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51)
밤새 악몽을 꾸고 뒤척였다. 월요병이 아니더라도 정신적 육체적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세상은 한 주를 활기차게 시작하라며 용기를 북돋았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등굣길 만원 버스도 교문에서 반겨주는 선도부와 선생님도 다 권태로웠다.
김생출선생의 예고대로 국민윤리시간에 열띤 토론을 하였다. 두발자율화가 시행된 지 불과 1년이었다. 재작년 고1 때 머리를 빡빡 깎고 교복과 교모를 착용했던 모습을 회상하며 깔깔거렸다. 교복자율화의 병폐사례를 제시하면서 꽤나 진지하였다.
“맨날 외모에 신경 쓰다 본께 공부가 잘 안 됩디다.”
“맞어, 아침마다 거울 보느라 무자게 바쁘고, 나는 깐닥하다 지각할뻔했단께.”
“나도 그랬어야, 근다고 가시나들한테 어찌 보일란가 신경 안 쓸 수도 없잖애.”
“아야, 니는 신경 쓰나 안 쓰나 차이 없은께 그냥 댕겨.”
“하기사, 원숭이한테 금목걸이 채운다고 사람 되냐?”
“하하하.”
“그라고 보믄 교복입을 때가 맴 편하고 좋았단께, 옷에 신경 쓸 일이 뭐 있어.”
“긍께 말이어, 까딱하믄 철마다 쌔삥 옷 사야제, 돈도 이만저만 들어가냐?”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디, 없는 살림에 이 옷 저 옷 사달라 조를 수도 없고.”
“못 사주는 부모맴은 또 으짜고, 가심이 찢어지제.”
“없이 살믄 그냥 댕기믄 될 것인디, 신발이랑 옷을 뺏는 놈들이 꼭 있드란께?”
“아야 말도 말어, 신발이랑 옷 살라고, 삥 뜯는 놈들도 허벌나게 많아졌다잉.”
“문승협, 문승협.”
“네, 네?”
“너 요즘 수업태도가 왜 그래? 선생님이 몇 번을 불러도 멍하니 앉아있고 말이야.”
“…….”
“뭔 생각하길래 그렇게 동공이 풀려있어?”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흐리멍텅한 눈빛은 거두고,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말해봐.”
문승협은 엉거주춤 일어났으나 질문내용조차 몰랐다. 대답이 없는 동안 교실에 정적이 감돌았다. 마침 김영후가 손들었다. 선도부중심으로 학생방법대를 만들어 학교 주변 문제의심구역을 순찰하자고 했다. 발표를 마친 후 앉으면서 문승협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럴 수도 있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격려였다. 문승협이 살짝 돌아보며 고마움의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들 화장실을 가는 동안, 김생출선생이 문승협을 교탁 앞으로 불렀다.
“너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다른 선생님들도 너 수업태도가 이상하다 그러던데?”
“…….”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고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네.”
“내가 시간 낼 테니까 꼭 와, 알았지?”
“예.”
김생출선생이 교실을 나가자, 문승협은 눈물을 쏟을뻔하였다. 지켜보고 있는 김영후와 김용남 때문에 참았다. 걱정스러워하는 둘의 눈빛에 창피함이 몰려왔다.
독일어시간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초점 없는 눈도 다를 바 없었다. 한동양선생이 성∙수∙격에 따라 변하는 정관사를 선창 하였다. 반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따라 했다. 문승협입은 닫혀있었다. 복수형이 없는 부정관사변화를 무한 반복하는데도 딴생각이었다.
“der des dem den, die der der die, das des dem das, die der den die.”
“데어 데스 뎀 덴, 디 데어 데어 디, 다스 데스 뎀 다스, 디 데어 덴 디.”
“ein eines einem einen, eine einer einer eine, ein eines einem ein.”
“아인 아이네스 아이넴 아이넨, 아이네 아이너 아이너 아이네, 아인 아이네스 아이넴 아인.”
“aus, bei, mit, nach, seit, von, zu, gegenüber.”
“아우스, 바이, 미트, 나흐, 자이트, 본, 주, 게게뉘버.”
모두가 전치사를 기계적으로 외칠 때, 한동양선생이 학생두명을 잡아냈다. 독일어수업시간에 다른 과목책을 펴지 말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영어와 수학을 몰래 공부한 아이들이었다. 결국 한동양선생손에 참고서가 찢기고 앞으로 끌려나갔다. 묵직한 몽둥이에 분노의 풀스윙으로 엉덩이를 열대씩 맞고 고꾸라졌다. 다음 주까지 정관사∙부정관사변화와 전치사암기숙제는 덤이었다. 검사해서 틀리면 엄히 처벌하겠다며 수업을 마쳤다. 문승협은 삼엄한 분위기에 현실로 돌아왔지만, 수업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이어진 화학시간, 김원정선생이 반드시 외우라던 원소주기율표를 점검하였다. 암기하지 못한 아이들을 가차 없이 체벌했다. 무자비하게 때린다는 소문은 허풍이 아니었다. 문승협도 버벅거려 손바닥을 맞았다. 작년 고2 때 세계사선생에게 대나무뿌리로 손등을 맞은 이후 오랜만이었다. 복도에서 말뚝 박기하다 걸려서였으나, 수업시간엔 처음이었다. 학생들은 매주 열외일명 없이 검사받아 고역이었다. 손바닥을 찰지게 맞는 고통쯤은 예사였다. 아프다고 엄살떨면 가중처벌받았다. 일일이 한 명 한 명 검사하다 보니 반항하는 학생이 있었다. 반항아의 볼을 잡고 귀싸대기를 때렸다. 자비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무서운 선생이었다. 학생들은 더 이상 저항 없이 선생의 폭력을 사랑으로 달게 받아들였다. 맞기 싫어 외우려 애쓴 만큼 흥얼거릴 정도까지 되었다.
