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17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47)

by 태양을 품은 별

새 학년 개학 후 첫 토요일, 대학진학을 포기한 고3들은 오전수업을 마치고 반공휴일의 즐거움에 환호했다. 그러나 미래걱정에 교정을 나서는 표정이 밝지 않았다. 대학진학을 목표로 공부에 목멘 고3들은 별감흥이 없었다. 저녁까지 학교교실에서 공부할 생각에 토요일도 도시락을 두 개씩 싸왔다. 김영후와 조운대가 점심 먹고 반찬냄새를 환기시키려 교실창문을 열었다.

“아따, 좋을 때다.”

“긍께 말이다, 저놈들도 내년이맘때쯤이믄 우리멩키로 머리 좀 아플 것이어.”

“하하, 작년에 선배들도 우릴 보고 그런 생각했겠지?”

“말해 뭐 하냐, 입만 아프제.”

토요일오전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에서 공놀이하며 마냥 즐겁게 뛰어노는 1.2학년들이 교실창밖으로 보였다. 문승협과 반친구들은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니는 도시락 안 싸왔드만, 점심 으쨌냐?”

“아, 매점에서 빵 하나 사 먹었어.”

“아야, 한참 클 나이에 고것 갖고 되겄냐?”

“야 조운대, 네가 나한테 키를 이야기하냐?”

“음마, 니랑 나랑 비까비까한디?”

“느그 둘이 한번 대봐, 누가 큰가 한번 보게.”

“영후야, 내가 더 큰 건 확실하니까, 얼마나 큰 지 봐봐.”

“와따, 승협이가 한 주먹이나 더 크다야.”

“운대야, 너 그 키로 사관학교는 가겠냐?”

“연설하네, 해군사관학교는 상관읍써, 키 큰 놈들이 싱겁기만 하제 별거 있간디?”

“그나저나, 운동장에서 열나게 뛰어노는 놈들 본께는 공부가 싫어진다야.”

“그래서 그런가, 요즘 사설독서실을 많이 끊더라?”

“잉, 인자부터는 날밤 까고 공부해야 한께.”

“고3들 사이서 유행하는 3당4락이란 말도 있잖애, 3시간 자믄 붙고 4시간 자믄 떨어진다.”

“나도 독서실 끊을라고 한디, 어디가 좋다디?”

“글쎄, 나도 이제 알아보려고.”

“독서실비도 만만찮다드라잉.”

“월권, 분기권, 반기권이다 해서 꽤 들어가는갑써.”

“인자는 가난하믄 공부도 하기 힘들단께.”

다들 본격적 대입시험준비에 들어갔다. 문승협과 심화반 친구들은 평일야자시간에 학교도서관을 이용하였지만, 어두침침한 조명과 오래된 책냄새로 공부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토요일방과 후와 일요일에는 학교교실과 시립도서관을 이용했다. 비용과 면학분위기에서 장점이나, 공히 저녁 9시쯤 퇴실해야 하는 불편이 따랐다. 집에서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나, 이상하게 졸음과 사투를 벌이다 잠만 자는 마법에 걸렸다. 고3수험생들은 새벽 늦게까지 공부할 장소가 절실하였다.

일요일아침 문승협이 정난희와 심각히 통화다. 엄청 화내는 정난희에게 까닭을 물었는데 대답 대신 울기만 하였다. 더욱 놀란 것은 통화가 끊기고 또 전화했다. 그동안 통화중간에 끊겨도 한 번도 다시 전화한 적이 없었다. 늘 이성적이던 정난희가 공중전화를 옮겨가며, 더구나 울면서 그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정난희생일과 화이트데이가 다가와 만남을 약속해야 함에도 일언반구 꺼내지 못하였다.

