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10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40)

by 태양을 품은 별

다음날, 문승협이 시립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정난희를 만나러 가려고 서둘러 나왔다. 3주 사이에 두 번의 통화가 있었으나, 한 달 만에 만나는 설렘이 가벼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12시 10분 전쯤 약속장소‘폭풍의 언덕’에 도착하였다. 꽤 알려진 경양식집으로 클래식음악이 흘러나왔다. 잠시 후 정난희가 들어왔다.

“왜 이렇게 구석진 자리에 앉았어?”

“너 남의 시선 신경 쓰일까 봐.”

“오호, 딴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딴생각?”

“응, 응큼한 생각.”

“다른 자리로 옮길까?”

“호호, 아냐.”

좌석입구에 커튼이 달린 레스토랑안쪽 구석자리였다. 종업원이 엽차를 한잔 더 가져왔다. 정난희가 메뉴판을 펼쳐 문승협 앞으로 밀었다.

“오늘은 내가 살게, 먹고 싶은 거 골라.”

“오므라이스도 좋고, 생선가스 먹을까?”

“아냐, 돈가스랑 햄버거스테이크 먹자.”

정난희는 늘 그랬듯 문승협의사와 상관없이 주문하였다. 문승협도 딱히 피력하지 않았다.

“여기 레스토랑 이름이 책제목하고 똑같더라?”

“맞아, 폭풍의 언덕. 참, 전에 내가 권한 책 다 읽었어?”

“아 아니, 데미안만 읽었어.”

“어허, 참 말 안 들으시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꼭 읽고, 시간 내서 테스도 읽어봐.”

“그런데, 테스는 야한 책 아닌가?”

“오빠도 다른 남자들하고 똑같구나, 하여튼 남자들은 다 속물이야.”

“그냥 물어 본거야.”

“그런데다 중점 두지 말고, 한 여자의 불운한 일생에 주안점을 두고 읽으라고요.”

어색한 순간, 종업원이 식사도구를 세팅하고 크림수프를 내려놓았다. 문승협이 수저를 들며 화제를 돌렸다.

“우리 학생인데, 여기 들어와도 안 걸려?”

“응, 사복 입어서 괜찮아, 술만 안 시키면 돼.”

“그래?”

“지난번 영산강하구언에 있는 로망스라는 레스토랑도 나랑 같이 갔었잖아?”

“아, 그랬지.”

문승협은 ‘초원의 집’도 생각났다. 채정이를 문승협에게 소개해주려고 김부일과 채영이가 데려갔던 곳이었다. 행여 정난희에게 꼬투리 잡힐까 싶어 지레 겁먹고 시치미 뗐다.

“이런 경양식집은 어른들하고만 오는 줄 알았어, 예전에 작은 고모랑 왔었거든.”

“순진하긴. 어제는 뭐 했어?

“담이랑 영기 만났어.”

“셋이 몰려다니면서 뭐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니야?”

“아냐, 항상 도서관에서 만나는데 뭘.”

“도서관에서 만나 놀기만 하면 공부는 언제 해?”

“도서관에서 노는 사람도 있구나, 나는 몰랐네?”

“호호, 월말고사는 잘 쳤어?”

“응, 그럭저럭.”

“다 다음 주 토요일 오빠생일에 영화 보자.”

“지 진짜?”

“뭘 그렇게 놀래?”

“하하, 놀래긴 좋아서 그러지.”

문승협은 뜻밖의 이벤트에 감격하면서도 어제 만다라와 애마부인 영화를 본 것이 찔렸다.

때마침 식사가 나왔다. 문승협이 정난희 앞에 있는 햄버거스테이크접시를 가져다 먹기 좋게 칼질해 줬다.

“오빠도 좀 먹어.”

“응.”

“참, 장학퀴즈학교예선은 어떻게 됐어?”

“난 떨어지고, 명성윤하고 임창열이 됐어.”

“에이 실망이다.”

“실망?”

“왜, 듣기 거슬려?”

“좋은 말도 많잖아.”

“오빠, 사랑하면 다 좋은 소리로 들려, 쩝쩝거리며 먹는 소리마저도.”

“그래도, 그렇게 면박을 주면.”

“그게 싫어지면 사랑도 내리막 길이야.”

“…….”

