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9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39)

by 태양을 품은 별

토요일오후 시립도서관, 천영기와 이담이 한숨지었다.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유증에 의기소침했다.

“진짜 낙이 없긴 없다잉?”

“긍께 말이어, 대학학력고사가 1년밖에 안 남은께, 인자 공부나 열심히 해야겄다.”

“공부, 해야지, 누가 대신 해주는 것도 아니고.”

“에이, 이 지긋지긋한 공부는 언제 끝나까잉.”

“참, 내일 김득구 권투 한다더라?”

“김득구가 붐붐 맨시니를 이길 수 있으까?”

“옛말에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 안 하든, 또 아냐, 챔피언 묵어불지?”

“근디 붐붐은 뭔 뜻이대?”

“맨시니가 주먹을 휘두를 때 나는 소리 땜시, 양키시끼들이 붙인 별명이어.”

“느그들 성길이 성이 국가대표된 것은 아냐?”

“문성길이가 언제 느그 성이 돼불었대?”

“아야, 목포에서 오다가다 만나믄 다 동상이고 성이어, 뭔 말이 필요하냐?”

“허허, 하기사 목포출신이믄 말이 필요 없제.”

“그라고 다 다음 주인가는 김철호 방어전 있제, WBC슈퍼플라이급인가?”

“맞아, 지난 2월에 무승부로 5차 방어했고.”

“얼마 전에 장정구가 15회 판정패로 져부렀는디, 이번에 김득구는 이겼으믄 좋겄다야.”


지난 2월 ‘김득구’가 OPBF챔피언전을 승리하여 세계복싱협회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동양챔피언 이후 OPBF타이틀 3차 방어전까지 치렀지만, 비동양권선수와 경기는커녕 아시아 원정경기조차 한 번에 불과해 세계무대와 거리가 있는 경력이었다. 그럼에도 WBA라이트급챔피언 ‘레이맨시니’와 타이틀전이 잡혔다. 김득구 측에서는 어렵게 생긴 기회인 만큼 필승을 다짐하며 맹훈련을 해왔다.


드디어 결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오가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거리가 한산했다. 가가호호 남녀노소 모두 TV앞에 둘러앉아 새로운 챔피언탄생을 기대하였다. 미국권투스타 레이맨시니와 한국프로권투선수 김득구의 경기가 전 세계에 위성중계됐다. 미국라스베이거스 시저스팰리스호텔특설링에서 열리는 WBA라이트급타이틀전이었다. ‘땡’하고 경기시작종이 울리자마자, 왼손잡이 김득구가 탐색전도 없이 레프트스트레이트를 길게 던지며 선제 공격했다. 주먹이 맨시니에게 적중될 때마다 모든 집에서 환성이 터졌다. 김득구우세로 1∙2회를 마쳤다. 3회에는 양선수가 적중 타 여러 개를 교환하였다. 현장 관중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미국 캐스터와 해설자가 김득구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심판 2명이 김득구우세를 채점할 정도로 9회까지 잘 풀렸다. 10회에 들어 김득구의 다리 움직임이 갑자기 둔해졌다. 12회까지 많이 맞아 눈이 풀렸다. 그렇게 밀리면서도 물러서지 않고 반격했다. 13회는 주먹 한번 못 내보고 맨시니의 하드펀치를 막기에 급급하였다. 그로기직전까지 가면서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다. 14회에도 시작과 동시에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맨시니가 레프트카운트펀치에 이어 라이트훅성스트레이트를 날렸다. 김득구는 빅펀치에 턱을 맞고 양팔을 대자로 벌린 채 쓰러졌다. 문승협뿐 아니라 온 국민들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복싱을 봐온 경험자라면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런데 김득구가 고통을 참아내며 기어이 일어났다. 처절한 모습에 다들 눈물이 핑 돌았다. 김득구가 심판의 카운트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며 로프를 붙잡고 일어섰다. 이미 초점을 잃은 눈이었다. 심판이 카운트텐을 외치고 경기종료를 알렸다. 그 순간 김득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중계방송화면은 이 장면을 담지 못하고 펄쩍 뛰며 좋아하는 맨시니 쪽에 초점을 맞췄다. 캐스터가 요란한 관중들 함성 속에서 들것에 실려나간 김득구상황을 전하였다. TV를 시청하던 국민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알고 싶어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몹시 안타까운 심정으로 TV를 예의주시하였다. 곧바로 1회부터 14회까지 경기를 분석하는 방송이 이어졌다. 해설과 함께 다시 본 영상도 9회까지 호각지세의 멋진 승부였다. 김득구는 10회부터 체력고갈로 난타를 허용했다. 계속 수세에 몰리며 정신력으로 버티는 모습이 역력하였다. 13회 때 허용한 집중타로 눈주위가 크게 부어올랐다. 이미 패색이 짙은 운명의 14회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공이 울리자마자 맨시니에게 달려들어 펀치를 던졌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아 유효타를 날릴 수 없었다. 지칠 대로 지친 김득구왼쪽머리에 맨시니라이트가 강하게 적중했다. 놀란 김득구가 뒤로 물러났지만, 따라붙는 맨시니속도가 더 빨랐다. 이어진 맨시니왼손훅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후속타가 계속 나올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김득구가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스텝을 넓게 밟지 못하였다. 가드를 제대로 올리지 못한 채 안면을 노출했다. 맨시니가 달려들며 뻗은 오른손스트레이트가 김득구턱에 제대로 꽂혔다. 김득구는 더 이상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다운됐다. 필사적으로 로프를 붙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으나 거기 까지였다. 이미 경기속행이 어려운 상태였다. 주심이 녹아웃 KO선언하자, 맨시니가 환호하는 관중들을 향해 승리세리머니를 하였다. 쓰러진 김득구가 의식을 잃어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캐스터멘트가 이어졌다.

