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52)
월요일 등교버스에서 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정부가 청소년선도중점대책과 상업고등학교를 뺀 전국실업계고교무시험 추천 선발을 발표했다. 낙동강하구언공사착공뉴스는 별로 관심받지 못하였다.
심화반수업안내문이 교문을 들어선 문일고학생들을 기다렸다. 중∙하급반 학생들의 문제제기로 다시 폐지됐다. 대학진학을 포기한 학생들이 떠들어 공부가 안 된다는 불평과 학교도서관출입제한에 불만이었다. 결국 상중하 구분 없이 각반교실에서 하기로 했다. 도서관이용제한이 철폐되고, 취업활동에 필요한 경우 야자시간열외를 허용하였다. 보충수업의 진도와 난이도 맞추기는 선생들 몫이었다. 수준차 없이 통합해 가르치다 보니 중∙하급반 학생들은 위화감을 느꼈다. 상급반 학생들이 수업 과목에 따라 다른 교과를 공부했다.
전교생이 교련복차림으로 봄소풍을 갔다. 작년에 썼던 교모대신 새로 바뀐 베레모가 폼나고 멋져 보였다. 시민들이 지나가는 문일고학도호국단행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문승협은 대대장으로서 참모 4명과 맨 앞에서 3학년을 지휘하였다. 행군행렬을 유도하는 보이스카우트후배들의 교통정리에 따라 인솔했다.
모두 오락시간을 기대하였다. 학교그룹사운드 ‘윙스 4기’가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선생과 전교생이 노래와 춤으로 한바탕 어우러졌다. 뚱뚱한 한형남선생의 디스코와 고고춤에 너나없이 열광했다. 몇몇 학생들이 술을 마시다 걸려 시끄러웠으나 학교로 무사 귀환하였다.
“자, 모두 소풍 다녀오니라 수고했다.”
“선상님이 고생했제, 우리는 암시랑 안 해라우.”
“내가 뭔 고생했다냐?”
“춤추느라 고생하셨지라우, 그 배둘레햄 땜시.”
“하하하.”
“베들레헴?”
“베들레헴이 아니고요, 배 둘 레 햄, 선상님 허리에 붙어있는 그 묵직한 것이라우.”
“예끼 이노무 시끼, 선상님을 놀리믄 쓰냐?”
“하하하.”
“그래, 뭐 느그들이 즐겁다믄 됐다.”
“배둘레햄, 배둘레햄. 오뚜기, 오뚜기.”
“인자 그만해, 운동장 한 바퀴 도까?”
“아니라우.”
“느그 학교 댕김시롱 마지막소풍인디, 안 서운하냐?”
“서운하지라, 그것도 허벌라게 서운하지라우.”
“근디, 인생에는 항시 마지막이 따라 댕긴께, 너무 섭하게만 생각 말어, 알겄제?”
“예, 우리도 좋은 시절 다 가부렀네요.”
“에휴, 인자부터는 마음잡고 공부나 해야지라우.”
학창 시절 마지막소풍이 마침표를 찍었다. 한형남담임선생별명은 ‘오뚜기’에서 ‘배둘레햄 오뚜기’로 바뀌었다. 뚱뚱한 체형 때문에 걱정했던 담임선생건강염려는 날렵한 반전 춤솜씨로 말끔히 사라졌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야간자습시간에 대학진학상담이 예고되었다. 학생과 선생 모두 본격적으로 대학입학학력고사준비에 들어갔다. 시험과목이 총 14과목이었다. 남녀학생공통은 국어Ⅰ, 한문Ⅰ, 국사, 국민윤리, 정치경제, 수학Ⅰ과 영어·독일어·불어·중국어·일본어·서반아어 중 1개 선택. 남학생은 기술과 농업·공업·상업·수산업 중 1개 선택. 여학생은 가정과 가사. 인문계는 사회문화, 세계사, 국토지리, 인문지리와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 중 1개 선택. 자연계는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과 사회문화·세계사·국토지리·인문지리 중 1개 선택. 사실상 고교 전 과목이 시험범위였다. 필기 320점과 체력장 20점으로 340점 만점이었다. 이전 대학입학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폐지된 뒤 세 번째 치러질 대학입학학력고사였다. 대학에 따라 과목시험 50% 이상과 내신 30% 이상이었다. 이는 학교교육강화가 목적이었지만 친구 간 경쟁으로 몰아갔다. 대부분 졸업정원제를 염두한 대학입시제도로 인식하였다.