“그래, 사랑받길 원한다면 말과 행동도 사랑받게 해야지,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기도 하고. 맞아, 세상에 노력 없는 사랑은 없으니까. 그런데, 맹목적 사랑의 결말은 이별이야.”

“그렇다고 이별을 이야기하냐, 화났어?”

“말이 그렇다는 거야, 하지만 현실이 될 수도 있어.”

“난희야, 넌 왜 자꾸 나를 작아지게 만들어?”

정난희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승협은 얼른 눈을 내리깔고 먹는데 집중했다. 정난희는 잠시 문승협을 바라보다 말없이 식사하였다. 경양식반찬으로는 역시 단무지며 단연 맛있어야 했지만, 문승협에게 유독 시큼하게 느껴졌다. 후식으로 주문한 아이스크림과 오렌지주스를 종업원이 가져다 놓고 갔다.

정난희가 커튼을 풀어 가리더니 문승협옆자리로 건너갔다. 문승협이 좌석안쪽으로 엉덩이를 살짝 옮겼다. 정난희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오렌지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문승협왼손을 깍지 껴 잡았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문승협을 빤히 쳐다봤다. 문승협이 같이 바라보자 정난희얼굴이 쑥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호흡을 멈췄다. 눈이 스르르 자동으로 감기며 맥박이 빠르게 진동하였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몸에 열이 오를 즈음, 정난희가 입술을 뗐다. 가쁜 숨으로 보아 분명 예전보다 긴 입맞춤이었다. 입맞춤 뒤에 어색해진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이래도 오빠가 작게 느껴져?”

“아 아니.”

조금 전 상했던 문승협마음이 입맞춤 한 번으로 금세 아물어버렸다. 자존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내 입에서 음식냄새나지 않았어?”

“아니, 달콤하던데?”

“이그.”

“아, 그래서 아까 생선가스 안 시키고, 후식으로 오렌지주스를 선택했구나?”

“뭐야, 내가 계획적이었다는 거야?”

“응,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렇지.”

“그래서, 싫어?”

“아니 좋아.”

“호호호, 나한테 또 확인받고 싶은 거 있어?”

“음, 확인까지는 아니고, 궁금한 게 두 가지 있어.”

“뭔데?”

“하나는 무용연구소.”

“무용연구소?”

“어떤 곳에서 무용하는지 궁금해.”

“남은 하나는 뭐야?”

“친한 친구.”

“내 친구?”

“응, 우리 사귄 지 1년 돼가는데 한 명도 못 봤잖아.”

“그게 왜 궁금해?”

“그냥, 너랑 친한 친구들은 어떤지.”

“오빠, 중학교 때부터 나랑 친했던 부현지 알지?”

“응, 내 친구 부용경동생이잖아.”

“오빠랑 사귄 이후 부현지랑도 안 만났어.”

“왜?”

“몰라서 물어?”

“알아, 무용 때문에.”

“그런데도 그래?”

“알긴 아는데, 그래도.”

“난 싫어, 싫다고.”

“친한 친구가 있긴 한 거지?”

“뭐라고?”

“혹시, 친구들에게 나 소개하는 게 창피해?”

“응, 더 이상 선 넘지 마.”

문승협은 굳이 친한 친구소개를 회피하는 정난희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미 정난희와 사귄다는 소문이 날 만큼 났고, 웬만한 또래들은 다 아는 사실이라 더 이상 감출 게 없다고 생각했다.

정난희는 문승협과 사귄 지 1년이 되어가도 여전히 소문에 신경 쓰였다. 문승협을 친구들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꼴이었다. 무용하다 슬럼프 왔을 때 핑계와 비난거리가 되는 빌미였다. 무엇보다 부모와 무용선생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었다.

“우리 사귀기로 했을 때, 오빠가 한 말 생각나?”

“무슨 말?”

“내가 무용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방해된다고 하니까 오빠가 했던 말, 잊었어?”

“여자친구무용을 수호하는 남자친구가 되겠다는 거?”

“응. 그리고, 우리가 사귀는 조건이라던 말도 기억해?”

“사람들 많은 곳에서는 모른 체하기, 만나자고 보채지 않기, 무용이 남자친구보다 최우선이니 이해해 주기, 공부에 더욱 집중하기.”

“다 기억하고 있네.”

