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19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49)

by 태양을 품은 별

문승협은 등교하려고 마지못해 일어났다. 몸살처럼 온몸이 쑤셨다. 입안이 까끌하여 수저를 들다 말았다.

컨디션난조로 어떻게 버스 타고 학교에 왔나 경황조차 없었다. 학교친구들은 문승협의 변화를 몰랐다. 항상 실없는 말을 하지 않고 웃는 얼굴인 데다,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친구들 장난을 무안하지 않게 받아줬으니 그럴만했다. 다들 평소같이 문승협을 대하였으나, 국민학교 때부터 보아온 김용남만 미묘한 차이를 감지했다. 미소에 그늘이 있었다.

화학수업을 앞둔 쉬는 시간, 김용남이 원소주기율표를 외웠냐고 물었다. 문승협은 뜬금없는 독일어숙제를 들먹였다. 김용남이 동문서답에 마이동풍이냐며 문승협어깨를 흔들었지만, 대꾸 없이 멍한 표정이었다.

문승협은 야간자습이 끝날 때까지 넋이 나갔다. 어떤 수업을 하고 무슨 공부를 하였는지 기억에 없었다. 하루 종일 한일이라고는 정난희생각뿐이었다. 독서실에 도착해서도 언제 왔고 여기가 어딘지 시공간을 초월했다. 이담을 만나면서 현실로 돌아왔다.

“밥은 챙겨 묵었냐?”

“응, 그냥저냥.”

“배고프믄 같이 가자, 국수나 한 그릇 때리게.”

“그럴까? 영기는?”

“영기는 백미정 만나러 간다드라.”

“현진이는 잘 지내지?”

“잉, 현진이도 여그 아래층 독서실로 올란갑써.”

“잘됐네, 서로 만나려고 왔다 갔다 시간 낭비하느니.”

“차라리 그런 것이 낫기는 한디, 틈만 나믄 공부 제끼고 만날까 비 쪼까 신경 쓰여.”

“부러우면 지는 건데, 좀 부럽다.”

“연설하네, 그렇게 부러우믄 난희도 여그로 오라 해.”

“올리도 없겠지만, 난희는 무용으로 대학 가니까, 우리처럼 날밤 새워서 공부할 필요는 없어.”

“난희는 잘 지내냐?”

“응? 으응, 잘 지내겠지.”

“음마, 으째 어감이 이상타? 잘 지내겠지?”

“아, 잘 지낸다고, 난희 잘 지내.”

“느그 뭔 일 있냐?”

“아 아냐, 얼른 들어가서 국수나 시키자.”

이담은 순간 굳어진 문승협표정에 의아하였다. 아무리 진중한 성격이어도 웃어넘기면 그만이었다.

“아짐, 우리 국수 두 개만 말아주쑈.”

“왔는가, 언능해주께 잠깐만 기다리소잉.”

“참, 니 어제 독일제과 왔으믄서 으째 안 들어왔냐?”

“거기 간 게 아닌고, 다른데 어디 좀 갔어.”

“어디 갔는디야?”

“야 담이야, 너 혼자 국수 두 그릇 다 먹어주라.”

“너는 아?”

“나 지금 어디 좀 갈 데가 있어서 그래, 정말 미안해.”

“아야, 아야 승협아, 야 문승협”

문승협은 포장마차를 나와 뛰기 시작했다. 이담이 불러도 앞만 보고 달렸다. 정신없이 가다 문구점에 들렀다. 최종 도착지는 정난희집 앞이었다. 문구점에서 산 연습장을 뜯어 전봇대를 받침 삼아 메모하였다.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 쓴 내용을 확인했다. 잘 접어 정난희집 담벼락구멍에 넣었다. 몇 번을 확인하고서야 돌아섰다. 정난희눈에 꼭 띄길 바라며 독서실로 갔다.

이담이 후줄근해져 들어오는 문승협을 이상히 여겼다. 고요한독서실분위기라 묻지 못하였다.

한 시간 뒤 문승협에게 갔다. 엎드려 곤히 자고 있었다. 바람이나 쐬러 가자고 깨우려다 멈칫했다. 문승협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고 놀랐다. 정난희와 연관된 일로 추측하였다. 무슨 일인지 말도 않고 오죽 힘들면 자면서까지 눈물을 흘리나 싶어 걱정됐다.

또 한 시간쯤 흐르고 갔을 땐 자리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문승협답지 않게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불안해서 졸고 있는 천영기를 밖으로 불러냈다. 자초지종말하고 같이 문승협을 찾아보기로 했다. 둘이 독서실 주변을 두 바퀴째 돌았으나 어디에도 없었다.

“아따 이 시끼 어디 갔으까?”

“설마 뭔 일 있는 건 아니겄제?”

“뭔 일 아?”