화학수업 후 쉬는 시간, 김영후와 김용남이 문승협에게 모여들어 걱정스레 물었다.
“니 요즘 왜 그냐, 수업에 집중을 못하드라?”
“화학꼰대가 니 때리믄서 쪼까 당황한 거 알어?”
“반아그들도 뭔 일이냐고 수군댔어. 으째 그냐?”
문승협은 무표정하게 빈웃음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다음은 영어수업이었다. 길현익선생이 가정법과거를 복습하자며 질문하였다.
“자, 누가 예문 한번 만들어볼래?”
“저요.”
“그래 김용남.”
“If I were young, I could enjoy this party.”
“좋아, 무슨 뜻이지?”
“내가 젊다면, 나는 이 파티를 즐길 수 있을 텐데.”
“잘했다. 그러면 이 예문을 직설법으로 바꿔볼 사람?”
“…….”
“문승협, 승협이가 직설법으로 바꿔봐.”
“As I am not young, I cannot enjoy this party.”
문승협이 답변하고 앉자, 앞자리 김용남이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뒷자리 김영후도 등을 토닥여줬다.
“If+주어+동사의 과거형, 주어+would+동사원형. ~한다면, …할 텐데. if절의 일반동사는 과거형이고, be동사는 인칭·수에 관계없이 were를 쓴다. 주절의 조동사는 일반적으로 would를 쓰지만, 의미에 따라 could나 might를 쓰기도 한다. 꼭 암기하도록, 알겠나?
“예.”
“그럼 오늘은 가정법과거완료를 공부하자.”
길현익선생이 기본문장구성을 반복해서 암기시켰다. 여러 가지 예문을 들어 가르쳤다.
“If+주어+had+p.p, 주어+would have+p.p. ~했다면, …했을 텐데. if절의 동사는 had+과거분사로 과거완료형이고, 주절은 조동사의 과거형+have+과거분사를 쓴다. 반드시 기억해라, 알았지?”
“네.”
“그럼 각자 예문을 만들고, 직설법까지 작성해 볼까?”
반아이들 모두 책상에 코를 박고 열심이었다. 발표를 해야 하니 나름 심혈을 기울였다. 장난기 있는 아이는 재미난 예문을 만들며 킥킥댔다. 문승협도 연필을 움직였다. 갑자기 어깨를 뜰썩이며 소리 없이 흐느꼈다. 노트에 몇 글자는 떨어진 눈물방울에 젖어 번졌다.
‘If she had loved me then, she would have accepted my heart. As she didn’t love me then, she didn’t accept my heart. 만일 그녀가 그때 나를 사랑했다면, 그녀는 내 마음을 받아들였을 텐데’
문승협은 정난희생각에서 쉽사리 헤어나지 못했다. 행여 누가 볼까 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김영후가 이상한 낌새를 느낄 찰나 수업종료종이 울렸다.
“과거 사실을 반대로 가정하거나,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일을 가정하고 상상해 보는 것이다.”
“네.”
“여러분들이 오늘 만든 예문을 다음 수업에 발표시킬 테니까, 다들 완성해 놓도록.”
길현익선생이 교실을 나가자, 문승협은 눈물자욱이 선명한 노트를 덮고 엎드려 감정을 추슬렀다.
직할시로 승격된 지 2년 된 인천직할시가 개항 100주년을 성대하게 치렀다. MBC기획‘조선왕조 오백 년 시리즈 제1부 추동궁마마’가 첫 전파를 탔다. 문승협은 여전히 깊은 슬픔에 빠져있었다. 어떻게든 마음을 다스려보려고, 밤늦은 시간 유선국민학교 근처 경동성당에 들렀다. 성모마리아상 앞에 손을 모았지만, 정난희와 이별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봄햇살이 따듯한 4월 첫날, 주택은행이 주택복권을 제574회로 잠정중지하고 올림픽복권을 발매하였다. 주택복권은 올림픽지원법시효가 끝난 이듬해인 1989년 재개예정이라고 알렸다.
올림픽복권은 서울아시아경기대회와 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 지원법에 의거 서울올림픽대회조직위원회가 발행했다. 기간은 88 올림픽까지며, 올림픽기금과 국민주택기금 조성이 목적이었다.
주택복권은 한국주택은행법에 따라 국민주택사업기금조성을 위해 1969년 9월 15일 선보였다. 처음엔 월 1회 50만 매 정도를 일부 도시만 판매하였다. 인기를 끌면서 1973년 3월 주 1회로 바뀌고, 판매량도 480만 매까지 늘어 총 5,000만 원의 복권을 유통시켰다. 1장당 가격은 100원이며, 1등 당첨금소득세율을 25/100 종합과세에서 5/100 분리과세로 수정했다. 조세감면규제법을 두 차례 개정하여 1982년 15/100로 인상됐다. 1등 당첨금은 300만 원으로 시작해 물가상승에 따라 1978년 1,000만 원을 돌파하였다. 1979년 연식복권을 도입하면서 2,000만 원이 되고, 1981년 464회에 3,000만 원으로 증가했었다.
