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42)
얼마 전부터 떠들썩하던 캐럴이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최고조에 달하였다. 문승협이 길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을 따라 부르며 정난희를 만나러 갔다. 문득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며칠 전 겨울방학식을 치른 날, 독서실에서 만난 천영기와 이담이 크리스마스이브를 여자친구들과 함께 보내자고 했다. 크리스마스이브날 약속 잡지 말라는 정난희명령에 부득이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극장 앞에 도착하여 깜짝 놀랐다. 성탄절개봉영화 ‘록키Ⅲ’를 보려는 학생들로 인산인해였다. 극장표를 사려는 긴 줄과 영화관으로 입장하려는 인파가 얽혀 복잡하였다. 아침에 잠깐 들러 극장표를 미리 사놓은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나마 크리스마스이브가 평일이라 가능했다. 휴일이었다면 어른들까지 겹쳐 매진이 분명하였다. 영화표를 사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 서는 수고가 필수였다. 원하는 날짜와 시간의 지정좌석표를 사전예매하는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난희눈에 잘 띄도록 한산한 곳에 서있으면서 ‘록키Ⅰ과 록키Ⅱ’를 회상하였다.
록키Ⅰ은 필라델피아뒷골목 4회전 복서 ‘록키’의 사랑과 꿈이야기다. 록키는 고리대금업자 하수인노릇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우연한 행운으로 이벤트에서 세계챔피언도전권을 얻는다. 잡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치열하게 훈련하고, 짝사랑‘아드리안’과 연인이 되어 챔피언에 도전한다. 록키가 승리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무적챔피언에게 판정패당하지만, 멋진 경기를 펼쳐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희망을 갖는다. 유명세를 탄 록키가 영화 OST ‘Gonna Fly Now’를 배경음악으로 꼬마팬들과 달리며 환호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남자들이 ‘빠바밤 빠바밤~’을 흥얼거리며 권투흉내를 내곤 했다.
록키Ⅱ는 록키의 챔피언 재도전이야기다. 록키는 아드리안과 결혼하고 명성을 얻으나 생활에 쪼들려 훈련을 게을리한다. 출산 중 난산으로 사경을 헤매는 아드리안의 이겨달라는 한마디에 분연히 일어선다. 처절한 사투 끝에 챔피언과 도전자 모두 쓰러지지만, 다시 일어선 록키가 헤비급세계챔피언에 오른다.
문승협은 록키Ⅰ을 국민학교 때 최선경과 봤었다. 록키Ⅱ는 김부일과 채영이가 함께였으나 사실상 채정이와 본 영화였다. 공교롭게도 록키Ⅲ를 정난희와 보게 되어 괜히 계면쩍었다. 지난주 전화로 크리스마스이브만남을 약속하면서 영화를 보자는 정난희생각이었지만 일말의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정난희가 먼발치서 손짓하였다. 사람들이 없는 뒷골목으로 오라는 신호였다. 문승협이 걸음을 바삐 움직였다. 정난희와 마주하자 지지난 주 키스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내색할 수는 없었다.
“왔어?”
“영화시간 늦은 거 아냐?”
“아냐 괜찮아, 아직 시간 있어. 자, 극장표야.”
“벌써 샀어?”
“응, 혹시 매진될까 봐 아침 일찍 사놨어.”
“오호, 부지런도 하시네.”
“뭐 이쯤이야.”
“그럼 들어갈까?”
“그래, 내가 먼저 가서 먹을거리 좀 살 테니까, 너는 천천히 자리 찾아서 와.”
사람들 시선을 의식하는 정난희를 배려해 문승협이 앞서 입장하였다. 짐작대로 극장 안 좌석배치도 앞에 관람객이 몰렸다. 보통은 좋은 자리를 선점하면 장땡이었으나, 인기영화는 관객이 많아 좌석지정제였다. 상영관에 들어선 관객들이 좌석을 찾느라 애먹었다. 좌석번호표시가 눈에 잘 띄지 않아 우왕좌왕했다. 남의 좌석에 당당히 앉아있다가 비켜주는 사람이 꼭 있었다. 종종 서로 자기 자리라며 다투기도 하였다.
문승협이 좌석번호를 확인하고 앉은 얼마 후 정난희가 들어왔다. 나란히 착석했으면서도 암전 될 때까지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영화가 시작되고서야 비로소 다가앉았다. 정난희가 살며시 문승협손을 잡았다.
문승협이 영화 보는 중간 간식을 사 왔다. 극장에 들어왔을 때 매점이 붐벼 미뤘었다. 둘은 갓출시된 팝콘을 맛보며 지난번보다 친숙한 자세로 영화를 즐겼다.
