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20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50)

by 태양을 품은 별

문승협은 독서실에 돌아와 해결되지 않은 이별로 심신이 고달팠다. 그나마 그리웠던 정난희를 봐서인지 문제집이 눈에 들어왔다. 천영기와 이담의 만화방유혹을 뿌리치고 모처럼 열중하였다.

마음먹은 대로 공부에 몰두하는 건 이틀을 못 넘겼다. 보통 학교가 파하면 곧장 독서실에 가는 루틴이었으나, 토요일 수업이 끝나고 미처 챙기지 못한 책을 가지러 집에 들렀다. ‘성문영문독해’를 챙겨 나오다 이항리에게 손목을 붙들렸다.

“승협아, 엄마랑 어디 좀 가자.”

“어 어디 가는데?”

“방금 전에 전화를 받았어, 니 아빠가 지금 어떤 여자들이랑 화투치고 있다더라.”

“뭐라고?”

“입 다물고 따라와, 같이 그 현장에 가보게.”

“싫어, 나 지금 독서실 가야 한단 말이야.”

문승협은 난감하고 짜증이나 공부핑계로 거절했지만. 일그러진 엄마표정과 강압에 어쩌지 못하였다. 웃음기 빠진 얼굴로 엄마를 쫓아가는 상황이 소름 끼쳤다. 할머니를 따라 할아버지를 미행하던 국민학생 문승협과 평행이론된 것 같았다. 싫다는데도 굳이 데려가는 엄마를 원망했다. 무슨 의도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태선화학본사의 시내출장소 건너편 식당에 도착하였다. 이항리가 식당문을 벌컥 열었다. 예전에도 경험이 있어 망설임 없었다. 널따란 식당방 한쪽구석에서 성인남녀가 둘러앉아 화투를 쳤다. 문승협과 이항리가 식당에 들어섰으나, 문경준은 등지고 있어 몰랐다. 당황한 일행 중 한 사람이 문경준에게 알렸다. 명절 때 박동후회장 저택에서 본 적 있는 태선화학직원이었다. 문경준은 얼굴이 벌게지고 말을 더듬었다.

“어? 여 여긴 또 어쩐 일로 왔어?”

“오 오매, 사모님 오셨소?”

“사 사모님, 안녕하셨지라?”

“네, 다들 안녕하셨죠?”

“안녕하세요.”

“아따, 승협이 많이 커부렀다잉?”

문경준의 직장동료들이 담요 위에 놓인 돈을 부리나케 감추고 뻘쭘한 자세로 인사했다. 두 사람도 남편과 아빠의 직장동료들이라 예를 갖췄다.

“승협이 아빠, 여기서 뭐해요?”

“아, 점심 먹고 심심풀이로 직원들과 화투 쳤어.”

“근무시간에 무슨 화투를 친데요?”

“토요일이라 오전근무잖아. 근데 어떻게 온 거야?”

“어떻게 오긴 어떻게 와요, 두 발로 걸어서 왔지.”

“아니 무슨 일로 왔냐고.”

“퇴근했으면 집에 가야지, 이렇게 화투 쳐도 돼요?”

“이 사람이 지금 어디서 큰소리야, 얼른 가.”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외삼촌이 이 사실을 아시면 퍽이나 좋아하시겠어요.”

“뜬금없이 외삼촌이 왜 나와?”

“저기요, 회장님이 여기서 화투 치는 거 알아요?”

“사 사모님, 점심 먹고 심심해서 장난 삼아 쳤어라우.”

“장난인데 돈이 오가요?”

“어허 이 사람이 진짜, 동네창피하게 뭔 짓이야?”

“그렇게 동네창피한지 아는 사람이, 왜 자식 앞에서 부끄러운 줄은 모르세요?”

“회사직원들도 있는데, 시끄럽게 떠들 거야?”

“저기 저 여자는 누구예요, 도대체 누군데 같이 어울려서 화투 치는 거예요?”

“여기 식당 사장이야, 그만하고 빨리 집에 가.”

