이 늘어났다. 차창 밖으로 서대문이 어슴푸레하였다. 높다란 빌딩숲 전등들이 하나 둘 꺼졌다. 길이 막혀 가다 서다 반복했다. 광화문사거리에 다다르자, 울긋불긋 현란한 불빛이 자태를 뽐내며 길거리를 밝혔다. 정차한 버스에서 바깥풍경을 보니 크리스마스가 다가옴을 느꼈다. 난생처음 본 고층건물상단의 전광판뉴스가 신기하였다.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계기로 국제민속축제 등 63개 문화올림픽행사개최. 버마랭군지구 인민법원 제8특별재판부가 아웅산테러범 사형선고, 북한과 단교나라 계속 늘어. 대구미문화원폭발사건은 다대포침투생포간첩진술 따라 북한소행 판명.’
대구미문화원폭발사건이 북한소행이라니, 광주와 부산의 미문화원방화사건처럼 반미운동을 조작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미국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반미감정이 고조됐었다. 한편으론 정부발표를 이용할 극우맹신자들과 곧이곧대로 믿을 일부 국민들이 불쌍하였다.
일순간 정체가 풀리고 종로1가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고 지나왔던 광화문방향으로 거슬러갔다. 박정진이 종각을 물어보면 시골촌놈으로 본다며 가르쳐줬었다.
종각은 또 하나의 만남의 광장이었다. 엊그제 서울친구들을 만난 신촌크리스탈백화점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연말마다 TV에 나온 제야의 종소리를 울린 보신각이었다. 새해카운트다운을 하며 환호한 군중들이 떠올랐다. 저녁 6시가 대중적 만남의 시간이어선지 발 디딜 틈 없었다. 보신각정면중심으로 동서남북을 정해 만나지 않으면 사람 찾기가 쉽지 않았다. 주변을 돌며 두리번거리는 이가 여럿이었다. 문승협도 6시가 넘어가자 불안하여 둘러보았다. 코트 깃을 한껏 추켜올린 안경 쓴 여자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동시에 등뒤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여자들의 대화가 들렸다.
“야, 저기 채정이 아니냐?”
“채정이가 여길 왜 오냐?”
“봐봐, TV에서 봤던 채정이 맞는 거 같아?”
“안경 썼잖아, 그리고, 여기서 저렇게 남자랑 팔짱 끼고 다니면 소문날 텐데?”
문승협은 채정이에게 이끌려갔다. 의외의 행색이라 얼굴을 확인하려 하였다.
“오빠, 나 맞아, 그냥 앞만 보고 걸어.”
“웬 안경을 꼈어?”
“알 없는 안경이야, 사람들이 알아볼까 봐 변장했어.”
“하하,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힐끗힐끗 쳐다본다.”
“근데, 정작 오빠는 몰라봤잖아. 그리고, 모르는 여자가 팔짱 끼는데 가만히 있어?”
“아, 이야기가 또 그렇게 되나?”
“팔짱을 풀어 재끼던가, 펄쩍 뛰든가 했어야지?”
“뒤에 여자들이 너라잖아, 그래서 가만히 있었는데?”
“참나, 그걸 변명이라고. 안 추워?”
“춥긴 하다. 하도 오랜만에 서울 와서 그런지,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안돼.”
“호호, 목포촌놈이 아니라 서울촌놈이 돼버렸네?”
둘은 광교를 지나 을지로로 걸었다. 롯데백화점과 롯데호텔이 보이는 사거리에서 길을 건넜다. 화려한 명동거리가 서울촌놈을 환영했다. 반짝반짝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알렸다. 경쾌한 노래와 음악들이 세상을 축복하였다. 문승협은 마법의 나라에 들어선 것처럼 금세 동화됐다. 명동 한가운데 세워진 대형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한껏 들떴다. 밤거리를 거니는 인파를 헤집어가면서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언덕 위 십자가건물이 다채로운 전구들로 치장하고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 유명한 명동성당임을 온누리에 알리는듯했다. 당장 들어가 소원이라도 기도하고팠다. 모든 사람들이 밝은 표정에 사랑이 넘쳤다.
채정이가 망설임 없이 로얄호텔로 앞장섰다. 프런트에서 뭔가 확인한 후 문승협에게 오라고 고갯짓 하였다. 호텔직원이 조용하고 고급스러운 레스토랑룸으로 안내했다. 채정이가 레스토랑직원에게 소곤소곤하고서야 코트와 안경을 벗었다.