록키Ⅲ는 챔피언타이틀 되찾기다. 헤비급세계챔피언으로 승승장구한 록키가 자만심과 매너리즘에 빠진다. 이를 경고하는 ‘미키’와 충돌한다. 강력하고 거친 흑인복서 ‘클러버’과 타이틀전을 앞두고 록키마음은 어지럽기만 하다. 마침내 무너지는 록키, 타이틀을 잃던 날 미키마저 세상을 떠난다. 좌절한 록키 앞에 이전 헤비급세계챔피언 ‘아폴로’가 나타났다. 난폭한 언행으로 흑인들 얼굴에 먹칠하는 클러버를 막겠단 명분을 대며 록키의 재도전 트레이너를 자청한다. 록키는 아드리안격려와 아폴로지도로 다시 맹훈련을 하고, 클러버를 3회 만에 링에 눕힌다. 이전 록키시리즈테마곡들이 유행했듯이 미국록밴드‘Survivor의 Eye Of The Tiger’를 흥행시키는데 한몫하였다.
둘은 영화가 끝나고 멀지 않은 분식점으로 이동했다. 영화이야기를 하며 저녁을 먹었다.
문승협이 식사를 마칠 즈음 정난희눈치를 살폈다.
“왜 그래?”
“아, 어딜 갈지 생각 중이야.”
“갈데 있어?”
“시간은 괜찮아?”
“응, 오늘은 시간 있어.”
“그러면, 어디 음악다방 같은 데 갈까?”
“호호, 고등학생이 음악다방에 간다고?”
“이런 날 한번 가보는 거지 뭐.”
“안돼, 클래식음악이 나오는 카페면 몰라도.”
“그럼 거기 갈까?”
“아는 곳 있어?”
“아니, 여기서 조금 걸어가면 하나 있던 것 같긴 해.”
“됐어, 거긴 다음에 가.”
“…….”
“저기, 무용연구소 궁금하댔지?”
“응?”
“무용연구소로 가자.”
“가도 돼?”
정난희는 가타부타 대꾸 없이 일어났다. 문승협이 얼른 계산하고 뒤따라나갔다.
둘은 택시를 탔다. 무용연구소 근처에 내릴 때까지 별말이 없었다. 정난희가 YMCA건물 앞에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5분 뒤에 올라오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5분을 길게 느꼈지만 기분 좋은 기다림이었다. 어둠 속 계단을 더듬더듬 올라갔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3층 무용연구소문을 살며시 밀었다. 정난희가 조용히 하라고 속삭였다. 문승협이 들어서자, 정난희가 재빨리 커튼을 쳐 문을 가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데려온 만큼 외부에 알려지거나 들킬까 봐 무척 신경 썼다. 문승협의 작은 행동과 소리에도 민감했다.
문승협은 무용연구소가 처음이어서 낯설었다. 정난희가 안쪽 응접실로 이끌었다. 난로에 불을 붙이고 담요를 가져다 폈다. 쌀쌀한 응접실에 금방 온기가 돌았다. 정난희가 문승협 옆에 앉으며 가방을 열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클래식음악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건넸다. 다른 카세트테이프를 꺼내 오디오에 넣고 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정난희가 음악을 감상하다 문승협을 응시하였다.
“괜찮아?”
“응.”
“왠지 불편해 보이는데?”
“조금 조심스러워서 그래.”
“올 사람 없으니까 너무 걱정 마.”
“사실 누가 올까 봐 쫄리긴 해.”
“무용연구소 와보니까 어때?”
“네가 여기서 연습한다고 생각하니까 신기해.”
“사방이 거울이고, 발레바 있고, 별거 없어.”
“무용하기 힘들지?”
“당연 힘들지, 세상일이 다 그렇지 뭐.”
“남자무용수도 있어?”
“있긴 한데 많지는 않아, 남자가 무용한다고 하면 다들 이상하게 보니까.”
“그런가? 난 남자가 무용하면 멋있을 거 같은데.”
“그럼 오빠 무용할래?”
“내가?”
“오빠는 키도 크고 약간 마른 체형에 날씬하니까, 무용하기에 딱 적합해.”
“지금 시작하면 늦지 않을까?”
“아냐, 남자무용수가 부족해서 지금부터 해도 충분해.”
“나 이제 고3인데?”
“1년만 해도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 무용과에 입학가능하고, 전망도 아주 밝아.”
“진짜?”
“응, 남자무용수는 무용계에서 불모지나 다름없어.”
“오호, 그럼 한번 생각해 볼까?”
“오빠, 남자발레복 한번 입어볼래?”
문승협이 재빨리 고개 저으며 손사례 쳤으나, 이미 정난희가 일어섰다. 웃자고 한 농담인데 진지하게 받아들여 적잖이 당황했다.
정난희가 잔뜩 기대한 표정으로 돌아와 발레복을 건넸다. 어쩔 줄 몰라하는 문승협을 애써 외면하며 자리를 피해 주었다. 갈아입는지 몇 번을 확인하였다.