“큰소리만 치면 다예요, 누가 무서워할 줄 알아요?”

“교양 없이 뭐 하는 짓이야?”

“교양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화투 치나 보죠?”

“어허 진짜, 계속 그렇게 화 돋굴 거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집에 가라니까.”

이항리가 작심하고 목소리 높였다. 문경준도 아내태도에 점차 격분하였다. 두 사람은 싸우면서 주위사람들 눈치는 봤어도 아들 문승협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결국 문경준이 이항리를 거칠게 문밖으로 내몰았다. 문승협은 식당서 쫓겨나다시피 한 엄마를 뒤따라 나왔다. 이항리가 분에 겨워 식당 앞을 서성였다.

“어 엄마, 이제 집에 가요.”

“너는 왜 한마디도 안 하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냐?”

“…….”

“그나마 사람들이 있으니 젊잖게 말한 거야, 아무도 없었으면 또 주먹질하고 난리 났어.”

“누가요?”

“누구는 누구여, 니 애비지.”

“엄마,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집에 가요.”

“백여시같이 생긴 식당여사장한테 홀려서,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지, 오매 속 터진 거.”

“그 뭔 짓이 뭔데?”

“유부남 유부녀가 만나서 뭐 하겄냐, 뻔하지.”

“어떻게 알았어, 엄마가 확인한 거야?”

“아이 시끄러워, 그걸 꼭 확인해야 아냐?”

문승협은 자라면서 경험한 엄마언행으로 보아 믿기 어려웠다. 식당사장이 여자라는 이유로 불륜을 의심하는 것이 과해 보였다. 화투도 직장인이라면 동료들과 점심식사 후 충분히 있을법한 일로 여겼다.

“엄마, 아빠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그럴 수 있잖아.”

“뭐? 너도 남자라고 니 애비 편드냐?”

“아니, 그거 말고 화투 말이야.”

“화투도 도박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이항리가 발끈하며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승협은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잔소리를 들었다. 이항리잔소리는 곧 분풀이로 바뀌었다.

문승협은 마치 제우스와 헤라의 아들신세 같았다. 헤파이토스가 부모싸움에 엄마 헤라편을 들어 아빠 제우스에게 노여움을 샀다. 그 벌로 렘노스섬에 던져져 못생긴 절름발이가 됐다. 문승협은 다리대신 마음을 절었다. 재주 많은 대장장이 헤파이토스와 동병상련하면서, 그의 미인아내 아프로디테가 떠올랐다. 그녀가 유부녀임에도 아도니스를 사랑한 바람둥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너무 싫어졌다. 정난희 때문에 아도니스를 향한 숭고한 사랑으로 아프로디테를 좋아하였지만, 정난희변심으로 이별을 겪는 중이라 헤파이토스입장에 빙의되었다. 와중에도 정난희생각이었다.

문승협은 계속된 엄마분풀이에 반항심이 불쑥 고개 들었다. 끝내 못 참고 엄마를 향해 울부짖었다.

‘엄마, 당신 아들이 어디서 뭐 하다, 왜 새벽에 집에 들어오는지는 알아? 내가 지금 뭘 고민하고,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그래, 알아주길 바라지도 않아. 그래도 엄마라면, 최소한 내가 어떻게 사는지는 알아야지?’

그러나 엄마옆모습을 바라보며 외친 상상 속 독백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눈물을 글썽였다. 분풀이를 듣고 있기 괴로워 억지로 끌고 간 이유를 유추했다.

‘아들로부터 부적절한 모습을 목격당한 아빠에게 모욕감을 주려고 나를 무기로 삼은 걸까? 아니면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아빠의 폭력행사에 나를 방패로 쓰려고 그랬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너는 아빠처럼 절대 그러지 말라는 현장답사였을까? 어쩌면 셋 다 일지도 몰라’

이항리분풀이는 집에 도착해서까지 이어졌다. 문승협은 30여 분간 더 정서적 고문을 당하였다. 독서실에 가야 한다는 명분으로 겨우 탈출했다. 엄마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이해되지 않았다.