진학상담이 시작되고 야자시간에 교실과 교무실을 오가는 3학년학생들이 부쩍 늘었다. 쉬는 시간이면 무슨 내용으로 상담하는지 묻고 답하느라 분주했다. 별관 3학년교실에서 본관에 있는 교무실과 진학상담실까지 가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성윤아, 진학상담하러 가니?”
“잉, 승협이 니도?”
“응.”
“무슨 과 갈지는 정했냐?”
“아직 대학도 못 정했다야.”
“서울대 갈 거 아녀?”
“야, 서울대는 아무나 가냐?”
“연설하네, 니가 엄살떨믄 쓰겄냐?”
“너는 경찰대?”
“잉, 빨리 정하고 난께 맘은 편하다야.”
문승협은 진로와 꿈을 결정한 명성윤이 부러웠다. 상담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고민되었다.
상담실로 들어가니 담임선생이 책상 가득 자료를 펼쳐놓았다. 문승협을 앞자리에 앉혔다.
“아따 우리 승협이, 아이큐 좋다잉.”
“네?”
“지난번에 시험 쳤던 아이큐결과 본께 잘 나왔드라, 아이큐 148이믄 엄청 높은 거여.”
“아, 네.”
“근디, 니 수업시간에 쪼까 그렇다드만, 월말고사성적도 계속 떨어지드라?”
“수업시간에요? 성적은 시험을 못 봐서 그런 건데.”
“교과선상님들마다 요즘 니 학습태도가 이상하다고, 전반적으로 말들이 많애.”
“제 학습태도가 어떤데요?”
“음마, 니 그 불손한 태도는 뭣이냐?”
“아니, 저는 항상 똑같이 열심히 듣는데, 자꾸만 이상하다고들 하시니까요.”
“어허, 이놈 시끼 보소, 시방 선상님한테 대드냐?”
“억울해서요.”
“아무리 억울해도 그렇지, 그것이 뭔 행동이어?”
“…….”
“승협아, 내가 니를 아낀께 하는 말이어. 큰사람이 될라믄, 기분이 태도가 되어서는 안 돼야.”
문승협은 성적하락과 수업에 불성실한 이유를 묻는 담임에게 발끈하였다. 정난희와 이별 때문이라고 의식해 순간 절제를 잃었다. 나쁜 감정이 불량하게 표출되고, 타이르는 담임말에도 반항심이 들었다. ‘그놈의 큰사람 큰사람, 저는 클 만큼 컸고, 큰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아요’. 생각이 튀어나오려다 입에서 맴돌았다.
“왜 대답이 없냐, 알아들었냐?”
“네.”
“학교는 어디로 갈래, 서울대?”
“모르겠습니다.”
“과는?”
“모르겠습니다.”
“니는 아직 사춘기 아그 모냥 으째 그라냐, 그냥 니가 갖고 있는 생각을 말해봐.”
청소년기의 모른다는 말엔 여러 뜻이 있었다. 진짜 몰라서, 알면서 모른 척, 그냥 대답하기 싫다는 의미다. 권위에 노예가 된 어른들은 결코 알아챌 수 없었다.
“니 꿈이 뭔디?”
“무용이요.”
“무용? 뭔 뜬금없는 소릴 하냐?”
문승협은 불쑥 떠오른 정난희생각에 무심코 무용이라고 했다. 상담이 아니었더라면 펑펑 울뻔하였다. 담임선생반응에 괘념치 않았다. 책임져주지도 않을 거면서 꿈을 묻고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 어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해라’ 정도의 무책임한 말로 끝맺는 결말을 예상했다.
“하기사, 니 적성검사 본께 문화예술 쪽이긴 하드라, 그렇다고 막 생각하믄 안 돼야.”
“…….”
“니 인생인께 니가 알아서 해야제 누가 뭐라 하겄냐만, 느그 부모님이랑 학교서 거는 기대가 있는디.”