문승협은 곤혹스러웠지만 기대를 저버릴 순 없었다. 정난희가 기다리다 지쳐 응접실로 들러왔다. 문승협은 창피해서 이리저리 몸을 비틀었다. 발레복이 딱 달라붙어 남성심벌 부분이 도드라졌다. 불룩 튀어나온 곳을 가리는 민망한 자태였다. 정난희가 빙긋 웃으며 위아래를 번갈아 훑어보았다.
“호호호, 오빠 잘 어울린다.”
“난희야, 나 지금 부끄러워 죽겠어.”
“오빠 이쪽으로 와봐, 무용기본동작 한번 해보자.”
“근데, 이거 누구 발레복이야?”
“그거 깨끗해, 선생님아들 건데, 지금 중3이야.”
정난희가 문승협을 넓은 플로어로 데려가 긴 바 앞에 세웠다. 창밖으로 빛이 샐까 봐 플로어등을 켜지 않았다. 발레복을 어색해하는 문승협과 달리, 정난희는 자못 진지한 태도였다. 문승협의 체격과 다리모양이 선천적 발레체형이었다. 응접실등만 켜진 어둑한 상태에서 발레손동작 ‘폴드브라’부터 가르쳤다.
“엄지를 중지에 붙여서 손이 길고 얇아 보이도록 부드럽게 펴, 손에 힘 빼고, 좋아. 다음은 앙바라는 팔동작이야, 날따라 해봐. 양손을 배꼽 앞에 주먹 3개 정도 들어가게 하고, 손과 손사이는 주먹 한 개쯤 띠워. 팔꿈치는 위로, 어깨는 말리지 않게 내려서 원을 그리듯이. 응, 앙아방도 해보자. 양손을 명치 앞에 두되 가슴보다 높지 않게 하고, 팔꿈치를 위로 어깨는 내려. 그렇지, 이번엔 앙오야. 두 손을 위로 들어 이마 앞에, 어깨와 등근육은 내리고 원을 그리듯. 오호, 오빠 진짜 소질 있는데?”
“그래?”
“여기서부터는 조금 어려울 거야, 잘 보고 따라 해.”
정난희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움직였다. 양팔을 벌려서 팔꿈치를 위로 어깨는 내리고, 누가 손끝을 양쪽에서 잡아당긴다는 느낌으로 손위치가 어깨보다 높지 않게 하는 ‘알라스콩’. 손등을 위로 들었다가 팔꿈치부터 내려와서 앙바자세로 내려오는 ‘알롱제’를 연달아했다. 문승협이 알롱제를 어려워하였다. 정난희가 숨을 들이켜면서 손등으로 원을 그리듯이 올렸다가 손바닥이 내려올 때 호흡을 내쉬라고 했다.
“우아, 잘했어.”
“갈수록 어렵다.”
“그래도 그 정도면 엄청 잘하는 거야. 자, 이번엔 다리동작 한번 해볼까?”
“또?”
정난희는 뾰로통한 문승협을 무시하고 다리를 들었다. 한쪽다리무릎을 구부려 올려서 기둥다리무릎뒤쪽에 발가락을 위치시키는 ‘파쎄’. 파쎄자세에서 옆방향 45도 이상 높이로 다리를 쭉 펴 올리는 ‘데벨로뻬’를 하였다. 문승협이 파쎄를 할 때, 정난희가 도왔다. 발끝을 무릎에 대지 말고 살짝 닿을 정도로 하라면서, 골반이 틀어지지 않도록 수평으로 정면을 보게 교정했다. 정확한 파쎄를 유지하려면 연습과 근력이 필요하였다. 데벨로뻬는 기둥다리에 힘을 주고, 바닥을 밀어내면서 쫙 펴야 흔들림 없이 할 수 있다며 다시 한번 시범 보였다. 문승협이 따라 하다 발아치가 무너지고 무릎이 살짝 접히면서 부들부들 떨었다.
“호호, 이건 훈련이 필요하겠다.”
“휴, 바가 없었으면 넘어졌을 거야.”
“무릎뒤쪽으로 위치시킬 때 발가락모양을 포인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아주 잘하네.”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
“아냐, 자세가 제대로야, 정말 무용해도 되겠어.”
“이제 그만하자, 응?”
“애티튜드와 앙드당턴까지 시켜보려 했는데 아깝다.”
“나 이 옷 빨리 벗을래.”
“오빠, 무용에 소질 있고 체격도 적격이야, 무용하자.”
정난희가 황급히 응접실로 가는 문승협에게 말했으나, 딱 달라붙은 타이즈를 빨리 벗어버리고 싶은 문승협귀에는 와닿지 않았다. 정난희는 발레슈즈도 없이 곧잘 따라 하였던 문승협이 귀엽고 대견했다.