복권번호추첨은 버튼을 누르면 화살이 날아가 숫자판에 꽂히는 방식이었으나, 이번 올림픽복권부터 전동식 공추출로 변경되었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표현이 10.26 박정희저격을 연상케 한다는 이유에서 폐지하였다. 여자보조원이 진행위원구령에 버튼을 누르면, 화살이 돌아가는 일∙십∙백∙천∙만∙십만 단위 숫자판에 꽂히고, 카메라가 번호를 비춘 특유의 광경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듯했다. 환한 미소로 당첨번호를 안내하는 여성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도 많았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행성이라는 지적과 조작논란이 늘 따라다녔지만, 배곯은 서민들에게 인생한방을 노리는 기회였다.
오전수업만 있는 토요일에 3주 동안 학년별 신체검사공지가 있었다. 가장 먼저 시행하는 3학년교실이 아침부터 어수선하였다. 옷을 전부 벗으라는 담임지시에 팬티까지 내린 학생이 있어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다들 하얀색 삼각팬티를 입고, 조별로 교실을 돌며 검사했다. 시력청력검사에는 조용하였으나, 키와 가슴둘레 측정에서 서로 크고 넓다며 으스댔다.
이달순이 가슴둘레에서 단연 1등이었다. 3년간 헬스를 다녀서 활배근이 무척 발달했다. 만나는 조마다 대놓고 자랑하다 문승협조를 보자 거들먹거렸다.
“승협이 니는 가심둘레 몇 이냐?”
“97.”
“아야, 사내새끼 가심이 그렇게 좁아갔고 어따 쓸래?”
“너 키 몇이야?”
“162.5다, 왜?”
“사나이 키치고는 참 크다, 그치 달순아?”
“염병, 니 키는 몇인디?”
“179.5, 왜?”
“…….”
“하하하, 달순이가 가심 쪼깐 넓다고 무자게 설레발치드만, 키에서 깨깽하네.”
“어이 땅꼬마 달순아, 그 가심에서 10센치만 떼서 머리로 올려, 그라믄 되잖애.”
“10센치 갖고는 텍도 없어, 15센치믄 모르까.”
“웃기고 자빠졌네. 느그 키는 유전이고, 내 가심은 후천적 단련인께 비교가 안돼.”
“연설하네, 우리는 뭐 노력 안 했가니? 키 클라고 콩나물이랑 멸치랑 허벌라게 묵었어.”
“그래도 가시나들은 멀대 같은 느그보다는, 나같이 넓은 가심을 좋아할 것이다.”
“과연 그라까? 내가 가시나믄, 니 가심보다는 승협이 키를 택할 것인디?”
“긍께 말이어, 가시나 즈그들도 있는 것이 가심인디, 뭐 할라고 또 가심을 찾겄냐?”
“맞어, 하하하.”
“그만 조잘대라잉, 그렇게 생각하믄, 승협이 키에 내 가심둘레믄 더 좋아하겄제.”
“당연하제, 그걸 누가 모르겄냐, 니가 하도 가심 넓다고 자랑해싸서 그런 거여.”
“아야 조운대, 니는 짜그라져 있어라잉, 나랑 키도 비까비까한 것이 어디서 깝치고 있어.”
이달순가슴둘레와 문승협키로 유쾌하게 떠들었다. 정작 논쟁중심에 있던 문승협은 결말나기 전 다음 교실로 옮겨갔다. 이달순이 앞선 문승협조를 뒤따랐다.
“아야 승협아, 나랑 같이 보디빌딩 안 할래?”
“헬스장?”
“잉, 우리 집 근처에 있는디 시설도 좋아.”
“글쎄.”
“공부하랴 뭐 하랴, 이것저것 신경 쓰고 머리 아플 때는 헬스가 또 최고다잉.”
“보디빌딩이라, 당장은 좀 그렇고, 한번 생각해 볼게.”
신체검사는 정규수업보다 1시간 일찍 끝났다. 학교를 파한 반아이들 대부분 운동장에서 축구나 농구를 하였다. 일부는 이달순을 따라가 철봉에 매달렸다.
문승협은 며칠째 컨디션이 좋지 않아 집으로 갔다. 왜 일찍 왔냐는 엄마질문에도 대구 없이 방으로 가 잠을 청했다. 잠깐 잔 듯 깨어보니 저녁 8시가 넘어갔다. 여동생들이 TV시청에 빠져있었다. 뒤늦은 저녁을 먹으며 무슨 프로인지 얼핏 보았다.
“너희들 TV안으로 들어가겠다, 뭘 그리 열심히 보냐?”
“유모어 1번지라고, 오늘 첫 방송인데 재미있어.”
“코미디프로 같은데?”
“응, 근데 옛날 하고는 좀 달라.”
“코미디프로가 거기서 거기지 다를 게 뭐 있어.”
“말 시키지 말고, 오빠는 밥이나 먹어.”
“야 문윤아, 내가 너한테 물어봤냐?”
“오빠가 시끄럽게 떠드니까 잘 안 들리잖아.”
문승협은 막내여동생에게 한마디 하려다 참았다. 오랜만에 밝은 표정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평소 두 여동생에게 오빠로서 책임감을 느꼈다. 그만큼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도 있었다. 자기 마음조차 어쩌지 못한 상황이면서도 동생들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유모어 1번지’에 이어 9시 뉴스가 나왔다. 국방과학연구소의 국내최초잠수정 ‘돌고래’ 진수식이 거행되고, 건설부가 북한산과 도봉산일원 78.5 km² 를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미국 NASA의 두 번째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발사보도에 문윤아귀가 쫑긋했다.