문승협은 자신이 기세등등하게 하였던 말들과 정난희가 제시했던 사귀는 조건을 상기하였다. 잊은 건 아니었으나, 자기감정에 치우쳐 어떤 것이 먼저고 무엇이 중요한지 뒤죽박죽이었다. 남녀가 사귀다 보면 서로 생각하는 우선순위와 경중이 바뀔 때 발생하는 흔한 갈등양상이었다. 사귀기로 할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합당한 거부이유를 찾지 못하였다. 자아를 버리는 대신 운명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만나는 횟수와 시간이 흐르면서 자꾸 숨겨진 남자라는 느낌이 들어 불만이었다.

“마음이 변한 거야?”

“아니야, 그런 거 아냐.”

“근데, 왜 오빠답지 않게 투정이야?”

“나다운 게 뭔데?”

“오빠가 더 잘 알잖아.”

“요즘은 나도 날 잘 모르겠어.”

“무용 선생님과 선배들 말처럼, 역시 발레리나에게 남자는 방해인 건가?”

“남자도 남자 나름이야, 난 달라.”

“그래, 그때도 오빠가 그렇게 말했어.”

“…….”

“그런 속설을 깨트리는 최초 남자가 되겠다고도 했고.”

“…….”

“오빠가 그렇게 장담하길래, 내가 오빠처럼 생각하는 남자도 나중에 지쳐서 다 떨어져 나간다고 했잖아.”

정난희가 유치원 때부터 들은 진리이자 학설이라며 예전에 주장했었다. 대화 속 이야기주인공이 자신의 현실이라는 생각에 속상하였다. 무용계자연선택설 같은 진화론적지론을 다시 한번 강조하려다 말을 아꼈다.

문승협은 약간 무색했다. 발레리나에게 남자친구가 유용한 점이 있을 거라고 반박하였던 것도 기억났다.

정난희는 문승협을 남자친구로 택한 이유를 회상했다. 언제까지나 자신을 바라봐주고, 원한다면 뭐든 들어주며, 어떤 행동을 해도 이해해 줄 거라는 확신을 문승협눈빛에서 느꼈었다. 지극히 개인감정이 가미된 상상이었으나, 문승협을 만난 후 ‘문승협은 다르다’는 믿음이 이성교제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바꿔놨다. 실제로도 자신이 생각하는 남성에 대한 부정적 선입관과 문승협은 많이 달랐다. 보통 여학생들이 인식하고 있는 사회통념상 일반남학생들과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두 사람만남이 1년쯤 되어가는 지금, 문승협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언행에 조금 변화가 있었다. 정난희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로에게 서로가 이유였다. 문승협이 많은 교감을 갈망한다면, 정난희는 절제였다.

정난희는 발레리나에게 남자친구가 독이라는 말이, 남자자체보단 사랑에 빠진 발레리나가 무용을 등한시해서라 생각하였다. 문승협과 사귀며 체험한 사실이었다. 항상 무용에 상념 없이 몰입했으나, 교제 후부터는 불현듯 문승협이 떠올랐다. 무용연습 중에도 보고파서 혼란스러웠다. 집중력이 흩어지는 날이 늘어났다. 더구나 무용하다 마음대로 안되거나 힘들면 투정 부리고 의지하고 싶었다. 날씨가 좋거나 또래남녀가 같이 지나가는 걸 보면 만나서 같이 놀고픈 충동이 일고, 무용을 해야 해서 무용이 싫어지며 짜증 났다. 문승협 때문에 무용을 망각하는 잡념들이 꿈틀댔다. 무용실까지 가는 자투리시간을 이용해 문승협을 만나자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난희사전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문승협은 만족스럽지 않아 서운하였을지언정, 정난희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그것이 정난희가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하는 이유이자 사랑이었다.

“그동안 오빠가 아무 말없이 지켜주려고 애썼다는 거 잘 알아, 그래서 고맙고.”

“…….”

“나도 많이 노력했고 또 변했어. 무용하다가 뜬금없이 오빠얼굴이 떠올라 힘들고, 오빠가 보고 싶어서 무용이 싫어지기도 했어, 하지만 나 스스로 통제하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되잖아.”

“아 알았어, 더 노력해 볼게.”

두 사람은 절친을 궁금해하는 발언을 빌미로 언쟁하다 교제과정까지 되짚었다. 문승협은 원론을 훈계하듯 한 정난희언변에 눌려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결국 정난희정리로 마무리되었다.