치열한 명승부를 시청하던 국민들은 충격에 한동안 멍했다. 뜻밖의 침통한 일요일이 돼버렸다. 문승협도 착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난희에게 전화 오지 않아 실망한 감정도 되살아났다. 매주일요일아침 꼭 전화하겠다며 다짐한 정난희약속은 문승협소망과 달리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주는 장학퀴즈참가학교대표선발에 만전을 기하라는 짧은 독려통화만 하였던 터라, 오늘은 혹시 만나자는 전화가 오지 않을까 잔뜩 고대했었다. 우울한 마음을 달랠 겸 ‘113 수사본부와 수사반장’재방송을 보았다. 수사드라마인기를 업고 MBC에서 쌍벽을 이룬 국민연속극으로 MBC문화방송소속탤런트 대부분 출연하였다.


113 수사본부는 간첩을 잡는 대공수사드라마다. ‘전운’이 본부장역할이었고, 남자수사관에 ‘오지명, 정욱, 박광남, 송재호, 백일섭’이 출연했다. ‘권미희’등이 여자수사관역할을 하였으며, 일반배역으로 ‘김용건, 박규채, 신충식, 김영옥, 나문희, 정혜선’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등장했다. 이 밖에도 ‘이수나, 김애경, 박은수, 임현식, 박원숙, 김영애, 고두심, 현석, 오미연, 유인촌, 임채무, 송기윤, 이경진, 신신애’등이 참여하였다.

수사반장은 시추에이션수사드라마다. 반장에 ‘최불암’, 남자형사에 ‘김상순, 조경환, 남성훈’등이 맡았다. 여자순경에 ‘김영애, 염복순, 이금복, 이휘향’등이 연기했다. 서형사역이었던 배우 ‘김호정’이 뇌지주막파열로 39세 나이에 요절하여 남성훈으로 교체됐다. 범인역으로 ‘이계인, 송경철, 조형기, 변희봉’등이 활약하였으며, 생계형 범죄와 범인의 애환 등 인간적인 내용으로 어필해 인기를 얻었다.


문승협은 공부 때문에 자주 보진 못해도 수사드라마를 선호했다. 특히 금요일밤에 1년여 방영하다 지난달 초 종영한 KBS‘형사콜롬보’를 챙겨봤었다. 형사콜롬보는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한 서스펜스수사드라마였다. 주인공 형사콜롬보가 항상 바바리코트를 입고 나타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성우 ‘최응찬’이 콜롬보역 ‘피터포크’를 더빙하였다. 이전에도 몇 번 방영과 종영을 반복했었다.