“이 시끼가 비관해 갖고 또, 아니어 아니어, 그런 나쁜 생각은 하덜덜말자잉.”

“아야, 아무리 그래도 죽기사 하겄냐.”

“뭔 말을 안 한께, 뭔 일인지 뭔 생각인지 도통 알 수가 있어야제, 안 그냐?”

“긍께 말이다.”

“분명 정난희랑 뭔 일 있어, 그거 아니믄 딴 뭐가 없어.”

“그 시끼는 쌔고 쌘 것이 가시나들인디, 뭐 한다고 정난희한테 집착한 지 모르겄어 그냥.”

“야.”

“오매 깜짝이야.”

“뭘 그렇게 놀래?”

“염병하네, 호랭이도 지 말하믄 온다드만.”

“너희들 공부는 안 하고 여기서 뭐 해?”

“니 뒷다마 까고 있었다 왜?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드만, 어디 갔었냐?”

문승협은 메모를 남기고 독서실로 돌아와서 정난희와 만나리란 한가닥 희망을 가졌다. 들뜬 마음을 누르며 책을 폈지만, 공부는커녕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피로감에 엎드려 눈을 감았다. 현재진행형인 이별의 시간이 힘겨워 절로 눈물이 났다. 이담이 자리에 왔다 간 줄도 몰랐다. 한참 동안 혼자만의 시간에 빠져있다가 기분전환하려고 바람 쏘이러 나갔다. 이런저런 잡념을 억지로 떨쳐가며 마냥 걸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정난희학교를 지나갔다. 작년 목화여고축제 때 정난희와 추억을 돌이켜봤다. ‘맞아, 난희가 학교축제에 초대한 것은 나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야’. 문득 떠오른 생각에 확신을 갖고 독서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니가 독서실책상을 그렇게 깨깟이 치우고 가믄, 우리가 걱정되겄냐 안 되겄냐?”

“나는 항상 그렇게 정리하는데? 너희들도 알잖아?”

“암튼, 살아서 돌아왔은께 됐다.”

“그건 그렇고, 니 뭔 일이여?”

“뭔 일은 무슨, 그냥 답답해서 한 바퀴 돌았어.”

“혹시 하는 말인디, 난희랑 틀어지믄 갈라서, 내가 기깔라는 가시나 소개해 줄라니까.”

“야 이씨, 그런 말 하지 말랬지?”

“승협아 참어, 저 시끼가 그냥 농담한 거여 농담.”

“와따 시끼, 그러다 치겄다?”

“야 천영기, 농담이라도 다신 그런 말하지 마, 알았어?”

문승협이 화나서 주먹 쥐고 눈을 부라리며 발끈하였다. 이담이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걱정해 주는 친구들 말이 문승협귓등에도 안 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모든 채널이 정난희에게로 맞춰져 있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친구들끼리 잠깐 옥신각신했으나, 상처받고 마음속에 담아둘 일은 아니었다. 서먹하게 독서실로 올라갔다.

문승협이 심호흡을 하고 책을 폈다. 몰두하려 머리를 싸쥐었지만 집중되지 않았다. 갑자기 정난희목소리가 울렸다. ‘공부에 열중해, 대학 가야지’. 깜짝 놀라 둘러보았으나 환청이었다. 이별후유증치고 괴이하였다. 깊어가는 아픔만큼 예사롭지 않은 밤이었다.

다음날, 문승협은 방과 후 독서실에 가방을 놓자마자 또 정난희집 앞으로 달렸다. 어제 담벼락구멍에 남긴 메모가 없길 바랐다. 정난희가 봤다면 사라졌어야 하는데 그대로였다. 작은 희망마저 날아갔다. 어깨가 축 처져 메모를 꺼내 읽었다. ‘3월 20일 오전 10시 독일제과에서 만나자’. 뭔가 내용이 부족한 느낌에 추가로 적었다. ‘난희야, 꼭 할 말이 있어’.

다음날에도 또 갔다. 역시 메모가 있어 크게 낙심했다. 애절한 심정을 전하려 다른 종이에 썼다. ‘사랑해, 보고 싶어’. 이전 메모 위에 올리고 돌멩이로 눌러놓았다.

다음날엔 갈 수 없었다, 여전히 남아 있을까 두려워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또 하루 지난 다음 날도 전전긍긍하였다. 온통 정난희와 메모에 정신 팔려있었다. 아침식사를 하며 엄마가 큰 고모부소식을 알려줬지만 관심 밖이었다. 이민현이 ‘한미은행’ 창립멤버로 이직하여 출근했다.