서먹해진 둘을 달래듯 클래식음악에 이어 은은한 팝송이 레스토랑을 감쌌다. ‘돈맥클린의 Vincent’가 둘 사이를 교묘히 타고 흘렀다. 정난희가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 이야기로 분위기를 바꿨다. 문승협이 고흐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 대해 물었다.

“난희야, 너는 그 그림을 보면 어떤 감정이 들어?”

“생각이 아닌 감정?”

“응, 난 그 그림을 보면 슬픔을 느껴.”

“고흐의 처절한 일생 때문인가?”

“고흐가 죽은 뒤, 동생 테오는 별을 봤을까?”

“아마도 그랬겠지, 사랑하는 형의 별을 찾으면서 슬픈 마음을 달랬을 거야.”

“고흐는 별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별을 통해 자기 자신을 봤겠지.”

“별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을 수도 있잖아.”

“설마, 별과 인간의 상호작용?”

“너는 별을 어떻게 생각해?”

“별은 늘 그대로인데, 매번 달라지는 건 인간이야.”

“별이 인간에게 꿈과 상상의 나래를 주어서 그런가?”

“항상 같은 별이 분명한데, 바라보는 인간의 생각에 따라 다른 별이 된다고.”

“별은 무슨 낙으로 살까?”

“에이, 별은 말없이 그냥 빛날 뿐이야.”

“우리가 별을 보듯, 별도 인간을 바라볼 수 있잖아.”

“말도 안 돼.”

“인간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보면서 힘과 용기를 얻어 더 빛을 낼지도 모르지.”

“풋, 오빠, 상상력이 도가 지나쳤다.”

뚜렷한 주관에서 나오는 정난희의 독선적인 행동과 말투로 소소한 내적충돌이 일었다. 그런 상황이 빈번해지면서 문승협에게 기시감을 줬다. 마치 평행이론처럼 어느 별에서 벌어진 데자뷔 같았다. 문승협은 가정환경영향으로 표현방법을 터득하지 못해 자기감정을 설명하는데 서툴렀다. 감정처리기술만큼은 빼어났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정신적 고통을 더 아파하였다. 아주 드물게 감정이 한번 터지면 주체 못 하는 단점이 있었다.

둘은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레스토랑을 나왔다. 정난희독단에 따라 버스정류소에서 헤어졌다. 문승협은 바래다주고 싶었으나 정난희아집을 꺾기에 역부족이었다. 도서관에 가려다 집으로 방향을 잡았다. 무거운 기분 때문인지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왔던 노래 Vincent가 떠올랐다. ‘Starry starry night~’ 무의식 중에 허밍을 하며 걸었다. 결핍에서 오는 외로움이 갑자기 몰려왔다. 돌연 정난희가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바뀌면서 심장이 조여왔다.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 없었다. 호흡을 길게 내뱉으며 가다듬었다.

‘지적 호기심과 지적 욕망이 강하고, 규정할 수 없는 모호함의 매력을 지닌 내 여자친구. 나의 만족보다도 내 여자친구를 위해서 더 잘해야겠다. 그래, 유시유종有始有終하고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자’

수업시간에 배운 월남 이상재선생말씀을 중얼거리며 스스로 다독였다. 마음을 다잡아선지 한결 홀가분했다.

집에 도착하니 다들 어디 가고 아무도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 책상옆에 가방을 던져놓고 책장 앞에 섰다. 꽂혀있는 세계문학전집에서 ‘토마스하디의 테스’를 뽑아 들었다. 깔려있는 이불속으로 들어가 벽에 기대어 앉았다.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같은 시각 장충체육관에서는 WBC슈퍼플라이급세계챔피언 ‘김철호’가 6차 방어전에 나섰다. 챔피언에 오를 때 상대선수였던 베네수엘라 ‘파라엘오로노’와 리턴매치였다. 안타깝게도 6회 KO 패해 타이틀을 뺏겨버렸다. ‘장정구’의 챔피언도전 실패에 이어, 불과 십여 일 전 김득구가 챔피언에 도전하다 사망한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철호까지 챔피언타이틀을 잃어 국민들에게 큰 상실감을 주었다.

월요일 출근한 직장인들과 등교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권투이야기로 갑론을박하며 원통해하였다.