뒤이어 사립독서실을 알아보자는 천영기전화가 왔다. 우울한 기분에 집을 나서다, 돈이 없어 독서실비를 못 주겠다는 엄마와 실랑이했다. 가뜩이나 정난희문제로 심란한데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답답한 마음은 친구들을 만나서 그대로 나타났다. 이담이 자신도 모르게 한숨짓는 문승협을 쳐다봤다.

“뭔 일이냐?”

“아 아니야, 아무것도.”

“니는 뭔 일이 있어도 말을 안 하드라잉?”

“그냥, 집에서 일이 좀 있었어.”

“친구 뒀다 어따 쓸래?”

“아야, 지 꼴린 대로 하라고 냅둬 부러, 지도 갑갑하믄 언젠가 야그하겄제.”

“그건 그렇고, 어디 독서실이 좋으까?”

“명정여고 근처 독서실이 좋다드라, 거그 가보자.”

“니 설마 백미정 땜시 그리 가자는 거는 아니제?”

“염병하네, 그라믄 나 안 갈란께 느그 둘이 가.”

“아따 시끼, 민감하기는.”

천영기와 이담이 문승협을 사이에 두고 옥신각신하였다. 문승협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천정부지 치솟은 물가가 안정세로 돌아섰지만, 사설독서실비가 널뛴 물가에 뒤늦게 올라탔다. 작년 이맘때쯤 일일권 50원, 월권 1,200원 수준이 세 배가량 껑충 뛰었다. 시설이 좋고 비싼 곳은 일일권이 150원 정도, 월권 4,000원 좌우, 분기권은 만원을 넘어갔다. 여름부터는 선풍기와 에어컨사용 등으로 더 상승한다며 반기권을 2만 원에 권유하기도 했다. 짜장면이 보통 300원이었으니 학생들에게 부담되었다. 그나마 독서실비를 줄이려면 시내에서 떨어진 변두리로 가야 하였다. 저렴한 비용만큼 시설과 면학분위기는 형편없었다. 학생들의 독서실이용에도 부익부빈익빈이었다.

“아그들아, 한 군데만 더 가보자.”

“두 군데나 봤는디 또야?”

“교통이 좋고 시설이 좋으믄 엄청나게 비싸 불고, 싼디는 개판 오 분 전이고.”

“시벌, 인자 돈 없으믄 공부도 못하겄다.”

“그래도 시설 좋은 독서실은 공부할 맛 나겄드라.”

“하긴 그러드라, 깨깟하고 조용하고.”

“으짤래, 한 군데 더 둘러볼래?”

“잉, 한 군데만 더 가보자.

“승협이 니는 으짤래?”

“나는 시립도서관에 가있을게, 너희 둘이 다녀와라.”

“그래, 둘이 한 군데 더 가보고 시립도서관으로 가께.”

문승협은 정난희생각에 휩싸여 같이 둘러볼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천영기와 이담이 다른 독서실을 알아보러 출발했다. 문승협은 시립도서관으로 가는 길에 무용연구소를 경유하였다. 멍하니 무용연구소창문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올라가 정난희에게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다. 그리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 한숨만 쉬다 시립도서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립도서관에 앉아서도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사무치게 그리운 정난희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 시간쯤 흐른 뒤 천영기와 이담이 왔다.

“돌아본께 명정여고 근처 독서실이 제일 괜찮던디?”

“나도 그러긴 하드라, 우리들 집서도 그리 멀지 않고.”

“승협이 니 생각은 으짜냐?”

“너희들 생각이 그렇다면 거기로 정하자.”

“아따 근디, 거그가 쪼께 비싼 것이 맘에 걸려.”

“싸게 할 방법이 없으까? 우리 셋이 분기권으로 끊는다고 사바사바 해서 한번 깎아보자.”

“돈은 갖고 왔냐?”

“오늘 끊을라고야?”

“쇠뿔도 단김에 빼야제, 말 나왔은께 그냥 질러 불게.”

“그라믄 일단 내 돈으로 질러 불고, 이단은 집에다가 달라고 청구해야겄다.”

