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13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43)

by 태양을 품은 별

1983년 계해년은 토요일로 시작됐다. ‘공직자윤리법시행’이 첫 뉴스였다. 공직자들이 새해부터 모범을 보이겠다며 맹세하였지만, 이를 믿는 국민들은 드물었다. 외무부가 50세 이상 국민들의 해외여행허용을 발표했다. 이 역시 일부 부유층만 반길 뿐 하루하루를 살기 바쁜 대다수 서민들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문승협과 정난희는 크리스마스이브날 무용연구소에서 함께 보낸 일을 계기로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문승협은 정난희에게 사로잡히는 날이 더욱 늘어났다. 서로 위로와 마음을 나누며 많은 걸 같이 하길 바랐다. 정난희는 문승협기대를 아는 만큼 둘만의 시간을 최소한이라도 갖으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바라는 목표와 문승협 사이에서 고심이 깊었다. 고뇌의 시간이 반복되면서 점차 흔들렸다. 가슴속 잉태된 갈등과 힘듦이 두 사람 관계에 어떤 파급을 가져올지 짐작도 못했다.

문승협은 여느 일요일아침처럼 정난희전화를 기다리며 ‘은하철도 999’를 시청하였다.


은하철도 999는 마쓰모토레이지松本零士의 창작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었다. MBC문화방송에서 한국말을 더빙하여 일요일아침 오전 8시에 2편씩 60분으로 묶어 정규 방영했다. 소년‘철이’와 신비로운 금발미녀‘메텔’이 은하철도 999호를 타고 안드로메다의 어느 별로 가는 여정을 그렸다.

배경은 서기 2221년 은하계행성이 우주공간을 달리는 열차로 연결된 미래세계다. 부유한 자들은 기계몸체에 정신을 옮긴 기계인간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계몸을 얻을 수 없는 데다, 외곽빈민촌에서 기계인간에게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는다. 어느 날 메갈로폴리스에서 출발하는 은하철도 999호를 타면, 무료로 기계인간으로 개조해 주는 행성에 갈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빈민촌사람들은 자유로운 삶의 기계인간이 될 희망을 품는다. 빈민촌에 살던 철이는 엄마와 밤하늘을 날아가는 은하열차를 보며 감탄한다. 엄마는 철이를 태우겠다며 열심히 노력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사냥하는 기계백작무리에게 살해당한다. 철이는 복수를 다짐하고 기계백작주거지를 찾아낸다. 백작과 일당들까지 소탕하나 살인혐의로 경찰에 쫓긴다. 메텔이 위기에 처한 철이를 도와주고, 동행을 조건으로 은하철도무임승차권을 건넨다. 그렇게 기계인간이 되기 위해 안드로메다의 별로 여행을 시작한다.

각 편은 기차가 머문 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연결진행된다. 은하철도 999호가 방문한 별의 극단적 특수성을 부각하고, 인간삶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에피소드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상당히 강하였다. 지구의 최첨단미래도시 메갈로폴리스를 출발하여 기계혹성 ‘프로메슘’까지 운행하는 우주열차도 독특했다. 외부모습은 19~20세기 운행하였던 증기기관차나, 내부는 인공지능컴퓨터로 장착됐다. 기관사 없이 컴퓨터조종에 운행되고, 항상 우렁찬 기적과 연기를 뿜어내며 출발한다. 역에 정차할 땐 보통기관차처럼 레일을 달리지만, 우주로 갈시는 비행기처럼 하늘을 날아오른다. 겉과 측면에 999라는 숫자가 새겨있고, 철이와 메텔의 우주여행을 도와주는 동반자이기도 했다.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우주정거장에 햇빛이 쏟아지네, 행복 찾는 나그네의 눈동자는 불타오르고, 엄마 잃은 소년의 가슴엔 그리움이 솟아오르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기차는 은하수를 건너서 밝은 빛의 바다로, 끝없는 레일 위에 햇빛이 부서지네, 꿈을 좇는 방랑자의 가슴에선 찬바람 일고, 엄마 잃은 소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있네,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힘차게 달려라 은하철도 999.’

동생들이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주제가를 따라 불렀다. 문현아가 1절을 하고 나니, 문윤아가 2절을 하였다.

다음 주 예고편이 나올 때, 정난희에게서 이번 토요일에 보자는 반가운 전화가 왔다.

