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41)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겨우 몸을 추슬러 등굣길에 나섰다. 등교하는 또래 고등학생들 얼굴에 어둠이 짙었다. 버스 안에서도 간간이 한숨소리가 들렸다. 교실분위기 또한 무거웠다. 어제 전국적으로 치러진 대입학력고사여파였다.
학생들은 대충 세분류로 나뉘었다. 꾸준히 공부에 집중하는 면학파. 더 놀다 내년 1월 1일부터 마음잡고 공부하겠다는 계획파와 대학포기파였다. 면학파와 계획파 아이들은 대입학력고사에 근심걱정이었다. 대학을 포기한 아이들은 취업으로 고민이었다.
문승협도 대입학력고사공부로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성문제와 가정불화까지 천근만근무게가 짓눌렀다. 다 잘하고 잘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쫓겼다. 스트레스가 날로 쌓여가고 일상이 흔들렸다.
일요일 정난희전화를 받았다. 다음 주 토요일 만나자는 말에 기운이 솟았다. 약을 먹어도 낫지 않던 감기몸살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공부에도 의욕이 생겼다.
목요일아침 학교 가려고 밥을 먹는데 TV에서 ‘오송회사건’이 보도되었다. 오송회사건관련자 9명을 구속했다는 전라북도경찰브리핑을 인용하였다. ‘군산제일고 전현직교사’라는 말이 의아했지만 곧 잊었다.
오송회사건이 문승협과 친구들의 이목을 끈 것은 뜻밖에도 금요일 김생출선생의 국민윤리시간이었다.
“선상님, 오송회사건이 뭐다우?”
“허허, 병돈이가 먹는 거에만 관심 있는 줄 알았더니, 시사에도 관심이 많구나?”
“저그 앉은 문승협이가 그럽디다, 입으로만 먹지 말고 머리로도 먹으라고.”
“허허허, 하하하.”
반아이들이 오송회사건이 뭐냐며 웅성거리다 노병돈농담에 깔깔거렸다.
“음, 오송회사건이라.”
“몇 달 전에 판결 난 부림사건과 비슷한 거 아닌가요?”
“그래, 그 이전의 무림사건, 학림사건과도 비슷하지.”
“글믄 또 고문해서 만들어낸 용공조작사건이겄그만?”
오송회사건은 전라북도 군산제일고등학교 전현직교사 9명을 ‘오송회’라는 반국가이적단체조직과 간첩행위 등으로 구속한 사건이다. 전북도경이 군산경찰서에서 입수한 ‘월북시인 오장환시집의 병든 서울’을 계기로 군산제일고등학교교사들을 내사하였다. 4.19와 5.18 기념식을 열어 시국토론을 하고 ‘김지하시인의 오적’ 낭송과 북한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교사들을 연행했다. 구속된 교사들은 평소 뜻이 맞는 교사들끼리 독서모임을 가졌을 뿐이었다. 막걸리를 사 들고 학교뒷산에 올라가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자추모의식, 시낭송과 토론한 것이 전부였다.
“이 정도가 내가 아는 진실이다, 너희들 생각은 어때?”
“선상님 말씀이 사실인지 두고 봐야 제라.”
“아야, 선상님이 언제 거짓갈 한 거 봤냐?”
“허허, 선생님말이라고 다 믿지 마라.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꼭 너희들이 직접 확인해.”
“국가공권력이 뭣 땀시 그런 몹쓸 짓을 한다요?”
“국민을 위한 권력이 아니라, 사리사욕 군부독재를 위해서가 아닐까?”
“그런 짓을 벌려놓고도 괜찮을란가?”
“그런 짓을 해도 괜찮은지, 그런 짓을 하면 안 되는지, 너희들이 평가하고 역사가 평가해야지.”
“우리가 뭔 힘이 있다고라우?”
“너희들이 잊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기억한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다들 이 말 알지?”
“예.”
김생출선생이 ‘역사의 기억은 만약에 라는 질문부터 시작한다’는 말로써 수업을 마쳤다. 보통 수업 끝종이 울리면 시끌벅적하였으나, 반아이들이 반복되는 국가공권력오남용에 항의하듯 쉬는 시간에 엄숙했다.
오송회사건은 군산제일고전현직교사들을 고정간첩단으로 몰려는 경찰의 계획이었다. 올해 1982년 11월 2일, 전현직교사들이 전주대공분실지하실로 끌려갔다. 영장도 없이 40여 일간 불법감금상태에서 고문기술자에게 폭행과 고문을 당하였다. 군산제일고교사출신 KBS남원방송총국부장은 단지 교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에서 간첩단수괴로 지목받고 가혹행위를 겪었다.