국내최초 한미합작 한미은행이 영업을 개시하였다. 서울시가 민간아파트분양방법을 채권입찰제로 확정했다. 시시콜콜한 기사들 속에 문승협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뉴스가 있었다. 서울천호동 강동카바레화장실에서 종업원이 요구르트병에 담긴 독극물 마시고 사망하였다. 문승협은 ‘사망’이라는 단어와 죽음에 이르게 한 수단인 ‘독극물’이 궁금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메모지에 남긴 정난희와 만날 날을 하루 앞둔 토요일에도 안절부절못하였다. 독서실에 앉아 의무감으로 책을 펴고 더디게 가는 시간을 채근했다.

“뭐 하냐, 저녁 묵으러 가자.”

“가서 먹고 와, 난 괜찮아.”

“연설하네, 밥을 묵어야 공부도 하제, 언능 인나.”

문승협은 마지못해 천영기를 따라나섰다. 1층에서 백미정이 기다렸다. 친구여자친구와 셋이 저녁 먹는 게 거북하였다. 다시 독서실로 올라가려다 백미정이 오해할까 봐 같이 갔다. 내키지 않는 식사를 함께하니,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 백미정이 입을 열었다.

“영기랑 사귐시로 나도 맴이 편치 안 해야.”

“왜?”

“류연경이 영기랑 사귀믄서, 이담이랑 니랑도 친했다드라? 한현진이도 그렇고.”

“응, 맞아.”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믄, 충분히 그럴만해.”

“무슨 뜻이야?”

“영기가 류연경이랑 쫑내고 나랑 사귄께, 니가 영기한테 무자게 뭐라 했담서?”

“서로 싫어서 헤어지면 누가 뭐라 그러겠어, 일방적이니까 의리가 발동했던 거야.”

“긍께, 난 고것이 멋지드라? 내 친구들은 내가 딴 머슴애랑 만나도, 마냥 좋다고 헤헤거리던디.”

“당시는 영기가 연경이를 외면할 때고, 이젠 너랑 사귀니까 의미 없어, 다 지난 일이야.”

“암튼, 니가 영기한테 그런 것도 이해하고, 또 한편으로는 미안해. 그동안 속으로 찜찜했어.”

“아니야, 네가 이해한다니까 내가 더 미안하다야.”

“그라믄 서로 퉁치까?”

“그래 주면 고맙고, 둘이 오래 잘 사귀길 바랄게.”

천영기가 류연경을 차버리고 백미정과 교제하려 할 때, 문승협이 단단히 화났었다. 정난희와 이별로 힘든 지금은 관심밖이었다. 둘의 관계를 인정하면서도 못마땅한 것은 여전했다. 진솔함 없이 서로의 화려함과 성적호기심에 만난다고 여겼다.

천영기와 백미정이 식당에서 나와 오락실에 가자고 꼬셨다. 문승협은 둘이 재미있게 놀라며 사양하였다.

독서실로 올라와 책상 앞에 앉으니 외롭고 허전했다. 지갑에서 정난희사진을 꺼내보며 지난 시간을 반추하였다. 배우 강주희를 닮았다고 생각한 첫 만남. 화이트데이날 밴드연습실에 찾아와 사탕을 나눠주던 환한 미소. 월출산과 무용연구소에서 키스. 최근 울면서 전화한 일. 정난희를 떠올릴수록 가슴이 미어졌다. 무거운 마음에 펼쳐진 책은 눈밖이었다. 공부부담에 짓눌린 책을 덮고 무용연구소로 달려갔다.

무용연구소창문에 쳐진 커튼 너머로 불빛이 훤했다. 무용동작을 하는 검은형상이 언뜻언뜻 비쳤다. 그림자만으로도 정난희를 알아볼 줄 알았는데 분간이 어려웠다. 스스로에게 실망한 순간, 낯익은 실루엣이 창옆에 머물렀다. 창밖을 보는듯하다 이내 사라져 몹시 아쉬웠다. 정난희임에 분명하였다. 각기 다른 공간이나 같은 시간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목이 빠져라 올려다봤다. 뻐근해지는 뒷목을 어루만지며 한참 지켜보았다. 한 시간가량 넘어서자 허리와 다리가 아팠다. ‘창문을 내다봐, 잠시만 아래층에 내려와’. 정난희에게 수없이 텔레파시를 보냈다. 신은 뭐가 그리 바쁜지 방관했다. 세상은 역시나 녹록지 않았다. 오랜 시간 고통 속에 지켜보다 발길을 돌렸다. 잠깐일지언정 정난희를 본 것에 만족하였다. ‘그대는 어느 길에도, 어느 날에도 있지만 없었다’. 무슨 뜻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일요일아침, 문승협은 그 어느 날보다 특별히 외모를 꾸몄다. 개장 전 독일제과점 앞에서 30분째 기다렸다. 10시에 문을 열자마자 들어갔다. 상징성을 고려해 정난희와 첫 만남 때 자리를 재빨리 선점했다. 약속시간이 지나가 긴장되었다. 손에 밴 땀을 닦으며 정난희가 오길 학수고대하였다. 사람을 기다리면서 살 떨리기는 처음이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러도 정난희는 그림자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종업원눈치를 보며 빵과 음료를 추가 주문하여 먹기를 두 번이었다. 기다리는 손님까지 생겨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어려웠다.