문승협은 약속한 날을 손꼽으며 책과 씨름했다. 매일 도서관을 다녀도 한주가 참 느리게 흘렀다. 드디어 토요일이 왔다. 아침 일찍 시립도서관을 찾았다. 정난희를 만나는 날도 들뜸 없이 공부에 열중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싶었다. 의지만큼 집중력이 배가되었다.

점심 무렵, 문일고친구들이 다짜고짜 문승협을 도서관매점으로 데려갔다.

“야, 무슨 일인데 그래?”

“점심으로 라면이나 한 그릇 때리자고.”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야.”

“음마, 니 모르냐? 시방 위성이 지구에 추락 중이라고, 여그저그서 난리여.”

“우리 대그박에 떨어지믄 즉사여 즉사.”

핵추진첩보위성‘코스모스 1402호’가 고장 나서 지구에 추락 중이라는 소련정부발표가 있었다. 다들 라면을 먹으며 당장 머리 위로 떨어질지 모른다고 호들갑 떨었다. 주택은행에서 곧 발매할 올림픽복권당첨보다 확률이 떨어진다는 설명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를 위험에 두려워하였다. 한국형 컴퓨터를 개발해 공급키로 확정한 상공부소식을 두고도 갑론을박했다. 한국형 컴퓨터가 보급되면 일상에 어떤 변화가 올지 각자의견을 펼쳤다. 쓸데없는 미래걱정을 접어두고 공부나 하자는 말에 모두 매점을 나왔다.

문승협은 열람실로 가면서 혹시나 싶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위성대신 눈송이가 간헐적으로 날렸다.

도서관을 나설 때는 눈이 펑펑 내렸다. 예보가 있었지만 순식간에 거리에 쌓일 정도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뽀드득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정난희가 알려준 ‘아마데우스’는 클래식음악다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두운 조명에 ‘하이든의 시계교향곡’이 울렸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종업원이 오기를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조용하다 못해 엄숙하였다. 대화를 하거나 소곤거리기라도 하면 쫓겨날 분위기였다. DJ부스를 바라보는 좌석구조가 독특했다.

잠시 후 정난희가 들어왔다. 밖에서 눈을 털고 온듯하였으나 곳곳에 남아있었다. 젖은 머리가 촛불조명에 반짝거렸다. 우산을 안 썼냐고 묻자, 정난희가 ‘쉬’하며 황급히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주위눈치를 살피더니 어리둥절한 문승협에게 ‘대화엄금, 정숙’이라고 종이에 써서 보여줬다. 주문도 대화 없이 메모하여 줘야 했다. 테이블마다 종이와 볼펜이 놓여있는 이유였다. 종업원도 주문한 차를 최대한 조용히 내려놓았다. 아무리 클래식음악카페라지만 낯선 문화였다.

정난희에게 메모를 건네받은 종업원이 살그머니 걸어가 DJ부스 앞 바구니에 갖다 놓았다.

정난희는 세계 3대 교향곡이라는 ‘베토벤의 운명, 슈베르트의 미완성,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신청하였다.

‘빠바바밤, 빠바바밤~’

문승협은 TV에서도 자주 들어 귀에 익숙한 베토벤운명을 금방 알았다. 슈베르트미완성은 선율에 집중할수록 졸음만 몰려왔다. 정난희는 신청한 음악이 나올 때마다 곡의 탄생 배경과 의미, 구성과 특징 등을 필담으로 열심히 해설했다. 문승협은 별감흥이 없으면서도 알아듣는 척 반응하였다. 낯선 클래식음악을 친근하도록 애쓰는 정난희에게 성의표시였다. 정숙한 가운데 클래식음악을 즐기라며 대화를 엄금한 카페방침이 불편했으나, 촛불조명아래 정난희와 바짝 붙어 앉아 필담을 나누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비창이 시작되자, 정난희가 ‘러시아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작품, 발레곡의 상징’이라고 적었다. 차이코프스키의 동성애자설을 속삭였다. 문승협은 필담보다 소곤거리는 정난희입술에 자꾸 눈이 갔다. 귓가에 느껴지는 정난희의 숨소리와 입김에 자극받았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었다. 정난희는 설명하는 동안 입술에 꽂힌 문승협의 시선과 응큼한 표정을 보고 알아챘다. 눈을 흘기며 벌을 내리듯 종이와 볼펜을 불쑥 밀었다. 문승협은 속마음을 들켜 뻘쭘했다. 음악이나 신청하라는 정난희지시를 받들었다. 잠시 고민하다 작은 고모 때문에 가끔 들었던 ‘비발디의 사계’를 썼다. 정난희가 메모를 보고 미소 지었다. 메모지는 종업원을 통해 DJ박스로 전달됐다. 정난희가 볼펜을 다시 들었다.