문승협이 발레복을 건네고 바지춤을 단정히 하였다. 정난희가 탈의실에 가져다 놓고 와서 카세트테이프를 바꿔 넣었다. 잔잔하고 은은한 팝송모음이었다. 문승협을 설득해 볼 태세로 유명한 발레리노를 소개했다. 아르헨티나 ‘조르주돈’과 미국에 망명한 소련무용수 ‘미하일바리시니코프’ 이야기였다.
“남녀가 파트너로 무용하면 이상하지 않아?”
“뭐가?”
“서로 밀착되고 그러면 기분이 좀 그럴 것 같은데?”
“무용은 무용일 뿐이야, 별 느낌 없어.”
“그래?”
“왜, 의심스러워?
“의심이라기 보단, 아무래도 남녀니까.”
“오빠 이리 와 봐, 궁금하면 나랑 한번 해보자, 기분이 어떤지 한번 느껴봐.”
정난희가 문승협을 일으켜 세웠다. 다가가 블루스춤을 추듯 껴안았다. 문승협은 엉덩이를 뺀 엉거주춤한 자세로 정난희를 안았다.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됐다. 정난희는 에로틱한 포즈로 놀려줄 작정이었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문승협을 얼른 밀쳐냈다.
“좋다 말았다는 그 표정은 뭐야?”
“조금 더 안고 싶었는데 아쉬워서.”
“이그, 짐승, 생각나는 게 그쪽밖에 없지?”
“그렇다고 껴안자마자 밀어내냐.”
“그런다고 삐져?”
“삐지긴 누가 삐졌다고 그래.”
“이쪽으로 와 앉아, 추워.”
정난희가 담요를 들추며 자기 옆을 가리켰다. 문승협이 냉큼 가서 앉았다. 정난희가 담요를 덮어주고 바짝 앉아 문승협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고요한 정적 속에 ‘Poco’의 팝송 ‘Sea Of Heartbreak’가 둘 사이를 타고 흘렀다. 정난희는 노래에 동화되어 문승협을 지긋이 바라봤다. 문승협도 고개를 돌려 마주 보았다. 정난희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문승협이 자연스럽게 입술을 가져갔다. 지난번 키스가 자꾸 생각났던 터라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정난희입술을 탐하려고 용기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 담요를 덮은 야릇한 기분에 시작한 뽀뽀는 이전보다 진화하였다. 어색한 몸짓도 처음 한 번이 어렵지 다음은 자연스러웠다. 부드러운 노래선율이 둘을 하나로 융화시켰다. 숨겨진 둘의 본능을 서서히 일깨웠다. 이번 키스는 문승협의 또 다른 상상력을 자극했다. 정난희권유로 읽은 책 ‘테스’에서 가슴 만지는 대목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문승협손이 키스하는 중에 몇 번을 망설이다 조심스레 정난희가슴께로 다가갔다. 조금이라도 거부하면 멈출 생각이었다. 정난희가 움찔할 뿐 가만히 있었다. 자신감 붙은 손이 가슴을 살짝 움켜쥐었다. 정난희가 손을 떼어내고 자신의 양손을 문승협목에 감아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누운 정난희 위에 문승협몸이 포개어졌다. 정난희는 그 상태로 입술을 놓지 않았다. 문승협도 마찬가지였다. 정난희입술을 탐색하는 사이 상상도 못 한 정난희혀가 들어왔다. 처음 맞이한 정난희혀를 어찌할 줄 몰라 움직이는 데로 내버려 뒀다. 둘은 혀끼리 접촉을 시도하였다. 서로의 부드러운 혀와 달콤한 타액을 느끼면서 뜨거워졌다. 두 사람 모두 정신이 아득하고 몽롱했다. 갈 곳 잃어 방황하던 문승협손이 정난희상의를 파고들었다. 역시나 처음 상대하는 브래지어와 대치하였다. 잠시 어루만지다 브래지어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정난희가 손을 잡으면서도 힘주어 막지는 않았다. 이윽고 정난희젖가슴이 문승협손안에 들어갔다. 문승협은 가슴언저리를 쓰다듬으며 소중히 다뤘다. 행여 아파할까 봐 살며시 움켜쥐었다. 둘은 이성을 잃고 격정적으로 서로를 탐닉하였다. 정난희가 숨죽여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문승협은 탱천 한 성기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갈수록 스스로를 제어하기 어려웠다. 이미 욕망이 문승협을 장악하고 통솔하였다. 성적욕구에 절제를 잃은 문승협손이 분출구를 찾아다녔다. 정난희치맛자락을 들추고 허벅지로 향했다. 점점 위로 올라가 팬티에 닿는 순간 정난희몸이 굳어졌다. 정난희가 문승협손을 꽉 움켜잡으며 ‘안돼’라고 낮지만 짧고 강하게 소리쳤다. 문승협은 목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곧 제정신으로 돌아오면서 정난희와 떨어졌다. 두 사람의 모든 행위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본능이었다.
두 사람이 평정심을 찾았을 때는 카세트테이프가 멈춰있었다. 정난희는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문승협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아까 전에 그 팝송제목이 뭐야? Heartbreak?”