다음날 미국유명가수 ‘마이클잭슨’이 ‘Thriller’ 앨범을 미국전역에 발매하여 월드스타서막을 알렸다.


보름 전부터 열심이던 학교월동준비가 12월 시작과 함께 완료되었다. 학생들이 깨끗이 청소하여 창고에 보관해 둔 난로를 옮겨 교실마다 설치했다. 수은주가 뚝 떨어진 추운 날씨에 반마다 조개탄이 배급됐다. 당번들이 난로에 불을 붙이느라 어수선하였다.

“왐마, 저그 연통에서 연기 샌다.”

“아야, 창문 좀 열어라잉, 연기 땜시 디지겄다.”

“니 저번 토요일에 뭐 했냐?”

“뜬금없이 토요일은 왜?”

“나 너 봤어야.”

“어디서?”

“어디긴 어디여 극장이제, 천영기하고 이담이랑 느그 셋이서 영화보드만.”

“너 너도 그날 봤냐?”

“잉, 안씨 남매 좀 만나고 왔제.”

“안씨 남매?”

“아따 안성기하고 안소영 말이어.”

“야 헛소리 말고, 얼른 저 연통부터 똑바로 연결해라.”

빼빼로삼총사가 만다라와 애마부인 동시상영영화를 볼 때, 장기원이 영화관뒷자리에 앉아 문승협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었다.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능글댔다. 문승협은 주위 반아이들이 들을까 봐 당황했다. 얼른 장기원입을 막으려고 연통을 가리켰다. 장기원이 별말 없이 난로당번과 연통을 교정하였다. 자욱한 연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니 언제부터 부뚜막을 좋아했냐?”

“또 뭔 소리야?”

“니가 순진한 고양이란 소리여, 진짜로 순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드라잉.”

“야, 좀 조용히 해. 얌전한 고양이지 무슨 순진한 고양이냐, 제대로 알고나 말하든가.”

“그래, 얌전한 고양이씨, 안소영이 빨통본께 으짜디?”

“조용히 하라고, 괜히 영화 봤다는 소문 퍼져서 교무실에 불려 가 징계받지 말고.”

“시끼 쫄기는, 배짱도 없이 그런 영화를 봤냐?”

“시끄럽고, 오늘 오전수업만 한다.”

“진짜? 으째서야?”

“내일 대입학력고사날이어서 오전수업만 한데.”

“아그들아, 이거 고급정본디, 오늘 오전수업만 한단다.”

문승협이 장기원입을 막으려고 아침에 교무실에서 들은 정보를 당근으로 주었다. 문승협말이 끝나자마자, 장기원이 반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단축수업은 언제나 학생들에게 큰 즐거움이라 반아이들이 환호했다

일찍 수업을 마치고 교정을 나가는 학생들 발걸음이 경쾌하였다. 문승협과 몇몇 친구들은 도서관으로 갔다.

시립도서관은 대입학력고사를 하루 앞둔 날이어서 긴장감이 돌았다. 다들 다른 때보다 훨씬 집중하여 공부했다. 문승협또래 고등학교2학년들은 내년 이맘때 똑같이 치러야 할 대입학력고사생각에 심장이 떨렸다.

어둑해지고 열람실 전등을 켜는 소리에 잠깐 집중력이 흐트러지기는 하였지만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자리를 옮겨 다니거나 소곤거리는 학생도 없었다.

저녁식사시간이 가까워지면서 하나 둘 도서관을 빠져나갔다. 문승협도 7시쯤 되어 나왔다. 맛있는 저녁밥을 먹고 열심히 공부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며 귀가하였다. 그런데 집 앞에 도착해 멍하니 목석처럼 굳어버렸다. 욕이 섞여 격렬히 싸우는 낯익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곧이어 와장창 그릇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가슴에 와서 꽂혔다. 심장이 쿵 하며 덜컥 내려앉았다.

아버지 문경준과 엄마 이항리가 다투고 있었다. 여전히 별의별 이유로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문승협은 맥이 탁 풀렸다. 이젠 왜 싸우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혹시나 두려움에 떨면서 상처받을지 모를 동생들이 걱정되었다. 그러나 대문을 열 용기를 잃어버렸다. 이 상황에서 집에 들어간들 지옥인 데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바탕 몰아치는 돌풍이 어서 지나가길 바라며 집을 등지고 돌아섰다. 단지 저 싸우는 현장에 동생들이 없기를 간절히 빌었다.