“뭐가 이렇게 조심스럽냐, 꼭 비밀 아지트 같다.”
“나도 한번 유명연예인들 흉내 내보는 거야.”
“괜히 나 때문에 구설수 생기는 거 아냐?”
“에휴 걱정 마슈, 내가 그 정도로 유명하진 않은께.”
“나 때문에 너에게 피해 가는 건 싫은데.”
“나 사실 5일부터 오빠전화 기다렸어, 12일 원서마감날 안에 연락한다고 해서.”
“뭘 또 기다리기까지 했어, 약속했으니 전화할 텐데.”
“그래, 오빠가 약속을 잘 지키는 그런 건 참 좋더라.”
“볼 살이 좀 빠졌나, 얼굴이 좀 핼쑥해진 거 같아?”
“남자라 잘 모르시나 본데, 요즘 유행하는 화장법이야.”
“아, 그래서 서울여자들이 다 귀신처럼 하고 다니나?”
“뭐라고?”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여전히 예쁘다.”
“피, 오빠는 농담 같은 거 잘 안 하잖아. 혹시, 예쁘다는 말이 농담 아냐?”
“아니옵니다, 정이씨는 예뻐요.”
“참, 이거. 별거 아냐, 오다가 주웠어.”
“오호, 오다가 주웠는데 포장이 잘됐네요?”
“뜯어봐, 빨리.”
“어? 지갑이잖아?”
“어때, 맘에 들어?”
“응, 너무 맘에 들어. 어? 여기 돈도 들어있네?”
“오빠, 생일 축하해.”
“내 생일을 또 어떻게 알았대?”
“다 아는 수가 있지, 내 영업비밀이야.”
“고마워,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원서는 어디에 냈어?”
“연세대에 냈는데, 떨어질지도 몰라.”
“꼭 붙을 거야, 걱정하지 마. 그러면, 우리 내년에 서울서 자주 만나는 건가?”
“음, 생각해 보고.”
“이그, 그냥 그렇다고 하면 누가 오빠 잡아먹어?”
“하하, 아니, 나도 서울여자들 좀 만나봐야지?”
“아, 그런 거라면 뭐. 난 서울여자들한테는 자신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채정이가 자신 없는 사람도 있어?”
“오빠 첫사랑, 난희 언니.”
“…….”
“지금은 오빠랑 헤어졌다고 해도, 오빠 머리에는 아직 정난희가 남아있잖아.”
마침 식사가 들어와 어색할뻔한 분위기에서 벗어났다. 채정이가 말없이 애피타이저를 먹는 문승협표정을 살폈다. 곧이어 메인요리가 나왔다.
“이런 스테이크는 처음 먹어봐, 적당한 굽기에 식감이 부드러워서 씹자마자 넘어가.”
“다행이다, 웰던으로 하려다 미디엄으로 주문했는데.”
“미디엄?”
“스테이크 굽기 정도인데, 웰던은 속까지 다 익힌 거고, 미디엄은 반쯤 익힌 거야.”
“미디엄, 기억해 둬야겠다. 서울에서 살려면 경양식 주문방법도 알아놔야겠네.”
“레어도 있는데, 그건 겉만 익힌 거라 호불호가 갈려.”
“정이 덕에 내입이 호강하네, 정말 맛있다.”
“호호, 나랑 만나면 매일 먹을 수 있는데.”
“정이씨, 저랑 사귀어 주세요, 네?”
“퉤퉤퉤, 이제 한번 뱉은 그 말 번복할 수 없어.”
“하하하, 귀여워.”
채정이는 놀이공원 등 문승협과 가고 싶은 곳을 나열하였다. 대화가 깊어지면서 신인연기자의 힘든 점을 토로했다. 어린 나이에 객지생활을 외로워하였다.
문승협이 디저트를 먹으며 채정이를 빤히 쳐다봤다. 연예인삶을 힘겨워해서 안쓰러웠다.
“오빠, 목포 언제가?”
“14일 날, 면접 끝나면 바로 내려가려고.”
“그럼 내일 하고 모레는 뭐 해?”
“내일은 서울친구들 원서 내는데 가기로 했고, 모레는 면접준비 좀 할까 해.”
“그러면, 우리 더 못 보는 거야?”
“그 그럴 것 같은데?”
“흥, 나도 바빠, 내일 하고 모레 다 촬영스케줄 있어.”
“다음에 와서 또 연락할게, 너무 서운해하지 마.”