문승협은 독서실로 가면서 아빠마지막말이 걱정스러웠다. ‘집에 가서 얘기해, 두고 봐’. 아빠가 집에 들어가면 또 한바탕 부부싸움이 벌어지리라 예감하였다. 아빠횡포에 당할 엄마와 상처받을 여동생들이 염려되었다. 부모에게 물려받는 정서적 유산부족에 허덕였다.

천영기와 이담이 독서실 앞에서 문승협을 기다렸다.

“아야, 뭐 하다가 인자 오냐, 목 빠지게 기다렸다야.”

“왜?”

“이따가 권투 보러 가자.”

“무슨 권투?”

“장정구가 챔피언에 도전하잖애.”

“어디서 보는데?”

“쩌그 다방 있어.”

“다방?”

“뭘 또 놀라고 그러실까잉.”

“야, 우리 학생들은 다방에 못 들어가잖아?”

“다 들어가는 수가 있어, 갈래 안 갈래?”

문승협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경기시간이 다가와 소처럼 도살장에 끌려가듯 했다. 막상 ‘초원다방’ 앞에 서니 망설였다.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 들어갔다. 국민학교 때 할아버지를 따라간 적 있는 다방과 달랐다. 목포시내라선지 찌든 담배연기와 커피 향이 뒤섞인 퀴퀴한 냄새가 심하지 않았다. 인테리어와 소파도 깨끗하였다. 손님 또한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옛날다방은 어른들 사랑방, 직장인과 대학생들 만남장소, 동네한량들 아지트였다. 음악감상휴게실이자 전화연락소역할을 톡톡히 했다. 맞선과 데이트, 가짜시계 등 소소한 물건들이 거래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해방 무렵 서울에 60개 남짓이던 것이, 1950년대 말 1,200여 개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중년여성 ‘마담’이 카운터에 앉아있고, ‘레지’라 불리는 아가씨들이 커피를 날랐다. 영어 lady가 레지로 변형됐다는 설이 있었다. 가끔 건달들에게 ‘오봉’이란 비속어로 불렸다. 고상한 척 점잔 떤 여성들 사이에서 ‘다방레지’는 남자에게 몸과 웃음이 헤픈 여자로 통용되었다. 구슬픈 뽕짝가락으로 손님들 가슴을 적셔주는 시골읍내다방은 물론이고, 시내중앙통다방에서도 마담이나 레지와 시시껄렁한 사연 하나 정도는 있었다. 그냥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려 다방에 가는 사람도 많았다. 다방에 들어서면 처음 보더라도 마담과 레지가 경쟁하듯 환한 미소로 반겼다. 자리에 앉으면 어김없이 옆으로 와서 속 보이는 친절을 베풀었다. 손님들은 애인보다 더 정겹게 팔짱 끼고 애교 부리는 호의를 우쭐하며 즐겼다. 다방에서 커피라곤 한 종류였다. 커피를 주문하면, ‘저도 한잔 하면 안 될까요’가 바로 이어졌다. 커피 한잔에 대화와 가벼운 신체접촉이 허락된 상황에서 안 된다 할 남자는 없었다. 실없는 농담과 스킨십으로 분위기가 고조되면 상술이 뒤따랐다. ‘우리 쌍화차 한잔 더하면 안 될까요?’. 비싼 차를 추가주문해도 역시 거절은 없었다. 매출을 올리라는 다방주인눈치를 알기에 묵과해 주는 것이 다반사였다. 뭇 사내들의 멋이고 낭만이었다. 인기다방레지는 연예인대접을 받았다. 예쁜 레지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문전성시를 이뤘다. 간혹 손님과 레지 사이에 연분이 생기는 경우가 있었다. 일부지역은 로맨스를 악용한 티켓다방으로 진화하여 퇴폐행위라고 지탄받았다. 전문음악감상실과 카페가 생겨나기 전 30여 년간 서민문화를 이끌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다방은 지금 카페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모닝커피라며 족보에 없는 계란노른자까지 곁들인 세태였다. 작은 부스에 앉은 DJ가 김추자노래와 팝송을 틀어주었다. 커피 한잔하고 다방문을 나설 때, 마담과 레지의 환송을 받으며 우쭐하던 커피맛은 사라져 갔다. 다방이름도 ‘향촌다방, 심지다방, 황제다방, 황금다방, 중앙다방’에서 ‘송죽다방, 준다방, 뉴욕다방’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예전 다방모습을 볼 수 없는 현실이 다가오고 있었다.