오후뉴스에 김득구상황이 전해졌다. 뇌출혈처치와 혈전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수술을 받았지만 뇌사상태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한결 나아진 기분이 안타까운 소식에 다시 침울하였다. 복잡한 심경에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자 ‘웃으면 복이 와요’가 방송되었다.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무드셀라 구름 위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허리케인에 담벼락 담벼락에 서생원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라는 72자의 가장 긴 유행어와 농심라면광고 ‘형님먼저 아우먼저’로 유명한 ‘구봉서’가 나왔다. ‘서영춘, 배삼룡, 송해, 권기옥, 이기동, 곽규석’을 위시해서 ‘남보원, 백남봉, 남철·남성남, 배연정, 배일집’등 쟁쟁한 코미디언들이 출연했다. 말 그대로 전국을 들었다 놨다 하며 웃음을 선사한 코미디프로그램이었다.

엄마 이항리가 하루 종일 뒹굴며 TV에 빠진 문승협을 보고 그냥 지나칠 리 만무하였다.

“아침부터 뭔 그렇게 테레비만 보냐?”

“…….”

누가 공부하다 죽었다 든? 공부는 안 하고 테레비 앞에 자빠져있으니 한심하다.”

“…….”

“아야, 그렇게 오래 누워있으면 허리 부러져야.”

문승협은 묘한 저항심에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모른 척했다. 보통 때 같으면 엄마잔소리에 쫓겨 자기 방으로 갔다. 마지못해 책상에 앉아 책을 펴거나 이도 아니면 도서관행이었다.

이항리가 째려보면서도 평소와 다른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내버려 뒀다.

문승협이 반항심에 행사한 묵비권은 성공하였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저녁을 먹고 책상 앞에 앉았다. ‘수학의 정석’을 펴니 머리가 아팠다. 수학공식이 외계인 암호 같았다. ‘성문종합영어’를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영어단어가 꾸물거리는 그림이었다. 공부에 집중하려 할수록 증상이 심해졌다. 정난희얼굴까지 불쑥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수학과 영어가 한편이 되어 정난희와 전쟁하였다. 별다른 전술 없이도 정난희가 손쉽게 이겨버렸다. 책을 덮고 책상에 엎드리자 비로소 평온이 찾아왔다.


휴일이 지난 월요일은 김득구이야기로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 모두 한마음으로 김득구쾌유를 빌었다.

국민들 열망에도 불구하고 뇌사판정받은 사흘 만에 병상에서 숨졌다. 이틀 뒤 라스베이거스에 도착한 김득구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산소마스크를 떼고 장기기증하였다. 향년 26세를 끝으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김득구는 출국 전에 비장한 각오였다. ‘관을 준비해 놓고 가겠다, 지면 절대 걸어서 링을 내려오지 않겠다’고 선언했었다. 미국으로 건너갈 때 모형관을 만들어 가져갔고, 그의 말은 곧 현실이 됐다. 결국 슬픔 가득한 비극을 남긴 최악의 시합이 되고 말았다.

일주일 내내 침통함이 이어졌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그랬다. 김득구는 한국인 하나하나의 자화상이었다.

토요일, 김철종이 드문드문한 시립도서관에 공부하러 왔다. 도서관휴게실에서 친구들과 모여 김득구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중에 끼어들었다. 느닷없이 한국권투세계챔피언계보를 주제로 강의하였다. ‘김기수, 홍수환, 유재두, 염동균’의 체급과 챔피언타이틀을 줄줄이 읊으며 빠삭한 권투지식을 뽐냈다.


이외에도 대한민국이 낳은 챔피언으로 ‘박찬희, 김성준, 김상현, 김태식’등 인기 있는 프로권투선수가 있었다. ‘박종팔과 유영우’등 세계챔피언에 도전할 인재도 여럿이었다. 국민들이 헝그리정신으로 무장한 권투에 열광했다. 비단 권투뿐 아니라 축구, 탁구 등 구기종목은 말할 나위 없었다. 모두가 애국과 국위선양에 일원이 되어 광분하였다. 소위 스포츠 ‘국뽕’ 신드롬이었다. 예전부터 ‘김일과 안토니오이노키’의 프로레슬링경기가 있을 때면 다방에 인산인해였다. 가던 길을 멈추고 길거리 전파사나 가전상점 앞에 모여 환호했다. TV가 없는 집은 염치불고 옆집이나 친구집을 찾는 불편도 감수하였다. 특히 한일전과 세계타이틀전이면 온 국민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승패여부에 따라 극단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승리하면 승리한 대로 대한민국국민으로서 자부심과 자긍심에 도취하여 감격했다. 패배하면 패배한 대로 수치심과 무력감에 사로잡혀 절망하였다. 승자와 패자로 빙의해 감정에 몰입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그도 그럴 것이 민주주의가 군부독재에 의하여 오랜 시간 구속받아온 터라 억압받은 자유를 분출할 곳이 필요했다.