“오빠, 그럼 우주로 여행 갈 수 있는 거야?”
“윤아가 어른이 될 때쯤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엄청 비싸겠지?”
“윤아야, 오빠가 돈 많이 벌어서 우주여행 시켜줄게.”
“오빠 나는?”
“하하, 현아도 물론이지, 우리 셋이 다 함께 가자.”
“아이고, 그때가 올런가 모르겠네요.”
“윤아야, 세상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마.”
“왜, 현실적인 게 나쁜 거야?”
“글쎄,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너 자신이 행복해지기 힘들어.”
문승협은 멍하니 생각에 잠긴 문윤아를 자주 목격하였다. 그때마다 무슨 고민을 하는지 궁금했다. 행여 자기만의 세계에 빠질까 싶어 물으면 매번 얼버무렸다. 가끔은 대화와 상관없는 엉뚱한 질문을 하였다. 자기중심적 사고에 사로잡힐까 우려했다.
“아빠는 어디 가셨어?”
“아니, 아직 안 들어왔어.”
“아, 그래?”
“왜 벌써 일어나? 아빠도 없는데 TV나 더 보시지.”
“공부해야지.”
문승협은 아빠가 없다는 말에 되레 안도하였다. 아직 귀가전인 아빠를 걱정하진 못할망정 이건 또 무슨 해괴한 감정인지 씁쓸했다. 책상에 앉아 암기과목문제집을 폈다. 유난히 전등이 어두침침하였다. 독서실과 달리 사방이 터져있어 뭔가 어수선했다. 공부하기 싫어 핑계를 찾는 사람처럼 산만하였다. 어느새 적응된 독서실환경을 탓하며 책가방을 챙겼다.
밤 깊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독서실로 이끌었다. 몰래 집을 나와 걷는 한적한밤이 외롭고 허전했다. 다들 가족과 즐겁게 주말을 보낼 텐데, 무슨 업보로 집 밖을 맴도는지 억울하였다.
독서실에 앉아 의욕적으로 책을 펼쳤지만, 암기과목 반페이지 정도 나간 진도가 다였다. 친구들과 잠깐 잡답을 나누고, 아침까지 졸다 깨다 몸부림이 대부분이었다. 독서실에서 기생하듯 그렇게 일요일도 지나갔다.
식목일을 하루 앞둔 월요일, 추적추적 내린 비로 실내에서 체육수업을 했다. 체육선생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테니스전설 ‘비에른보리’가 은퇴한다며 안타까움을 넘어 애통해하였다.
비에른보리는 스웨덴출신 세계랭킹 1위 프로테니스선수였다. 70∙80년대 활동하면서 최초 5년 연속 윔블던우승, 프랑스오픈 우승 6회, US오픈 준우승 4회, 호주오픈 3라운드 등 11개 그랜드슬램타이틀을 획득해 화려한 성적을 남겼다. 테니스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인정받은 한 명이었다. 1982년에 17세‘매츠빌랜더’의 우승 전까지는 프랑스오픈 최연소우승자였다. 18살의 보리는 데이비스컵단식 19연승으로 스웨덴의 데이비스컵최초우승을 이끌어내는데 공헌했다. 데이비스컵단식 33연승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프랑스오픈 6회 우승은 이대회 남자최다우승기록이었다. 3년 연속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을 우승한 유일한 선수였다. 9년의 선수생활동안 그랜드슬램단식에 27회 출전 11회 우승과 그랜드슬램단식경기 89.8% 승률은 오픈시대이래 최고기록이었다. 1980년 윔블던에서 ‘존매켄로’와 결승경기는 세계최고 명경기로 꼽혔다. 운명적 라이벌 ‘지미코너스’와 테니스선수 최초 대중적 인기를 누린 스포츠스타였다. 덕분에 이들 라이벌대결은 대중의 화젯거리였다. 지미코너스, 존매켄로와 함께 테니스전성시대를 이끈 삼두마차로 불렸다. 프로테니스를 인기종목에 등극시킨 주역이었다. 사상 처음 시즌상금 100만 달러를 돌파하며 최고스타로 군림하였다. 훤칠한 키와 높은 코에 장발과 구레나룻수염으로 귀공자처럼 잘생긴 데다, 헤어밴드를 하고 코트를 힘차게 뛰는 모습이 이상적 백인남성의 아이콘이었다. 활동적인 섹시한 장면이 TV광고와 패션잡지에 실려 세계남녀모두에게 전례 없는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스웨덴인하면 남자는 비에른보리, 여자는 ‘잉그리드버그만’ 일 정도로 지명도가 높았다. 스웨덴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대표적 인물로서 20세기 스웨덴은 비에른보리의 나라였다.
조우조체육선생이 테니스에 열광한 터라, 침을 튀겨가며 열정적으로 비에른보리일대기를 가르쳤다.
“오늘 수업을 잘 들었으믄, 월말고사에서 좋은 점수받을 것이다, 뭔 말인지 알제?”
“진짜로요?”
“어허, 학생과장인 내가 거짓갈하겄냐?”
“와따 참말로, 진작에 말해줬으믄 열심히 받아쓰기라도 했을 것인디 말이어.”
체육선생이 빙긋 웃으며 교실을 나갔다. 반아이들이 체육선생별명을 노래처럼 불러대며 분풀이했다.
“조우조는 앞으로 해도 조곤조, 뒤로해도 조곤조, 곤조 땜시 못살아 정말 못살아~.”