“아, Poco의 Sea Of Heartbreak인데, 미국컨트리가수 DonGibson곡을 커버한 거야.”
“음률이 좋아서 그런지, 노래여운이 계속 남는다.”
“응, 나도 그래서 자기 전에 자주 들어.”
대화하면서도 서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일생일대 크나큰 대사를 치른 뒤 쑥스러움이었다. 정난희가 헝클어진 머리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였다. 부끄러워서 소리와 동작을 최대한 자제했다. 문승협은 계속 시선을 피할 수 없는 노릇이라 먼저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정난희가 회피하다 눈을 맞췄다.
“사 사랑해.”
“응?”
“사랑한다고, 난희 널.”
“나도, 나도 오빠 사랑해.”
문승협이 용감하게 정난희얼굴을 당겨 입술을 훔쳤다. 둘은 재차 키스하였다. 문승협은 정난희를 상대로 치밀어 오르는 성적충동을 느꼈다. 생물학적 반응을 실현하려는 종족번식본능에 혈기왕성한 자신을 감당할 수 없었다. 정난희가 가슴으로 다가오는 문승협손을 재빨리 잡았다. 키스를 마무리하며 문승협을 밀어냈다. 이번에도 이성을 먼저 찾은 건 정난희였다. 1차 대전에 이어 2차 대전을 시작하려는 문승협욕구를 잠재웠다. 문승협도 정난희승낙 없는 인위적 결합을 원치 않았다. 정난희공조 없이는 불가능함을 알았다. 무엇보다 정난희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겨우 풀렸던 분위기가 문승협의 2차 도발로 다시 서먹해졌다.
“미안해.”
“뭐가?”
“방금 또 그런 거.”
“왜 그랬는데?”
“너를 사랑하는 마음에 또 키스하고 싶었어.”
“그럼 미안하다고 하지 마.”
“혹시 네가 하기 싫은데, 내 욕심 때문에 그랬을까 봐.”
“아니야, 나도 하고 싶었어.”
“진짜?”
“여자는 사람 아니야?”
“그렇다면 다행이다.”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할 거고, 오빠는 그때마다 내 의사를 존중해 주면 돼.”
“알았어.”
“오빠는 여자신체에 대해 알아?”
“아니, 잘 몰라.”
“생리하는 거는 알지?”
“응.”
“생리주기가 있는 것도 알아?”
“대충은 아는데, 자세히는 모르겠어.”
“이그, 순진해서 큰일이다.”
“그것이 그렇게 큰일일 것 가지야.”
“오빠, 여자를 사랑한다면. 아니다, 내가 차츰차츰 하나씩 가르쳐줄게.”
문승협은 중학교 때 서수연담임선생이 떠올랐다. 힘주어 강조했던 성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알았다. 부족한 성지식에 부끄러움이 몰려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 집에 가야겠다.”
“벌써?”
“벌써라니, 시간도 많이 됐는데.”
“좀 더 있으면 안 돼?”
“안돼, 위험할 거 같아. 여기 더 있으면,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이제부턴 너 안 건들고 가만히 있을게.”
“어허.”
늘 정난희말이 곧 법이었다. 문승협에게 반론 없이 따라야 하는 불문율이 됐다.
정난희가 문승협을 내보낸 뒤 서둘러 응접실을 정리하였다. 문단속을 하고 무용연구소를 빠져나갔다.
문승협은 길어귀서 기다렸다. 무용연구소를 나와 걱정스레 두리번거리는 정난희를 보았다. 무용선생이나 아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는 것 같았다. 만약 누군가에게 들켰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무용연구소가 궁금하단 말을 기억해 주어 고마웠다.
둘은 택시를 탔다. 강력한 스킨십을 나눈 후라 몸도 마음도 한층 더 가까워졌다. 택시기사눈치를 신경 쓰이지 않고 대담하게 손을 잡았다. 택시차창밖으로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며 오가는 사람들이 행복해 보였다. 두 사람감정이 세상과 연동되었다. 행복을 음미할 틈도 없이 택시가 정난희집 근처에 도착하였다.
정난희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전화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집으로 향했다. 문승협품에 안기고 싶었으나 참았다.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이면 또 달려들 문승협이기에 잠깐의 여유라도 주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문승협은 가벼운 포옹도 없이 휙 가버린 정난희가 야속하였다.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련 가득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하지만 돌아서는 발걸음은 가뿐했다.
집으로 가면서 무심코 하늘을 보았다. 무용연구소에서 일들이 영사되었다. 입속에 들어왔던 혀느낌. 손끝에 전해져 온 가슴감촉까지 되살아났다. 선을 넘어서지 못한 아쉬움과 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복잡한 심정이 교차하였다. 고개를 돌려 세상을 둘러보았다. 각종 전구와 소품으로 휘황찬란하게 치장한 교회모습들이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이 ‘Merry Christmas’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집에 와서도 정난희와 교감했던 흥분을 잊을 수 없었다. 잠자리에서도 생각났다. 그러나 몸과 마음으로 정난희와 소통하였음에도 사랑의 의미가 무언지 정의할 수 없었다. 첫사랑에 빠질수록 자아는 꼭꼭 숨어버렸다.