어깨가 축 처져 목적 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현실을 도피한 초라한 자기 모습이 불쌍했다. 집에서 한참 멀어졌어도 싸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괴로웠다. 온 세상이 불행해 보였다. 이 불행한 세상에서도 자신이 제일 불행하다는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가로등이 어두웠지만 누가 볼까 봐 눈물을 닦았다.

자신의 가정생활을 돌이켜봤다. 집에 있을라치면 살얼음판 걷는 것처럼 늘 조마조마하였다. 아버지목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만큼 깜짝깜짝 놀랐다.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지옥불보다 아찔했다. 그나마 아버지가 집에 없으면 마음에 안정이 생겨 편안함을 느꼈다. 부모가 언성을 높이는 자체가 노이로제였다.

눈물이 계속 나오는 데다 찬바람까지 불어왔다. 잔뜩 움츠러들게 해 더욱 우울하였다. 방황하던 발길은 천영기와 이담이 다니는 독서실로 향하고 있었다. 독서실에 다다라 심호흡을 하며 감정정리와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친구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상점유리창에 얼굴을 비춰보면서 눈가를 정리했다.

아무 일 없는 척 독서실로 올라갔다. 독서실사환에게 잠깐 들어가 친구 좀 만나겠다고 하였으나, 시끄럽게 떠든다며 일언지하 거절했다. 조용히 친구를 찾아 바로 나오겠다는 말도 통하지 않았다. 친구들을 불러달라는 간청마저 거절하였다. 꼭 들어가려면 독서실이용권을 사라고 했다. 공부할 기분이 아니라 별수 없이 그냥 내려왔다. 뭐 할까 고민하였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독서실에 올라가는 학생이 있으면 친구들을 불러달라 부탁하련만 한 명도 없었다. 잠시 서성이다 이용권을 사서라도 만나려고 다시 올라갔다. 돈을 꺼내는데 마침 천영기가 나왔다. 이담을 불러오겠다며 들어가더니 금방 같이 나왔다.

“밥 묵었냐?”

“아니, 아직.”

“가자, 가서 라면이나 한 그릇씩 때리자.”

“근디, 니 눈깔 왜 그냐?”

“울었냐, 으째 뻘겋게 충혈됐대?”

“아, 바람맞아서 그런가 봐, 좀 전에 세게 불더라.”

“난희한테 바람맞은 것은 아니고?”

“연설하네, 뜬금없이 난희를 갔다 대냐.”

“아따 춥다, 언능 들어가자.”

“아짐, 여그 라면 세 개 주쑈.”

“우리도 대입학력고사 볼라믄, 1년밖에 안 남았다잉?”

“그란께 말이다, 인자부터 학력고사 365일 작전에 들어가야 쓸란갑다.”

“나는 한두 달 더 놀다가 300일 작전할란다.”

“승협이 니는 으째 말이 없냐, 뭔 일 있냐?”

“아 아니, 뭔 일은 뭐.”

“니는 항시 웃는 얼굴이라, 그러코롬 무표정하게 있으믄 화난 것 같고 이상해.”

“뭔 일 있으믄 말해봐, 이 성님이 해결해 주께?”

“아냐, 별일 없어.”

“또 정난희가 속 썩이디?”

“아니라니까.”

“아따 시끼, 그란다고 성질이냐?”

“그니까 헛소리 좀 그만하라고.”

“염병, 농담도 못하냐?”

“됐고, 라면 먹고 나서 엿이나 사러 가자.”

“엿은 뭐 할라고야.”

“내일 남강선배랑 박현선배 학력고사시험 치잖아.”

빼빼로삼총사는 라면을 후루룩 먹어 치우고 근처 문구점에 들러 갱엿을 샀다.

“나는 선배들한테 전해주러 갈게.”

“그라믄, 갖다 주고 다시 올 거여?”

“지금은 모르겠다.”

“니 공부할라고 독서실 온 거 아니었냐?”

“공부보다도 그냥 너희 보러 온 거야.”

“이 시끼 진짜, 오늘 쪼까 수상한디?”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 너희는 들어가서 공부나 해.”