“아따, 조곤조 땜시 미쳐 불것그만잉.”
“긍께 말이다, 저러코롬 곤조 부린께 별명이 곤조제, 뭐 한디 곤조라고 하겄냐.”
“아야, 누구 필기한 사람 없냐? 같이 좀 돌려보자?”
“느그 설마, 내신점수 땜에 모른체끼 하는 거 아니제?”
“아그들아, 승협이 노트 한번 봐봐라잉, 딴사람은 몰라도 승협이는 필기했을 것이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김용남이 잽싸게 문승협노트를 가져다 살폈다. 이내 겸연쩍어하며 반아이들에게 아니라고 알렸다. 김영후가 못 믿겠다며 빼앗으려 하였다. 김용남이 등뒤에 숨기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섭게 째려보는 문승협에게 건네며 나지막이 미안하다고 했다. 문승협은 말없이 받아 가방에 넣었다. 노트에 ‘정난희’ 이름석자와 ‘사랑’이란 글자만 빼곡히 쓰여있었다.
식목일행사로 개최한 사생대회에 대입시험을 앞둔 3학년은 열외였다. 문승협은 체육노트에 도배된 글자만큼 정난희와 이별에 매몰돼 날이 갈수록 무기력하였다.
문교부가 대학교여름학기신설을 허용하고, 문공부가 과천남서울대공원에 국립현대미술관건립계획을 발표한 날이었다. 담임선생이 아침조회를 했다.
“느그 지난달 아이큐테스트한다고 시험봤지야?”
“예.”
“그 결과가 나왔는디, 다 불러주까 으짜까?”
“아니라우, 그냥 각자 알려주쑈.”
“선상님, 쓰잘데없이 아이큐테스트를 뭐 한디 한다요?”
“어이 근육쟁이 달순씨, 니는 인생에 아무 쓰잘데없는 함수를 뭐 한디 배우냐?”
“저는 들으믄 바로 까묵어분께, 수학은 아예 몰라라우.”
“그라믄 아이큐테스트도 아예 잊어 부러.”
“하하하.”
“선상님, 아이큐테스트는 어느 나라서 했으까라우?”
“미국이어, 이민제한과 우수인적자원을 전쟁에 파견하려는 목적으로 시작했제, 그때 지능을 측정하는 도구로 인기 끌믄서 본격적으로 활용했어.”
담임선생이 반장 유호창을 호명하더니 학교최고아이큐 153이라고 하였다. 반에서 최저아이큐는 85라며 이달순을 바라봤다. 누구라고 말하진 않았으나, 눈치챈 몇몇 아이들이 킥킥댔다. 개별아이큐는 이달 말 진학상담 때 알려주겠다고 했다. 아이큐 낮은 아이들이 놀림당할까 미연에 방지하려는 배려였다. 아이큐결과를 알게 되면 동물아이큐와 비교할 것이 분명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쉬는 시간에 시끌시끌했다. ‘원숭이 60, 앵무새 30, 닭 15, 붕어 10’. 다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빠삭하였다. 문승협은 뭐 그리 아이큐가 중요하냐면서도 궁금하였다. 정난희에게 이별통고받기 전날 아이큐시험을 치러서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다.
이웅평이 미그기를 몰고 귀순한 지 두 달여 만에 여의도에서 반공궐기대회를 했다. 전두환정권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관제동원하였다. 반공웅변대회 등 또 멸공열풍을 예고했다. 반공멸공 관제동원선동으로 서울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개막식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무기구형을 받은 조세형의 서울형사지법구치감탈출뉴스도 묻혔다. 모든 국민들의 시청각이 반공에 쏠렸다.
와중에 ‘마이클잭슨 Thriller’ 앨범이 국내에 상륙하였다. Thriller가 발표된 작년 11월 말을 기점으로 듣는 음악에 더해 보는 음악개념이 막을 열었다. 문화계와 정치사회전반에 인종주의가 붕괴되는 계기였다. 1월 ‘Billie Jean’에 이어 2월 ‘Beat It’까지, 전 세계인들에게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었다. 전파상과 레코드판매점,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길거리 리어카에서도 마이클잭슨노래가 온종일 울렸다. 음악다방에서는 Thriller의 뮤직비디오와 공영장면을 계속 반복 재생했다.
마이클잭슨의 멋진 댄스와 흥겨운 리듬이 폭풍처럼 유행하며 온 세상사람들을 열광시켰지만, 실연에 빠진 문승협은 구해내지 못하였다. 여전히 이별의 고통을 품고 독서실을 오갔다. 한동안 멈췄던 메모 남기기를 재개했다. 오기가 발동해서였으나, 담벼락구멍에 쌓여가는 메모만큼 정난희와 만남불발은 낙심으로 반복되었다.
‘이만기’가 제1회 천하장사씨름대회결승에서 ‘최욱진’을 꺾고 우승한 날, 작은 고모 문희경이 선을 봤다. 시큰둥한 반응과 달리 결혼으로 이어질 분위기였다.
월요일에 충격적인 해외토픽이 떴다. 언론들이 외신을 인용하여 긴급 타전했다. 테러조직 헤즈볼라가 레바논베이루트주재 미국대사관에 자살차량폭탄테러를 가하였다. 63명이 죽고 130명이 다쳐 세계가 경악했다. 거리에 신문팔이소년들이 고함을 지르며 호외를 뿌렸다. 대구향촌동 ‘초원의 집’ 디스코텍에서도 큰 불이 났다. 10대 청소년 25명이 죽고 67명이 부상하였다. 학생들은 미국대사관폭탄테러보다 디스코텍화제사건에 주목했다. 또래들의 사망사고를 놓고 언론보도를 토대로 갑론을박하였다.