새벽녘 잠에서 깨어 무척 황당했다. 어제 사랑을 몸소 체험한 첫 경험 때문인지 몽정을 하였다. 지극히 정상적인 신체건강한 반응이지만 죄책감이 들었다. 속옷을 갈아입고 다시 잠을 청했다. 부모들은 성을 입에 담는 것이 불경스러워 안 가르쳐줬으나, 자신은 반드시 자식들에게 성교육을 시켜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정난희는 성탄절아침 일찍 눈떴다. 이부자리에 누워 어제 일들을 회상했다. 위험을 무릎 쓰고 무용연구소에서 문승협과 보내려 마음먹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날만큼은 둘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런 차에 한 달 전쯤 무용연구소를 궁금해하던 문승협말이 떠올랐다. 때마침 무용연구소가 가능한 상황이었고, 둘만 있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무용연구소를 보여주겠다는 명분과 작은 욕심이었지만, 돌이켜보니 참으로 간 큰 생각이었다. 문승협을 유혹하려는 본능, 순간 주체 못 한 욕망,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자신의 본성에 놀랐다. 내면에 존재하는 음탕함을 알게 되어 당혹스러웠다. 키스할 때 혀를 들이민 과감하였던 행위를 생각하니 부끄러움에 절로 이불킥을 날렸다. 조금만 더 문승협이 적극적이었다면 성관계를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자신을 지켜주려고 욕구를 참아낸 문승협에게 감동하였다. 갑자기 보고픈 마음에 전화해서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으나, 어제 행동들이 쑥스러워 차마 수화기를 들지 못했다. 그래도 모든 것이 자주적으로 한 동기이자 결과여서 떳떳하였다. 다시없을 크리스마스이브날추억을 만들어 기분 좋았다. 불현듯 문승협생각에 깊이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완강하던 자신의 주체성이 문승협으로 인해 흔들린다는 사실에 심란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한편 같은 시각 문승협은 정난희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통화할 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해야 할지, 허물없이 속 깊은 말을 해도 될지 고민됐다. 둘 사이가 예전보다 훨씬 가까워졌다는 현실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정난희집에 아무 때나 마음대로 전화할 수 없는 당장이 불만스러웠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일요일아침에서야 정난희에게 전화 왔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 목소리로는 어떤 심리상태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부드럽고 아양스럽다가도 금세 돌변해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듯 당당하였다. 다음 주에 전화하겠다는 마지막말은 또 간드러지게 했다. 앞으로 어떻게 대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전혀 그런 적이 없었던 표현방식이라 여성심리연구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마침 TV에 나오는 KBS드라마 ‘보통사람들’재방송을 보면서 어느 정도 짐작하였다.
여배우‘유지인’이 상대남자배우에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전화했다. 호감 갖고 있다는 심정을 들키지 않으려고 금세 돌변해 카랑카랑하였다. 너무 숨기면 상대가 모를까 봐서 다시 애교를 부렸다.
통화처음 정난희의 간지러운 목소리는 그제 나눈 키스와 육체적 스킨십에 대한 쑥스러움이었다. 이어진 당돌한 목소리는 진한 키스와 가슴을 내줬으나 우습게 보지 말라는 은연의 압박이었다. 자신을 가볍고 쉽게 볼까 봐 걱정에서였다. 마지막 앙증맞은 목소리는 그럼에도 좋은 감정으로 이어가자는 정도로 이해했다.
신기한 것은 드라마중간에 나온 ‘유안나’ 역의 여배우‘조용원’보다 정난희가 훨씬 더 예뻐보였다. TV연속극이 끝나갈 즈음 천영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이 비었다며 놀러 오라고 하였다.
천영기집에 류연경이 와있었다. 문승협이 도착하고 얼마 후 이담과 한현진이 왔다.
“크리스마스에는 뭐 했냐?”
“그냥 집에 있었어.”
“난희 안 만나고?”
“아, 난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났어.”
“우리는 이브부터 어제 크리스마스까지 같이 놀았다.”
“우리?”
“잉, 우리 넷이.”
“어디서?”
“그렇게 궁금하믄 같이 놀자고 할 때 오지 그랬냐?”
“난희하고 약속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둘이서 뭐 했는디?”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놀고.”
“뭐 하고 놀았는디야?”
“뭘 또 묻냐, 그냥저냥 놀았지.”
“하, 이 시끼, 얼굴이 빨개진 것 본께 뭔 일 있었그만?”
“아야, 순진한 헤실이가 일이 있어봐야 뭔 일 있겄냐?”