제과점을 나오면서 좌절을 느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체험하며 독서실로 향했다.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주지 않은 정난희를 원망하였다. 머리 한구석에서 배신감이 꿈틀댔다. 담벼락구멍에 넣어둔 메모를 정난희가 못 봤을 거라며, 그래서 안 나온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설사 보았더라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라며 합리화시켰다. 계속된 자기 최면은 성공하였으나, 정난희를 탓하는 마음속원성은 더욱 날뛰었다. 상대가 인지 못한 일방적 반쪽짜리 약속을 약속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독서실에 들어가니 천영기와 이담이 보이지 않았다. 누구와도 마주치기 싫던 차에 오히려 위안이었다. 사방이 막힌 독서실이 옥죄어왔다. 세상과 단절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었다. 표정과 동태를 은폐엄폐하는데 안성맞춤인 책상칸막이가 은신처 같았다. 좌절에서 발전한 절망이 정신을 피폐하게 했다. 눈을 뜨고 있는 자체가 고통이어서 책상에 엎드려 눈꺼풀을 닫았다. 숨을 멈추고 싶은데도 꾸역꾸역 쉬어졌다. 통제에 따르려는 육체와 눈치 없이 활동하는 신진대사가 충돌하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휴전하면서 피로가 몰려왔다.

몇 시간을 잦을까, 독서실에 들어오고 나가는 발걸음소리가 부산스러웠다. 고요한독서실이 점점 웅성거렸다. 독서실사환이 조용히 하라며 호통쳤다. 때마침 천영기와 이담이 들어왔다. 부스스 일어나 어리둥절한 문승협을 데리고 나갔다.

“이 난리에 밥은 묵고 잤냐?”

“무슨 난리?”

“어허, 지금 배철수가 죽었냐 살았냐 하는 판국에, 니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여?”

“배철수가 왜?”

“쫌 전에 방송하다 그대로 쓰러졌단께.”

“송승환이 말에 의하믄 감전된 거 같다드라.”

“송승환?”

“잉. 아 그 젊음의 행진말이여, 왕영은이랑 엠씨 보는.”


KBS1‘젊음의 행진’ 생방송 중에 ‘송골매의 배철수’가 감전당해 쓰러진 장면이 전국에 송출됐다. 생사여부를 묻는 팬들 전화가 KBS에 빗발치며 후폭풍이 엄청났다. 10대 20대 시청자를 대상으로 노래와 연기를 곁들인 쇼프로그램이었다. 가수와 개그맨들이 주출연자였다. MBC경쟁프로그램으로 ‘이문세와 강미아’가 MC인 ‘영11’이 있었다. 이들 프로그램에 ‘짝꿍들과 영스타즈’라는 백댄서팀이 고정출연했다. 매해 20대 남녀대학생을 선발하였다. 배우나 가수로 진출하는 등 연예계등용문이기도 했다. KBS가 ‘젊음’이라는 단어를 방송프로그램제목에 자주 사용하였다. ‘젊음의 축제, 젊음의 노래, 젊은이의 가요제’ 등이 있었다. 감전사고 이후 모두 녹화방송으로 바뀌었다.


“저 시끼 꼴상을 본께, 밥도 안 묵고 퍼 잤네.”

“그라믄 가서 승협이 밥이나 묵이자.”

“너희는 먹었어?”

“아야, 지금 시간이 몇 시냐?”

“우리는 폴쎄 묵었어.”

“됐어, 나 밥 생각 없어.”

“염병하네 진짜, 니 그러다 쓰러진다잉.”

“얼굴이 반쪽이그만 그라네, 뭐 묵을래?”

“진짜 괜찮다니까.”

“어허, 성들 말 들어, 뭐를 묵드라도 끼니는 챙겨야제.”

“입맛 없을 때는 라면이 최고제, 가자.”

천영기와 이담이 문승협을 앞세우고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라면과 만두를 주문했다.

“아짐, KBS1 좀 틀어보쑈.”

“배철수 살았다네, 쪼까 전에 방송으로 나왔어.”

“다행이그만, 뇌진탕도 걱정되든디.”

“아야, 저 멀리 있는 배철수 걱정 말고, 여그 가까이 있는 승협이나 챙겨라잉.”

“승협아, 라면 다 묵고, 밥도 한 그릇 말아서 묵어.”

“아짐, 여그 밥 하나하고라, 김치도 좀 더 주쑈.”

“너희들 진짜 밥 먹었어?”