“집에서 안 주믄 으짤라고?”

“대학 안 간다고 나자빠져야제, 그라믄 별수 있겄어?”

“승협이 니는 돈 있냐?”

“응, 나도 일단 용돈 모아둔 걸로 내려고.”

“이따가 가까 지금 가까?”

“여그 금방 들어왔은께, 공부 좀 하다가 이따 저녁 먹으러 나가믄서 들리자.”

“얘들아, 미안한데, 나 공부하기 싫으니까 지금 가자.”

“응?”

“그 그라까 그럼.”

천영기와 이담이 평소와 다른 문승협태도에 흠칫 놀랐다. 셋은 지체 없이 소지품을 챙겨 명정여고 근처 사설독서실로 직행했다.

이담과 문승협이 서너 걸음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천영기가 나서 독서실사환과 협상하였다. 몇 마디 나누다 종이 한 장을 받아 들고 돌아서며 인상 썼다. 둘에게 보여주며 독서실운영시간표 중 반일권 시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반일주간권 : 오전 12시~오후 24시, 반일야간권 : 새벽 0시~오전 12시’. 일반적인 사설독서실의 반일주간권은 오전 6시~오후 18시, 반일야간권은 오후 18시~다음날 오전 6시여서 속는 기분이었다. 셋은 야자시간을 마치고 독서실에 도착하면 10시~11시 사이라 새벽 늦게까지 공부하다 집에 갈 계획이었다. 이용시간과 비용면에서 일반적인 반일야간권이 안성맞춤이었다. 토요일일요일과 공휴일 낮시간은 학교나 시립도서관을 이용하면 되었다. 천영기가 고개를 갸웃하며 속삭였다.

“이거 완전 상술이그만. 내가 한번 따져봐야쓰겄다.”

“그걸 따져서 뭐 할라고야?”

“여그는 일일권으로 분기권을 끓어야 한디, 딴 독서실서는 반일야간권으로 분기권 끓으믄 반값이잖애.”

“음마, 진짜 그렇다잉. 그라믄 한번 따져 보든가.”

천영기가 격려에 용기를 얻어 독서실사환에게 갔다. 옥신각신하다 수긍한 표정으로 다시 왔다.

“뭐라 디?”

“방학 때를 생각해 보란다야.”

“하긴, 방학 때는 또 그것이 맞그만.”

“그라고, 여그는 우리 같은 학생들만 오는 게 아니라 고시생들도 많이 온갑써.”

“고시생들 입장에선 여그 이용시간표가 합리적이네.”

“결정적으로, 딴 독서실도 월권이나 분기권은 반일을 이용하는 조건이 없다드라.”

“그라믄 어차피 분기권 끓을라고 왔은께 그냥 끓자.”

독서실비요금체계가 이용자입장을 배려할 만큼 세부적이지 않았다. 결국 천영기가 한풀 꺾인 자세로 독서실사환과 사바사바하여 세 사람 공히 분기권을 만원에 결정했다. 독서실사환이 돈을 받고 또 다른 종이 한 장과 명함크기 ‘분기권 증명카드’를 주었다. 증명카드에 사진을 붙이고 인적사항을 써서 가져오라 하였다. 증명카드뒤에 사진바꿔치기와 타인양도불가 등이 인쇄되었다. 종이는 입퇴실 시 반드시 증명카드를 지참하여 제시하라는 등 독서실이용규칙이었다. 보통 돈만 받고 마는 다른 독서실과는 달랐다.

“눈탱이 맞은 것 같은 이 껄쩍지근한 기분은 뭐까잉?”

“할 수 없잖아, 사람들 불만이 쌓이면 또 바뀌겠지 뭐.”

“그란디, 뭔 사진까지 붙이라 하고, 우리한테 직접 카드에 인적사항을 쓰라 하까?”