이날저녁, 일본정부의 교과서시정계획발표뉴스가 나왔다. 얼마 전 한국정부가 교과서를 시정하라고 13개 항 19가지 내용을 제시하였다. 일본정부가 4개 항 6가지를 뺀 나머지를 시정곤란하거나 계속 검토하겠다고 통고했다. 어이없는 일본정부행태에 여론이 들끓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이신애여사가 지난 9월 말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져 국민들이 더욱 분개했다.

다음날 문승협이 도서관에 가려고 아침을 먹는 데 정난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 해?”

“아침 먹고 있었어.”

“아니, 오늘 뭐 하냐고?”

“공부해야지, 일요일이니까 시립도서관으로 갈 거야.”

문승협은 시립도서관을 힘주어 말하였다. 혹시나 정난희가 만나러 올지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알았어, 가서 공부 열심히 해.”

“…….”

“왜 대답이 없어?”

“그게 끝이야?”

“호호, 또 삐쳤어?”

“내가 언제 또 삐쳤었어?”

“어쭈, 반항하는 거야?”

“응. 지난주에는 왜 전화 안 했어?”

“호호호, 다음 주에 만나자.”

“진짜? 어디서?”

“12시, 폭풍의 언덕.”

정난희는 다음 주 약속으로 지난주 전화 안 한 이유를 무마했다. 문승협은 만나자는 말 한마디에 그동안 서운하였던 감정이 일순간 사라졌다. 바보 같을 정도로 희색이 만면하여 다시 식사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문승협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천영기를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였다.

“으째, 난희가 만나자디? 표정이 무자게 밝다?”

“하하, 너 돗자리 깔아라.”

“니는 정난희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목메냐?”

“그러는 너는 류연경한테 왜 그러는데?”

“나는 니멩키로 목멘 적 없는디?”

“아무튼, 만나는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나한테 가시나는 땅콩이고 트로피 같은 거여.”

“그게 무슨 뜻이야?”

“뭔 뜻이겄냐, 땅콩은 심심할 때 먹는 거고, 트로피는 진열하는 장식품이제.”

“야, 연경이가 그 말 들으면 퍽이나 좋아하겠다.”

“연경이가 좋아하든 말든 뭔 상관이어, 내가 중한디.”

“그건 여자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니는 고것이 문제여, 니가 예의 찾느라 힘들고 괴로우믄서, 뭔 예의를 따지냐?”

“…….”

문승협은 부인하며 반박하려 했으나 말문이 막혀버렸다. 지식과 논리로 충분히 반론이 가능하였지만, 자신과 정난희 사이를 정확히 꽤 뚫는 말이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비수가 날아와 심장에 꽂히는 기분이었다.

“으째, 찔리냐?”

“야 사랑하면 노력해야지, 어떻게 자기감정만 내세워?”

“그래 맞어, 노력해야제. 근디, 그 노력은 서로 해야제.”

“…….”

“사랑 좋아하네, 니를 죽여가믄서 하는 게 사랑이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함부로 말하지 마.”

“책에서 본 사랑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여, 그냥 참고만 해 이 쪼다 같은 놈아.”

“야, 너 말 다했어?”

“아니, 한마디 더할란다. 지랄육갑 떨지 말고, 아니다 싶으믄 언능 차부러.”

“이 시끼가 진짜, 열린 입이라고 막말하네?”

“아야, 느그들 뭐 하냐, 지금 쌈 하냐?”

문승협이 발끈하여 천영기가슴께 옷을 움켜쥐었다. 때마침 이담이 와서 말렸다.

“뭔 일이대? 영기야, 뭔 일인디 그라냐?”

“아야 말 마라잉, 저 호구시끼 귀가 꽉 막혀갖고, 방법이 없다 방법이.”

“승협아, 뭔 일이여?”

“…….”