“잉, 나는 미정이랑 묵고, 담이는 현진이랑 묵었어.”

“이 성이 살 텐께, 승협이 먹고 잡은 거 다 묵어.”

“…….”

“뭐여, 니 시방 우냐?”

“뭔 일이데? 승협아, 뭔 일이어?”

“뭔 일이긴, 너희들한테 감동해서 눈물이 다 난다.”

“아따 진짜, 언능 말해봐야, 뭔 일인디 그냐?”

“하하하, 놀라긴, 라면국물이 눈에 튀어서 그래.”

“지 진짜여?”

“그래, 거기 휴지 나 좀 주라.”

“지랄도 풍년이다 진짜, 라면 묵다가 국물이 눈에 들어가서 우는 놈은 또 첨 본다.”

문승협은 걱정해 주는 친구들 호의에 감격하였지만, 여자친구들과 저녁을 먹었다는 말에 울컥했다. 왠지 자신의 처지가 구슬프면서 쓸쓸하였다. 목이 메면서도 만두와 라면을 먹고 라면국물에 밥까지 말아먹었다.

천영기가 분식집서 나와 옆집 만화가게로 앞장섰다.

“아자씨, 박봉성이 만화 새로 나왔다믄서라우?”

“아따 소식 빠르다잉, 거그 신간에 있어.”

“이현세꺼는 나왔소?”

“잉, 거그 같이 있어, 둘 다 오늘 와갖고 따끈따끈해.”

“담이 너는 뭐 볼래?”

“나는 신의 아들 볼란다.”

“그라믄 나는 공포의 외인구단 봐야겄다.”

“그게 무슨 만화야?”

“예끼 시끼, 요즘 무자게 유명한 이 만화를 모르다니, 니는 세상 헛살았다야.”

“긍께 말이어, 공포의 외인구단은 프로야구하고도 맞물려갖고, 인기가 허벌라부러.”

“그라믄 승협이 니는 이거부터 봐라, 박봉성의 20세 재벌인디, 겁나게 재밌어.”

“그거 다 보고 나서, 이현세꺼 시모노세키의 까치놀이하고 국경의 갈가마귀를 봐.”

“오랜만에 왔더니 만화가 많이 달라졌구나.”

“아야, 언제 적 야그냐. 인자 이상무, 고행석, 허영만이 그린 만화는 아그들이나 찾어.”

“그래도 독고탁, 구영탄, 이강토랑 친했는데.”

“우리 소싯적에는 고우영의 삼국지가 유명했는디, 만화도 시대가 바뀌었단께.”

“그러네, 만화가 이두호, 이우정도 유명했는데.”

천영기와 이담이 신간을 챙겨 익숙한 자세로 자리 잡았다. 문승협은 ‘20세 재벌’을 선택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순식간에 만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20세 재벌은 기업만화였다. 맨몸의 20세 주인공이 한치 빈틈없는 계획을 세워 최고경영자에 오른다. 황당한 이야기면서도 현실에서 가능한 일 같았다.

천영기와 이담은 읽는 속도가 비슷하였다. ‘공포의 외인구단 1~3편과 신의 아들 1~3편’을 다 보고 맞교환했다. 문승협은 20세 재벌 3권을 펼쳤다.

문승협이 마지막 7편을 완독 하였을 때, 천영기와 이담은 각자 다른 만화 10여 권을 곁에 두고 절반가까이 봤다. 문승협도 망설이다 ‘이현세작 시모노세키의 까치놀이’ 전권을 가져왔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만화방을 찾아 허전함을 달랬기에 심야영업을 했다. 만화도 3~5권 단편에서 10~30권 내외로 장편추세였다.

천영기와 이담이 속도가 더딘 문승협에게 보조를 맞추다 보니, 다 보길 기다리다 자꾸 새로운 만화를 뽑아 들었다. 다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문승협은 ‘이현세작 국경의 갈가마귀’까지 독파하였다.

“인자 가자, 벌써 새벽 한 시가 다됐다야.”

“와, 만화방에 온 지 세 시간이 넘었네.”

“만화 본께 시간이 엄청시리 빨리가지잉?”

“그러게, 만화 재미있다.”

“어허, 이런 촌노무시끼, 그 참된 이치를 이제사 알았단 말이어? 가깝시럽다.”

“이제라도 알았으믄 다행이제, 부처님도 그것을 미처 못 깨우치고 열반하셨는디.”

“그러고 보니, 요즘 나온 만화들은 드라마나 영화 같아, 소설 같기도 하고.”

“만화는 역시 이현세하고 박봉성이어.”

“공포의 외인구단은 무슨 내용이야?”

“쪼께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야구단을 만드는 거여.”

“거그다가 까치 혜성이하고 엄지의 애달픈 사랑야그를 섞었제, 아조 맴을 찢어부러.”

