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48)
미국대통령 로널드레이건이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칭하였다. 점점 악화되는 미소관계와 냉전상황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철희∙장영자가 징역 15년을 확정받았다.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 주도자 2명 사형 등 관련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상고심선고공판을 두고 재야에서 극렬히 반발했다.
문승협은 야자시간이 끝나고 독서실로 갔다. 천영기와 이담이 먼저 와있었다. 셋이 독서실요구대로 증명카드에 사진을 붙여 제출하니 비닐코팅을 해서 돌려줬다.
“음마, 코팅했소?”
“잉, 자꾸 쓰믄 낡아져서 찢어진께.”
“와따 이거 뽀다구 난다잉.”
“카드번호까지 있는 것이, 꼭 비밀요원신분증 같은디?”
“그게 아니고, 우리가 조작 못하게 한 거야.”
독서실카드를 코팅해 준 이유는 부정사용방지목적이 더 컸다. 학생들이 비싼 독서실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다양하게 활용하였다. 이전 마분지로 된 카드를 변형하거나 수정하는 수법을 주로 썼다. 친구끼리 독서실이용시간을 달리해 사진을 뗐다 붙였다 하여 교대로 사용했다. 기한이 남았는데 부득이 다른 독서실로 옮길 때는 이름을 칼로 긁어 다시 쓰는 방식으로 싼값에 양도하였다. 종종 독서실사환에게 걸려서 옥신각신했다. 독서실은 철저한 출입관리로 소득을 놓치지 않겠다는 입장이고, 이용자는 세분화되지 않은 이용시간과 남은 기간만큼 돈을 돌려주지 않은 불합리한 독서실처사에 반항이었다. 양측 간 첨예한 대립에서 항상 갖은 자가 승리하였다. 힘없는 학생들이 늘 패배했다.
“시끄러, 여그서 그만 떠들고 언능 들어가.”
“오매 깜짝이야, 아자씨 간 떨어지겄소.”
“오늘 첫날인께 이만치 한 거여, 다음부턴 얄짤없어.”
“얄짤없으믄 으짤라고라.”
“으짜긴 뭘 으째, 떠들믄 바로 퇴실조치 해야제.”
“오매 무서운 거, 겁나서 어디 세상 살겄소?”
“여그서 계속 씨잘데없는 소리할 것이어?”
“우리 속이 출출한께, 들어가서 가방만 놓고 나오께라.”
“그것은 알아서들 하고, 느그는 지정좌석인께 딴 자리에 앉으믄 안 되다잉?”
분기권을 끓으러 왔을 때 친절하던 독서실사환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함부로 반말하고 아이들을 다루듯 하대하는 행동이 천영기를 껄끄럽게 하였다.
셋이 가방을 자리에 두고 나와 독서실 옆 포장마차로 갔다. 마치 약속한 것처럼 다들 국수를 시켰다. 뜨거운 멸치국물에 삼아놓은 국수를 풀어 간장양념을 얻었을 뿐인데 맛이 그만이었다.
“아따 맛나다잉?”
“뭐 별거 없는디 겁나 맛있다야?”
“그러게, 무슨 국물이지?”
“여그 다꽝이랑 묵은지 좀 더 주쑈.”
“아짐, 우리 이참에 단골 할란께, 앞으로 잘 해주쑈잉?”
“내 아들또래인디 잘해줘야제, 배고프믄 언제든지 와.”
문승협입에도 잘 맞았다. 곁들인 단무지와 묵은 김치도 일품이었다. 언젠가 대전역에 정차했을 때 먹은 국수맛과 비슷하였다. 한 그릇에 50원이니 학생들이 먹기에 저렴했다. 떡볶이와 오뎅, 순대와 만두도 있었다.
“아짐, 거그 야채뎀뿌라 세 개만 주쑈.”
“저것도 맛나겄는디?”
“아야, 뎀뿌라는 뭐든 다 맛있어.”
“나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너희들 먹고 먼저 독서실에 들어가, 계산은 내가 할게.”
“어디 갈라고야?”
“있어, 갔다 올게.”
“저 시끼 또 말 안 하고 간다.”
문승협은 정난희집 앞으로 직진하였다. 일주일 내내 정난희가 메모를 봤나 안 봤나 전전긍긍하기보단 직접 담구멍에 남아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온종일 정난희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하였다.
정난희집에 가까워질수록 떨렸다. 제발 메모지가 없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몇 번 망설이다 슬쩍 담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허리 숙여 손을 넣었다. 눌러놨던 돌멩이만 잡힐 뿐 다행히 메모지가 없었다. 간절했던 만큼 기쁨이 두 배였다. 당장 정난희를 만난듯한 전율을 느꼈다.