‘2주 동안 뭐 했어?’

‘열심히 도서관만 다녔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도서관만 열심히 다님 어떡해?’

정난희가 필담을 멈추고 억울한 표정을 짓는 문승협이 귀여워 볼을 어루만졌다. 문승협은 정난희손길에서 순간 사랑을 느꼈다. 어깨로 정난희손등을 눌러 볼에 밀착시켰다. 따듯한 손길을 더 느끼고 싶었다. 정난희가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둘은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며 함께 지내왔던 봄여름가을겨울을 회상하였다. 주위시선을 피해 최대한 가깝게 앉아 팔짱 낀 채로 손잡고 있었다.


사계라는 곡은 사계절 자연의 변화와 특징적 풍경을 묘사해 표제음악의 효시로 알려졌다. 작자미상으로 전해져 온 이탈리아정형시소네트형식을 기초로 작곡되어 ‘음에 의한 풍경화’로도 불렸다. 봄은 새들이 노래하고 봄기운이 무르익어가는 풍경을 음악으로 그려냈다면, 여름은 천둥번개 폭풍우가 몰아치는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가을은 수확의 기쁨을 즐기는 흥겨운 축제의 분위기며, 겨울은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을 표현했다.


정난희는 문승협에게 한 손이 묶인 채로 음악이 끝날 때까지 필담을 이어갔다. 문승협은 정난희의 폭넓은 클래식음악지식에 감탄하였다. 덕분에 클래식음악지식을 한 스푼 얻어먹었다.

둘은 오랜 시간 깍지를 껴서 손에 땀이 배고 팔이 저렸다. 그 정도 불편은 기꺼이 감당했다.

음악다방을 나왔을 때는 온 세상이 하얀 눈에 덮여 눈부셨다. 눈이 발목높이까지 쌓여있었다. 정난희가 유달산 쪽으로 발길을 잡았다. 문승협은 말없이 따랐다.

작년 11월 개장한 조각공원에 도착하였다. 두 달여밖에 안 됐는데도 조각작품들이 잘 어우러져있었다.

꽤 운치 있는 눈 덮인 조각공원에서 시민공원으로 갔다. 정난희가 인적 드문 한적한 곳을 찾았다. 문승협이 벤치에 쌓인 눈을 치워 앉을 수 있게 정리했다. 바람이 불지 않아 춥진 않았지만, 신발이 젖어 발이 시렸다. 멀리 보이는 눈 내린 사찰이 아름다웠다. 첫 입맞춤한 월출산구정봉이 떠올랐다. 별안간 정난희가 사람들이 안 다니는 곳을 좋아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은근히 키스를 기대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봤다.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아, 풍경이 멋있어서.”

“이상한 생각을 한건 아니고?”

“무 무슨 이상한 생각?”

“오빠는 표정에 다 나타난단 말이야.”

“헤헤, 들킨 건가?”

“호 혹시 말이야, 우리 헤어지면 어쩔 거야?”

“뭐라고?”

“아 아니, 혹시, 만약에 말이야.”

“혹시 든 만약이든 절대 그런 말 하지 마, 나 진짜 심장 떨어질 뻔했어.”

“호호호, 알았어 알았어, 오빠가 애들처럼 그렇게 경기할 줄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에이 장난이야, 농담이라고.”

“난희야, 나 너 사랑해, 그것도 네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내 마음 알지?”

“알아, 나도 오빠 사랑해.”

정난희가 장난이고 농담이라고 하였으나, 문승협은 불쑥 머리든 불안을 잠재우려고 사랑함을 강조했다. 사랑한다는 정난희대답을 듣고서야 사랑을 확인하고픈 여자마음정도로 이해하였다.

멈췄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곧 세상을 덮을 듯이 함박눈을 펑펑 쏟아부었다.

“오빠, 추워진다, 이제 가자.”

“그래, 그러자.”

“오늘은 나 집에 바래다줘.”

“응, 좋아.”

정난희가 평소 같지 않게 집에 바래다 달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기쁘게 받아들였다.