“신의 아들은?”

“고아원에서 자란 주인공이 신장인가 이식받고, 기증자소원으로 권투챔피언 되는 거.”

“괴롭히는 악덕재벌회장을 응징하고, 최강타랑 진보배의 사랑야그도 뺄 수 없제.”

“재미있겠네, 나중에 시간 내서 한번 봐야겠다.”

“니 그러다가 만화방 죽돌이 되는 거 아니어?”

“에이 설마, 만약에 승협이가 만화방 죽순이 되믄, 내가 이 두 손에 장을 지진다.”

“하하하, 공부하다 지겨우면 한 번씩 가자.”

“와따, 니 증말 오랜만에 웃는다잉?”

“니만 좋다믄 우리야 언제든 환영이제, 안 그냐?”

“그라제, 만화방 간 것이 효과 있어서 다행이다야.”

셋은 독서실로 들어갔으나, 월요일등교를 위해 곧장 책가방을 챙겨 나왔다.

문승협과 천영기는 이담을 보내고 집방향이 같아 함께 걸었다. 문승협은 땅만 보며 걷고, 천영기는 드문드문 눈치를 살필 뿐 대화가 없었다. 천영기집 근처 갈림길에서 잘 가라는 인사가 다였다.

문승협은 부족한 잠과 사투를 벌이며 겨우 일어났다. 서둘러야 하는데도 미적미적 등굣길에 올랐다.

학교에서는 어제 배철수감전사건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오늘도 정난희생각에 수업내용을 기억하지 못했다.

여느 날처럼 야간자습을 마친 고3수험생들이 하나 둘 독서실로 모여들었다.

문승협이 11시쯤 조용히 독서실을 빠져나갔다. 정난희집담벼락구멍에 그대로인 메모를 꺼냈다. 자신처럼 외면받은 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다행이라 여겼다. 메모를 못 봤으니 어제 정난희가 나오지 않았다는 정당화였다. 만나자는 날짜를 ‘27’로 고쳐 쓰고, 독서실에서 준비한 메모와 다시 넣어놓았다. ‘제발 한 번만 만나자, 제발’. 절박한 심경을 알리고 싶었다. 전부 새로이 쓰려다 말았다. 이전 메모까지 둠으로써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호소이자, 계속 왔다 갔다는 메시지로 최대한 성의를 보이려는 의도였다. 시계를 보니 얼추 정난희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었다. 온 김에 꼭 만나야겠다고 각오하며 걸어올 길목을 지켰다.

10분 정도 지났을 즈음, 어두운 골목어귀를 돌아오는 여자윤곽이 보였다. 반갑고 설레어 다가갔지만 정난희가 아니었다. 실망을 다독이며 가로등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정난희눈에 잘 띄길 바라며 30여분을 더 기다렸다. 개미 한 마리조차 지나가지 않았다. 12시가 넘어가자 아쉬움을 접고 독서실로 발길을 돌렸다.

문승협은 하루빨리 27일이 오길 기다리며 며칠을 흘려보냈다. 오늘따라 머리가 너무 아파 조퇴하고 병원에 들렀다. 의사가 신경성이라며 두통약을 조제해 줬다.

병원을 나와 집에 가기 싫어서 독서실로 향하였다. 한참 야자시간인 학교와 바깥세상이 대비됐다. 늘 걸어 다니는 길과 풍경이 새삼 낯설고 신묘했다. 독서실건너편 전파상 앞에 올망졸망 모여있는 아이들을 발견하였다. 보통 7시쯤이면 집에서 밥 먹을 시간인데, 꽤 많은 여자아이들이 TV에 심취해 있었다.

“저기 숙녀아가씨, 뭘 그렇게 열심히 보는 거예요?”

“오늘 첨 방송하는 요술공주 밍키여라.”

“밍키가 뭔데?”

“아따 말 시키지 마쑈 좀, 지금 테레비본디 그라네.”

“오메, 예쁜 숙녀아가씨가 무자게 친절하요잉?”

“그러코롬 궁금하믄, 같이 보믄 될 거 아니오.”

문승협은 여자아이에게 면박당했으나 불쾌하진 않았다. 아이들 표정이 밝으면서도 심각하였다. 덩달아 같이 TV를 보았다. 금방 아이들이 넋을 놓은 이유를 알았다. 옛날 아이들 나이적에 즐겨봤던 ‘들장미 소녀 캔디,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우주소년 아톰’ 같은 만화영화였다. 이름하야 ‘요술공주밍키’란 제목으로 KBS2에서 방송하는 마법소녀물이었다. 작년 이맘때 일본 TV에서 방영한 ‘밍키모모’를 더빙했다.