독서실에 돌아와서 공부가 잘되었다. 새벽까지 공부해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정난희와 마주한다는 기대만으로 생기가 돌았다. 들뜬 마음에 한 주가 활기차게 지나갔다.
예상대로 일요일아침에 전화가 오지 않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평소보다 신경 써 한껏 꾸미면서도, 집을 나서 석빙고제과점문을 열 때도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뜬 기분이었다. 정난희맞은편에 앉으면서야 가라앉았다. 먼저 와있는 것이 처음인 데다 무척 어두운 표정이어서 반가움보다 불안이 앞섰다.
“일찍 왔네? 언제 왔어?”
“아까 전에.”
“10시에 만나자고 썼는데, 메모 못 봤어?”
“봤으니까 지금 여기 앉아있는 거잖아.”
“아 그렇지, 먼저 와있길래 물어본 거야.”
“할 이야기 있음 얼른 해, 나 빨리 가야 돼.”
“왜?”
“왜라니, 가서 연습해야지?”
“오늘은 안 하면 안 돼?”
“태평한 소리 한다 진짜, 오빠는 대학 안 갈 거야?”
“왜 안 가, 가려고 열심히 공부하잖아.”
“나 곧 큰 대회가 있어서 안돼.”
“근데, 왜 그렇게 짜증을 내?”
“짜증?”
“…….”
“오빠가 한가한 소리나 하면서 나를 짜증 나게 하잖아.”
“내가?”
“오빠, 날 사랑한다면 잘 보이려는 노력 좀 해.”
“노력하잖아.”
“뭐라고?”
“아 아니야, 내가 괜한 소리를 했다.”
“그래서, 오늘 만나자는 용건이 뭐야?”
“우리가 무슨 용건이 있어야 만나는 사이야?”
“또 말끝에 토 단다, 계속 그럴 거면 나 지금 갈래.”
“알았어 안 그럴게, 알았으니까 앉아.”
“…….”
“오늘이 너 생일이고, 내일이 화이트데이라서 보자고 했어. 난희야, 생일축하해.”
문승협이 준비해 온 선물을 가방에서 꺼냈다. 하나씩 건네면서 정난희반응을 살폈다.
“이건 화이트데이기념사탕.”
“…….”
“그리고 이건 생일선물, 내가 고른 LP판이야.”
형형색색사탕을 꿰어만든 꽃다발. 소피마르소주연으로 유명한 영화OST‘라붐의 리얼리티’가 수록된 ‘리처드샌더슨’의 LP판이었다. 정난희는 웃지도 즐거워하지도 않고 무덤덤하였다.
문승협은 나름 애써 준비한 정성이기에 감동까진 아니더라도 좋아할 줄 알았다. 별 호응이 없어 서운했다. 선물이 어떤지 물으려다 생색내는 것 같아 참았다.
“그럼 영화 볼 시간도 없는 거야?”
“입 아프게 두 번 말해야 해?”
“아 알았어, 영화표예매해 왔는데 아까워서 그랬어.”
“참 한심하다, 영화 볼 생각이나 하고.”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야?”
“고3인 이 시기에, 오빠생각이 심한 건 아니고?”
“너의 생일이고 또 화이트데이니까 그런 거야.”
“올해는 물론이고, 내년에 나 고3 지날 때까지 아무것도 축하하거나 기념하지 마, 알았어?”
“너무 한다 진짜.”
“허, 뭐라고? 나는 절박해서 한 말인데, 오빠는 지금 너무 한다는 말이 나와?”
“그놈의 대학 대학, 짜증 날라고 그래.”
“뭐야? 진심이야?”
“…….”
“오빠가 계속 나를 만날 생각이면 제발 내 말대로 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뭔데?”
“저기, 지난번 전화로 화내고 울었잖아, 그때 무슨 일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
“아니, 묻지 마.”
“왜?”
“왜라고도 묻지 마.”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진짜 그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어?”
“그냥 묻지 마, 내가 말하고 싶지 않다고.”
“나 남자친구 맞아?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거야?”
“아니, 사랑 안 해, 나 사랑 안 할 거야.”
“왜 그래, 나는 네가 걱정돼서 아무것도 못했다고.”
“그러니까 이제 사랑 안 한다고.”
“후, 답답하다.”
“세상사람 누구든 자기 본심을 알아주길 바래, 하지만 말로 표현하는 걸 어려워해.”
“그래서 하는 말과 본심이 다르면 오해가 생기잖아.”
“맞아, 설사 그렇더라도 지금은 다 감수할 거야.”
“어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후, 아무래도 우린 여기까지인가 봐.”
“무슨 뜻이야?”
“우리 그만 헤어지자.”