초원다방은 국가대표경기날이면 단체관람장으로 변신하였다. TV를 향해 좌석을 배치하고 손님 맞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앞장선 천영기가 어디에 앉을지 두리번거렸다. 프런트에 서있는 여자가 소리쳤다.

“어서 오세요. 아야 이양아, 손님 받아라.”

“아따, 이양이라고 하지 마란께 꼭 이양 이양하네잉.”

프런트에 있는 여자는 행세로 보아 마담 같았다. 이양이라 불린 여자는 비교적 어려 보이는 레지였다. 호칭이 맘에 안 드는지 마담에게 눈을 흘겼다. 문승협일행 앞에 와서는 세상 환한 미소로 반겼다.

“어서 오쑈, 권투 보러 왔지요?”

“예, 이렇게 세 사람인디.”

레지가 구석진 자리로 안내하며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느그들 고등학생이제?”

“음마, 우리 얼굴에 써졌소? 어떻게 아요?”

“내가 커피만 탄지 1년 이어, 척보믄 앱니다.”

“허허허, 시방 이주일 흉내 냈지라?”

“호호, 눈치는 이미 어른이다잉.”

“우리 얼마씩 내믄 돼요?”

“느그는 학생인께 기본만 내.”

“기본이 뭔디라.”

“요쿠르트 하나에 달걀 한 개씩.”

“아니어라, 쌍화차에다 계란 노른자 동동 띄워주쑈.”

“음마, 느그 돈 많은 갑다잉?”

“어허, 이 정도는 껌값이지라.”

“이쁜 누나 것도 같은 거로다가 한잔 가꼬 오고, 이리 와서 여그 좀 앉아보쑈.”

“순하게 생긴 것이, 여간 사내멩키로 행세한다잉?”

“아따 고3이믄 옛날에는 장가도 갔소.”

“느그 19살이믄 나랑 갑장이어, 말 놔도 돼야.”

“음마, 그라까 그라믄?”

“누나라고 부르지 말고, 미스리라고 불러.”

“미스리, 네 명이믄 얼마여?”

“3,200원 인디, 학생인께 특별히 3,000원만 줘.”

경기관람이 있는 날엔 사람이 많아 선불이었다. 천영기가 돈을 지불하자, 레지가 쪼르르 주방으로 갔다. 마담과 레지들이 짙은 화장에 짧은 치마를 입었다. 옛날에는 마담과 레지들이 한복에 쪽머리를 틀어 올렸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양장스커트에 파마머리를 하거나 생머리단발 등 다양한 차림새였다. 권투경기를 보려는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아야, 느그들 여그서 순진한척하지 마라잉, 이런 데서는 좀 거시기해야 써.”

“하긴, 깡패멩키로 건들건들해야 무시 안 당하고, 눈탱이도 안 맞는다고 하드라.”

“나는 그리 허세 부려가면서 여기 온 사람들이 웃기다.”

“연설하네, 차까지 시켰는디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어.”

“어휴, 저 아가씨는 왜 저렇게 짧은 치마를 입은 거야?”

“긍께, 앉으믄 빤스 다 보이겄다.”

“저 미스리 말이어, 아양 떠는 것이 죽이드라잉?”

천영기눈에서 음흉한 상상이 보였다. 말투에서는 남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레지가 노른자를 띄운 쌍화차를 쟁반에 받쳐 가져왔다. 문승협 옆에 앉아서 한 잔씩 내려놓았다. 향수인지 분냄새인지 묘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아따 참말로, 눈은 있어 갖고, 남자손 안 탈라고 순진한 놈 옆에 앉그만잉.”