‘너와 나의 밍키, 밍키밍키. 요술공주밍키, 밍키밍키. 빛을 타고 내려온, 요술공주밍키밍~키. 우주로 날아가버린 요술나라 꿈나라, 꿈과 희망의 요술나라 여기에 있네. 요술로 풀어보는 우리들의 세계, 오늘은 어떤 꿈이 펼쳐질까. 너와 나의 밍키, 밍키밍키. 요술공주밍키, 밍키밍키. 꿈과 희망에, 요술공주밍키 밍~키’

만화영화가 끝나며 주제곡이 나오자 아이들이 합창하였다. 첫 방송이라 처음 들었을 텐데도 중독성이 강해 흥겹게 따라 불렀다. 문승협은 3년 전 여동생들과 재미있게 본 ‘요술공주세리’가 생각났다. 독서실로 가면서 아이들처럼 요술공주세리주제가를 흥얼거렸다.

‘요술공주세리가 찾아왔어요, 별나라에서 지구로 찾아왔어요. 요술공주세리가 찾아왔어요, 별나라에서 지구로 찾아왔어요. 세리 세리, 신비한 그 힘으로 우리들에게 꿈과 웃음을 뿌려준대요. 세리 세리, 요술공주세리’

두 번째 웅얼거릴 때는 ‘세리’ 대신 ‘난희’로 개사했다. 세상 유치해 웃기면서도 눈물이 났다. 그리운 마음에 정난희를 노래에 결부시킨 자신이 처량하였다.

독서실에 앉아 문제집을 펼쳤다. 자꾸만 정난희얼굴이 어른거렸다. 열심히 야간자습 중인 학교친구들을 떠올리며 스스로 경쟁심을 부추겼다. 몇 번씩 밑줄을 그어가며 집중했다. 아무것도 암기되지 않았다. 진도가 나갔다 돌아가길 수차례 반복하면서 짜증 났다. 차라리 수학문제를 풀면 나아지려나 싶어 ‘수학의 정석’을 꺼냈다. 이번엔 문제내용조차 이해가 안 되는 난독증에 걸렸다. 몰입하고 또 몰두해도 핵심파악이 어려웠다. 대입할 수학공식마저 공중에 분해되어 버렸다. 공부해서 힘들기보단 공부가 안되어 괴로웠다.

두 시간여 책과 싸우다 귀신에 홀린 듯 독서실을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또 정난희집 앞이었다.

‘술 취해 깜빡 조는 사이, 천관이라는 기생집에 데려온 말의 목을 자른 김유신처럼, 나도 무언가를 잘라내야 하나? 이제 내 다리를 잘라야 할 판국이네’

문승협은 열다섯 살 신라화랑과 비교하며 다리를 내려봤다. 스스로 실망스러운 나머지 풀썩 주저앉아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 들어 얼핏 보니 담벼락구멍에 메모가 없었다. 엉거주춤 일어나 손을 넣어 확인하였다. 메모가 없다는 것은 누군가 봤다는 뜻이었다. 일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며 정난희라고 확신했다. 정난희를 봐야겠다는 일념에 버스정류소로 뛰었다.

11시가 넘어가는 시각, 드디어 버스에서 내리는 정난희를 목격하였다. 당장 뛰어가 반기고 싶었지만 놀랄까 봐 참았다. 정난희눈에 잘 띄는 길어귀 가로등밑으로 자리를 옮겼다. 떨리는 가슴을 누르며 무슨 말을 먼저 꺼낼지 생각했다.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정난희를 애틋이 응시하였다. 마침내 서로 눈이 마주쳤다.

정난희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었다. 문승협은 도망치듯 피하는 정난희를 재빨리 쫓아갔다. 정난희가 얼마 못 가 인적 드문 골목에서 멈춰 섰다. 문승협을 회피하려 등을 돌리고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보 보고 싶어서.”

“이러지 마, 나도 힘들어. 아니, 싫어.”

“어 얼굴 좀 보여줘, 보고 싶었단 말이야.”

“나는 하나도 안 보고 싶었고, 오빠얼굴 보면 짜증 나.”

정난희가 냉정하게 말하면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바라보았다. 문승협은 오매불망 그리웠던 얼굴이었으나, 막상 대면하자 차마 볼 수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땅바닥으로 향하였다.

“내 눈 똑바로 봐.”

“…….”

“한 번만 더 이러면, 그땐 진짜 끝이야.”

“우리 끝난 거 아니었어? 우리 헤어진 거라며?”

“지금 이 순간에 말꼬리 잡아야겠어?”

정난희가 눈을 흘기면서도 이리저리 빠르게 문승협을 살펴보았다. 문승협도 놓칠세라 정난희모습을 최대한 눈에 담았다. 용량이 초과했는지 눈물이 났다.

“울긴 왜 울어, 표정은 또 그게 뭐야, 누가 죽었어?”

“넌 안 슬프냐, 난 슬프다.”