천영기와 이담이 빠른 걸음으로 가는 문승협을 지켜보다 독서실로 올라갔다.

문승협은 중학교 이후 두 선배가 사는 동네를 오랜만에 찾았다. 감회에 젖어 찬찬히 둘러봤다. 국민학교시절 어울렸던 최선경과 김철종이 기억났다. 김철종은 가끔 도서관서 보기라도 하는데, 이 세상에 없는 최선경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다. 셋이서 깔깔거렸던 추억들을 회상했다. 총총히 빛나는 별을 보며 최선경을 떠올렸으나 얼른 그려지지 않았다. 흐릿해진 최선경얼굴을 차갑게 부는 바람 때문이라고 합리화시켰지만, 무심하게 잊고 있었다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또 한 번 울컥해 눈물이 글썽였다. 문승협감정을 무시하듯 소주상자를 산더미처럼 실은 짐발자전거가 획 지나갔다. 남강선배네 가게에서 나온 것이 아마도 종업원이 배달 가는 모양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배달뒷정리를 하던 남강선배아버지가 멀뚱히 쳐다봤다.

“안녕하셨어요?”

“음마, 니 승협이냐?”

“네, 오랜만에 뵙네요.”

“왔다메, 뭔 키가 요로코롬 커부렀대, 길거리서 보믄 못 알아보겄다야.”

“건강하시죠?”

“잉, 아직까정은 까딱없제.”

“남강선배는 집에 있어요?”

“아직 집에 안 들어왔어, 아마 독서실에 있을 것이다.”

“그럼 선배 들어오면 이것 좀 전해주세요.”

“이것이 뭔디?”

“내일이 대입학력고사날이잖아요, 시험 잘 쳐서 원하는 대학에 붙으라고 갱엿 좀 사 왔어요.”

“허허, 그래 고맙다, 내가 잘 전해 주께.”

“저 가볼게요, 박현선배한테도 들러야 해서.”

“잉, 살펴가고, 나중에 시간 나믄 놀러 와.”

“네, 안녕히 계세요.”

“그래, 니도 공부 열심히 하고잉. 근디, 이렇게 그냥 보낸께 쪼깐 섭하다.”

남강선배아버지가 아쉬운 표정으로 마중하였다. 문승협은 다음에 또 들리겠다며 인사했다. 곧바로 박현선배네 가게로 갔으나 박현선배도 박현선배아버지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종업원에게 갱엿을 전해달라 부탁하고 나왔다. 그러고 보니 박현선배네 구멍가게가 슈퍼로 확장됐다. 쌀집이던 남강선배네도 주류도매까지 하는 가게로 커졌다. 모두 발전한 것 같아 흐뭇하였다. 이정주집 라이카사진관 앞에 멈춰 섰다. 최선경사진이 걸렸던 자리를 행복이 넘쳐 보이는 누군가의 가족사진이 차지했다. 부부싸움이 계속되는 지옥 같은 자신의 가정과 비교되면서 더욱 집에 들어가기 싫어졌다. 배회하던 발길은 다시 독서실로 향하였다.

친구들과 공부나 해야겠다며 독서실이용권을 끊었다. 독서실사환이 이용권을 주면서 조금 전 친구들이 나갔다고 했다. 무를까 하다 딱히 갈 곳이 없어 그냥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책을 폈다. 친구들이 없는 독서실이 썰렁하게 느껴졌다. 공부가 될 리 만무하였다.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다 새벽 한 시쯤 독서실을 나왔다.

겨울새벽공기가 문승협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했다. 어둠과 침묵으로 덮인 새벽길이 자기 인생 같았다. 폐부 깊은 곳에서부터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맥없이 걷다가 어느덧 집대문을 마주하였다.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열쇠로 대문을 열었다. 인기척에 부모가 깰까 봐 뒤꿈치를 들고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었다.

방에 들어서자 기운이 빠졌다. 옷을 대충 벗어놓고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자려고 눈을 감았지만 온갖 잡념들이 휘몰아쳤다. 밤새 뒤척이다 어렴풋 쓰레기차 오는 소리를 들으며 겨우 잠들었다. 불길한 꿈에 금세 깼다. 언제부턴가 정난희와 이별하는 악몽을 꿨다. 그런 꿈꾼 날은 일진이 사나웠다.

“아야, 얼른 안 일어나고 뭐 하냐, 학교 안 갈 거야?”