“왜 그래 진짜, 왜 꼭 그런 식이야?”
“나 원래 그런 애잖아, 오빠도 다 알고 지금까지 참아 왔잖아. 설마, 몰랐어?”
“세상에 원래라는 건 없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난 그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고.”
“나 힘들어, 그만하자 우리.”
“사랑해서, 사랑하니까, 더 사랑하려고 그런 거야. 난희야, 내 마음 몰라?”
“알아, 아니까 더 힘들어, 나 여기서 그만할래.”
“아 알았어, 그러면 내가 가만히 있을게, 제발 헤어지자는 말만은 하지 마.”
“아냐, 오빠 힘들잖아, 아무래도 헤어지는 게 좋겠어.”
“나 안 힘들어, 안 힘드니까 그런 말 좀 하지 마.”
“오빠 그만해, 이젠 그런 오빠태도도 짜증 나.”
“뭐?”
“이거 받아, 혹시 몰라서 써온 거야. 잘 있어, 나 갈게.”
정난희가 편지봉투를 테이블 위에 불쑥 내놓고 일어났다. 문승협은 순식간일이라 어안이 벙벙하였다. 쏜살같이 제과점을 빠져나가는 정난희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에 뒤늦게 쫓아나갔다. 무용연구소 쪽으로 뛰어가고 재빨리 반대쪽도 갔으나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제과점여점원이 갑자기 뛰쳐나간 둘을 이상히 여겨 빼꼼히 문을 열고 지켜봤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문승협이 돌아오자 제과점문을 슬그머니 열어줬다.
문승협은 갈증이 나서 단숨에 엽차를 넘겼다. 벽면거울에 비친 후줄근한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 오늘 만남을 위해 평소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추레하다 못해 처량하였다. 여점원이 주전자를 들고 와 빈엽차잔을 채웠다. 문승협은 비로소 앞에 놓인 편지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내용인지 직감하며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편지를 읽으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닫아버린 마음을 향해 사랑을 하는 건 직진만 가능한 일방통행이야. 부디 현실을 직시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가길 바래. 안녕.’
세상 간단하게 자기 할 말만 쓴 이별편지였다. 헤어져야 하는 이유를 속시원히 알려주지도 않았다. 달랑 편지 한 통을 남긴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가버린 정난희였다. 문승협은 울컥하여 비탄에 잠겼다.
‘그놈의 대학 대학, 지겹다 진짜. 우리는 왜 맨날 어긋나는 걸까 어긋 내는 걸까? 그렇게 헤어지는 꿈을 자주 꾸더니 이별예고였나?’
그동안 언쟁은 있어도 특별한 다툼은 물론 이별징후조차 없었다. 문승협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천영기와 헤어지면서 납득이 안되다고 했던 류연경말이 이해되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하였다.
‘끓고 맺음이 확실한 냉정한 성격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끝낸다고? 이렇게 헤어진다고? 말도 안 돼. 그래, 이 편지도 혹시 몰라서 써온 거라고 했어, 아직 헤어지려는 마음을 굳힌 게 아니야. 맞아, 전화로는 할 수 없으나 담벼락구멍에 메모를 남겨서 연락이 가능하니 그나마 다행이야’
문승협은 이별현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왈칵 몰려온 상실감에 얼굴을 감싸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여점원이 걱정스레 지켜보았다. 문승협이 가까스로 마음을 추슬러 일어났다. 계산하는 동안 여점원이 힐끔거렸다.
문승협은 제과점을 나와 정처 없이 걸었다. 드라마에선 이별로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을 누군가 지켜봐 주던데 현실은 아무도 없어 슬펐다. 무의식 중에 걸어온 곳은 극장 앞이었다. 주머니에서 영화표를 꺼냈다. 정난희와 함께 볼 수 없는 무용지물을 찢어버리려는 순간 누군가 외쳤다. ‘시방 시작한께 빨리 들어오쑈’. 얼떨결에 극장으로 들어갔다. 영화‘사관과 신사’가 서울에선 신년 초부터 장기간 인기리에 상영 중이나 지방은 이제 개봉하였다. 관객들이 상영관으로 다 들어가고 거의 마지막 입장이라 붐비지 않았다. 어둠 속 영사기에서 나오는 긴 빛줄기를 타고 상업광고가 상영되었다. 안경점에 이어 예식장과 보석시계전문점이 나왔다. 사람들로 가득 찼는데도 가장 좋은 위치에 빈좌석 두 개가 도드라져 보였다. 가장자리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미안함을 표시하며 들어가 앉았다. 슬쩍 주위를 보니 양옆자리에 여자가 앉았지만 얼굴은 알 수 없었다.