“그 약속 지켜, 오면 꼭 연락하는 거, 알았지?”
“그래, 알았어.”
“그건 그렇고, 여기서 나가면 뭐 할까?”
“어? 나 서울친구들 만나기로 했는데?”
“뭐야, 우리 여기서 나가면 바로 헤어지는 거야?”
“미안, 원래 서울친구들하고 계획이 없었는데, 걔들이 일방적으로 약속 잡았어.”
“그럼 오빠친구들 만나는데 나도 가면 안 돼?”
“안될 건 없는데, 네가 괜찮겠어?”
“나 같이 갈래, 가서 오빠서울친구들도 만나볼래.”
“이러다 괜한 소문날까 걱정이다.”
“뭐 어때, 오빠친구들인데.”
“아까 그런 소문 때문에 연예계생활이 힘들다 했잖아.”
“오빠랑 관계된 거라면 괜춘해, 그건 얼마든지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종로 연타운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거기 사람들 엄청 많다나 봐. 진짜 괜찮겠어?”
“어허, 나 생각보다 야무지단께, 걱정 붙들어 매쑈잉.”
“하하하, 그럼 천천히 가봅시다. 그래도 혹시 모른께, 각별히 조심합시다잉.”
채정이가 신나서 코트와 안경을 걸쳤다. 로얄호텔을 나와 위장술을 믿고 안기듯 바짝 다가갔다. 오히려 문승협이 주위시선을 의식했다. 비교적 인적 드문 명동성당을 지나 삼일로길을 택하였다.
장통교 쪽 종로1가에 들어서니,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북적댔다. 가히 젊음의 거리라 할만했다. 건물전체에 환히 불을 밝힌 ‘연타운’ 간판이 보였다. 박상인말대로 누구에게 묻지 않고도 찾기 쉬웠다. 1층부터 4층까지 전부 호프집이었다. 3층에 청춘남녀들이 맥주를 마시며 시끌벅적하였다. 어른이라곤 한 명도 없고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행여 채정이가 노출될까 전전긍긍하며 친구들을 찾았다. 하필 출입구와 가까운 창가자리여서 당혹스러웠다. 그나마 튀어나온 기둥이 있었다.
“승협아, 여기!”
“잠깐만, 영기야 너 한 칸 옆으로 가 앉아라.”
“어? 채정이다!”
“쉿! 정이야 여기에 앉아.”
“왐마, 여그서 채정이를 본다잉?”
“야씨, 좀 조용히 하라고.”
“TV에 나온 사람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야, 승협이가 조용히 하라잖아, 딴사람들 모르게 하려고 애쓰는구만 그러냐.”
“고맙다 상인아, 내 맘 알아준 사람은 너밖에 없다.”
문승협은 사람들 이목을 가리려 기둥옆자리에 채정이를 앉혔다. 친구들이 생각지 못한 연예인출현에 놀라 호들갑 떨었으나, 곧 목소리를 낮췄다.
“채정이씨가 올 줄 알았으면,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에서 만날걸 그랬다야.”
“대입원서도 마감 전인데, 뭔 학생들이 이렇게 많냐?”
“여기는 원래 그래, 아마 1년 내내 이럴걸?”
“참, 이쪽은 나랑 친한 동생이야.”
“안녕하세요, 승협오빠가 숨겨 논 애인 채정이입니다.”
“정이야, 그러다 얘네들 오해한다?”
“오해는 사양하구요, 사실입니다.”
“허허허, 승협이 너 어제 전화한 사람이 여자였구나?”
“네, 제가 그 여자 맞구요, 사랑하는 오빠의 친구들이니 말씀 편히 하세요.”
채정이가 과한 애정을 담아 정체를 밝혔다. 문승협은 휘둥그레한 친구들 반응에 멋쩍었다. 작은 박정진과 큰 박정진이 채정이에게 인사하다 실랑이했다. 서로 큰 박이라 우기면서 누가 더 큰지 키를 쟀다. 다른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저런다며 툴툴댔다. 박상인이 채정이에게 뭐 마실지 묻고 종업원을 불렀다. 작은 박정진이 문승협에게 생소한 서울친구를 소개하였다. 송낙운은 큰 키에 덩치가 있었지만, 단발머리에 안경을 써 순해 보였다. 이승현은 작은 키 마른 체형에 귀염상이었다. 모두 대선고등학교에 다니고 사이가 돈독했다. 다들 집이 홍은동인데, 송낙운만 불광동에 살았다.