경찰은 최후의 5.18 수배자라 불리던 윤한봉을 북한과 연결고리로 ‘김일성-윤한봉-이광웅-오송회’의 계보도를 만들었다. 체포된 전현직교사들을 고문하면서 윤한봉과 관계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윤한봉은 학생운동배후자로 수배되어 광주민주화운동직전 5월 17일 광주를 벗어났다. 서울서 도피생활을 하던 중 이광웅의 매제집에 잠깐 머물렀다. 그때 여름방학을 맞아 여동생집에 들른 이광웅이 윤한봉을 만났다. 경찰은 이를 가지고 오송회가 윤한봉지시를 받았다는 자백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하지만 윤한봉은 이미 1981년 4월 29일 경남마산에서 화물선으로 밀항하여 6월 4일 미국워싱턴주에 도착했다. 에드워드케네디상원의원 등의 도움을 얻어 정치적 망명허가를 받은 상황이었다. 사건진행 중에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에 망명해 있는 윤한봉에게 군산의 교사들이 지휘받았다는 내용은 맞지 않게 되었다. 경찰은 계보도의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을 스스로 수정하기까지 하였다.
점심시간이 시작되고 1∙2학년 반장부반장은 야자시간에 강당으로 모이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모범생들이라 야자시간시작종이 울리기도 전에 집합했다. 교무과장과 교련주임선생 주도하에 내년도 학생회임원과 학도호국단간부를 선출하는 자리였다. 일사천리진행하여 전교회장에 임창열, 학도호국단 연대장 겸 부회장에 강원종이 뽑혔다. 요즘은 국민학교회장도 선거를 치른다며 선출방법을 바꾸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대입학력고사공부라는 현실을 핑계로 타협하였다. 아직 더딘 걸음의 학교민주화를 후배들에게 맡겼다. 문승협도 국민학교 때 학생회장선출을 학생투표로 바꿨던 기억이 있지만 별말 없이 대세에 따랐다. 내년 학도호국단 3학년 대대장도 어쩔 수 없이 맡았다. 한 시간 만에 모든 보직을 정하고 강당을 빠져나갔다. 2학년 7반 부반장 강동우가 이야기 좀 하자며 문승협팔을 다정하게 잡아끌었다.
“무슨 일이야?”
“아, 저 거시기, 니한테 사과할라고.”
“뭘?”
“전에 니한테 억지 부리고 멱살 잡았던 거 말이어.”
“나 너한테 실망했잖아, 알아?”
“아따 그때는 내가 윙스리더였은께, 그룹사운드에 애착이 많아서 그런 거여.”
“그건 이미 알고.”
“그라믄 뭔디야?”
“너 나를 피해 다녔잖아, 안 그래?”
“잉 맞어, 미안해 갖고 그랬어.”
“그럼 이제부턴 안 피해 다니겠네?”
“니가 사과받아주믄 피할 이유가 없겄제.”
“야, 실망은 뭔가 기대하는 것이 있어서 하는 거야.”
“뭔 말이대?”
“내가 너한테 기대하는 게 있어서 실망한 거라고.”
“나한테 뭘 기대한디야?”
“서로 예전처럼 잘 지내는 거.”
강동우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교실로 가면서 문승협뒤를 이어 싱어를 맡았던 주신의 자퇴소식을 알려주었다. 자퇴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간혹 고향이 시골이거나 섬인 친구들이 가업을 도우려 불가피하게 고등학교를 중퇴하였다. 대학진학과 고등학교졸업장을 포기한 채 하루빨리 산업전선에 뛰어드려는 친구도 있었다.
오전수업만 하는 토요일등굣길은 학생들에게 즐거움이었다. 문승협이 교실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포장꾸러미 몇 개가 놓여있었다. 최신가요와 팝송을 녹음한 테이프, 새로 나온 5색 형광펜과 요점노트 등 대학입시를 앞둔 고등학생에게 요긴했다. 문승협기억에 2학년 4반 교실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반친구들의 생일선물에 답례가 예의였다. 수업이 끝난 뒤 학교 앞 분식집에서 점심을 사기로 하였다.