영화 사관과 신사는 ‘리처드기어’가 해군항공장교후보생‘잭메이어’를 맡았다. ‘데브라윙어’가 상대배우로 제지공장여공 ‘폴라포크리피키’ 역이었다. 잭은 해군 아버지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남을 감싸고 배려하는 동료 ‘시드’와 교관 ‘폴리’를 만나 혹독한 훈련 속에서 인간애를 쌓는다. 잭과 시드는 훈련 4주째 파티에서 ‘폴라와 리넷’을 마주한다. 폴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잭을 진심으로 사랑함을 깨달으나, 잭은 부담을 느껴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영화후반부에 하얀 해군제복을 입은 잭이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폴라를 찾아간다. 잭이 키스 한 뒤 직공들의 박수와 응원 속에서 폴라를 양팔로 안아 들고나간다. 동시에 ‘제니퍼원스와 조코커’가 부르는 OST ‘Up Where We Belong’이 나오며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문승협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노래가사를 몰라도 애틋한 감정에 목이 메었다. 정난희와 헤어진 아픔이 더해져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어깨를 들썩이며 하염없이 울었다. 옆자리 사람들이 걱정정스레 쳐다보는 줄도 몰랐다. 영화가 끝나고도 복받친 슬픔이 가시지 않았다. 관객들이 다 나가고 클로징크레디트마저 끝났으나 멍하니 앉아있었다. 청소하는 사람들이 빗자루 쓰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Up Where We Belong노래가 반복재생되는 극장을 나오면서 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남들이 볼까 창피하여 슬픔을 떨치려 애썼다. 그나마 영화관에서 녹여내서인지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독서실로 가는 길거리에도 Up Where We Belong이 흘러나왔다. 전투기가 발진해 석양을 배경으로 활공하는 장면과 하얀 해군제복을 입고 오토바이를 타는 리처드기어의 멋진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났다. 처음으로 하얀색 해군제복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독서실에 들어가니 천영기와 이담 자리가 비어있었다. 차라리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배고픔도 잊고 책을 폈지만 집중될 리 만무하였다. 답답한 마음에 엎드려 정난희를 떠올렸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말을 안 하는지. 왜 맨날 짜증만 내는지. 그동안 나도 많이 참아왔는데 왜 몰라주는지. 내가 많은 걸 감수하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왔을까? 난희는 날 사랑하는 걸까? 아니냐, 사랑만큼은 불신하지 말자. 앞으로 어떡하지? 벌써 난희가 보고 싶다. 난희는 내가 보고 싶진 않을까? 난희는 지금 뭐 할까?’
상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또 눈물이 났다.
한편, 정난희는 이별의 아픔은커녕 얼마 안 남은 대회준비로 땀 흘리며 연습에 열중했다. 문승협이 혼자 눈물로 영화본 시간에도, 상념에 젖어 헤매는 이 시간에도, 정난희는 무용만 붙잡고 무용만 생각하였다. 남자친구로 인한 잡념 따윈 사치였다. 그래도 사랑 중인 사람인지라 마음은 편치 않았다. 무용연습 중에 삐걱거려 무용선생에게 몇 번을 지적받았다. 쓸데없는 잡념을 버리라며 심한 꾸중도 여러 번이었다. 자꾸 투정하고 보챈다는 이유로 문승협에게 이별을 선언했으나, 자기라도 똑같이 채근할 일이기에 가슴 아팠다. 분명히 슬퍼하고 있을 문승협을 생각하니 심장이 아렸다.
사실 그동안 엄마와 무용선생에게 문승협과 절연하라는 압박을 숱하게 받았다. 헤어졌다고 거짓말하며 잘 버텼지만, 얼마 전 사귀어온 사실이 들통나 전쟁을 치렀다. 부모와 무용선생 앞에 무릎 꿇은 채 세 시간가량 훈계와 질타를 들었다. 눈물을 뚝뚝 떨구며 용기 내 진심을 말하였다. 절대 무용을 등한시 않겠다며 문승협과 교제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목숨을 걸고 다짐하였음에도 일언지하 거절당했다. 오히려 문승협과 무용 중 양자택일하라고 강요받았다. 문승협과 끝내지 않거나 혹여 몰래 만나다 발각되면, 그날부터 전면 무용중단은 물론, 호적에서 파버리겠다는 협박까지 뒤따랐다. 정난희일생에 가장 큰 사건이었다.