종업원이 왼손에 접시 3개, 오른손에 500cc 생맥주 7잔과 오렌지주스 1잔을 들고 왔다. 문승협은 서커스를 보는 것 같았다. 노가리와 소시지모둠을 안주삼아 생맥주를 마셨다. 채정이는 오렌지주스를 홀짝였다. 당면한 대입원서지원 등 공통주제로 갑론을박하는 사이, 송낙운이 마카로니과자를 리필하였다. 동그랗게 구멍 난 밀가루반죽을 튀긴 거라 자꾸 손이 갔다. 작은 박정진이 밖에서 사 온 새우깡을 팝콘바구니에 몰래 부었다. 안주 값을 아낀다고 궁상떨면서도, 채정이를 배려해 과일안주를 추가시켰다. 문승협에게 친근감을 표시하며, 작년 여름방학 때 만난 이후 근황을 이야기했다. 종업원이 과일접시를 놓고 갔다. 송낙운이 씩 웃으며 황도를 찍어 건네자, 작은 박정준이 화들짝 놀랐다. 문승협은 복숭아알레르기가 있는 최선경이 떠올랐다.
흥겨운 음악에 손님들 목소리가 커지고 웅성웅성하였으나, 잔잔한 노래가 나오면 잦아들었다. DJ의 선택과 볼륨조절에 따라 연타운분위기가 활기차고 차분해졌다. 소란스러운 몇몇 취객이 옥에 티였다.
문승협은 친구들과 어울리다가도 틈틈이 채정이를 살폈다. 주변테이블에서 채정이를 알아본 듯 힐끗거려 긴장하다 안도하길 여러 번이었다. 천영기가 채정이를 모델로 한 책가방광고를 들먹였다. 모델협회회장인 외삼촌이 채정이의 소속사대표라 알고 있었다. 모델에이전시와 연예인매니지먼트에 관심이 많았다.
조금 전 술 취해 소란 피운 남자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박상인이 재빨리 부둥켜안고 데려갔다. 남녀무리 중에서 한 명이 또 접근했다. 이번에는 최봉수가 등을 떠밀어 화장실 쪽으로 이끌었다. 둘 다 채정이를 의식해서였다. 5분도 채 안되어 자리로 돌아왔다. 천영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호기롭게 물었다.
“뭐 하는 놈들이여?”
“아, 김준희라고 동네친구야, 술 취했어.”
“그 시끼 동네서 어울린 양아치들하고 왔더만, 맨날 술 쳐 먹고 쌈질이나 하니.”
“김대용이는 여자친구의 친구들이랑 왔나 보던데?”
“응. 근데 정이씨를 알아보더라.”
“그래서, 뭐라고 했어?”
“목포친구후배라고, 모른척하라 했어.”
“으째, 이성이 가서 단도리 좀 하고 오까?”
“영기야 참아, 네가 가면 더 복잡해져.”
작은 박정진이 만류하고 화장실에 간다며 일어났다. 문승협도 뒤따라갔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혼자 다녀왔다. 10여분 지났을 즈음, 작은 박정진이 등뒤에 뭔가 감추고 등장하였다. 천영기와 눈빛을 교환하더니 테이블가운데를 정리하고 상자를 내려놓았다.
“문승협, 생일축하한다.”
“어저께 니가 산 케익보고 생각났잖애.”
“어쩐지, 내가 작박따라 화장실 갔는데, 순식간에 사라져서 어디 갔나 했다.”
작은 박정진이 초를 꽂고 불을 붙였다. 때마침 스피커에서 ‘겨울아이’가 흘러나왔다. 가수‘이종용’이 1980년에 발표한 노래였다. 작은 박정진이 신청했다며 친구들과 따라 불렀다. 자연스레 사람들 시선이 모였다. DJ가 연이어 1981년에 리바이벌한 ‘김세환의 겨울아이’도 틀었다. 일반대중에게 더 익숙한 곡이었다. 문승협은 채정이를 숨기느라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촛불을 끄고 케이크를 가르고서야 주변사람들 관심에서 자유로웠다. 그래도 평생 기억될 추억이고, 어느 때보다 훌륭한 생일축하였다. 마치 기념이라도 해주듯 창밖에 솜털 같은 눈이 펑펑 내렸다.