“승협이 니, 난희 입술쪼가리는 빨아봤냐?”
“염병, 별 걸 다 묻는다, 너희는 뭐 하고 놀았는데?”
“나는 연경이랑.”
“영기야, 그 그건 말하지 마.”
“뭐 으짠다냐, 친구끼린디?”
“그래도 그건, 제발 그러지마란께?”
“알았어 알았어, 안 하께.”
“뭘 했는데 그래?”
“아야, 느그 요 앞 점빵에 가서 먹을 것 좀 사 오니라.”
“뭣을아?”
“배도 출출한께, 라면이랑 과자랑 알아서 사와.”
“알았어, 가자.”
“연경이 니는 가지 말고 나랑 있어.”
“아니어, 나도 같이 갔다 올란다.”
류연경이 허겁지겁 가방에서 돈지갑을 꺼내 들고 한발 앞장서 나갔다. 문승협눈에 류연경행동이 이상하게 보였다. 한현진이 앞서가는 류연경을 따라잡아 나란히 걸었다. 문승협이 이담옆으로 다가갔다.
“야 담이야, 연경이 무슨 일 있냐?”
“그런 일이 있었어.”
“뭔데?”
“그저께 이브날에, 영기가 연경이를 따묵어부렀어.”
“뭐?”
“둘이 빠구리쳤단께.”
“진짜?”
“잉, 내가 옆방에서 다 들었어.”
“무슨 방?”
“연경이네 집이 비어서 거그서 놀았거든.”
“너희도?”
“아니, 우린 못했어. 현진이가 무섭다고 울믄서, 내 손을 꽉 잡고 안 놓드라.”
“너희들 아주 미쳤구나?”
“나는 어쩌다 본께 그렇게 됐고, 영기는 계획적이었어. 아야, 비밀로 해라잉.”
문승협은 그제야 좀 전에 천영기가 하려던 말이 뭔지, 류연경이 다급히 가로막으며 왜 울상이었는지 알았다. 이담에게 미쳤다고 했지만, 자신도 아찔한 경험이 있어 입을 닫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문승협뿐 아니라 세상사람들에게 많은 일이 벌어졌었다.
“아짐, 요번에 농심서 나온 너구리우동 순한맛 있소?”
“거그 있을 것인디?”
“그라고 육개장사발면도 새로 나왔지라, 해피소고기라면은 어딨다우?”
“거그 라면진열대에 다 있어, 찬찬히 찾아봐.”
“이건 뭐예요?”
“잉, 맥콜이라고 일화에서 나온 음료수여.”
“아짐, 이 비누가 요즘 방송에서 광고하는 그 비누요?”
“거그 럭키드봉하고, 애경유지럭스있제, 바로 그거여.”
“가시나라서 그란가, 현진이는 비누에 관심이 많다잉.”
슈퍼를 둘러보며 각자 먹고 싶은 것을 골라 한아름 사갔다. 천영기가 눈을 크게 뜨며 한마디 던졌다.
“민나 도로보데스.”
“아야, 우리 돈으로 사 온 건디 뭔 도둑이어?”
“하하, 느그들 뽄새가 꼭 도둑 같은께 한 소리여.”
‘민나 도로보데스’는 MBC연속극‘거부실록, 공주갑부 김갑순’ 편에서 배우‘박규채’가 일갈한 일본어대사였다. 모두 도둑놈이란 뜻으로 회자되며, 믿을 놈 없이 다 부정과 사기를 친다는 자조 섞인 말이었다. 남녀노소친구끼리 만나면 의당 오갈 만큼 유행하였다. 이철희∙장영자사건 때문에 ‘큰손, 단군이래 최대의’라는 말도 수시로 갖다 붙였다. 사회가 혼란할수록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매스미디어가 대중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가수‘조용필’ 인기가 하늘 높이 치솟아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오빠부대’도 등장하였다. ‘비련’의 첫 소절 ‘기도하는~’을 부르면 여성팬들이 ‘꺄아악’하고 소리 질렀다.
류연경과 한현진이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는 사이, 문승협이 책꽂이를 훑어보았다.
“야 영기야, 이거 신간소설인데 언제 샀어?”
“내가 산 것이 아니고, 우리 성이 산 거여.”
“뭔디야?”
“올해 베스트셀러라는 김홍신의 인간시장이어, 거그 이외수가 쓴 들개도 있을 것인디?”
“이거 어디다 놓으까?”
“이 멍청한 가시나야, 그것을 꼭 물어봐야 아냐, 저그 상 있는디 니 눈에는 안 보여?”