“그렇게 감정에 약해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

“살고 싶은 생각도 없어, 지금은 사는 게 지옥이라고.”

“마음 약한 소리 할 거야 진짜?”

“…….”

“그리고 이게 뭐야, 어디서 막노동하다 온 사람 같아.”

“그럼 내가 웃고 꾸미고 다니는 게 정상이야?”

“뭐라고? 오빠, 우리가 헤어진 지 불과 2주도 안 지났어, 벌써 이러면 어떡해?”

“벌써라니, 헤어진 시간에 따라 이래라저래라, 그런 법이 있으면 좀 알려줘.”

“그렇게 따지려고 온 거야?”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네가 사무치게 그리웠어.”

“…….”

정난희가 살핀 문승협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문승협이 눈에 담은 정난희모습도 썩 좋지 않았다. 그리 크던 눈이 퀭하니 작아 보이고, 창백한 피부가 증거였다.

“난희야, 우리 안 헤어지면 안 돼?”

“안돼, 우린 이미 헤어진 거야.”

“난 헤어지지 않았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당장은 그러더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질 거야.”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만 좀 칭얼거려, 내가 싫다잖아 내가.”

“…….”

“계속 메모 남기지 마, 이제 절대 안 볼 거야.”

“…….”

“그리고, 계속 집 앞에서 기다리지도 마, 다음에는 이렇게 마주하지 않을 거니까.”

“너는 안돼, 싫어, 하지 마, 이런 말밖에 몰라?”

“…….”

“아 아니, 나 화내는 거 아니야. 나한테 강요하지 마라고,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돼서 미치겠단 말이야.”

“오빠, 제발 부탁이야. 딴생각 말고 나조차도 생각 말고 공부에만 집중해, 응?”

“사랑하는 여자친구랑 헤어졌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공부하면, 그게 어디 인간이야?”

“우리 대학 가서 다시 만날 수도 있잖아, 안 그래?”

“너는 이 상황에서도 또 대학타령이구나, 어차피 헤어졌는데 대학 가면 뭐 해?”

“어휴, 오빠가 애기야? 애들처럼 투정이나 부리고, 왜 내 말귀를 못 알아들어?”

“무슨 말?”

“대학 가서 만난다고, 아니 만날 수 있다고.”

“나는 지금이 중요해, 나 지금 너무 힘들어.”

“더 이상 대화가 안 된다, 나 갈게, 다신 찾아오지 마.”

“난 난희야, 난희야, 이렇게 가면 어떡해?”

정난희가 답답하다 못해 잔뜩 화난 표정으로 획 돌아섰다. 문승협이 다급히 부르며 몇 걸음 쫓아갔지만,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자괴감과 실망감이 산사태처럼 덮쳤다. 어느새 사라지고 없는 정난희가 걸어간 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혹시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미안해서도 좋고 동정심이어도 상관없었다. 이유를 막론하고 다시 나타나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런 기대에 부응할 정난희가 아니었으나,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 발목을 옴짝달싹 못하게 붙잡았다. 정난희성격을 뻔히 알면서 ‘혹시 몰라 병’에 걸렸다. 벽에 기대어 조금 전 정난희발언들을 곰곰이 되짚었다. ‘대학 가서 만난다’. ‘계속 메모 남기지 마, 계속 집 앞에서 기다리지도 마’. ‘그땐 진짜 끝이야’. 정난희말속 숨은 진심 찾기에 빠졌다.

‘대학 가서 만나자는 건 사귀기를 거절할 때나 쓰는 말이잖아, 나도 중학교 때 그랬는데 뭘. 그럼 나를 달래려는 꼼수인가? 계속의 의미는 다 보았다는 뜻인데, 그럼 내가 남긴 메모와 내가 집 앞에서 기다린걸 다 봤다는 건가? 그땐 진짜 끝이야라는 말은 정난희도 아직 이별하지 않았다는 무의식적 발로가 아닐까?’

한편, 정난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에 들어왔다. 몹시 상한 문승협모습에 속상하였다. 마음이 여려 힘들어할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견뎌내지 못하는 문승협에게 실망하였다. 한편으론 측은지심에 가슴 아팠다.

정난희가 문승협을 다시 만나러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몰라 병에 걸린 문승협에게 ‘역시나 약’으로 처방되었다. 문승협은 30여분쯤 더 기다리다 쓸쓸히 독서실로 향했다.

두 사람은 상대모습에서 아픔과 슬픔을 느꼈다. 비록 둘 다 힘들어하는 상황이었으나, 서로 얼굴을 보고 나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헤어졌지만 서로를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 아직 서로에게 일말의 미련이 남아있다는 안심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꺼져가는 사랑의 불씨를 소중히 품었다. (계속)


keyword
이전 18화단테의 별 – 2권 2부 1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