“우리가 사진 붙여서 써오믄, 얼굴을 대조한 뒤에 그거 보고 대장에다 기록한다드라.”

“그래도 여기가 나름 체계적이네.”

“인자 낼부터는 학교 끝나고 항시 여그서 보는 거여?”

“잉, 내일부터 지긋지긋하게 보자.”

“우리 기념으로다가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얘들아, 저녁은 둘이 먹어라, 난 어디 좀 갈 데가 있어.”

“어디 갈라고야?”

“응, 나 갈게.”

“아야, 어디 간디?”

“내일 보자.”

“저 시끼는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하고 가냐?”

“뭔 일이까, 하루 종일 말도 없던디?”

문승협은 뒤돌아보지 않고 정난희집 앞으로 갔다. 연습장을 꺼내 몇 자 끄적이고 찢어서 접었다. 일전에 약속했듯이 집담벼락구멍에 넣고 작은 돌을 올려놓았다. 일요일 13일 10시 석빙고에서 만나자는 메모였다. 정난희생일이고 화이트데이 하루 전날이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당일 일요일아침에 정난희가 전화하지 않으리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정난희에게 무슨 일 있는지 걱정됐다.

담구멍에 메모를 몇 번 확인하고도 혹시 정난희가 못 볼까 봐 불안하였다. 아무래도 정난희를 직접 만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저녁을 거르고 기다렸다. 밤 10시까지 지켰으나 만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제발 메모를 발견해 주길 바라며 노심초사하였다.

문승협이 방으로 들어가다 엄마 이항리와 마주쳤다. 실랑이를 반복하기 싫어서 독서실을 끓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비밀 아닌 비밀이 되었다.

이항리와 문경준은 어디서 공부하는지 몇 시에 들어왔는지 문승협에게 묻지 않았다. 가끔 시험기간에 친구집에서 공부하다 새벽에 들어와도 모르기 일쑤였다. 청소년기에 관섭을 안 받으면 천국이고, 이도 저도 아니면 연옥이요, 극렬한 참견은 지옥이듯. 문승협도 또래들과 다르지 않았다. 무서워하는 아버지 문경준의 무간섭은 오히려 감지덕지였다. 하지만 때때로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부모에게 뭔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부모사랑을 갈망하는 문승협에겐 이중적 문제였다. 또한 부모관섭여부와 별개로 늘 머릿속에 되뇌는 강박이 있었다. ‘나는 공부를 잘해야 한다, 나는 탈선해선 안 된다, 나만은 부모처럼 그러지 않아야 한다’. 성장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하나의 인격 같은 집착이었다.

으슬으슬 한기가 들어 바로 이부자리에 누웠다. 쌀쌀한 날씨에 정난희집 앞에서 4시간을 기다렸더니 온몸이 오므라들었다. 이불을 꽁꽁 둘러싸고 잠들었다.

다행히 다음날 등교할 때 콧물이 조금 났을 뿐 건강에 큰 이상은 없었다. 국민윤리수업시간, 김생출선생이 학교안팎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를 뜬금없이 질문했다. 반아이들의 흥미로운 대답이 이어졌다. 학교와 일상에서 쓰는 언어들을 마구 쏟아냈다.

“오뎅, 다데기, 닭도리탕.”

“시마이, 구라, 기스도 일본말이여.”

“진짜 허벌라게 많다잉.”

“우리 사는 디가 목포인께, 일본식 집들도 많고, 일본말을 많이 쓸 수밖에 없제.”

“그래 맞어, 일제수탈전진기지. 일제시대 때 일본 놈들이 약탈하는 항구로 썼으니 오죽하겄냐?”

“목포는 항구다~.”

“허허허, 하물며 국민학교라는 말도 일제식표현이다.”

“으짜쓰까잉, 일본말 빼믄 대화가 안 되겄는디?”

“너희들이 싫어한 아침조회, 차렷경례도 마찬가지야.”