이렇게 된 배경에 무용선생이 있었다. 정난희와 문승협의 소문을 듣고 여러 채널을 동원해 수소문하였다. 마침내 1년여 사귄 사실을 확인하고 정난희엄마에게 강한 어조로 전했다. 그리고 며칠 후, 정난희엄마가 집 앞에서 정난희와 문승협이 포옹하고 입맞춤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너무 놀란 나머지 딸이 집에 없는 틈을 타 일기장을 보았다. 문승협에 대한 감정과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읽고 심각했다. 노심초사하다 남편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정난희아빠가 충격받고 며칠을 절치부심한 끝에 문승협뒷조사를 하였다. 태선화학 박동후회장여동생의 장손도 좋고, 문승협의 성적과 성격, 친구관계까지 다 좋았다. 문제는 할아버지 문재환과 아버지 문경준의 소문이었다. 할머니 박옥춘과 엄마 이항리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은 습관적 한풀이가 부메랑이 됐다. 남편험담을 늘어 논 말들이 결국 손자와 아들을 괴롭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목포사회가 좁기도 하지만, 정난희아빠가 세무공무원인 터라 몇 다리 거치면 알았다. 평판이 중요하게 작동하는 시대에 결코 무시 못할 대목이었다. 문승협의 조부와 아버지에 대한 확실치 않은 세평일지라도, 정난희부모입장에서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의구심이 팽배하였다. 아직 고등학생이긴 하나 과년한 딸의 혼사를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딸의 장래가 결부된 일이었다. 무용을 등한시하여 이화여대무용과진학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 불안이 엄습했다. 지금까지 딸의 무용에 들어간 금전적 비용도 어마어마하였다. 결국 특단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정난희를 불러 앉혔다. 딸만큼은 문승협뒷조사를 몰라야 했으나, 계속 사귀게 해 달라며 애원하는 모습에 참지 못하였다. 화가 치밀어올라 몇 가지 소문을 언급하다 인연을 끓겠다는 말이 나와버렸다. 그 대가로 딸의 원망 어린 눈빛과 서럽게 쏟아내는 눈물을 지켜보아야 했다.
지금 무념무상 무용연습에 몰입하려 애쓰는 정난희도 무척 힘들었다. 큰 대회를 앞두고 집중 안 되는 것은 문승협처럼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나 무용학원에서나 어디서든 내색하지 않고 참아낼 뿐이었다.
문승협이 독서실책상에 엎드려있는 사이 천영기와 이담이 들어왔다. 둘이 살금살금 걸어가 문승협어깨를 주물렀다. 문승협이 화들짝 놀라 눈주위를 닦았다.
“뭐여, 니 울었냐?”
“아 아니, 잠깐 졸았는데, 눈곱 꼈나 해서.”
“울었네, 눈이 벌겋고 책도 눈물에 젖었그만.”
“아 아니야, 자다가 침 흘렸나 봐.”
“니 뭔 일 있지야?”
“아니라니까, 무슨 일 있을게 뭐 있어.”
“암튼 간에, 니 요새 졸라 요상허다잉.”
“쓸데없는 소리 한다. 둘이 어디 갔다 온 거야?”
“아야 승협아, 이 아래층에 가시나들 독서실이 있는디, 거그에 백미정이 있드라.”
“하여간 이 시끼도 허벌라게 입이 싸, 곰방도 말안키로 했씀서 숨도 안 돌리고 떠벌리네.”
“염병, 그런다고 승협이가 언제까정 모르겄냐?”
“백미정이가 있다고? 그렇다면 여기가 남녀혼용독서실이 아닌 게 다행이다.”
“아마도 여그가 남녀혼용이었으믄, 둘이 쑥떡쑥떡하느라 난리였을 것이다.”
“지랄, 니나 현진이랑 희희덕거리제 난 안 그래.”
“아야, 으째서 독서실 안이 시끄럽대? 그러코롬 해갖고 이 건물이 무너지까?”
“시벌, 지 목소리가 더 크그만.”
“밖에 나가서 하든가, 계속 떠들믄 퇴실시킨다잉?”
독서실사환이 문밖에서 호통치자, 천영기와 이담이 입을 삐쭉거리며 자리로 갔다.
사설독서실이 처음 생겼을 때는 남녀혼용이었다. 남녀 간 이성문제와 여학생들에게 여러 가지 불편이 있어 최근 여자전용독서실이 생겼다. 외모와 생리적 문제 등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 인기였다.