문승협과 김부일 등 친구 10여 명이 학교건너편 분식점에 모였다. 생일케이크는 없었으나 다들 기쁘게 축하했다. 각자 주문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이병규와 노병돈이 TV에서 봤던 롤러스케이트장이 생겼다며 놀러 가자고 하였다. 문승협은 정난희와 약속이 있어 함께 가지 못했다.
문승협이 목포극장에 도착한 시각은 3시 10분 전이었다. 곧이어 정난희가 나타났다.
“오빠,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냐, 약속시간 다 됐는데?”
“에이, 내가 영화표 사놓고 기다리려고 했단 말이야.”
“하하, 그럼 저쪽에 있다가 다시 올게.”
“피, 됐어.”
정난희가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샀다. 영화표 한 장을 문승협에게 주고 먼저 들어갔다. 역시나 누군가의 눈에 띌까 걱정에서였다. 문승협도 익숙하게 정난희와 시차를 두고 입장하였다. 극장매점 앞에 줄 선 정난희가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라며 강하게 눈짓했다. 문승협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정난희가 먹거리를 안고 어두운 조명 속에서 더듬더듬 자리를 찾아왔다.
“그냥 들어오지 그랬어, 내가 가서 사 오면 되는데.”
“괜찮아, 오늘은 오빠 생일이니까 가만히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
“오빠는 오란씨고, 나는 콜라.”
“오호, 내 취향을 알다니.”
“우리가 사귄 지 1년이 되어가는데 그걸 모를까.”
“와, 감동.”
“별 걸 다 감동이야, 근데 오빠는 오란씨가 왜 좋아?”
“그 그냥, 톡 쏘면서 달콤하잖아.”
“톡 쏘고 달콤한 건 당연 콜라지.”
문승협이 왜 오란씨를 좋아하는지 물음에 움찔하면서도 과자봉투를 뜯어먹기 좋게 폈다. 둘은 주위에 들리지 않게 소곤소곤 대화하였다. 문승협은 갑자기 정난희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화기애애하고 다정다감하게 함께 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오빠, 이 영화 알아?”
“대충은 아는데, 자세한 건 몰라.”
“나는 몇 해 전에 책으로 읽었어.”
정난희가 영화시작까지 10여분 정도 남은 시간에 영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이야기하였다.
미국소설가 ‘마거릿미첼’이 쓴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이었다. 이 한편으로 세계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 작가가 됐다. 1,037쪽 거대분량으로 1936년에 출판하여 퓰리처상을 받았다. 1939년 영화로 만들어 아카데미상 10개 부문을 휩쓸었다. 238분 러닝타임에 쉬는 시간도 있는 영화였다. 진정한 할리우드흥행대작으로 30년간 흥행순위 1위를 고수했다. 당시로는 상상을 초월한 425만 달러가 투자되었다. 13명의 작가와 ‘조지쿠커, 샘우드, 빅터플레밍’등 5명의 감독손을 거쳐 완성하였다. 1,400명의 여배우를 인터뷰하고, 400명의 대본오디션을 통해 ‘스칼렛오하라’ 배역에 ‘비비안리’를 뽑았다. 여주인공 비비안리가 상대 배우 ‘클라크게이블’의 입냄새 때문에 키스신을 꺼렸다는 영화가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의상은 영화공개 전부터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스칼렛역의 비비안리를 위하여 무려 5,500벌의 드레스를 디자인했다는 일화가 전해졌다. 비비안리가 열연한 영화 속 스칼렛의 옷들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18인치 허리를 더욱 조이던 레이스업 장면. 자신의 가난함을 숨기기 위해 커튼을 뜯어 만들어 입은 초록색 벨벳드레스. 검은 상복차림으로 레트와 춤추던 모습. 스칼렛의 강한 성격을 드러낸 불타는 붉은색드레스. 소매가 넓은 새하얀 레이스잠옷에 이르기까지, 마치 의상이 또 하나의 주인공 같은 영화였다. 영화에 실제 사용된 의상만 해도 4,118벌이었다. 무려 16만 달러 정도가 의상비로 쓰였다. 1930년대를 감안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스칼렛은 44벌, 레트는 36벌의 옷을 입고 등장하였다. 1939년 할리우드는 화려한 스타시스템이 확립되던 무렵이었다. 이브닝드레스와 페티코트, 보석과 장신구 등을 한껏 사용해 스크린 속 스타를 보통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포장하던 시기였다. 이 영화의상담당디자이너는 ‘월터플랭킷’으로 스타시스템을 만드는 데 일조한 전문가 중 한 사람이었다. 비비안리는 이 작품으로 첫 번째 오스카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여세를 몰아 ‘애수’ 등의 영화에 출연하며 승승장구하였다. 이후 5년이 비비안리에게 있어서 인생황금기로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다.