디스코텍은 오래된 목조건물 2층이었다. 스프링클러 같은 방화시설이 없었다. 약 330m² 넓이에 의자가 320개였다. 평일은 평균 150여 명, 주말에 많을 때는 500여 명이 몰렸다. 인기만큼 손님은 주로 20대였다. 새벽 1시 30분 전기합선으로 추정된 화재가 일어났다. 목격자에 따르면 천장에서 섬광이 일고 불길이 치솟았다. 낡은 목조건물특성상 순식간에 번졌다. 바닥카펫과 아래층 ‘쌍쌍클럽’으로 옮겨 붙었다. 한 손님이 '불이야'라고 소리치자, 150여 명의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다. 내부가 굉장히 복잡해 탈출구를 찾기 어려웠다. 대피로마저 폭이 2m도 채 안 되었다. 서로 먼저 나가려다 보니 사람들이 뒤엉켜버렸다. 소방차 35대가 출동하여 진화작업을 펼치고 구조에 나섰다. 쇠창살로 밀폐되고 대피로도 60여 명의 사람들로 막혀 들어가기 힘들었다. 1시간 30분 정도 지난 후 진화하였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피해자 상당수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라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젊은 세대는 시대를 막론하고 나라의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이었다.
나흘뒤 대구디스코텍화재 후속뉴스가 나왔다. 문교부가 전국시도교육청에 교외생활지도강화를 지시했다. 국무총리행정조정실은 유흥업소영업시간을 자정까지로 제한하는 등 청소년유흥업소출입억제 종합대책을 발표하였다. 자연스레 학생들이 디스코텍과 유흥업소에 호기심을 가졌다. 문일고도 정부시책에 보조를 맞췄다. 학생과장 조우조선생주도로 디스코텍에 다니는 학생들을 색출했다. 문승협은 3학년 각반에 2~3명씩 있는 것도 뜻밖이었으나, 1∙2학년도 많아 놀랐다.
“월성원전 2호기 준공소식에는 아무도 관심 없고, 어딜 가나 디스코텍야그뿐이네.”
“너희 학교도 디스코텍에 다니는 애들이 많아?”
“잉, 순진한 우리들만 디스코텍을 모르제 다 알드라.”
“지랄, 느그 둘만 안 가봤다는 생각은 으째 못하냐?”
“뭐야, 영기 너는 가봤어?”
“그람, 미정이랑 몇 번 가봤제.”
“우아, 너희들 미쳤다 진짜, 학생이 학교에서 출입금지한 곳은 가지 말아야지.”
“승협아, 니는 뭣 땀시 그렇게 준법정신이 투철하냐?”
“영기야, 지키라고 있는 게 법이잖아, 미성년자인 학생이면 더욱 잘 따라야지.”
“이그, 이 범생이 시끼, 내가 니한테 뭔 말을 하겄냐?”
“나는 네가 그런 곳을 다니는 게 더 이해 안 된다.”
“염병하네, 아야 우리는 청춘이여, 시행착오를 겪으믄서 자라는 청준이란께?”
“느그 그러다 또 싸우겄다, 인자 그만해.”
“담이야, 지금 우리 때 안 가보믄 언제 또 가겄냐?”
“아따 시끄런께 그만하란 말이여, 복잡한 머리 쪼까 식히게 만화방이나 가자.”
천영기가 만화방에 들어서자마자 ‘신의 아들 7~15권’을 선점하였다, 이담은 ‘공포의 외인구단 4~6권’을 집었다. 문승협은 친구들이 만화를 넘겨주길 기다리며 TV를 보았다. 마침 KBS2 ‘유머 1번지’가 틀어져있었다. 첫 전파탄날 동생들과 봤던 프로였다. 프로그램이름이 유모어 1번지에서 유머 1번지로 바뀌었다.
유머 1번지는 1∙2세대 코미디언들이 다수 출연했다. 1세대는 ‘송해, 이상해, 배삼룡, 최용순, 고영수, 송영길’이 꼽혔다. 2세대로는 ‘전유성, 엄용수, 김정식, 정명재, 이상운, 이경래’등이었다. 점점 2세대로 교체됐다. 코미디프로장르도 정통희극에서 단편코미디로 바뀌어갔다. ‘CF콩트 베스트 5’에는 ‘김형곤, 최양락, 주병진, 김학래, 이성미’가 출연해 웃음을 선사하였다. ‘유머세계일주’에는 ‘임하룡, 심형래’등이 재미나게 연기했다. ‘다시 보고 싶은 코미디’는 첫 회부터 고정코너였다. 과거 60∙70년대 유명단편코미디를 리메이크하였다. 항상 김학래가 먼저 나와 언제 방송되었던 코미디라고 소개한 뒤 시작했다.
문승협은 ‘김광한과 이성미의 Let's Go 팝스’를 흥미롭게 봤다. 유머 1번지가 끝나갈 무렵, 이담에게 공포의 외인구단을 받았다. 만화를 보면서 이전처럼 ‘까치 오혜성과 최엄지’에게 자신과 정난희를 투영하였다. 신의 아들을 볼 때도 ‘최강타와 진보배’가 문승협과 정난희로 물아일체였다. 정난희생각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천영기가 신간만화를 전부 섭렵하고 두리번거렸다. 슬픈 표정으로 만화에 빠진 문승협모습이 애잔하였다. 벌떡 일어나 국자에 설탕을 담았다.