문승협은 공부할 요량으로 책을 다시 폈지만 역시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문득 정난희에게 두 번이나 읽으라고 추천받았던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떠올랐다.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베르테르가 출세지향 공직사회에서 속물스러운 귀족들에게 모욕당한 고통이 스트레스라면, 나는 대입학력고사공부가 그렇다. 베르테르가 로테의 사랑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느끼고 그녀 곁을 떠나 잊으려 애썼다, 나도 난희를 잊으려 애써야 할까? 베르테르가 로테의 사랑을 체념하고 죽음만이 사랑을 완성시켜 줄 수 있다며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나도 자살할까? 로테는 그의 자살소식을 듣자마자 실신했는데, 그럼 난희도 실신할까? 베르테르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유언대로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있는 곳에 묻어주었다, 나는 어떤 유언을 남겨야 할까? 베르테르가 사적이야기까지 할 정도로 가까운 빌헬름과 베르테르죽음을 슬퍼하며 관을 붙들고 안 떨어진 늙은 법무관 같은 사람이 내 곁에 있을까? 로테를 짝사랑하다 로테아버지에게 해고당해 정신이 나간 청년 하인리히처럼 나도 미쳐버릴 것 같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음울한 괴테의 연애경험을 바탕으로 쓴 편지형식 서간체소설이었다. 남자주인공이름이 독일어 베르터Werther다. 일본어중역풍조영향에 가타카나표기 ‘베르테르’였다. 한국학계도 원어발음이 아닌 걸 알았으나 한번 굳어지면 고치기 어려워 그대로 뒀다. 독일어원제 중 ‘die Leiden’이 슬픔이란 의미보다 고통과 고뇌에 가까워서 책제목을 ‘젊은 베르터의 고통, 젊은 베르터의 고뇌’라는 주장도 있었다.
롯데그룹회장이 이 작품을 읽고 감동받아 ‘샤롯데Charlotte’에서 따 기업이름을 ‘롯데lotte’라 지었다. 롯데백화점상품권에 샤를로테도안이 그려지고, 롯데백화점명동점에 샤를로테동상을 세웠다는 설이 돌았다. 동상은 을지로입구사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높이에 위치하였다. 먼 미래에 롯데그룹이 아주 높은 빌딩을 짓는다면 괴테동상도 세우겠다는 추측이 꽤 설득력 있었다.
수많은 청년들이 베르테르에 공감했다. 소설 속 푸른 연미복과 노란 조끼를 똑같이 입고 잇달아 자살하여 베르테르효과라는 말이 생겼다. 문승협에게 정난희와 이별은 죽음을 생각할 만큼 충격이었다.
문승협은 갑자기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가슴을 쥐어짜는 심한 고통을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이별로 불안과 스트레스에 직면할 때 나타나는 ‘상심증후군’이었다. 교감신경호르몬분비과다로 심장박동과 혈압이 상승되고 혈관을 수축시켜 심장근육을 손상시킨다. 좌심실수축에 좌심실위쪽 부푼 모양이 일본의 문어 잡는 항아리와 비슷해 ‘타코츠보심근증’이라고도 불린다. 이별의 아픔으로 문승협의 방황은 불가피하였다. 가슴이 미어져 또 한바탕 눈물이 났다. 책상에 엎드려 입을 틀어막고 소리 죽여 흐느꼈다. 그렇게 울다 그치기를 몇 번 반복했다. 에너지를 소모한 탓에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다.
주변을 오가는 인기척에 몸을 일으켰다. 잠깐 잔듯하였지만 벌써 저녁시간이었다. 책상에 접힌 종이가 놓여있었다. 천영기와 이담이 남긴 메모였다. ‘가시나들하고 저녁 먹기로 했어. 깨우기 미안해서 그냥 나왔은께, 보는 대로 독일제과점으로 와. 혹시 우리 없으면 제과점벽에 메시지 찾아봐.’ 메모한 시간을 보니 둘이 나간 지 10분 조금 넘었다. 평상시 같으면 갈까 말까 고민이라도 했을 텐데 내키지 않았다. 정난희와 헤어진 마당에 친구커플들 사이에 앉아 시시덕거리기 싫었다. 화이트데이를 기념하는 화기애애한 모습을 지켜볼 아량도 없었다. 메모지를 꾸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처량한 신세를 원망하며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눈감은 채 아무 생각 없이 이쪽저쪽 자세를 바꿔가며 엎드려있었다. 허리가 아파오고 팔이 저려 마지못해 일어나 시계를 봤다. 빨리 시간이 지나가길 바라며 밀려오는 통증을 참았는데 겨우 30분 지났다. 짜증이 나서 독서실에 있을 수 없어 책가방을 챙겨 나갔다.
목적 없이 걷다 멈춰 선 곳은 독일제과 앞이었다. 정난희와 첫 대면한 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제과점옆골목으로 들어가 벽에 기대어 서럽게 울었다. 맨 처음 약속이 어긋난 일부터 정식으로 만난 날 사과를 가져왔던 정난희표정까지 눈에 선하였다. 도무지 이별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문승협에게 이별이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과 추억이 있고 흔적이 남은 곳을 스쳐가도 눈물이 났다. 별것이다 다 슬프고 세상이 무너진 기분이었다. 살아있는 인생 자체가 파국이었다. 문승협에게 두 가지 큰 슬픔이 존재했다. 어릴 적 엄마와의 잦은 이별과 최선경을 하늘로 보낸 일이었으나, 이제껏 그 어떤 슬픔보다 정난희와 헤어진 지금이 가장 큰 아픔이었다.