정난희는 영화 보기에 앞서 원작뿐 아니라 가십거리까지 알았다. 뭐든 하면 완벽할 정도로 준비성이 철저했다. 문승협은 그럴 때마다 존경스러웠다.
영화가 시작되고 정난희가 손을 포개었다. 문승협은 반갑게 감싸 쥐었다. 행여 땀이 베이면 손을 거둬갈까 봐 몰래 닦아내기 바빴다. 팔짱을 끼며 기대어 왔을 땐 콧속으로 스며드는 정난희향기에 심장이 쿵쾅댔다. 레트버틀러와 스칼렛오하라가 키스하는 신에서 침 삼키는 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은근슬쩍 곁눈질로 정난희표정을 살피고 입술을 훔쳐봤다. 영화 보는데 몰입을 방해하고 줄거리를 놓치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장장 4시간 가까운 상영이었지만 전혀 지루함이 없었다.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정난희가 귓속말로 ‘백악관’으로 오라는 말을 남기고 극장을 빠져나갔다. 문승협은 같이 나가고 싶은 충동에 살짝 서운하였다. 불 켜진 극장 안에 많은 인파를 보고 금방 이해했다. 관객들이 반쯤 빠져나갈 즈음 일어섰다.
사람들이 백악관이라 부르는 경양식집의 본래 이름은 ‘하얀 집’이었다. 문승협이 하얀 집에 들어서자, 종업원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안내하였다.
“춥지, 이거 따뜻한 보리차 좀 마셔.”
“아까 극장에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나오면서 보니까 사람들이 엄청 많더라?”
“그러게, 서울국도극장에서 재상영했는데, 거기서도 완전 매진이었대.”
“옛날에 개봉했을 때도 그랬나?”
“응, 아마 나중에는 비디오로 출시되고, 더빙해서 TV특선영화로도 방영할 거 같아.”
“대단한 인기다. 참, 음식 주문해야지?”
“오빠 오기 전에 주문했어.”
“난희야, 좋은 영화 보여줘서 고마워.”
“영화 본 소감은 어떠셔?”
“스칼렛이 짝사랑한 애슐리가 부럽더라, 누구에게 사랑받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오빠도 엄청 많이 사랑받으면서 그래, 내가 아는 사람만도 몇 명인데?”
“내가?”
“채정이, 홍지아, 차여선, 계속 말할까?”
“아, 내가 괜한 소릴 했구나.”
“흥, 어디 한두 명이어야지, 버스에 다 태우면 아마 한대로도 부족할걸?”
“아니 짝사랑 말고 사랑 말이야 사랑.”
“나한테 사랑받고 있잖아, 혹시, 못 느끼는 거야?”
“아 아니, 느껴, 엄청 많이.”
“당황하는 저 눈빛 좀 봐, 그러게 영화 잘 보고 왜 뚱딴지같은 소릴 해?”
“미 미안, 화났어?”
“됐어, 수프나 먹어.”
종업원이 수프를 가져왔다. 안절부절못하는 문승협모습에 피씩 웃으며 내려놓았다. 정난희가 양파수프를 떠먹으면서 문승협을 물끄러미 보았다.
“나는 말이야, 마지막에 스칼렛이 진정한 사랑을 깨달을 때 떠나버린 레트가 이해되면서도 아쉬워.”
“여자들은 다 그런가, 짝사랑에 빠지면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남자를 몰라봐?”
“여자 나름이겠지만, 보편적으로 그렇다고 봐야지.”
“그 장면이 왜 아쉬워?”
“레트가 조금만 더 참아 줬더라면 하는, 뭐 그런 거지.”
“아주 쌤통이야, 진심으로 사랑해 준 남자마음을 그렇게 늦게 알다니.”
“오빠는 날 위해 끝까지 참고 기다려줄 거지?”
“어허, 당연한 걸 물으실까?”
“호호, 든든한데?”
“난 스칼렛이 한 그 대사에서는 눈물 나더라.”
“아,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응, 레트가 떠나고 난 후 계단에 엎드려 우는 스칼렛이 너무 불쌍했어.”
“그런데 그 대사 잘못된 번역이야, 내일은 또 다른 내일이라는 뜻 이래.”