10시가 다가오자, 문승협이 집에 가야 할 시간이라며 다시 재촉하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던 채정이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무척 서운한 얼굴로 문승협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실내에서 밖으로 나오니 으쓱하였으나, 겨울날씨치곤 바람 한점 없이 포근했다. 함박눈이 내린 지 20분도 안 됐는데, 밝은 달빛아래 종로거리가 온통 하얗게 덮였다. 아스팔트 위 흰 눈을 지르밟으며 길 건너 택시승강장으로 향하였다. 채정이가 춥다고 핑계 대며 겨드랑이를 파고들었다. 문승협은 과감히 팔을 둘렀다. 어깨를 감싸 안으면 사람들이 채정이를 몰라보리라 생각했다. 채정이가 흡족한 표정으로 걸으면서도 아쉬운 눈빛을 여러 번 발산하였다.
“오늘 오빠에스코트 마음에 들어, 보호받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기분 좋아.”
“그래 맞아, 나는 채정이 보호자야.”
“호호호, 오빠, 우리 또 언제 만나? 저기, 오 오늘 말이야, 우리 집에서 잘래?”
“방금 내 에스코트가 맘에 든다 하고선 그런 말을 해?”
“뭐 어때, 오빠가 우리 집서 자면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남녀칠세부동석.”
“응큼하긴, 이상한 생각을 하네?”
“또 연락할게.”
“꼭 전화해야 돼, 알았지?”
“택시 타면 집까지 얼마나 걸려?”
“30분쯤.”
“집에 도착할 시간에 전화할게.”
“내년에 꼭 보는 거다?”
“그래요, 알았어요 아가씨.”
문승협은 늦은 시간이라 불안했다. 택시기사에게 보란 듯 번호판을 외우고 차문을 열었다. 채정이가 택시에 타면서 혀를 날름하였다. 좋아하는 사람인데 미웠다. 문승협이 피식 웃으며 문을 닫아주고 손을 흔들었다. 출발한 택시가 차량들과 섞여 분간이 어려울 때까지 지켜봤다. 채정이도 마찬가지였다.
문승협은 연타운으로 걸음을 옮겼다. 횡단보도신호를 기다리면서 채정이에게 도움이 되고팠다. 예전에 읽은 책‘키다리아저씨’가 기억났다. 꼭 그러라고 독려하는 마냥 눈발이 날렸다. 함박눈이 포근히 내리는 하늘을 보았다. 달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반짝이는 별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부턴가 목성이 목석같이 달을 지켜주는 것으로 보였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를 보호하는 목성처럼 채정이의 수호신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채정이가 한 말이 떠올라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까 정난희를 나의 첫사랑이라고 했지. 도대체 첫사랑의 의미가 뭘까? 그냥 처음 사랑해서 첫사랑일까? 아니면 두 번째 사랑이 있다는 암시일까? 그것도 아니면,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서 일까? 첫사랑 의미도 모르는 주제에 채정이에게 수호신이라니 가당찮은 욕심 같다. 그래 내 주제파악이 먼저다’.
채정이를 배웅하러 다녀온 사이, 친구들 생맥주잔에 바닥이 보였다. 대입원서마감이야기로 잔을 비우는데 30분 정도 더 걸렸다. 박상인이 버스 끊기기 전에 일어나자고 하였다. 큰 박정진이 먹고 마신 비용을 있는 만큼 갹출하자며 지갑을 꺼냈다. 문승협이 내겠다고 했지만, 친구들이 이구동성으로 생일자는 빠지라 하였다. 간혹 돈을 안 내려 꼼수 부린 얌체가 있기 마련인데 다행히 없었다. 아무리 속이려 해도 친구끼린 눈치로 알았다. 어차피 들킬 것인데도 꼭 있었다. 그런 처신 때문에 친구관계를 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프런트에 계산하러 간 큰 박정진이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미 채정이가 지불했다며 모은 돈을 어찌할지 물었다. 최봉수가 내일 대입원서를 낸 뒤 모여서 놀 때 쓰자고 제안하였다. 모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타운을 나와 버스정류소로 이동했다. 막차시간이 다가와 제법 혼잡하였다. 눈길에 연착돼 놓칠세라, 다들 버스 오는 방향을 근심스레 바라보았다. 문승협이 버스 기다리는 짬에 공중전화를 찾아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만 갈 뿐 받지 않아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필 타야 할 버스가 왔다. 빨리 오라 재촉한 친구들 손짓에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끓었다. 홍은동으로 향하던 버스가 무악재 눈길에서 엉금엉금하였다. 차창 밖 하얗게 눈 덮인 대지를 보며 채정이를 무한 걱정했다.