“담이야, 우리 내기하끄나?”
“뭣을 아?”
“내가 지금 달고나를 만들 텐께, 띠나 못 띠나 해갖고, 진사람이 만화본값 다 내기.”
“뭘로 야?”
“별 모양.”
문승협이 신의 아들 15권을 거의 다 봤을 즈음, 천영기가 달고나게임에서 이겼다. 이담이 툴툴거렸다.
“아야 가자, 오매 열불 난 거, 나만 덥냐?”
“큭큭큭, 고로코롬 억울하믄 담에 또 한판 하든가?”
“영기야, 애도 아니고, 달고나 하니까 좋으냐?”
“잉, 좋아디지겄다 그냥. 꽁으로 만화보고, 옛날 어릴 적도 생각나고, 아조 재미지드라.”
“너 그렇게 공짜 좋아하다 대머리 된다.”
“그건 늙다리 돼서 걱정할란다. 아따 날씨 조으다잉?”
“봄날씨가 다 이렇제, 뭐 별거 있가니?”
“너 내일 무슨 일 있냐?”
“이 어르신은 콧바람 쪼까 쐴란께, 아그들은 독서실서 공부나 열심히 하그라.”
천영기가 알쏭달쏭한 말을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이담이 천영기뒤통수에 주먹질시늉을 하며 뒤따랐다. 문승협은 밤하늘을 한번 쳐다보고 독서실로 들어갔다.
다음날, 독서실분위기가 예전과 조금 달랐다. 일요일인데도 군데군데 자리가 비었다. 상춘시기라 교외로 인파가 몰렸다. 각급학교에서 선생들을 근교 유원지와 명소에 파견하여 단속했다. 교육청의 교외생활지도강화지시여파였다. 즐기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학생들이 정부를 원망하였다. 어차피 공부해야 할 문승협관점에선 쌤통이지만, 세상이 그렇듯 선생들 단속에도 놀러 가는 학생들이 있었다. 고3수험생이면서 아랑곳없는 천영기와 백미정이 그랬다. 이담도 점심 나절 외출했다. 문승협과 두 명만이 독서실에 틀어박혔다. 공부의무감인지 처지가 그래선지 알길 없었다.
저녁 무렵 천영기와 백미정이 독서실을 찾았다. 문승협을 불러내 무작정 택시에 태웠다. 째보선창을 지나 바닷가 레스토랑 앞에 멈췄다. 먼저 와있던 이담과 한현진이 어리둥절한 문승협에게 미소 지었다. 종업원이 곧바로 음식을 내왔다. 문승협은 말없이 돈가스를 썰어먹었다. 후식으로 오렌지주스를 골랐다.
“아야 담이야, 니는 현진이랑 오늘 뭐 했냐?”
“그냥 시내 여그저그 다녔어, 꼰대들 교외단속 땜시 어딜 갈 수가 있어야제.”
“나는 오늘 미정이랑 청계에 놀러 갔다 왔어.”
“청계에 뭐 볼 거 있다고, 니 목대갈라고 그라냐?”
“뭔 말을 고로코롬 하냐, 그러다 말이 씨가 된다잉.”
“와따, 니 목포대학을 무자게 시피본다잉, 나중에는 국립대학이 될 것이다.”
“그라믄 니가 가든가, 아직 종합대학으로 승격도 안 됐는디, 어느 세월에 되겄냐.”
“야, 말장난 그만하고, 오늘 무슨 날이야?”
“무슨 날은 뭐, 아무 날 아니어.”
“근데, 왜 나를 납치하듯 데려온 거야?”
“아따 시끼, 이 화창한 날에 니 혼자만 독서실서 처박혀있은께, 우리가 구제해 줄라고 그랬제.”
“내가 안쓰럽고 짠하냐?”
“으째 또 삐딱하까잉.”
“너희들끼리 놀지 그랬어. 왜? 나 염장 지르려고?”
“승협어, 내가 그러자고 했어.”
“미정이 네가?”
“잉, 할 말도 있고 해서.”
“할 말이라니?”
“말하기 쪼께 근디, 듣고 나서 기분 나빠하지 마라잉?”
“뭔데, 무슨 말인대?”
“저그 뭐시냐, 니 난희랑 헤 헤어졌지야?”
“…….”
“스 승협아, 우리 다 알고 있어, 사방데 알아봤어.”
“현진이 네가?”
“잉, 미정이랑 나랑 같이.”
“니가 그러코롬 넋 빼놓고 산디, 맨날 붙어 다니는 우리가 모르믄, 그것이 친구냐?”
“그래서?”
“아따 그래서는 뭔 그래서여, 인자 탈탈 털고 정난희를 잊어버리든가, 아니믄.”
“아니면, 아니면 뭐 어쩌라고?”
“현진이랑 미정이가 새로 소개해줄 수 있다고 한께, 딴 가시나 한번 만나보든가?”
“잉, 승협이 니라믄, 공부 잘하고 예쁘고 착한 가시나들이 허벌나게 줄 섰어야.”
“가시나들이 니 소개시켜주라고 아조 난리여 난리, 니만 맘먹으믄 일사천리여.”
“그래, 마음 써줘서 고맙다.”
“그라믄 날짜 잡으까?”
“아니 아니야, 나는 아직 다른 여자를 만날 생각이 없어,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아따 염병하네 참말로, 정난희한테 홀려 갖고는 아직까정 정신을 못 차리네 진짜.”