“호호, 질투 나믄 그 짝이 이 짝으로 오든가?”

“아야, 아무래도 안되겄다. 승협이 니가 호강한께, 오늘 쌍화차값은 니가 내야 쓰겄다.”

“뭔소리야, 내가 싫다는데도 네가 억지로 여기 데려왔잖아, 돈도 이미 네가 냈고.”

“염병하네, 하여튼 저 시끼한테는 뭔 농담을 못해, 그냥 웃자고 해본 소리여.”

“호호호, 으짜까잉, 나는 요로코롬 이쁘장하게 생기고 순진한 머시마가 좋드라.”

레지가 문승협에게 기대면서 은근슬쩍 팔짱을 꼈다. 빤히 쳐다보며 손과 팔을 쓰다듬었다. 문승협도 남자라고 말초신경에 자극받았다. 살짝 놀라 레지손을 슬며시 뿌리쳤다. 천영기가 그 장면을 놓치지 않고 다방에 놀러 온 어른흉내놀이를 이어갔다.

“어이 미스리, 진짜 맘에 든가? 내가 그 시끼 공짜로 줄 텐께, 한번 데꼬 살아볼란가?”

“그라믄, 이 참에 신혼방 한번 꾸며 보까?”

“이러지 마세요, 사람들도 많은데 좀 떨어져 앉아요.”

“호호, 서울말까지 한께 미치겄그만잉.”

레지가 문승협팔을 가슴께로 확 당겨 안았다.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문승협이 당황한 나머지 다소 거칠게 팔을 뺐다. 어떤 남자가 TV볼륨을 높였다.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경기시작 5분 전을 알렸다. 뒤늦은 몇몇 사람이 자리가 없어 문전박대당다.

권투중계가 시작되고, 마담과 레지들이 주방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다. 다방 안은 남자들로 가득 찼다. 하나둘 TV속 장정구를 향해 훈수두기 시작하였다.

대전충무체육관에서 열린 WBC라이트플라이급타이틀전이었다. 파나마국적 일라리오사파타와 6개월 만의 리턴매치였다. 장정구가 작년 9월 15라운드 경기에서 1대 2로 판정패했었다.

2회전을 마치는 종이 울리자, 긴장된 경기 탓에 담배 피우는 사람이 늘어났다. 다방 안에 연기가 자욱하였다. 갈증이 났는지 여기저기서 레지를 부르며 물을 달라고 아우성쳤다. 1977년 홍수환의 4전 5기 이후 한국에 세계챔피언이 없었다. 세계타이틀도전에서 11연패를 기록 중인 터라, 모든 국민들이 한마음 한 뜻으로 장정구승리를 염원했다.

“잘못하믄 이기겄는디?”

“아냐, 잘못하면 져.”

“아니, 잘하믄 이기겄다고.”

“그렇지, 그러니까 잘해야지.”

3회전 시작종과 함께 응원하는 고함이 들끓었다. 장정구가 6개월 전 경기와 달리 일라리오사파타에게 공격적으로 돌격하였다. 마침내 3회 TKO승으로 이겼다. 심판판정에 장정구손이 들리는 순간, 다방뿐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동시에 함성이 떠졌다. 서로 모르는 사람일지언정 얼싸안고 환호하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3회 TKO과정을 다시 보려는 손님들이 다방에 앉아있었다. 문승협일행은 길거리인생을 극복한 세계챔피언에게 롱런을 기대하며 제갈길을 찾았다.

“다음에 또 놀러 와, 그땐 오늘보다 더 잘해주께.”

“뭣을 잘해준디야?”

“호호, 뭘 묻고 그라까잉, 와보믄 알제.”

“내가 호구냐, 니 말을 믿게?”

“니 말고 니, 승협이라고 했든가? 꼭 와라잉, 내가 재밌게 놀아주께, 알았제?”

“허허, 하기사, 승협이가 홀려 묵기는 딱이제.”

“야,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가자.”

문승협과 친구들이 계단을 내려서자, 레지가 미련 없이 다방 안으로 획 들어갔다.