문승협이 마음을 추스르고 지나가면서 제과점안쪽을 힐끗 보았다. 하필이면 정난희와 첫 만남 때 테이블에 친구커플들이 앉아있었다. 행여 친구들에게 초췌한 모습을 들킬까 서둘러 벗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이담이 뛰쳐나와 문승협을 불렀다. 문승협은 못 들은 척 앞만 보고 걸었다. 이담이 큰소리로 몇 번 부르다 고개를 갸웃하며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문승협은 이담을 피하려고 길을 건넜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자 레코드가게에서 ‘김현식의 떠나가버렸네’가 흘러나왔다. 노래가사가 귀에 콕 박혔다.
‘그대 내 맘에서 떠나가버렸네, 사랑을 남긴 채. 그대 내 맘에서 떠나가버렸네, 아쉬움 남긴 채. 외로운 이내 마음에 사랑을 남긴 채. 떠나가버렸네, 내 맘속에 그대는. 떠나가버렸네, 사랑했던 그대는~’
‘내 마음 깊은 그곳에 사랑을 남긴 채, 떠나가 버렸네’라는 대목이 문승협을 또다시 울렸다. 호소력 짙은 김현식목소리가 더해져 정난희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사무침과 동시에 너무너무 야속하였다.
슬픔에 휩싸여 인적 없는 길로만 걸었다. 정난희와 만나게 된 과정을 떠올리며 죄 없는 운명을 탓했다. 첫 만남약속이 어긋나서 길거리를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일, 전화번호를 받고 기어이 다시 마주한 상황이 그랬다. 현실 부정과 인정, 그리움과 미움, 사랑과 증오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집에 다다랐다.
초점 풀린 눈으로 대문을 응시하였다. 어두운 공기가 짙게 드리워진 계단에 앉았다. 어렸을 적 엄마와 이별하고 동생과 슬픔을 달래려 별을 바라봤던 이후 오랜만이었다. 슬픔의 계단으로 불러야 하나 싶어 씁쓸했다.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이 눈에 들어오면서 정난희말이 기억났다. ‘별은 그대로인데 매번 달라지는 건 인간이야’. 정난희생각에 스며드는 찰나 집안에서 와장창 하였다. 나쁜 일은 연속해서 온다는 속설은 틀림없었다. 이별만도 감당키 힘겨운데 부모의 싸우는 소리까지 들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숨이 턱 막혔다. 어렴풋해서 정확하진 않지만 돈이야기 같았다. 한동안 시끄럽던 소란이 멈추고 누군가 밖으로 나오는 인기척이 났다. 마주칠까 두려워 얼른 자리를 피했다.
옆집 담벼락에 숨어 가만히 내다보았다. 아빠 문경준이 식식거리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밥상이 엎어져 거실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일요일이라 동생들이 있었으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점심저녁을 걸러 배고픈데도 난장판을 보니 전혀 먹고 싶지 않았다.
“엄마, 왜 안 치운 거예요?”
“너도 너희 아빠가 한 짓을 보라고.”
“…….”
“그냥 둬, 이따 내가 치울 테니까.”
“…….”
“놔두라니까, 놔두고 이리 와서 앉아봐.”
문승협은 보란 듯 놔뒀다는 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뒹군 그릇을 주섬주섬 주웠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엄마 이항리가 하소연준비를 마치고 기다렸다.
부부싸움이유는 역시 돈문제였다. 아빠가 태선화학에 월급쟁이로 근무하면서 과거처럼 과소비하고, 최근엔 도박에 손대 형편이 어렵다며 푸념하였다. 오늘은 없는 돈을 내놓으라 깽판 쳤다는 것이 엄마한탄이었다.
문경준이 사업활황 때 접대 등으로 몸에 밴 소비습관을 사업 실패와 재건을 반복하면서도 유지했다. 적어도 태선화학에 다니면서는 고쳐야 하나 변치 않았다. 계속된 헤픈 씀씀이가 가정경제에 해를 끼쳤다.
부부싸움에서 남편문제가 아들에게 튀었다. 이항리가 문승협의 금전과 경제관념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멈췄으면 다행이나 과거사건들을 전부 재소환했다. 마침내 남편 문경준과 시어머니 박옥춘과 있었던 일, 시누이와 동서 등 시댁에 대한 불평불만까지 늘어놓았다.