“내가 아직 할 말이 많은디, 그만할란다잉.”

“말해봐, 뭔 말인디 그냐?”

“뭔 말을 하믄 알아 쳐 묵어야 말할 기분이라도 나제.”

“하, 이 시끼가 진짜.”

“그래, 어디 한번 쳐봐라, 쳐 보란께.”

문승협과 천영기가 다시 엉겨 붙어 주먹이 오갈뻔했으나, 이담이 온몸으로 막아섰다. 둘은 마지못해 물러나면서 한 마디씩 던졌다.

“나도 날 잘 모르는데, 네가 나를 알아?”

“나는 니가 훤히 보인디, 너는 니가 안보인갑다잉?”

“아야, 그만하고 들어가자.”

“놔봐야.”

“아따 그만해야, 나중에 다시 야그 하잔께?”

이담이 천영기 등을 떠밀며 도서관 안으로 몰고 갔다.

천영기와 문승협은 각자 고민이 달랐다. 천영기는 문승협에게 정난희를 소개해줬지만, 그동안 문승협을 대하는 정난희언행이 못마땅하였다. 게다가 싫다는 것을 막무가내로 꼬드겨 만나게 한 책임감 때문에 문승협이 상처받을까 걱정되었다. 문승협도 그런 천영기의 자격지심을 알고 있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도 정난희를 마뜩지 않아하는 천영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문승협은 혼자 남아 번민에 빠졌다. 가장 친하고 자신을 잘 아는 천영기와 다툼이라 충격이었다. 천영기와 정난희가 티격태격하던 일이 기억났다. 천영기가 ‘승협이 울리믄 내가 가만 안 둔다잉’라고 하자, 정난희가 ‘웬 참견, 웬 오지랖이야’라며 대꾸했었다. 당시 정난희와 사귀기로 한 이후라 가벼이 넘겼으나 서로 앙금이었다. 문승협 또한 정난희에게 불만이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헤어지라는 친구들 의견이 종용을 넘어 강요로 발전해 착잡하였다. 가뜩이나 정난희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 상태여서 머리가 복잡했다.

문승협이 인내하면서도 정난희에게 빠져드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와 떨어져 자란 환경이 내면에 깔렸다. 어린 나이에 인생 매 순간을 혼자 결정하다 보니, 누군가 이끌어 줬으면 하는 기대 같은 것이 있었다. 결핍을 채우거나 보상받고 싶은 심리였다. 정난희를 생각하면 할수록 의지의존하려는 동요가 일었다. 점점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정난희에 대한 추앙과 집착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커져갔다. 설사 맹목적이더라도 문승협에게는 현실이었다. 다만 그런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다.

문득 문승협머릿속에 목화여고축제 때 보았던 만해 한용운의 시화 ‘복종’이 떠올랐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문승협이 정리되지 않은 머리를 흔들며 열람실로 들어갔다. 자리를 찾아가면서 공부하는 천영기동태를 살폈다. 사소한 일로 아웅다웅하였지만 오늘처럼 맞붙은 적은 없었다. 앞으로 천영기와 관계를 어찌해야 할지 신경 쓰였다. 자리에 앉아 책을 펴면서 화해를 생각했으나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을 비우려고 수학문제풀이에 집중하였다. 한 시간쯤 흐르고 딱지모양으로 접힌 종이가 책상 위에 떨어졌다. 고개 들어 주위를 살피니 걸어가는 천영기뒷모습이 보였다. 연습장에 쓴 메모였다.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네 기분이 어떤지, 네 하루가 어땠는지 신경 쓰여. 낮이든 밤이든 힘든 날에는 너의 미소를 기억해.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쌓이고 싸워서 절교하네 마네 하지. 아까는 내가 미안해, 걱정되는 마음에 한마디 했어.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다. 친구가.’

첫대목은 어디에선가 본 듯한 시의 구절 같았다. 마지막에 쓰인 ‘친구가’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친구니까 이해하라는 요구로 보였다. 흔히 친구라는 말로 관심과 관섭의 경계를 구분했지만 오히려 모호하였다. 누구보다 사내다움을 강조하는 천영기가 사과편지라니 그만큼 마음 쓰였다는 뜻이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며 용기를 냈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어울리지 않게 시구절을 인용하다니, 문승협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다시 한 시간쯤 지났다. 이담이 서먹한 둘을 대신하여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천영기가 잠깐 문승협눈치를 살피더니 평상시처럼 행동하였다. 문승협은 우정을 이유로 생채기난 마음을 무조건 덮을 순 없었으나, 거듭 문제를 언급하면 왠지 속 좁은 놈이 될 것 같았다. 대범해 보이려고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웃어 보였다.