“오늘 학교 안 가.”

“왜?”

“오늘 선배들 대입학력고사 치르는 날이라서.”

문승협은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려 놀라기도 했으나, 격앙된 엄마말투에 퉁명스레 답하였다.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소리에 짜증이 치밀었다. 다시 잠을 청했다. 두 시간여 잤을 즈음 밥 먹으라고 깨워서 일어났다.

“아빠는?”

“출근했어.”

“아침 생각 없어요.”

“어디 아프냐?”

“아니, 괜찮아.”

“너는 옷을 옷장에 넣든가 잘 개켜놓든가 하지, 왜 이렇게 엄마말을 안 듣냐?”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얼른 나가요.”

“이노무새끼가, 왜 너까지 나한테 소릴 지르고 난리야? 너 어제 몇 시에 들어왔어?”

“…….”

“너 요즘 태도가 왜 그러냐, 대답도 잘 안 하고?”

문승협은 엄마에게 늘 공손하였지만, 감정이 격해진 어느 순간부터 종종 말이 거칠어졌다.

이항리가 이불을 덮어쓴 채 아무 대구 없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불을 확 걷어내며 앉아보라고 했다. 마지못해 일어난 문승협 앞에 다가가 앉았다.

문승협이 마주한 엄마눈에 멍들어있었다. 그 멍이 자기 가슴속에 그대로 와 멍들었다. ‘지긋지긋하다, 미쳐버리겠다’는 나쁜 감정이 엄마걱정보다 먼저 치올랐다.

이항리는 아들마음을 읽지 못하였다. 항상 해온 습관처럼 어제 부부싸움을 넋두리했다. 문승협은 엄마에게 미안하면서도 의도적으로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디 아프냐는 말에 자식을 걱정하는 줄 알았는데 역시나 하소연이 목적이었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이항리의 토로는 1시간여 계속되었다. 싸운 동기만 다를 뿐 과거와 똑같은 레퍼토리였다.

문승협은 절제 없이 배설한 엄마의 쌓인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낸 쓰레기통이었다. 어찌하지 못하는 무능한 자신을 혐오하였다. 지금 상황이 너무 증오스러웠다. 지루하고 괴로운 긴 시간이었으나, 불쌍한 엄마를 위로하는 심정에서 인내심으로 버텼다.

이항리는 상처받은 아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감정만 쏟아낸 뒤 방을 나갔다.

문승협은 다시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슬픔에 겨워 소리 죽여 흐느꼈다.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죽고 싶었다. 으슬으슬한 몸을 웅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점심까지 거르고 식은땀을 흘리며 계속 잤다. 저녁시간이 되어서야 이불밖으로 나왔다. 감기기운에 선배들 시험응원을 가지 못해 아쉬웠다. 오늘 벌어진 대입학력고사 진풍경과 안타까운 사정들이 TV뉴스로 나왔다. 시험장 앞에서 응원하는 방송장면을 보며 대리 만족했다. TV 보는 동생들이 엄마눈치를 살피면서 조심하였다. 우울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농담 삼아 TV뉴스를 인용했다. 어둡지 않은 모습이어서 다행이었다. 그것도 잠시,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자 공포스런얼굴로 변하였다. 아버지에게 인사한 후 각자 방으로 가 문을 닫았다. 집안 공기가 급속히 냉각되었다.

문경준은 못마땅한 자식들 태도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지만 별말 없이 식사했다.

문승협은 심상치 않았던 아버지표정에 가슴조였다. 공부하려고 책상에 않았으나 책을 펴자마자 현기증이 났다. 편치 않은 몸을 이끌고 이부자리로 들어갔다. 안방에서 큰소리가 들려올까 두려움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잠자기를 서두를수록 잠들지 못하였다. 문득 아까 봤던 뉴스가 떠올랐다. 미국유타대메디컬센터가 세계최초영구인공심장이식에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 최선경이 지금 미국에서 수술하였더라면 살았을 거라고 상상했다. 아쉬움과 안타까운 최선경생각에서 정난희로 전이되었다. 최근 정난희와 복잡한 감정에 심란하였다. 딱히 해법이 없어 갑갑해 돌아누웠다. 불현듯 내년에 있을 대입학력고사가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난희와 이별을 암시하는 듯한 악몽을 또 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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