정난희가 집 근처에 다다라 문승협손을 이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가볍게 입을 맞춘 뒤 포옹했다. 문승협은 정난희처분에 몸을 맡겼다. 고분고분 따르던 문승협이 꽉 껴안으려는 찰나, 정난희가 슬며시 밀어냈다. 문승협은 욕심을 충분히 채우지 못해 아쉬웠지만 정난희의사를 거스를 순 없었다.

정난희가 전화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집으로 향하였다. 문승협은 말없이 뒷모습을 지켜봤다. 저만치 걸어가던 정난희가 뒤돌아 손을 흔들었다. 문승협도 손들어 화답했다. 눈싸움하던 동네꼬마들이 둘을 보고 멈칫하였다. 갑자기 정난희를 타깃으로 눈뭉치를 던졌다. 우리 동네에 왜 낯선 남자를 데려왔냐는 질투였다. 정난희도 뜻밖의 공격에 지지 않겠다며 눈을 뭉쳐 대항하였다. 동네꼬마들이 정난희반격에 뭉쳐놓은 눈으로 총공세를 폈다. 문승협이 수세에 몰린 여자친구보호명분으로 참전을 망설이는 사이, 정난희가 아이들 공격을 피해 도망치듯 집으로 뛰어갔다. 동네꼬마들이 승자처럼 의기양양하게 문승협을 째려보았다. 문승협은 둘 사이를 훼방 논 꼬마들에게 복수하려다 참았다. 악의 없는 어린아이들 행동에 맞장구치던 조금 전 정난희모습이 생각났다. 유쾌한 기분에 돌아서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정난희와의 관계가 늘 오늘 같기를 바랐다. 문득 마음 한구석이 걸렸다. 조금 전 유달산시민공원에 앉아서 대화 나눌 때가 떠올랐다. 뭔가 말하기를 주저하며 흔들리는 정난희의 눈빛과 서글펐던 표정이 찜찜했다. 뭔지 모를 불안이 엄습하였으나 딱히 그럴만한 이유가 없기에 쓸데없는 걱정으로 여겼다.

다음날 정난희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아 문승협에게 착잡한 일요일이었다. 어제 만났으니 오늘은 거르는 거라며 스스로 위안 삼았다. 기계적으로 책가방을 챙겨 시립도서관에 갔다. 지난 크리스마스다음날 만난 이후 3주간 연락이 없던 천영기가 공부하고 있었다.

문승협과 천영기가 도서관매점에서 점심을 먹는데 류연경이 찾아왔다. 무슨 연유인지 천영기가 류연경을 외면했다. 문승협은 둘 사이에서 난처하였다. 류연경이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천영기에게 이야기 좀 하자고 사정했다. 천영기가 마지못해 류연경을 데리고 도서관모서리 느티나무 근처 벤치로 옮겼다.

문승협은 천영기를 기다리다 열람실로 올라갔다. 창문을 통해 둘을 지켜보았다. 너무 멀어 대화가 들리지 않았지만, 류연경이 천영기를 설득하는 모양새였다. 천영기는 화를 내며 무시하고 간간히 손을 들어 때리려는 시늉을 하였다. 한동안 둘이 옥신각신 하더니, 천영기가 돌아서 열람실을 향해 걸었다. 류연경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죽여 흐느꼈다.

문승협이 열람실로 들어오는 천영기에게 무슨 일인지 물으려다 말았다. 둘 사이 일인지라 궁금해도 어쩔 수 없었다. 다시 창밖을 보았다. 눈물을 닦아내며 벤치에 앉는 류연경이 처량해 보였다. 공부에나 집중하자며 책을 폈다. 수학 세 문제를 푼 뒤 무심코 창밖을 내다봤다. 여전히 류연경이 멍하니 벤치에 앉아있었다. 또 30분쯤 지났을 때는 보이지 않았다.

어둑해질 무렵, 저녁 먹으러 가자는 천영기를 따라 도서관을 나섰다. 놀랍게도 류연경이 도서관출구계단옆에 서있었다. 천영기가 못 본체하며 앞만 보고 갔다. 류연경이 다급히 불렀으나, 천영기는 무시하며 바삐 걸었다. 문승협이 어정쩡한 자세로 망설이자, 천영기가 짜증 내며 빨리 오라고 재촉했다. 류연경이 천영기 쪽으로 가려는 문승협을 애절히 불렀다.

“승협아 잠깐만,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으까?”