“뭐 먹으까?”

“짜장면이나 한 그릇씩 때리자, 내가 사께.”

“승협아, 아직 맘이 안 풀렸냐?”

“아 아냐.”

“아야, 승협이가 니멩키로 쫌생인 줄 아냐?”

“음마, 때린 놈이 맘 편하다잉.”

“나도 현경이랑 쫑내야 쓰겄다.”

“뭔 뜬금없는 소리대?”

“아녀, 진작부터 생각했어.”

“으째서야?”

“자꾸 밀당할라 해쌌고, 조련하듯 갖고 놀라 하드라고.”

“남녀가 만나다 보믄 다 그런 거제, 뭐 그런 거 갖고 그라냐? 다들 벨반 차이 없어.”

“나는 딱 질색이어, 가시나가 남자한테 복종해야제, 남자머리꼭대기에 올라가믄 못써.”

“야, 사랑하는데 무슨 조건을 따지냐?”

“사랑? 염병하네, 니 또 사랑이라고 했냐?”

“그만해라잉, 느그 그러다 또 쌈 하겄다.”

문승협은 조건 따지는 사랑을 속물이라 여겨 소름 돋게 싫어했다. 사랑을 뭐라 정의하지 못하는 어린 청춘들에게 어려운 문제였다. 어느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이런 논제로 옥신각신하기에 딱 어울리는 나이였다. 셋은 중국식당으로 들어가면서 논쟁을 멈췄다. 주문을 마친 뒤에도 말을 아꼈다.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이라 재차 갈등하지 않으려고 서로 눈치를 살폈다.

“아야, 저그 지나가는 게 김부일 아니어?”

“그라네, 옆에 가시나는 부일이각시 채영이그만,”

“부르까?”

“뭐 할라고야, 넵둬, 가던 길 가게.”

“뭔 딴 가시나들도 같이 간다야?”

“채영이 친구들이겄지 뭐.”

식당건너편으로 김부일과 채영이 일행이 지나갔다. 화제 돌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문승협은 미소 지으며 채영이 친구들과 어울려가는 김부일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정난희친구들을 만나봤는지 물었던 김부일말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정난희친구를 만난 적이 없었다. 무용하는 후배와 친구들을 어쩌다 마주치긴 하였지만, 한 번도 마주 앉아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 정난희와 사귄 지 1년이 되어가는데 절친이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그때는 김부일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으나, 오늘은 그 의도를 조금 알듯했다.

“너희들 여자친구의 친구들하고 만나 적 있냐?”

“그람, 현경이 친구들하고 여러 번 만났제.”

“담이 너는?”

“잉, 현진이 친구들하고 가끔 만나.”

“승협이 니는 한 번도 없지야?”

“…….”

“에이 설마. 진짜여?”

“야, 둘이 만나기도 바쁘다.”

“그래도, 한 번도 없었다믄 이상한디?”

“봐봐, 내 이빨 상했는지.”

“허허, 지랄하네.”

“아야, 세상에서 가장 잘 속이믄서도 속이지 못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말이 있다잉.”

문승협은 무슨 뜻인지 알쏭달쏭하였다. 천영기발언에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혹시 정난희가 나를 창피해하거나, 나를 감추고 싶은 건 아닐까? 아니야, 무용하기 때문에 그렇고, 유명세 치르는 걸 싫어해서 그래.’ 정난희에게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머리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한편으로는 여자친구부모에게 허락받고 자유롭게 왕래하는 김부일이 부러웠다. 와중에 주문한 짜장면이 나왔다. 둘은 게눈 감추듯 먹어 치운 반면, 문승협은 께적거렸다.

셋은 식사를 하고 도서관으로 돌아갔다. 다음 주에 있을 월말고사준비에 밤늦게까지 공부하였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오늘 다툼을 계기로 ‘빼빼로삼총사’의 우정만큼은 한층 돈독해졌다.


