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45)
설렘과 기다림에 이틀이 무척 더뎠으나, 문승협생애 오늘만큼 들뜬 날은 없었다. 생각지 못한 임시휴일이 생겨 학교에 안 갔을 때 보다 신났다. 아침부터 정난희맞이로 방청소는 기본이고, 정원과 거실을 돌며 정리정돈에 열심이었다. 평소 하지 않는 짓을 한다고 엄마에게 핀잔 들어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두 여동생 문현아와 문윤아는 점심을 먹은 후 약속이 있다며 나갔다.
두시 무렵 정난희가 작은 화분을 안고 문승협집에 도착하였다. 예전에 문승협엄마가 동백꽃을 좋아한단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이항리는 선물을 받아 들고 기뻐하며 반겼다. 부엌에서 먹거리를 한 상 차려왔다. 셋이 거실에 앉아 전병과 한과를 먹으며 이런저런 안부를 물었다. 잠시 후 이항리가 수정과를 가져다주고 외출했다. 선약이 있어 이웃집에 간다고 하였지만, 둘이 편히 있으라는 배려였다.
“수정과가 맛있긴 한데 좀 싸하다.”
“그러면 식혜 마실래?”
“괜찮아.”
“아냐, 내가 가서 가져올게.”
“여동생들은?”
“친구 만나러 갔나 봐.”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그럼 다음 주에 또 오면 되잖아.”
“피, 웃기고 있어.”
“자, 마셔봐, 우리 집 식혜 진짜 맛있어.”
“음, 시원하고 달달하다.”
“식혜는 시원해야 제 맛이지.”
“뭘 그렇게 빤히 봐?”
“예뻐서.”
“풋, 새삼스럽게.”
“내 방으로 갈래?”
정난희가 문승협방에 따라 들어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문승협이 펴져있는 이불을 들췄다.
“위풍이 있어서 좀 썰렁해, 이 쪽으로 앉아.”
“따뜻하다.”
“담요를 덮으면 더 따뜻해.”
“오빠,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오늘?”
“응. 모르지?”
“음, 우리 집에 두 번째 온 날?”
“칫, 우리 소개받고 정식으로 만난 지 1년 되는 날이야.”
“아, 그렇구나.”
“어디서 만났는지는 알아?”
“독일제과.”
“그래도 그건 기억하네.”
“난 우리가 사귀기로 한날을 처음 만난 날로 생각했어.”
“그게 언젠데?”
“작년 5월 29일.”
“오호, 제대로 기억하고 있군.”
“당연하지.”
“호호, 저기 내 가방 좀 줘봐.”
문승협이 잽싸게 가져다 주자, 정난희가 잠깐 눈감으라면서 가방을 열고 뭔가를 꺼냈다.
“자, 이제 눈떠.”
“이게 뭐야?”
“발렌타인데이 초콜릿.”
“우와, 이걸 어떻게.”
“왜, 내가 잊었을 까봐?”
“감동이야.”
“발렌타인데이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었어, 이해하지?”
“그럼 당연하지, 무용 때문인데 뭐.”
“서운하지 않았어?”
“아니, 전혀.”
문승협은 뒤늦은 밸런타인데이선물을 받고 그동안 섭섭했던 감정이 눈 녹듯 사라졌다. ‘난희에게 다 계획이 있었구나’라며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을 받은 정난희가 스르르 눈을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맞췄다. 정난희양볼을 잡고 가볍게 시작한 입맞춤은 키스로 변하였다. 정난희는 문승협의 양어깨를 잡은 채로 입술을 탐닉했다. 이번에도 먼저 이성을 찾은 건 정난희였다.
“으, 식혜맛도 나고 수정과맛도 난다.”
“나는 맛있기만 한데?”
“이그, 징그러워.”
“한번 더 맛보고 싶은데, 안될까?”
문승협이 또 키스하려고 덤벼들었다. 정난희가 살짝 밀어내고 눈을 흘기며 정색하였다.
“까분다, 문승협씨 정신 차리세요.”
“알았어, 안 그럴게.”