“여 연경아, 무슨 일이야?”

천영기는 류연경에게 돌아선 문승협을 두고 그냥 가버렸다. 류연경은 애타는 심정에 문승협을 붙잡았으면서도 눈물만 흘렸다. 도서관에서 나온 남녀학생들이 어색하게 서있는 둘을 힐끗거렸다. 문승협은 다그쳐 묻지 않고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류연경은 어떻게 서두를 꺼낼지 한참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지난번 크리스마스다음날 천영기집에서 뛰쳐나갔을 때 한현진에게 털어놓은 내용과 대동소이하였다.

천영기의 갖은 폭언과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성관계를 가졌는데, 이후 돌변하여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했다. 설득하려고 만나자 해도 천영기가 계속 피하기만 하였다. 잘못한 것을 말해주면 뭐든 다 고치겠다며 사정해도 외면하고, 두 번 다시 나타나면 죽여버리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지금 자기 인생이 시궁창에 빠진 기분이라고 하였다.

류연경이 복받친 감정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이상하게 쳐다보며 지나가는 학생들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문승협은 류연경을 부축해 인적 드문 골목으로 데려가면서 도울 방법을 궁리하였다. 류연경마음을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최소한 상실감정도는 공감했다. 아무리 천영기와 친한 친구사이라도 제삼자입장에서 어떻게 중재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류연경이 골목길 방범등전봇대에 기대어 슬픔을 추슬렀다. 문승협은 천영기마음을 돌려보도록 잘 설득해 보겠다는 말밖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최대한 노력하겠으나 장담은 못한다고 다.

류연경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에 고개를 끄떡였다. 또다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문승협이 어느 정도 진정된 류연경을 버스정류소까지 바래다주고 천영기집으로 갔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잉, 승협이 왔냐.”

“영기 있어요?”

“2층 지 방에 있다, 가봐라.”

“네.”

“밥은 묵었냐, 밥 주까?”

“아니요, 괜찮아요.”

천영기는 방으로 들어서는 문승협을 투명인간 취급하였다. 엎드려서 만화책만 뒤적였다.

“야 천영기, 일어나 앉아봐.”

“…….”

“이야기 좀 하게 앉아보라니까?”

“나는 니랑 야그 할 거 없어, 씨잘데기 없는 소리 할라믄 그냥 가라잉.”

“너 연경이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어허, 니가 뭔디 참견이냐. 니나 정난희한테 잘해, 남일에 끼어들지 말고.”

“나는 난희한테 너처럼 그렇게 안 해, 아니, 못해.”

“하기사, 니 같은 쪼다 시끼가 뭘 하겄냐.”

“너, 연경이랑 그랬으면 책임져야 되는 거 아냐?”

“뭣아, 한번 그랬다고 책임지믄, 평생 스무 명쯤 데꼬 살아야겄다잉?”

“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 너 연경이랑 안 그랬으면, 안 헤어졌을 거잖아?”

“니가 내 속에 들어와 봤냐, 뭘 안다고 씨부리냐?”

“그거 배신이야, 네가 연경이를 배반한 거라고.”

“아야, 친구라도 지킬 선이 있어, 선 넘지 마라잉.”

“이런 나쁜 새끼, 너 같은 놈을 친구라고 생각했었다니, 내가 다 미치겠다.”

“인자부터 친구 하지 마, 그라믄 되잖애.”

“영기야, 이건 내 부탁이다. 연경이랑 정 헤어지려거든, 연경이랑 충분히 이야기해.”

“염병, 이 마당에 뭔 야그를 하겄냐?”

“헤어져야 된다면 이유를 잘 설명하고, 연경이 생각도 들어줘야지, 안 그래?”

“그래 봤자 아무짝에 쓸데없어, 가심만 아플 뿐이제.”

“왜 연경이가 가슴 아프다고 생각해? 너도 연경이 마음을 안다는 얘기잖아?”

“…….”

“나도 잘은 모르는데, 그래도 사귀다가 헤어지려면, 상대를 납득시켜줘야 하지 않냐?”

“미련만 남길뿐이어, 헤어질라믄 단칼에 끝장내야 써.”

“아무튼, 한 번만이라도 연경이를 만나서 이야기 좀 들어줘라, 친구로서 부탁할게.”

“이그, 저 마바리 오지랖 넓은 시끼.”

“평생 지켜온 순정과 정조를 너한테 받친 연경이 입장을 한번 생각해 봐.”