“그럼 엄청 잘한 오역이네, 머리에 딱 박히던데?”
유명한 대사‘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는 한국에서 초월번역으로 유행했다. 문승협에게 또 하나 눈에 띈 장면이 있었다. 스칼렛왼손에 쥔 버틀러가 준 손수건이었다. 영화에서는 신사의 상징이었으나, 문승협에게는 이별의 상징으로 재확인시켜줬다.
수프를 다 먹어갈 즈음 스테이크가 나왔다. 문승협은 고기를 먹기 좋게 자른 뒤 정난희접시와 바꿨다.
“고마워.”
“어서 먹어봐.”
“맛있어, 오빠도 얼른 먹어.”
“난 스테이크는 처음이야.”
“오빠, 그거 알아?”
“뭐?”
“스칼렛이 마신 음료가 칵테일로 만들어졌는데, 그 이름이 스칼렛오하라야.”
“여기 레스토랑에도 있나? 한번 시켜볼까?”
“어쭈, 범생이가 별말을 다하네?”
“하하, 너랑 있으니까 막 용기가 생기는데?”
“피, 그 용기 때문에 큰일 나겠다. 오빠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거 있어?”
“음, 클라크게이블의 미소와 수염?”
“왜?”
“멋있고 매력적으로 느껴졌어, 나중에 어른이 되면, 그렇게 한번 수염을 길러보고 싶어.”
“난 스칼렛이 입었던 의상들, 특히 그 크리놀린드레스.”
크리놀린드레스의 넓은 자락이 정난희에게 아름다운 꿈처럼 기억되는 영화였다. 문승협과 정난희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인생영화로 꼽았다. 둘은 영화이야기를 하며 저녁식사를 마쳤다. 정난희가 가방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거 집에 가서 펴봐.”
“뭔데?”
“생일선물.”
“우아, 선물까지 준비했어?”
“호호, 별거 아냐.”
“고마워.”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약속 잡지 마, 알았지?”
“무슨 일 있어?”
“아무튼 약속 잡지 마, 알았어?”
“응.”
“이제 가자, 나 9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해.”
문승협이 계산하려고 선뜻 프런트로 갔다. 정난희가 붙잡으며 극구 제지하였다. 문승협은 지갑을 꺼내 돈을 치르는 정난희를 어색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둘은 시간에 쫓겨 택시를 잡아 탔다. 뒷자리에 앉아서 택시기사시선을 피해 손을 깍지 끼고 애정행각을 벌였다. 정난희가 은근슬쩍 문승협어깨에 기댔다. 문승협은 쑥스레 백미러를 보며 택시기사눈치를 살폈다. 정난희는 집과 가까운 큰길이 아닌 작은 길로 택시를 유도하였다. 어스름한 골목길에서 차를 세웠다.
문승협이 택시비를 지불하는 사이 정난희가 내렸다. 저만치 떨어져 아는 사람이 오가는지 주위를 둘러봤다.
택시가 떠나자, 정난희가 문승협팔을 당겨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문승협은 영문을 모른 채 이끌려갔다. 정난희는 조금의 여유를 두지 않고 문승협목에 팔을 감으며 입맞춤을 감행했다. 문승협은 돌발적인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금방 순응하였다. 꽤 긴 시간 서로 입술을 탐했다. 배우지 않은 어설픈 키스였지만 동물적 감각이 자연스레 발휘되었다. 정난희는 시작 때도 그랬듯이 일방적으로 키스를 끝냈다. 수줍어하며 ‘잘 가’라는 인사를 남기고 집 쪽으로 뛰어갔다.
문승협에게 오늘은 정난희집 근처에서 일어난 일들 중 단연코 최고의 로맨틱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정난희를 지켜보다 발길을 돌렸다. 쌀쌀한 겨울날씨 마저 포근하게 느껴졌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실성한 사람이었다.
집에 들어서면서 잠시 긴장하였으나, 아버지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행복을 배가시켰다. 방에 들어가 정난희에게 받은 선물을 풀었다. 지혜명언 20가지가 담긴 탈무드책이었다. 엽서 마지막에 쓰인 ‘사랑해’라는 글귀가 황홀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여러 이유로 한 달 보름 남짓 침체에 빠졌었지만, 정난희와 생일을 보내면서 생기를 되찾았다. ‘사랑해’라고 중얼거리며 잠자리에 들었다.