“어허, 우리도 모르게 아조 쪽바리행세를 했그만?”

“그렇게까지 스스로 비하할 필요는 없고, 앞으로 하나씩 하나씩 고쳐가면 된다.”

“아침조회는 뭣을 따라 했단 가요?”

“반장이나 좌측통행도 그렇고, 아침점호처럼 대부분 일본군대식에서 유래됐어.”

“재작년 고1 때까정 우리들 빡빡 깎은 머리 하고, 교복교모 쓴 것도 기지라우?”

“그래, 맞아.”

오매오매, 그라믄 지금부터 당장 우측통행하고, 우리끼리라도 바꿔갑시다.”

액자에 넣어 건 일장기를 모방한 액자형 태극기, 향나무교목과 교화, 교훈과 교가, 교표휘장, 동상과 비석 등 일제잔재가 학교마다 수없이 널려있었다. 수학여행도 일제강점기에 세뇌목적으로 시작됐다. 해방 후는 학교 밖 사회경험과 관찰차원 교육목적에 진행하였지만, 대규모 여행과정에서 학생들을 그저 통제와 집체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다. 집단적인 야외여행의 조직적 행동을 습득시키는 등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요인이 있었다. 김생출선생의 이어진 설명에 반아이들이 술렁였다.

“수학여행도 일제잔재라고라우. 아따 선상님, 수학여행 아니믄 언제 친구들끼리 여행 가겄어요?”

“이러다가 수학여행 없어지믄, 선상님이 책임지쑈잉?”

“그러니까, 지난주 3.1절을 그냥 흘러 보내지 말고, 국경일의 의미를 되새겨보도록 하자.”

“예.”

“한글 첫 글자가 뭐지?”

“기억이요.”

“그래, 한글 첫 글자 기억. 기억이 중요하다, 알았나?”

“예.”

반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교실이 떠나갈듯한 목소리로 동의했다. 애국심과 민족정기 확립을 위해 3.1절 국경일을 기억하자는 말에 토달 학생은 없었다.

김생출선생은 과제를 내고 수업을 마쳤다. 이번 달 마지막 수업시간에 두발자유화와 교복자율화 시행을 맞아 토론해 보자며, 어떤 문제가 있는지 각자 의견을 준비하라고 하였다. 반아이들이 숙제에 시큰둥했다.

다음 수업은 독일어였다. 한동양선생이 3학년을 전담하였다. 그동안 학교를 오가다 봤으나 대면수업이 처음이라 모두 낯설어했다. 문일고는 독일어를 택하였지만, 일본어나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었다. 대입학력고사에서 영어 대신 다른 외국어를 선택할 수 있었다. 영어가 어려운 학생들에게 인기였다.

“선상님, 질문 있는디라우.”

“뭔데?”

“우리가 허벌나게 존경해 마지않는 한형남담임선생님과 성이 똑같은디, 두 분은 뭔 관계다요?”

“허허, 너희 담임과 성만 같지 별 관계없어, 오히려 나랑 많이 다르지 않나?”

“뭐가요?”

“너희 담임은 뚱땡이고, 난 날씬하고 멋있잖아?”

“하하하.”

“자, 3학년 들어서 첫 수업이니까, 오늘은 독일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겠다.”

수업시간이 마쳐갈 무렵, 한동양선생이 다른 반에 비해 수업태도가 좋다고 칭찬했다. 상으로 ‘베토벤의 Ich liebe Dich’를 불러줬다. 노래실력이 성악가처럼 대단하였다. 자기 수업시간에 다른 과목을 공부하다 걸리면 엄벌하겠다고 경고하며 수업을 종료했다.