거리에 사람들이 자기가 세계챔피언이 된 마냥 여운을 즐겼다. 천영기와 이담도 장정구경기를 복기하며 흉내 냈다. 어느덧 독서실에 가까워졌다.

“아까 그 미스리빨통 느낌 으짜디?”

“빨통이 뭔데?”

“아따 그 가시나 젖통말이어, 유방.”

“뭘 어쩌긴 어째, 별 느낌 없었어.”

“내가 보기에는 크도 작도 않고 딱 적당하드만.”

문승협은 모른척하였으나 천영기의 가슴크기추측에 덩달아 상상해 버렸다. 물컹한 젖가슴에 놀란 건 사실이었다. 다른 여자가슴을 생각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정난희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헤어져버렸는데 무슨 소용이냐면서도, 뜬금없이 지난번 만졌던 정난희가슴이 떠올랐다. 내일로 다가온 일방적 만남요구에 정난희가 나올는지 신경 쓰였다.

친구들과 밤샘공부를 작정하였다. 12시쯤 출출해서 국수를 먹고 왔다. 점점 졸음이 괴롭혔다.

새벽 한 시가 넘어가자 잠든 친구들을 배신하기로 했다. 집에 가는 새벽길이 30분쯤 걸렸다. 정난희를 만나 무슨 말을 할지 궁리하는 사이 도착하였다.

늦은 시간이라 고요했다. 여동생방문아래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최대한 조용히 노크하고 빼꼼히 열었다. 문현아는 책상 앞에 앉아있고, 문윤아는 꿈나라였다.

“오빠, 이제 들어오는 거야?”

“응, 밤도 늦었는데 안 자고 뭐 해?”

“공부했어, 다음 주 시험기간이라.”

“우리 현아도 공부하느라 고생 많구나, 무리하지 마.”

“응, 오빠도.”

“오늘 집에 별일 없었어?”

“…….”

“아빠가 심하게 했어?”

“그렇지 뭐, 한두 번 그런 것도 아니고.”

“너는 괜찮아?”

“…….”

“윤아는?”

“나랑 비슷한 마음일 거야.”

“오빠가 미안하다.”

“아니야, 오빠가 왜?”

문승협은 오빠로서 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무력감을 느꼈다. 동생방을 나오면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인간 같아 스스로 부끄러웠다. 자리를 펴고 누워서도 괴로운 마음에 한참 뒤척이다 잠들었다.

일요일아침, 집을 나서기 전 동생방에 들렀다. 문윤아와 눈을 맞추며 살폈다. 괜찮다며 문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을 잃은 동생들 표정을 보니 억장이 무너졌다. 어제 예감하고 염려한 대로였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아빠가 낮의 일을 앙갚음하듯 엄마에게 횡포를 부렸다. 한바탕 부부싸움에 엄마와 여동생들이 크게 상처받았다. 어쩌면 그렇게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지, 뭐 이따위 세상이 있는지 다 싫었다.

동생방에서 나와 안방을 바라보며 의문을 품었다. ‘모기조차도 모성애가 있다는데, 과연 내 부모에겐 있기나 한 걸까? 자손번식을 위해 죽음을 무릎 쓰고 인간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보다 못한 건가?’. 아들은 아버지등을 보고 자란다는 말처럼, 자식들은 훈육이 아니라 부모삶을 보고 배운다는 사실을 외치고 싶었다.

동시에 닥친 여러 힘겨운 일들이 집을 나서는 문승협어깨를 짓눌렀다. 현실회피방법으로 죽음뿐이라는 잘못된 각성이 뇌리를 난도질하였다.

정난희는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문승협은 세상을 모두 잃은 기분이었다. 상실감과 공허감에 공기처럼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지근지근 아픈 머리를 가로저어보아도 나아지지 않았다.