“근데 말이야, 아까 서있을 때는 안 보이던 것이, 이렇게 앉아있으니까 보이네?”
“뭐가?”
“저기 저거, 책장맨아래 커튼에 가려진 상자는 뭐야?”
“아, 어렸을 때 갖고 놀던 거야, 별거 아니야.”
“가져와봐, 뭐가 들어있는지 한번 보게.”
“머 먼지가 쌓여있어서.”
“왜 말을 더듬지?”
“내 내가?”
“수상한데, 혹시 옛날애인물건이라도 들어있나?”
“나중에 또 와서 그때 봐, 우리 음악 들을까?”
“응, 음악도 틀고, 저 상자도 좀 가져와봐.”
정난희가 가리킨 것은 문승협추억상자였다. 문승협은 피할 방도가 없어 난감했다. 카세트플레이버튼을 누르고 상자를 꺼내 고스란히 갖다 바쳤다. 정난희가 휴지로 먼지를 대충 닦으며 문승협반응을 살폈다. 상자에는 최선경이 생일선물로 주었던 5년짜리 다이어리, 최선경이 직접 녹음해 준 카세트테이프, 최선경이 읽으라며 줬던 황순원의 소설‘소나기’, 대부분 최선경과 연관된 물건들이 들어있었다. 정난희가 상자를 여는 순간, 카세트에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빠바바밤, 빠바바밤~’하고 울렸다. 맨 위에 있는 두툼한 다이어리를 꺼내며 문승협을 쳐다보았다. 읽어봐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문승협은 반대해도 어차피 읽을 정난희이기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난희가 당연하다는 듯 다이어리커버를 젖혔다. 문승협은 다이어리에 집중한 정난희 몰래 녹음카세트테이프와 소설책을 숨겼다. 정난희는 다이어리를 대충 흩어보며 넘겼다. 어느 부분에선 심각한 표정으로 꼼꼼히 읽었다. 또 어느 부분에선 빠르게 훑어보다 문승협을 째려보길 몇 번 반복하였다.
“나 난희야, 남의 일기를 보는 것도 실례인데, 너무 자세히 보는 거 아냐?”
“오빠, 이거 완전 판도라의 상자인데?”
“원래는 판도라의 항아리야.”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아 아니, 그냥 그렇다고.”
“이야,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일기네.”
“옛날옛적, 아주 어렸을 적 국민학교5학년 때 일이야, 어린데 뭘 알고 썼겠어?”
“무슨 소리야, 중학교 2학년 것도 있는데, 중2면 감정을 다 아는 나이야 왜 이래?”
“…….”
“그리고, 오빠가 그렇게 부정하면, 여기 나오는 최선경언니한테 예의가 아니지.”
“…….”
“아주 순애보네 순애보.”
“에이 무슨 순애보야, 그냥 일기잖아.”
“말이나 못 하면 밉지나 않지.”
“지금 질투하는 거야?”
“나 대범한 여자야, 이런 걸로 질투하고 화내지 않아.”
정난희가 다이어리를 내려놓으며 째려보았다. 문승협은 좌불안석이었다. 정난희는 상자를 계속 뒤적였다. 중국선원 진춘과 이자연에게 받은 편지를 검열했으나 별말 없이 넘어갔다. 네모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이건 뭐지?”
“우리 월출산 갔을 때 사진 찍어준 아저씨명함이야.”
“그래?”
“거기 봐봐, 요트 위에 남자 있는 사진, 그 아저씨잖아.”
“아 맞다, 기억난다.”
“아저씨가 보내준 우리 사진도 있고, 편지도 있을걸?”
정난희가 사진을 본 후 편지를 펼쳤다. ‘선남선녀 예쁘게 잘 만나고 올일 있으면 꼭 연락해’. 독백처럼 읽고 또 뭐 없나 상자 안을 살폈다. 더 이상 사냥거리가 없자 문승협을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오빠, 거기 이불 밑에 숨긴 건 뭐야?”
“뭐?”
“다 봤어, 내가 다이어리 볼 때 오빠가 몰래 숨긴 거.”
“아, 별거 아니야, 카세트테이프하고 소설책.”