빼빼로삼총사는 월말고사로 한 주를 정신없이 보내고 토요일저녁에 영화 보러 갔다. 문승협과 이담은 아무 생각 없이 천영기를 따라갔다가 극장 앞에서 난감했다. 한 편의 입장요금으로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동시상영관은 좋았지만, 하필 청소년관람불가인 ‘만다라’와 ‘애마부인’이었다. 둘은 허겁지겁 극장옆골목으로 갔다. 행여 누가 볼까 봐 안절부절못하였다.

“느그 뭔 죄 졌냐, 뭐 한디 숨고 그라냐?”

“염병, 청소년관람불가잖애.”

“아따 교복 안 입었은께 괜찮해야.”

“단속 나온 선생님한테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냐?”

“이 시간에는 단속 안 해, 선생들도 밥 묵어야제.”

“그라믄, 니가 살짝 가서 입장권 받는 아저씨한테 한번 물어봐, 우리 들어가도 된가 안된가.”

“연설하네 진짜, 괜찮하단께.”

“야, 나는 심장이 벌렁거린다.”

“이그 쫌팽이시키들, 여그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가서 극장표 사 올란께.”

“승협아, 우리 까닥하다가 정학당하는 거 아니어?”

“그러게 말이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저런 영화를 보자는 건지 모르겠다.”

큰소리친 천영기도 겁이 나서 주위를 살피며 매표소로 갔다. 영화표를 받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왔다. 태연한 척 숨을 고르면서 사온 표를 나눠줬다. 문승협과 이담은 표를 받고서도 망설였다. 끈질긴 천영기의 충동질에 설득 당해 이끌려갔다. 극장 안이 반암전상태라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 싶어 자라목 움츠리듯 고개를 집어넣었다.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앞만 보고 직진했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비로소 시야가 트였다. 천영기가 버젓이 두리번거렸다.

“아그들아 안심해라, 대충 본께 다 우리 또래다.”

“근디, 생각보다 사람이 많다잉.”

이담은 고개를 돌리면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칠까 봐 곁눈질로 둘러봤다. 문승협은 앞쪽자리만 살펴본 뒤 어둠 속 하얀 장막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영화시작을 알리는 벨이 요란히 울리면서 완전히 암전 됐다. 이렇다 할 광고 없이 곧장 영화가 상영되었다.

빼빼로삼총사는 만다라가 끝난 쉬는 시간에 화장실도 가지 않은 채 말없이 앉아있었다.

두 번째 영화 애마부인을 보는 내내 소리 죽여 침만 꼴딱꼴딱 삼켰다. 침 삼키는 모습을 들키거나 눈이 마주치면 서로 뻘쭘하기에 스크린만 봤다. 영화끝날 때까지 의자 깊숙이 앉아있어서 허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중간 쉬는 시간에도 그랬듯이 화장실서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 무서워 바로 극장을 빠져나갔다. 소변을 참은 이심전심에 으슥한 골목을 찾아 시원한 방뇨를 즐겼다.

“뭔 청소년관람불가라드만 별거 없던디?”

“긍께 말이어, 난 또 뭐 있는 줄 알았다잉.”

“너희들 뭘 기대했는데?”

“고것을 꼭 말해야 아까?”

“근데, 애마부인의 마자가 말마자가 아닌 삼마자더라?”

“진짜로? 봤어?”

“응, 못 믿겠으면 가서 확인해 봐.”

“그래서 거시기한 것이 벨로 없었으까?”

“거시기가 뭔 디야?”

“거시기가 거시기제 뭐여.”

“하하하, 허허허.”

음흉한 농담으로 웃고 떠드는 사이, 동병상련의 또래아이들이 골목으로 들어왔다. 빼빼로삼총사가 흠칫 놀라 옷매무새를 급히 정리하며 자리를 비워줬다. 이담이 극장 근처에서 버스를 탔다. 문승협은 허풍석인 천영기이야기를 들으며 집으로 갔다.

지난여름 청화고 염기형자취집에서 처음 들었던 또래들의 성性인식에 충격받은 이후, 문승협과 이담은 호기심만 조금 늘었을 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반면 천영기는 남녀성관계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 여자친구 류연경에게 성접촉을 시도하다 갈등하였다. 성관계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별통고까지 하였다. 여전히 성지식이 위험 수준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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