친구들 전부 유진상가에서 내렸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쉽다며 일본식 꼬치집에 들어갔다.
“얘들아, 맥주 마시고 있어,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승협이 저 시끼 왜 채정이랑 안 사귀는지 모르겠다?”
“승협이 사귀는 애 있잖아, 정난희.”
“헤어졌다던데?”
“누가 그래?”
“아까 채정이가.”
“아야, 느그들 승협이 앞에서 절대 그런 말 마라잉, 저 시끼 아직 정난희 못 잊었은께.”
“하면 어때서?”
“순정파여 순정파, 아무도 못 말리는 순정파라고.”
“쟤 채정이한테 전화하러 갔을걸?”
“채정이는 채정이고, 정난희는 정난희란께.”
“무슨 뜻이야?”
“채정이가 암만 사귀자고 자빠져도, 승협이 가슴에 정난희가 있어갖고 안 된단 말이여.”
“야, 여자면 몰라도 남자는 한번 찍으면 다 넘어가, 더구나 채정이 같은 애라면 더하지.”
“어허, 승협이를 모른 소리는 하덜덜 말어.”
“영기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승협이를 원투데이 겪냐, 저 시끼 속에 수천번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어 내가.”
“에이 설마.”
“채정이보다 더한 가시나가 와도 택도 없단께.”
“진짜 그 정도야?”
“잉, 만약에 내 말이 틀리믄 내손에 장을 지진다.”
문승협은 화장실보다 공중전화부터 찾았다. 아직 채정이가 집에 도착하지 않았으면 어쩌나 불안불안하였다. 네 번째 신호 끝에 수화기가 들렸다.
“여보세요?”
“오빠, 나 방금 들어왔어.”
“아 그래 다행이다. 너 가고 40분쯤 지나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걱정됐거든.”
“말도 마, 남산 1호 터널이 꽉 막혔어. 눈이 엄청 와서 차가 움직이질 않더라.”
“그래서 늦었구나, 나는 또 무슨 일 생겼을까 봐 별의별 생각을 다했지 뭐야.”
“아까 그 시간에 택시 타면 차도 별로 없어서 한남동까지 금방인데, 이런 경우 처음이야.”
“하하, 오늘 여러 가지로 특별한 날이네.”
“나랑 끝까지 통화 안되면 어떡할라고 했어?”
“네가 탄 택시번호판을 기억해 뒀으니, 경찰서에 신고할까 말까 고민했지.”
“그러게 나랑 같이 우리 집에 왔으면, 그런 고민할 필요 없이 얼마나 좋아.”
“정이야, 네가 계산했어?”
“응, 얼마 안 나왔어. 오빠생일이기도 하고, 내가 얻어먹기도 좀 그렇고 해서. ”
“고마워, 근데 다음부턴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왜, 내가 잘못한 거야?”
“아니, 잘못한 건 아닌데 내가 미안하잖아, 나 너한테 미안한 거 싫거든.”
“오빤 학생이잖아.”
“너도 학생이잖아.”
“나는 돈을 벌잖아.”
“아 알았어, 친구들이 고맙다고 전해달라더라.”
“오빠 화났어?”
“아니야, 화 안 났어.”
“지금 어디야?”
“친구들 집 근처, 홍은동.”
채정이가 오늘 일들을 회상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문승협은 묵묵히 들어줬다. 통화중간 틈틈이 양념을 쳤다. 건강 챙겨라 일찍 다녀라, 채정이 단속은 필수였다.
“또 전화할게, 잘 지내고 있어, 알았지?”
“벌써 끓으려고?”
“미안,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너 먼저 끊어”
“알았어, 꼭 전화해, 기다릴게 오빠.”
문승협은 울먹인 채정이 목소리에 속상했다. 좀 더 다독여줄걸 후회하면서도 무사해 안심됐다. 사심 없는 채정이의 수호신이 되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디 화장실을 갔길래, 이렇게 오래 걸리냐?”
“아, 채정이랑 통화했어, 집에 잘 들어갔는지 확인차.”
“거봐, 내 말이 맞지?”
“뭐가 맞아?”
“내가 채정이한테 전화하러 갔을 거라고 했거든.”
“둘 다 맞아, 화장실도 갔으니까.”
“승협아, 너 채정이랑 사귀지 그러냐?”
“무슨 소리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순간 피식 웃는 천영기와 서울친구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문승협은 무슨 영문인지 친구들을 살폈으나 알 수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 자신과 채정이를 두고 말이 오갔다는 짐작 정도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