“에이, 오빠가 별거 아니라고 하면, 최선경언니가 서운해하지 않을까?”
“…….”
“저 테이프 끄고, 그 테이프 틀어봐.”
문승협이 어쩔 수 없이 카세트에 넣고 틀자, ‘닐세다카의 You mean everything to me’가 나왔다. 정난희가 잠시 듣더니 카세트에 다가앉았다. 앞으로 감기를 반복하며 어떤 노래가 들어있는지 하나하나 확인하였다. 카세트테이프 A면은 문승협최애곡 ‘닐세다카의 You mean everything to me, Oh carol’과 최선경이 좋아한 ‘폴앵카의 Diana’등 팝송으로 채워졌다. 카세트테이프 B면에는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등 최선경이 연주한 피아노곡과 문승협의 상징 같은 가곡 ‘별’이 마지막곡으로 녹음됐다.
“피아노를 잘 쳤나 보네?”
“어떻게 알아?”
“본인이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녹음 한 거구만, 딱 들어보면 몰라? 오빠생각하면서 엄청 정성을 들였네.”
“…….”
“오빠도 피아노 칠 줄 알아?”
“큰고모한테 조금 배우긴 했는데, 잘은 못 쳐.”
“칠 수 있는 곡 있어?”
“예전에 가곡 별을 몇 번 치긴 했었는데, 안친 지 오래돼서 지금은 잘 모르겠다.”
문승협이 얼렁뚱땅 얼버무렸다. 최선경에게 생일선물대신 연주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열심히 연습해서 쳐주었던 곡이라 양심이 찔려서였다.
정난희가 카세트테이프검증을 끝내고 소설책 황순원의 소나기를 넘겨보았다. 맨뒤 책갈피에서 멈추더니 쪽지를 꺼내 들었다. 읽어봐도 되는지 눈으로 물었다. 문승협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최선경이 폴앵카의 Diana가사를 해석하여 나름의 시로 써서 문승협에게 줬던 글이었다.
‘너와 나는 자유로워질 거야, 나무 위의 새들처럼.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니? 나를 꼭 안아주면 스릴을 느껴. 다이아나,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너를 사랑해 그리고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발 내 곁에 있어줘 다이아나. 오직 너만이 내 마음을 가져갈 수 있어, 네가 나를 홀리면 너의 사랑스러운 품에 안겨서 네가 주는 걸 느낄 수 있어. 나를 꽉 안아줘, 나를 꽉 잡아, 제발 내 곁에 있어줘 다이아나. 다이아나=문승협.’
정난희가 덤덤히 읽었다. 쪽지를 원래 위치에 끼우다 뭔가 발견하고 멈칫했다. 곧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문승협은 왜 그러나 싶어 책을 받아 펼쳐보았다. 책갈피 맨 아래에 ‘이 책이 너에게 현실이어도 절대 슬퍼말아 줘’라는 글귀가 쓰여있었다. 당시에 최선경이 죽음을 예감하였다는 뜻이었다. 문승협도 몰랐던 처음 본 메모였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정난희 앞에서 어떻게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처하였다.
정난희가 갑자기 ‘오란씨 CM송’을 불렀다. 다이어리에 문승협이 오란씨를 좋아하는 이유가 쓰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희석시키려는 의도였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러운 눈동자여, 오 오오오 오란씨.”
“뜬금없이 웬 노래야?”
“오구오구, 그렇게 오란씨가 좋았어요?”
“그만하시죠 난희씨, 부끄럽습니다.”
정난희는 불현듯 작년여름 질투를 참아가며 문승협과 통화했던 기억이 났다. 문승협의 서울친구들이 목포에 놀러 왔을 때였고, 친구 부현지에게 전화로 최선경이야기를 처음 들었었다. 갑자기 문승협이 얄미웠다. 너그러워 보이려고 계속 이해하는척하였지만 점점 심기가 불편했다.
“어쩜 좋아, 난 선경이언니와는 많이 다른 성격인데?”
“그만하라고, 지난 일이잖아.”