“니 시방 신파 찍냐?”

문승협은 화가 치밀어 올라도 애걸복걸 매달린 류현경을 생각해 참았다. 천영기에게 강한 거부감을 느낌과 동시에 류연경에게 많이 미안했다.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 해도 도저히 이해 안 가는 처신이어서 몹시 못마땅하였다. 그렇다고 천영기를 끌어다 류연경 앞에 앉힐 수 없는 노릇이었다. 류연경을 만나서 충분히 대화를 나누라며 신신당부하고 나왔다.


통계청이 언론을 통하여 1980년 기준, 인구 및 주택센서스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국내인구수 37,436,315명에 7,969,201 가구. 인구밀도가 세계 3위인 km²당 385명. 대한민국 합계 출산율이 2.06명으로 인구대체 수준을 못 넘기기 시작하였다.


일 년여 재미있게 즐겨본 은하철도 999 마지막 편이 방송됐다. 은하철도 999가 끝나면 늘 정난희전화를 기다렸던 것이 일요일아침 루틴이었는데 종영되어 무척 아쉽고 허전했다. 곧 정난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문승협이 반갑게 받은 데 비해 약간 격앙된 목소리였다.

“오빠, 일주일 동안 잘 지냈어?”

“응, 너는?”

“난 오빠 때문에 잘 못 지냈는데?”

“나 때문에?”

“응, 별의별 소릴 다 들었지 뭐야.”

“무 무슨?”

“왜, 찔리는 거 있어?”

“아니, 없는데?”

“그만 까불고, 빨리 이실직고하시지 그래.”

“진짜야, 아무 일 없었어, 맨날 도서관만 다녔는데?”

“오빠, 나 입 아프게 하지 마, 지난 일요일 저녁시간쯤 시립도서관 앞에서 뭐 했냐고?”

“아, 류연경이랑 잠깐 이야기했어.”

“류연경?”

“응, 영기 여자친구 류연경.”

“참나, 이해가 안 되네. 왜 오빠가 류연경이랑 만나고, 또 류연경이 왜 펑펑 울어?”

“펑펑 울긴, 그냥 조금 울었지.”

“뭐야, 지금 류연경 편드는 거야?”

“근데, 어떻게 알았어?”

“그다음 날 누가 말해줬어.”

문승협에게 일어난 일이 정난희귀에 들어가기까지 하루면 충분하였다. 정난희가 천영기를 만나 무슨 말을 했고, 느낀 소감까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문승협은 자초지종 설명하느라 진땀 났다. 가족들 눈치를 보며 답변하느라 곤혹스러웠다. 정난희는 모든 정황을 듣고 충고를 덧붙였다.

“남녀관계를 맘대로 재단하거나 쉽게 속단하지 마, 영기오빠에게 권고는 잘했는데 함부로 끼어들진 말고.”

“알았어, 그럴게.”

“근데 오빠, 오빠도 영기오빠처럼 나를 헌신짝 버리듯 할 거야? 혹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난 연경언니처럼 그렇게 안 해, 절대 안 매달린다고.”

“알아, 네가 그럴 사람도 아니라는 거.”

“뭣이라, 내가 그럴 사람도 아니라니, 무슨 뜻이야?”

“아 아니, 내가 그렇게 안 만들 거라고.”

“우리 만남을 내가 시작했듯 그 끝도 내가 해, 알아?”

“응, 아 알아.”

“명심해, 응?”

“넵, 명심 또 명심.”

천영기와 류연경의 이별이야기가 문승협과 정난희 관계로 옮겨갔다. 문승협은 둘 사이 만남과 앞날의 결정자가 정난희라는 사실을 덤으로 알게 되었다. 씁쓸하게 통화가 끝났다. 아무리 좁은 도시라지만 방학인데도 소문이 정난희에게 전해지는데 불과 하루라니 신기하였다. 앞으로 더욱 행동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딴짓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통화말미의 정난희명령을 받들었다. 방학중일상이 집과 도서관이었다.