제과점을 나오니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복잡한 생각을 떨쳐버릴 무언가를 찾았다. 얼마 전 친구들과 무아지경시간을 보냈던 장소가 떠올랐다. 목적지가 생기자 몸이 절로 움직였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땅바닥만 보고 걸었다. 멍하게 시공간을 오가며 도착한 곳은 독서실 근처 만화방이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왔으면서 익숙한척하였다. 신간만화칸을 뒤적여 ‘공포의 외인구단’을 꺼내 들었다.

이현세작 야구만화였다. 가난한 야구천재 주인공이 치명적 부상을 입고 좌절했다. 주류세계에서 소외와 고통을 받은 반항아들과 팀을 이뤘다. 자신처럼 어딘가 모자란 팀원들과 불굴의 집념으로 일어서려 노력하였다. 헌신적인 첫사랑이 얽혀있었다.

문승협은 3권까지 나온 공포의 외인구단을 순식간에 독파했다. 다시 6권까지 출간된 ‘신의 아들’을 집었다.

박봉성작으로 권투를 접목한 기업만화였다. 고아원출신 주인공이 시한부인생을 사는 비운의 복서에게 신장과 두 눈을 기증받았다. 기증자동생의 간호 속에 기적같이 살아났다. 죽은 기증자의 세계챔피언이 되어달라는 유언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무너트리고 핍박한 악덕기업주에게 복수심을 불태웠다.

두 만화에 유사한 점이 있었다. 남자주인공 ‘오혜성과 최강타’의 연인이 ‘최엄지와 진보배’였다. 주인공라이벌이자 악역 ‘마동탁과 엄동호’는 안경 쓴 엘리트타입으로 닮았다. 듬직한 조력자로 ‘백두산과 장백산’의 등장도 비슷하였다. 다른 점이라면 ‘오혜성’의 별명이 더벅머리 때문에 ‘까치’였다.

문승협은 만화 보는 내내 자신의 현실 상황을 투영했다. 특히 만화여주인공‘엄지와 보배’에게 정난희로 감정이입되었다. 정난희도 여주인공들처럼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만화 보는 중에 문승협이 ‘오혜성, 최강타’고, 정난희가 ‘최엄지, 진보배’였다.

한참 만화에 심취해 있는데, 누군가 신발코를 툭툭 찼다. 고개 들어보니 무릎이 불룩한 추리닝을 입은 20대 초반 동네놈팡이 같았다. 최신판 신의 아들 4~6권을 빨리 넘기라는 독촉이었다. 문승협은 보는 중인 6권을 빼고 줬다. 만화방에서 흔한 일이라 괘념치 않았지만, 뜻밖의 불청객에 기분이 마뜩잖았다. 그래도 만화를 보는 시간만큼은 현실세계의 괴로운 일들에서 벗어나 좋았다. 조금 전까지 휩싸였던 상실감과 공허감, 분노와 죽음 등 부정적 감정에서 탈피할 수 있어 만족했다. 속세일에 무념무상하다 열반하신 부처님이 조금 이해되었다. 마치 해탈한 사람처럼 만화방을 나섰다.

독서실로 향한 발걸음이 아까보다 활기찼다. 왜 친구들이 두 만화를 찾았는지 깨달았다. 더벅머리로 자른 천영기가 까치머리 어떠냐 물은 이유도 이제 알았다.

신의 아들 6권까지 나온 소식을 전하려 허겁지겁 올라갔다. 둘 다 어디 갔는지 책가방만 놓여있었다. 아쉬움을 접고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공부하려고 의욕적으로 책을 폈다. 글자를 보자마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면서 잡생각이 또 고개 들었다. 무념무상과 해탈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온갖 근심과 정난희생각들이 머릿속에 득시글 활보하였다.