“지난 일인데 왜 이렇게 보물처럼 간직했을까?”
“미안해, 버릴 수도 없었어.”
“버리면 안 되죠, 이 소중한 걸 버리면 벌 받아요.”
정난희는 화를 내면 지는 것 같아 미소 지었으나, 자신도 모르게 짜증 내며 비아냥댔다. 문승협이 정난희를 달래려고 입을 열었다.
“세상에서 나한테 여자는 난희 너밖에 없어, 진짜야.”
“그렇겠지, 최선경언니는 하늘나라에 있으니까.”
“…….”
“가만 보니, 이 남자가 마음속에 두 여자를 품었었네?”
“…….”
“왜 대답이 없어?”
“…….”
“오빠, 그렇게 묵비권을 행사하면 어떡해? 진짜로 마음속에 두 여자를 품었어도, 현실 여자친구인 내 앞에서는 아니라고 펄쩍 뛰든가 발뺌을 해야지?”
“…….”
“오빠가 그렇게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나 점점 자존심 상하려고 한다?”
“치, 아까는 말한다고 뭐라 해놓고서, 이번에는 대꾸 안 하니까 뭐라 그러냐?”
“아깐 아까고, 지금은 지금이야.”
“난희야, 그때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잖아.”
“그럼 나 사랑한다고 말해봐.”
“사랑해, 나의 온 마음, 내 진심을 다해 너를 사랑해.”
문승협말이 끝나자마자, 정난희가 달려들었다. 뒤로 밀려 누운 문승협에게 입을 맞췄다. 지난번 무용연구소에서 불안한 상황과 느낌이 달랐다. 집 그것도 이불 위라 몰입되었다. 부드러운 입맞춤이 차츰 격렬해졌다. 문승협은 정신없이 정난희몸을 더듬었다. 거침없이 돌려 누이고 블라우스단추를 열어젖히니 브래지어가 나왔다. 키스를 이어가며 브래지어와 실랑이하였지만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무언으로 방치하던 정난희가 방황하는 문승협손을 끌어 등뒤후크로 안내했다. 알려준 후크를 푸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툭 소리와 함께 브래지어가 느슨해졌다. 문승협손이 브래지어에 숨겨진 정난희가슴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살짝 쥐어보다 쓰다듬으며 유두를 탐색하였다. 브래지어를 위로 올리며 키스하던 입술을 가슴으로 옮겨가자, 정난희가 얼굴을 붙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문승협은 하는 수 없이 다시 키스했다. 가슴을 만지던 손은 허리를 거쳐 배꼽 주변으로 이동하였다. 잠깐 망설이다 정난희청바지단추로 갔다. 문승협어깨에 살포시 얹혀있던 정난희손이 따라 움직였다. 청바지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리는 문승협팔을 재빨리 잡았다. 문승협손이 내친김에 팬티 속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정난희가 꽉 움켜잡고 속삭였다.
“거긴 안돼.”
“왜 안돼?”
“우린 아직 서로를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아니야.”
“만져만 보면 안 돼?”
“안돼, 그러다 감당 못할 수도 있어.”
“무슨 감당?”
“이러다 이성을 잃으면 돌이킬 수 없다고.”
“난 이미 이성을 잃었어.”
“오빠, 내 말 안 들으면 다신 오빠랑 이러지 않을 거야, 내 말 안들을 거야?”
“알았어.”
문승협은 설득당했다. 내렸던 청바지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다시 채워줬다. 참을 수 없는 욕망이었으나 냉철히 이성을 지킨 정난희로 인해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오빠, 이번에도 날 지켜줘서 고마워.”
“나는 사실 지켜줄 마음은 없었어, 난희 네가 싫어하니까 억지로 참은 거야.”
“그게 그거야, 고마워.”
“…….”
“만약에 우리가 성관계해서 내가 아기라도 갖게 되면, 내 꿈인 무용인생은 끝이야.”
“알았어.”
“기특해.”
“내가 해줄게, 내가 했으니 원상복구도 내가 할래.”
“싫어, 부끄럽단 말이야.”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다음엔 잘 풀지.”