국회재무위원회가 1986년부터 금융실명제실시를 의결하였다. 부산고법은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주동자 2명에게 사형, 가담자 4명에게 징역 10년 등 실형을 선고했다. ‘1천만 이산가족재회추진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이산가족들이 희망에 부풀었다. 서울지하철 2호선 종합운동장역과 교대역 구간이 개통됐다.
야당정치지도자 김대중이 부인과 미국망명을 택하였다. 청주교도소에서 치료를 위해 서울대병원에 이송되었다가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직후였다. 사건조작과 체포, 망명까지 군부독재의 만행이 있었다. 김대중이 배후에서 5.18 민주화운동시위를 사주한 증거가 전혀 없었으나, 신군부가 두 달 동안 혹독하게 고문해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자백을 받아냈다. 오직 자백만을 근거하여 내란음모죄로 기소했다. 재판부는 구체적 증거 없이 유죄판결을 내렸다. ‘죄가 없으면 자백하겠냐’는 화려한 논리의 오류였지만, 군부정권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로 여기던 풍토가 한몫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정권을 장악하려는 신군부의 집권방해세력체포계획에서 출발했다. 체포대상자는 크게 두 부류였다. 국기문란을 이유로 학생운동권인사들과 재야민주화인사들이 대거 포함됐다. 가장 핵심인물이 김대중이었다. 또한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공화당 김종필과 유력인사들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김대중본인도 위험을 감지하였는지 1980년 5월 13일 기자회견을 했다. ‘북한공산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해 폭력에 의한 야욕을 성취하려고 음모를 획책하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 경고한다.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안정을 유지하여 북한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아야 한다’라며 학생운동권의 질서유지를 당부하였다. 이는 ‘서울역회군’에도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재야민주화운동단체‘국민연합’이 1980년 5월 16일 성명발표로 ‘비상계엄해제와 전두환공직사퇴, 명확한 정치일정 공개’등 5월 18일까지 응답할 것을 촉구하려 했으나, 선언문초안을 받아본 김대중이 국회에서 5월 20일에 계엄령해제를 논의하는 본회의가 열리는 만큼 5월 22일로 연기토록 주문하였다. 계엄군에게 상부명령을 따르지 말라는 내용에 대해서는 내란음모로 몰아갈 우려가 있다며 삭제를 권고했다. 이처럼 김대중은 신군부에게 민주화운동탄압명분을 주지 않으려 여러모로 노력하였다. 전두환이 김대중사형을 당장 집행할 기세였지만, 국제사회는 김대중구명을 촉구하고 압박했다. 김대중이 ‘동아시아의 만델라, 동아시아의 민주화운동의 거목’으로 주목받던 터였다. 최종판결 최후진술에서 ‘나는 먼저 죽지만 먼저 죽은 나를 생각해서 이 땅에 다시는 정치보복이 없도록 해달라’라는 김대중발언도 널리 알려졌다. 국제적으로 김대중에 대한 동정여론이 확산됐다. 게다가 재판과정에서 미국무부법률담당특보가 직접 참관하는가 하면, CIA한국지부관계자가 ‘우리는 김대중에 대한 당신들의 고발이 매우 억지스럽다고 생각한다’며 사실상 전두환정권에 경고하였다. 미국대통령에 당선되어 민주주의수호자를 자처한 로널드레이건 역시 김대중사형을 막기 위해 와인버거국방장관과 그레그 전 CIA한국지부장을 파견하여 김대중구명을 요구했다. 에드워드케네디의원도 김대중구명운동에 앞장섰다. 앨고어상원의원이 김대중석방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두환에게 발송하였다. 독일에서는 빌리브란트 전 총리가 나섰으며, 교황요한바오로 2세가 두 차례 서한을 보내 김대중을 선처해 달라고 촉구했다. 전두환은 국제적인 압력에 김대중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다시 20년 형으로 감형하였다. 심지어 일본까지 북한과 수교를 거론하며 압박하자, 안기부장이 김대중을 석방해 미국일본과 외교관계 마찰을 막아야 한다고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전두환이 고집을 꺾고 광복절특사에 김대중을 포함시킬 것을 검토했으나 신군부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됐다. 하지만 미국의 압력이 멈추지 않았다. 결국 김대중을 신병치료라는 명분으로 미국에 내보내기로 결정하고, 안기부장을 통해 김대중의 부인 이희호여사에게 전달하였다. 김대중은 처음에 거부했으나 탄압받는 주변사람들을 생각하여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마침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자유의 몸이 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