“긍께 말이어, 난희가 뭐가 좋다고 저러까잉.”
“도도하제 싸가지없제, 근다고 고분고분하기는 하나.”
“그따위로 말할래? 난희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니도 병이다 병, 그것도 아조 큰 병이어.”
“저 시끼 난희한테 완전히 가부렀어, 미쳐부렀단께.”
“병도 내 병이고, 미쳐도 내가 미쳐.”
“이그, 답답해서 내속이 천불난다.”
“너희들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뭔디, 뭔디야?”
“저기, 난희랑 나랑 헤어졌다는 거 비밀로 해줘, 내가 이별을 극복할 때까지만.”
“그때가 언젠디야?”
“나도 모르지, 근데 오래가진 않을 거야.”
“그럴 자신은 있고?”
“…….”
“에이, 나도 모르겄다, 니 알아서 해라.”
그동안 친구들이 변해가는 문승협의 일거일동을 지켜봤다. 친한 반아이들도 어느 정도 알았으나, 감정에 치우쳐 자각하지 못한 문승협만 몰랐다. 겉으론 멀쩡할 뿐 문승협내면이 피폐해졌으리라 짐작하였다. 표현하지 않는 내성적 성격의 문승협에게 이별에서 탈피할 계기를 만들어 주려했다. 괴로움에 힘겨워하며 무너지는 모습이 애처로워 찾은 특단대책이었다.
이로써 문승협과 정난희의 이별이 공식화됨과 동시에 비밀 아닌 비밀이 되었다. 문승협은 아프고 힘들면서도 스스로 감당해 내는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다. 친구들은 방관하는 것처럼 존중했다.
문승협과 친구들이 레스토랑을 나와 짠 내 나는 해변을 걸었다.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이야, 아그들아 하늘 좀 봐봐.”
“우와, 별이 허벌나다야.”
“별이 언제부터 저렇게 많았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묘하게 홀린다잉.”
“밤하늘 별을 보면, 항상 꿈과 희망을 갖게 됐었는데.”
“언제부터야?”
“정확한 시기는 모르겠고, 아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은 아?”
“얼마 전까진 난희와 함께하는 꿈이었는데, 지금은 그 꿈이 사라져 버렸어, 내의사와는 상관없이.”
“빈센트반고흐 알제?”
“아, 그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
“잉, 고흐가 별을 그린 그림은 한 가지여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 것이다.”
“그래, 각자가 마음속에 품은 별이 있을 테니까.”
“담이가 요즘 니 행동보고, 말없이 절규하는 것 같다드라, 뭉크의 그림 절규처럼.”
“그래? 참, 너 뭉크 그림 제목이 왜 절규인지 알아?”
“그림에 나오는 사람이 절규하는 모습 아니어?”
“아니야, 귀를 막은 거라더라.”
“와따, 미술 하는 나도 모르는 야그인디?”
“자기 내면에 대한 절규가 아니라, 외부 자연의 소리에 괴로워 귀를 막고 절규하는 거래.”
“하기사, 그러기도 하겄다. 자기 내면의 소리도 힘든디, 남들 말까지 들으믄 죽을 맛이제.”
“지구 도는 소리가 너무 커서 귀 막은 것은 아니고?”
“담이야, 지금은 나를 너의 여친이 아니라, 승협이 친구로 봐주믄 안 되겄냐?”
“현진아, 그 뭔 섭한 소리여?”
“나랑 승협이랑 대화 중인께, 니는 쪼까 빠져주라고.”
“나도 같이 해도 되잖애.”
“승협이랑 형이상학적 야그를 하고 있는디, 니가 형이하학적 과학을 들이밀믄, 대화가 되겄냐 안 되겄냐?”
“알았다 알았어, 오늘만이다잉?”
천영기와 이담이 여자친구를 데려다줘야 해서 버스정류소로 앞장섰다. 버스 오는 순서에 따라 타다 보니 문승협이 맨 마지막이었다. 독서실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멍하니 차창밖을 보았다.
‘혹시 이별극복공식은 없는 걸까? 만약 있다면 이별의 올바른 과정과 의식을 달달 외워서라도 1등 할 자신 있는데. 최소한 이 정도면 잊어도 된다거나 정해진 기한이 있다면, 딱 그때까지만 아파할 텐데.’
각종 가정법을 동원해 상상하였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버스기사에게 내려달라고 외쳤다. 정난희집 근처에서 한 정거장 지난 정류소였다.
망설임 없이 정난희집 앞으로 뛰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담벼락구멍에 그대로 쌓여있는 메모들을 보며 냉정한 정난희를 떠올렸다. 메모를 하나하나 꺼내면서 이제 그만해야겠다고 자포자기하였다.
메모조차 읽어주지 않은 정난희를 원망하며 독서실로 향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답답하였다. 이렇게 끝이구나라는 생각에 울컥했다.
독서실책상에 앉아 기계적으로 책을 폈다. 여자친구를 바래다주러 간 친구들은 오지 않았다. 쓸쓸해서 공부할 엄두가 안 났다. 망설임 끝에 책가방을 챙겼다.
집 가는 길 상점에서 성냥을 샀다. 한적한 골목에 쪼그려 앉아 메모들을 화형 시켰다. 서서히 타들어가는 메모를 바라보며 정난희와 이별을 승화하려 애썼다. 다 타고 남은 재처럼 미련이 흔적으로 남아 여기저기 흩어져 나뒹굴었다. 눈물이 나올까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 의외로 무덤덤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