“이그, 그런 흑심이 있었구만.”
문승협이 브래지어에 이어 블라우스단추도 잠가주었다. 정난희가 옷매무새를 정리하는데 문밖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문승협이 깜짝 놀라 나가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정난희가 가야겠다며 바래다 달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아쉬워하며 입을 삐죽였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소지품을 챙긴 정난희와 방을 나섰다.
신발을 신고 대문으로 가는데 인기척이 났다. 정원 저쪽에 엄마 이항리가 있어 살짝 당황했다. 정난희가 태연히 집에 간다며 인사하였다.
“왜, 더 놀다 가지.”
“아니에요, 많이 놀았어요, 오빠도 공부해야죠.”
“그래, 다음에 또 놀러 오니라.”
“네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엄마, 나는 난희 좀 바래다주고 올게.”
둘은 집을 나서 잠시 떨어져 걷다가 손을 잡았다. 정난희가 거리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문승협에게 바짝 붙어 다정히 팔짱을 꼈다.
“오빠, 조금 전 우리를 배웅해 주는 어머니표정이 좀 이상하지 않았어?”
“그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우리 오빠방에서 그런 거, 설마 아시는 건 아니겠지?”
“모를 거야, 내가 방문을 열어봤을 때 아무도 없었어.”
“절대 아시면 안 되는데.”
“아까, 어느 대목에서 제일 기분 나빴어?”
“뭐가?”
“그 상자 말이야.”
“왜 잊고 있는데 그 얘길 꺼내?”
“네가 기분 나빴을까 봐 걱정돼서.”
“기분 나쁘기보단 좀 슬프더라, 최선경언니가 저 세상으로 간 것도 그렇고.”
“다른 건 없고?”
“오빠를 좀 더 알게 된 계기랄까?”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
“아니야, 다 지난 일인데 뭐.”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풋, 너무 애쓰지 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오빠를 사랑하는 최선경언니방식에 동의하진 않지만, 어린 나이에 대단해.”
“사랑?”
“이그, 그걸 몰랐단 말이야?”
“응, 그런 감정을 알기엔 내가 너무 어린 나이였어.”
“하긴.”
“난희야, 이해해 줘서 고마워.”
“한편으론 오빠를 더 사랑해 줘야지 하는 생각도 들고.”
정난희는 최선경의 다이아나시와 황순원의 소나기소설책 맨 뒷장아래에 쓰여있던 메모가 인상 깊었다. ‘이 책이 너에게 현실이어도 절대 슬퍼말아 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문승협을 걱정한 최선경의 희생적인 사랑이 숭고하게 느껴졌다.
“근데 이것만은 확실히 알아둬, 최선경은 최선경이고 나는 나야, 알았어?”
“그럼 당연하지.”
정난희가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또다시 오란씨 CM송을 부르며 씩 웃었다.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아름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러운 눈동자여, 오 오오오 오란씨.”
“너 또 나 놀리는 거지?”
“호호, 그냥 생각나서 불렀는데, 양심이 찔리나 보네?”
“어휴, 앞으로 큰일이다, 생각날 때마다 부를 텐데.”
“그러게 왜 그 상자를 거기다 둬서 들키나 들키긴.”
“후, 그 상자를 어떡하지?”
“그럼 버려. 아니야, 잘 보관해, 두고두고 약점 삼아서 괴롭힐 거니까.”
“난희씨, 어떻게 선처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음, 없진 않지.”
“뭔데, 내가 무슨 짓이든 다 할게.”
“테이프에 녹음된 오빠 18번 한번 불러봐, 가곡 별도.”
“좋아, 노래 불러주면 용서해 주는 거다?”
“들어보고, 잘 부르면 생각해 볼게.”
문승협은 나지막이 닐세다카의 You mean everything to me에 이어 가곡 별을 불렀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 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도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우아, 합창단출신이라서 그런지 정말 잘 부른다.”
“이제 정난희님의 선처만 남았습니다.”
“그래, 저 하늘에 빛나는 별 뒤편에 잘 감춰둬.”
“알았어, 절대 못 찾도록 꼭꼭 숨겨둘게.”