화요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평일이라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도서관을 찾았다. 시립도서관에 들어서니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군댔다. 문교부가 외국박사학위를 조회하기로 결정한대 이어, 학생체력검사종목에 오래달리기와 윗몸일으키기를 추가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소식을 들은 학생들이 원망을 늘어놓았다. 고등학교3학년들은 대입학력고사와 대입체력장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 민감했다. 갑작스럽게 바뀐 문교부방침에 불만이어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점수에 민감한 아이들은 당장 체력장을 대비하겠다며 계획을 세웠다. 문승협도 다른 고3들처럼 대입학력고사와 체력장 준비가 부담이었다. 가중된 심적 압박감에 공부가 집중되지 않았다. 저녁식사 때에 맞춰 집으로 갔다.

아빠 문경준은 퇴근시간이 지났으나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 이항리가 차려준 저녁을 두 여동생과 함께 먹었다. 오랜만인데도 다들 밥 먹는 동안 별말 없었다. 막내 문윤아가 마지막 숟가락을 뜨면서 입을 열었다.

“오빠, 난희언니랑 통화하면서 왜 그렇게 쫄았어?”

“내가? 언제?”

“엊그제. 아주 벌벌 기던데?”

“무슨, 그냥 친절하게 전화받아준 거야.”

“헐, 두 번 친절했다가는 무릎 없어지겠다.”

“야, 너는 오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막내 문윤아가 문승협에게 따지듯 놀리자, 문현아가 문제 삼았다.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일촉즉발상황에서 이항리가 TV채널을 돌리며 조용히 하라고 하였다. 자매 간 전쟁은 그렇게 진화되었다.

이항리가 선택한 프로는 연속극‘전원일기’였다. 방송한 지 2년이 넘은 장수프로그램이었다. 화요일 밤 7시 40분이 되면 대부분 가정은 전원일기를 보려고 TV앞에 모였다. 농촌마을유지 ‘김회장네’와 ‘복길네’로 대표되는 이웃들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진행됐다. 김회장역에 ‘최불암’, 김회장부인역에 ‘김혜자’였다. ‘김용건과 고두심’이 김회장의 큰아들과 며느리로 출연하였다. 특히 30대 꽃다운 나이에 노인분장으로 출연한 ‘일용엄니 역 김수미’가 인기를 끌었다.

전원일기 연속극이 끝나고, 9시 저녁뉴스에서 ‘사진작가 죽음연출사건’을 브리핑했다.


한 달 전쯤인 1982년 12월 중순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네크로필리아사건이었다. 서울구로구 호암산에서 24세 이발소여종업원사체가 발견됐다. 한국경찰역사상 최초 프로파일링기법을 동원하였다. 특수절도 4범의 전과기록이 있는 아마추어사진작가이자 보일러배관공이 살인자였다. 범인은 당시 애인이던 피해자를 살해장소로 데려갔다. 사진촬영을 준비하다 추운 날씨에 감기예방약이라며 청산가리를 주입한 약을 건넸다. 약을 먹은 피해자는 사진촬영 중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범인은 아무 죄의식 없이 무려 21장의 사진을 찍는 잔인성을 드러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모습부터 죽는 순간까지 고스란히 담았다. 그리고 죽은 피해자를 낙엽 등으로 묻었다. 피해자시신은 며칠 후 범행장소에서 병정놀이를 하던 동네어린이들에 의해 발견됐다. 사건을 접한 서울남부경찰서는 피해자의 부검과 인맥관계 등을 토대로 용의자를 파악했다. 밀착수사와 집안수색을 통해 확실한 피의자를 선정하였다. 피의자집에서 보일러기사들이 흔히 사용하는 공업용 청산가리를 발견했다. 지하보일러실벽속에서 필름과 노트를 찾아 증거물로 확보하였다. 피의자가 범행을 극구 부인했지만, 사진감정전문가의견 한마디에 범행일체를 자백하였다.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사진을 찍으려고 청산가리를 캡슐에 넣어 죽음까지 시간을 벌었다는 전문가의 말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고급카메라를 사용한 솜털사진이 결정타였다. 어릴 적 불행한 가정환경과 잦은 학교폭력 등이 원인이었다. 비정상적 인격과 지나친 집착에서 비롯된 비극적 사건은 전국을 분노와 경악에 빠뜨렸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비판이 들끓었다. 사람의 생명을 자신의 예술창작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삼고,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한 채 사진촬영만 하는 극악범죄였다. 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기소된 살인자에게 사형선고는 당연한 예상이었다. 사건발생당시 해외토픽에까지 오르자, 소위‘높은 사람의 나라망신’이라는 질책에 한 달여 만에 속전속결한 수사결과였다. 이 사건은 전처도 실종됐다는 의문이 남아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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