문승협이 두통과 잡념으로 괴로워하는 사이, 정난희는 무용연구소에 다다랐다. 만화가게로 들어가던 문승협뒷모습을 떠올렸다. 아직도 마음잡지 못하다니 걱정되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난희가 뒤늦게 약속장소에 갔으나, 들어가지 않고 몰래 지켜보았다. 제과점에서 나와 축 처져 어딘가로 가는 문승협을 뒤따랐다. 만화가게문을 여는 걸 보면서 왜 저러나 싶었다. 걱정스럽고 미안하면서도 나약해빠진 바보천치처럼 굴어 어이없었다. 이별은 이별, 공부는 공부, 두 가지를 분리해 씩씩하게 자기 할 일에 열중하는 문승협을 상상했었다. 생각과 너무 달라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사랑하기에 마음 아프며 괴롭고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꿋꿋이 버티며 무용에 집중하는데, 남자가 되어갖고 왜 저렇게 방황하는지 짜증스러웠다. ‘내가 고통을 줘놓고 아파하는 승협이를 왜 걱정하나’. 무용연구소에 들어가면서 자조하였다. 이별이 최선이라고 선택한 결과에 힘들어하는 문승협을 생각하니 마음이 더욱 무거웠다.

문승협이 점심을 거른 채 세 시간 가까이 잡념과 사투벌이며 책을 뒤적였다. 중간에 이담이 들어왔다가 데이트약속이 있다며 금방 나갔다.

또 세 시간쯤 지나 천영기가 들어왔다. 백미정과 함께 저녁 먹자고 하여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밥을 먹기보다는 대충 때웠다. 둘이서 즐거운 시간 보내라 하고 독서실로 들어왔다.

독서실에 앉아 책을 폈다 덮었다 하길 수 차례였다. 피로감에 엎드려 자다 깨기를 몇 번 이었다. 자정 무렵쯤 되어서야 친구들과 독서실을 나왔다.

“내일 보자.”

“잉, 느그는 집이 같은 방향인께 좋겄다.”

“담이야, 집에 가다가 혹시 깡패들 만나믄 내 이름 대.”

“염병, 니 이름 댔다가는 한 대 맞을 것을 두 대 맞어.”

“허허허, 암튼 삥 뜯기지 말고 조심조심 가라잉.”

“승협아, 내일 보자.”

“응 그래, 잘 가.”

천영기와 문승협이 이담을 먼저 보내고 돌아섰다.

“니 요즘 왜 그렇게 매가리가 없냐?”

“그냥, 그냥 힘이 없다.”

“니 요즘 난희랑 자주 안 만나제?”

“아니, 자주 못 만나.”

“으째서야, 뭔 일 있냐?”

“난희 무용 때문이야, 아무 일 없어.”

“근디, 누가 이상한 말을 하드라?”

“뭐, 무슨?”

“니랑 난희랑 헤어졌는지 묻던디?”

“누가, 어떤 새끼가?”

“와따, 뭘 그렇게 성질이냐, 아니믄 말제.”

“너는 친구라는 놈이 그런 말 듣고도 가만히 있었냐?”

“아따, 당연히 아니라고 했제.”

“그래, 아니야.”

“근디 말이여, 난희랑 무용하는 여자후배가 묻드란께?”

“언제?”

“아까 낮에. 난희네 무용연구소 앞을 지나가다 만났어.”

“그 그런 일 없어.”

문승협이 아무 일 없다고 펄쩍 뛰었다. 민감히 반응하며 극구 부인하는 태도에 천영기가 의아해했다.

문승협은 갈라진 길에서도 잘 가라는 인사에 대꾸 없이 고개만 끄떡였다. 천영기가 땅만 보고 걸어가는 문승협뒷모습을 바라보며 의심을 품었다.

문승협이 집 앞에 당도하여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갈 데가 없어 들어가야 할 집이라서 답답하고 처량하였다. 세상 어디 마음 편하게 머물 곳이 없어 우울했다. 한숨과 우울을 가슴 깊숙이 욱여넣고 조용히 대문을 열었다. 역시나 집안은 불 꺼진 채 고요하였다. 아빠목소리가 나는 것보단 엄청난 안도감을 줬다.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아무도 반겨주지 않은 것이 차라리 마음 편했다.

방으로 들어가 책상옆에 가방을 던져놓고 이부자리에 누웠다. 공부는 해야겠는데,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정난희생각을 멈출 수 없어 어지러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고민을 쫓다 지쳐 잠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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