문승협은 더 이상 듣고 있기 괴로웠다. ‘엄마, 제발 그 이야기 좀 그만해,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미쳐버리겠어. 엄마는 악감정을 배출하고, 난 그걸 받아내는 쓰레기통이야? 아들에게 밥은 먹었냐고 물어보는 게 먼저 아냐? 사랑을 주고받아야 정상 아니냐고? 아들을 사랑해서, 오직 아들을 위해서, 그 흔한 억지스러운 사랑이라도 보여준 적 있어? 엄마가 상처 줘서 미안하다, 엄마아빠처럼 살지 말고 너는 행복해야 한다, 용서해 달라고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생각이라도 해봤냐고?’. 욱한 심정에 따져 물으려다 엄마가 상처받을까 봐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였다. 엄마가 불쌍하고 무서운 아빠가 너무 싫었다. 아들이 무의식적으로 동성 아버지를 멀리하고 이성 어머니를 좋아하는 잠재의식인 ‘오이디푸스콤플렉스’와 달랐다.
문승협은 이별을 겪고 있는 데다, 매번 반복되는 엄마넋두리가 듣기 힘들어 죽고 싶었다. 1시간여 고통의 시간이 지나고 방으로 갔다. 모든 에너지가 방전된 듯 맥이 풀렸다. 힘없이 주저앉아 벽에 기대어 앉았다. 멍청히 바라본 책장에서 십자가가 반짝였다. 감정을 다스리기 벅차 난생처음 성경책을 꺼내 들었다. 뒤쪽을 펼치니 부록 편에 ‘심방을 위한 말씀’과 ‘약속의 말씀’이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위안삶을 성경구절을 찾아보았다. ‘시편 27편 10절,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편 37편 8절,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만족할 만큼 위로되진 않았지만 그나마 와닿았다. ‘하나님이 있으니 부모에게만 의존하지 말 것이며, 화나는 대로 행동하면 불행이 온다’는 정도로 이해했다. 성경책을 책장에 꽂아놓고 추억상자에서 정난희사진을 꺼냈다. 정난희얼굴을 어루만지다 왈칵 눈물이 났다. 사진을 부둥켜안고 한참 흐느껴 울었다. 다소 진정되자 정난희사진을 지갑에 넣었다.
그 시각 정난희는 무용연구소를 나섰다. 혹시나 문승협이 기다릴까 싶어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버스정류소에서 오르고 내릴 때와 집 근처 골목어귀에서도 몇 번을 두리번거렸다.
서로 사랑과 격려로 많은 것을 함께하길 원하는 문승협, 그런 바람을 알기에 둘만의 시간을 최소한이라도 만드려 노력하였던 정난희였다. 그러나 돌아온 건 마찰과 힘듦이었다. 그만큼 정난희도 흔들렸다. 부모바람과 자기 목표, 문승협사이에서 갈등했다. 문승협에게 마음 쓸수록 무용에 집중이 어렵고, 부모와의 관계가 악화됐다. 결국 가정과 자신을 위해 문승협을 밀어내기로 마음먹었다. 대입학력고사를 앞둔 중요한 시기에 문승협의 공부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그럴듯한 합리화를 만들었다. 스스로 억지 최면을 걸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확고히 하였다. 하지만 사랑에 고파서 여전히 최선경을 곁에 뒀던 문승협을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마찬가지로 나를 잊지 못한 채 마음 아파할 여린 문승협이라는 것을 알기에 가슴이 찢어졌다. 나를 갈망하고 그리워할 문승협을 생각하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정난희가 집에 들어가면서 무심코 담벼락구멍을 흘깃했다. 순간 자신의 모습에 허탈하였다.
가라앉은 목소리에 다녀왔다는 인사만 하고 자기 방으로 직행했다. 복잡한 심경에 머리가 무거워 자리에 누웠다. 조금 전 담벼락구멍을 흘깃 한 자신의 행동이 어이없었다. 무슨 미련이 남았길래 그랬냐며 자책하였다. 몸을 일으켜 가방을 뒤적였다. 조그만 열쇠를 꺼내 책상 앞으로 갔다. 일기장을 훔쳐본 엄마 때문에 채운 자물쇠를 풀었다. 서랍을 열어 다이어리를 꺼냈다. 얽힌 감정을 정리하려고 이부자리에 엎드렸다. 막상 쓰려고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승협이가 보고 싶다. 승협이 괜찮을까? 아니야, 승협이 걱정 말고 나만 생각하자. 아까는 담벼락구멍에 어떤 메모가 있기를 기대했을까? 승협이와 이별에서 어떤 후회나 회한을 남기지 말자. 내가 강해져야 해. 괜히 미련이 남은 태도를 보이면 이도 저도 안돼.’
정난희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이런저런 걱정과 자기 다짐을 끄적이다 잠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