“하지만, 내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그때마다 꺼내서 상기시켜 줄 거야.”
정난희가 집 앞 골목에서 멈춰 섰다. 문승협이 근사한 작별인사를 기대하며 땅을 보았다. 돌담벼락 무릎높이쯤 배수구 같은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참,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응? 무슨 소리야?”
“너희 집에 내 맘대로 전화 못하니까, 연락하고 싶을 때 너무너무 답답하더라고.”
“그래서?”
“여기, 구멍 보이지?”
“응.”
“내가 급히 연락하고 싶을 때마다 메모해서, 여기다 넣고 돌멩이로 눌러놓을게.”
“호호, 별생각 다한다.”
“넌 집에 들어갈 때 돌멩이가 있는 지만 보면 되잖아.”
“그래, 알았어.”
정난희는 신대륙을 발견한 것처럼 기뻐하는 문승협을 보면서 마음이 짠했다. 작별인사에 위로를 담아 가벼운 뽀뽀와 포옹을 하였다. 문승협은 집 앞이고 누가 볼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라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과감한 행동에 감격했다. 무척 사랑받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가는 정난희에게 계속 손을 흔들었다. 모처럼 아쉬움이 아닌 충분한 만족감을 안고 돌아섰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경쾌하였다. 오늘 추억상자를 들킨 것이 전화위복이었다. 정난희말처럼 나를 이해하는 계기 이길 바랐다. 어디선가 최선경이 연주하는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가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하듯 최선경이 환하게 웃으며 동행해 줬다. 잠시 회상과 상상으로 추억이 되살아났으나, 기억이 한 꺼풀 또 옅어졌다. ‘그대는 어느 길에도, 어느 날에도 있지만 없었다’는 시구가 가슴에 와닿았다.
문승협이 집에 들어서니, 이항리가 입가에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문승협을 뒤따랐다.
“난희는 잘 바래다줬냐?”
“네.”
“둘이서 집에 있었을 때 뭐 했냐?”
“뭐 하긴요, 그냥 음악도 듣고, 이것저것 보며 놀았죠.”
“달랑 그것만 했다고?”
“왜요, 뭘 생각했는데요?”
“뭘 생각하긴, 남녀가 단 둘이 집에 있었으니까, 엄마로서 걱정돼 물어본 거야.”
“엄마, 혹시, 아까 제방을 엿들은 거예요?”
“아 아니야, 엿듣긴 뭘 엿들어?”
“엿들었죠, 맞죠?”
“아 아니라니까. 나갔다 왔으면 얼른 손 씻어.”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는 말처럼, 정난희와 방에 있었을 때 관찰한 게 분명해 보였다. 말을 더듬고 얼렁뚱땅 둘러대는 엄마행동에서 더욱 확신했다. 기분이 나쁘면서도 따져 물을 방법이 없어 어쩌지 못하였다.
저녁을 먹고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다 추억상자가 생각났다. 이부자리로 가져와 뚜껑을 열었다. 황순원의 소나기소설책을 꺼내 맨 뒷장에 메모를 읽어보았다. ‘이 책이 너에게 현실이어도 절대 슬퍼말아 줘’라는 글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찌릿하게 아프면서 상념이 몰려왔다. 벌렁 드러눕자 책상 위 오르골이 보였다. 최선경이 준 생일선물이었다. 태엽을 감았다 놓으면 브람스자장가가 흐르고 하트를 안은 공주가 빙글빙글 돌았다. ‘고민 없이 잘 자라’는 최선경이 써준 카드도 기억났다. 최선경과 갔던 가을 녘 고하도와 유달산동굴이 떠올랐다. 충무공유적, 용머리, 목화밭, 염전길 등 함께 사진 찍었던 장소들. 짱둥이에 놀라 뻘에 빠져 젖은 옷, 빨아도 지워지지 않은 얼룩, 최선경의 손수건까지 아른거렸다. 불현듯 정난희에게 집중하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최선경을 회상하면서 정난희를 생각하는 자신에게 모순을 느꼈다. 두 사람 모두에게 미안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