대입학력고사를 앞둔 3학년이라 영어를 택한 학생들은 독일어시간이 아까웠다. 독일어를 선택한 학생들은 영어수업이 거북하였다. 실익이 없다는 불만에 영어와 독일어를 동시간 편성해 분반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고등학교가 대입학력고사만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닌 만큼 문교부방침대로 병행수업을 결정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당장 대입학력고사가 중요하였다. 담당선생 몰래 영어시간에 독일어를, 독일어수업에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점수 따기 쉽다는 선배들 경험에 비춰 학교수업과 전혀 상관없는 일본어를 따로 공부하는 학생도 몇 명 있었다.

문승협은 독일어와 첫 대면이 생각났다. 영어의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가 꽤 있었다. 보통 단어배열 그대로 읽으면 됐으나, W가 비읍으로 발음되고 모음에 의한 모음의 동화현상이라는 움라우트가 있어 특이했다.

이어진 수업은 김원정선생의 화학이었다. 선배들로부터 악명 높다고 전해졌다. 첫날이면 상견례차원에서 설렁설렁 화기애애하였지만 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모두 책 덮어. 다 덮었나?”

“예.”

“원소주기율표 외우는 사람 손들어.”

손든 학생을 세는 김원정선생얼굴에 실망이 역력했다.

“아니, 60여 명 중에 겨우 5명이면 너무한 거 아냐?”

“…….”

“원소주기율표를 중학교 때부터 배웠을 텐데?”

반아이들이 죄지은 마냥 고개를 떨구었다. 김원정선생이 몇 마디 더 나무랐다.

“오늘 쉽게 외우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전부 확실히 암기하도록, 알았나?”

“예.”

“먼저 원소주기를 외운 다음에 원소족도 외워야 한다.”

“예.”

“자, 모두 큰소리로 선생님을 따라 한다, 수헬리베붕탄질산불네나마알규인황.”

김원정선생이 원소주기 첫 글자만 따서 호흡에 맞게 끓어 읽었다. 반아이들이 복창하였다.

“목소리가 그 정도밖에 안 나와?”

“아닙니다.”

큰소리로 몇 번을 반복한 뒤, 선생에게 지명받은 학생이 선창하고 다른 학생들은 목청껏 후창 했다. 반아이들이 익숙해질 무렵, 김원정선생이 몇 명을 테스트하고 원소족 외우기로 넘어갔다. 원소 첫 글자를 따는 것은 똑같았으나 재미있는 연상법을 동원하였다.

“너희들 술 좋아하지, 친구들끼리 술이나 갈라 마시세, 수리나칼루세프.”

“술이나 갈라 마시세, 수리나칼루세프.”

“내 친구 베마야 칼 좀 써봐라, 베마칼스바라.”

“베마야 칼 좀 써봐라, 베마칼스바라.”

“내 붕알에 가린 털 봤니, 붕알갈인탈니.”

“하하하, 붕알에 가린 털 봤니, 붕알갈인탈니.”

수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반복됐다. 연상법으로 외우는 효과가 있어 반아이들이 만족스러워했다. 수업 때마다 외웠는지 확인하겠다는 말에 웃음을 멈췄다.

“단순한 엄포가 아니다, 반드시 외우도록, 알겠나?”

“예.”

“다 너희들을 위한 일이야, 못 외우는 사람은 상상이상의 벌을 줄 거야, 알겠지?”

“네.”

김원정선생이 교실을 빠져나가자마자, 반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불평을 늘어놓았다.

“아야, 이거 외운다고 우리 인생에 뭔 도움이 되까?”

“도움이야 되제, 당장 내신성적에 반영될 거고, 나아가서는 좋은 대학 가는 데 일조하겄제.”

“염병, 고따구 시험 같은 거 말고야. 우리가 세상 살믄서 어따 써묵냐 이 말이어?”

“화학박사가 될라믄 모르까, 벨로 쓸 데는 없겄다야.”

반아이들이 웅성웅성 떠드는 와중에도, 문승협은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담벼락구멍에 남긴 메모를 정난희가 발견하였을지 궁금했다. 세상은 문승협과 상관없이 열심히 돌아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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