천영기가 라면을 끓여 온 류연경에게 갑자기 버럭 하여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한현진과 이담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다. 문승협이 얼른 밥상을 가져왔다. 류연경이 엉거주춤 들고 있던 냄비를 내려놓았다. 한현진이 그릇과 수저를 상위에 올렸다. 이담이 국자로 라면을 그릇에 퍼담았다. 한현진이 울상을 하며 서있는 류연경손을 잡아끌어 상 앞에 앉혔다. 침묵 속에 눈치 보면서 각자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천영기가 라면을 두어 젓가락 먹더니, 류연경에게 김치를 가져오라며 또 구박하듯 말하였다.
“김치 어딨는디?”
“냉장고에 있제 어딨겄냐, 대그박은 뒀다 얻다 쓸래?”
“연경아 앉아있어, 내가 가져올게.”
문승협이 일어나 김치를 가지러 갔다. 류연경이 애써 억눌렀던 눈물을 흘렸다.
“아야, 연경이가 느그 집에 처음 온 거 아니어?”
“연경이가 우리 집에 처음 온 거 하고, 김치가 냉장고에 있는 것이 뭔 상관이어?”
“그래도 그렇제, 니가 말이 좀 심하다.”
“아야, 눈물 안 그치냐, 입맛 떨어지게 진짜.”
천영기가 자신을 나무라는 이담에겐 아무 말도 못 하면서 류연경에게 화풀이했다. 류연경이 참다못해 가방을 들고일어났다. 한현진이 따라 일어나 류연경을 붙잡았다. 천영기가 류연경을 째려보며 비아냥댔다.
“갈라믄 가, 근디 지금 가믄 끝이다잉?”
“야 영기야, 너 진짜 왜 그래, 너무 심하잖아?”
문승협이 김치통을 내려놓고 천영기를 꾸짖으며 불편함을 숨기지 않았다. 류연경이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한현진과 문승협이 허겁지겁 뒤따라갔다. 한현진이 류연경을 붙잡아 달랬다. 류연경이 잠깐 망설이다 서글픈 눈으로 하소연하였다.
두 달 전부터 천영기가 끊임없이 성관계를 요구했다. 안된다 못한다며 거절하였더니 계속 화내서 많이 힘들었다. 도저히 견디다 못해 엊그제 관계했는데, 이후 완전히 돌변하였다며 서러운 눈물을 쏟았다.
문승협은 민망한 대화라 한걸음 떨어져 들었다. 참견하기 어려워 가만히 듣기만 했으나, 자기 욕구를 채운 뒤 돌변하였다는 천영기태도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해도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처사였다. 그런 천영기가 몹시 못마땅했다.
한현진이 남일 같지 않아 달래려고 손을 잡았다. 류연경은 상할 대로 상해버린 자존심에 뿌리쳤다. 이 상황에서 같이 있기 괴롭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한현진이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혼잣말로 ‘나도 그날 관계 안 하길 천만다행이네’라며 중얼거렸다. 문승협을 향해 고개돌리더니 눈을 흘겼다.
“니도 난희랑 했냐?”
“뭐를?”
“뭐긴 뭐여, 그 짓거리 말이제?”
“아 아냐, 우린 생각도 해본 적 없어.”
“그라지잉, 적어도 승협이 니는 그런 생각 안 하제?”
“응, 꿈에도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어.”
“넌 절대 딴 맘먹지 말고, 꼭 난희순결을 지켜줘라잉?”
“그 그래, 알았어.”
“나 혼자 느그들 틈에 있는 것도 거시기한께, 나도 그냥 가야 쓰겄다.”
“담이한테 간다고 말해야 되지 않아?”
“미안한디, 니가 가서 담이한테 내 가방 좀 챙겨 나오라고 말해주라.”
이담이 한현진에게 가방을 전해주고 돌아왔다. 셋은 팅팅 불은 라면을 먹었다. 서로가 오늘 일에 할 말이 많았지만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만화책만 뒤적였다.
문승협은 저녁시간에 집으로 갔다. 식사를 하고 마지막 종영을 앞둔 KBS1‘풍운’을 봤다. 사극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 역 이순재와 명성황후 여흥민씨 역 김영애’ 연기가 흥미로웠다. 엄마 이항리가 즐겨보는 주말연속극‘아내’에 밀려 채널이 돌아갔다. 한 남자가 기억상실로 전처의 생존을 모른 채 다시 결혼하여 두 명의 아내를 갖게 된 드라마였다. 한 명의 남편과 두 명의 부인 사이에 불가피한 삼각관계이야기는 주부들에게 인기 받기에 충분하였다.
문승협은 방학임에도 등교시간이 습관 되어 아침 일찍 일어났다. TV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딩동댕 유치원, 모여라 꿈 동산, TV유치원 하나 둘 셋’을 봤다.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이 출연하는 프로여도 눈길이 갔다.
도서관을 다녀온 저녁시간에는 ‘개구리 왕눈이와 미래소년 코난’을 재미있게 보았다. 1982년 끝자락 뉴스는 의무경찰제신설이었다. 대학생들 대모진압용으로 제정되었다는 반발이 불 보듯 뻔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