“네.”
“근디 말이어, 니 서울대 갈라믄, 시방멩키로 해 갖고는 택도 없다잉. 뭔 말인지 알제?”
“알겠습니다.”
“오늘은 암만해도 안 되겄다, 잘 생각해 보고, 한 달쯤 뒤에 다시 야그 해보자.”
“죄송합니다, 저의 불손한 행동을 사과드립니다.”
그다지 원치 않은 다음 상담까지 예약됐다. 오늘 진학상담에서 은근히 바랬던 운명을 바꾸는 질문과 진심 어린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작은 몸부림일지언정 뭔가 분출하였다는 생각에 마음만은 한결 가벼웠다.
최대한 몸을 낮춰 상담실을 나왔다. 아직 끝나지 않은 옆 상담실서 1반 담임선생목소리가 들렸다.
“명성윤, 니는 으째 공부가 조으냐?”
“할아버지가 좋아하셔서라우.”
“아, 그라냐?”
“근디, 저는 그런 제가 싫어라우.”
“으째서야?”
“누구를 위해서 하는 공부가 여간 힘듭디다.”
문승협은 과거 사극장면이 떠올랐다. 조선 21대 왕 영조 앞에 앉은 어린 정조. 아버지 사도세자 때문에 주위로부터 받은 상처와 억눌린 감정들을 어떻게 감당했을까. 슬기롭게 잘 극복해 내어 존경스러우면서도 많이 괴로웠을 어린 정조가 안쓰러웠다.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닮은듯한 동질감을 느꼈다. 주변사람들에게 애증의 관섭이 아닌 애정으로 관심받고 싶었다. 보살핌 받지 못해 결핍된 아버지사랑을 갈구하는 심정만큼은 유사하였다. 엉뚱하게 정조와 동일시하다니 웃겼다.
“성윤아, 공부는 다 힘든 거여. 안 힘들믄 누구나 다 공부해서 1등 하제, 안 그냐?”
“예,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겄습니다.”
“그래, 니는 긍정적이어서 맘에 들어. 그동안 쭉 잘해왔은께, 우리 끝까지 힘내자잉?”
“네.”
“선상님도 그렇고, 학교에서 니 실력을 무자게 자랑스러워한께, 그 점을 항시 잊지 말고.”
1반 담임선생이 피그말리온효과를 이용했다. 채찍대신 칭찬과 기대를 적절히 주입하였다. 명성윤은 교육받는입장에서 충실히 따랐다.
피그말리온효과는 키프로스의 조각가이름에서 따왔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충족시키려 노력하게 되고 잘하게 되는 현상이다.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에 학생성적이 향상되는 교육심리현상이며, 언젠가 그리스신화에서 본 적이 있었다.
문승협이 은연중 엿듣다가 교무실 열리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김생출선생이 오라고 손짓했다.
“거기서 뭐 해?”
“진학상담 끝나서 교실에 가려고요.”
“시간 있어?”
“지금 야자시간입니다.”
“담임이 뭐라 셔?”
“그 그냥 그렇죠 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칭찬하시드냐?”
문승협은 방금 전 생각을 들킨 것 같아 흠칫하였다. 김생출선생이 문승협어깨에 손을 올리며 걷자고 했다. 둘은 터벅터벅 별관 3학년교실 쪽으로 향하였다.
“선생님, 고래가 칭찬을 알까요?”
“아니, 고래는 칭찬을 몰라. 만약에 알았다면 춤추다 지쳐서 죽었을 거야, 안 그래?”
“네?”
“돌고래쇼를 보면 알잖아.”
“아 네.”
“고래는 춤추는 것이 아니고, 먹이를 갈구하는 생존의 몸부림이지. 인간들이 그렇게 보는 거야.”
“그럼 왜 그런 말이 생겼을까요?”
“칭찬을 통해 복종을 요구하는 거지.”
“복종이요?”
“인간이 칭찬을 좋아하는 건, 칭찬을 통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채우기 때문이거든.”
“선생님, 꿈의 의미가 뭐예요?”
“글쎄다, 어려운 질문이네. 음, 무언가 하나를 잃는다 해도 이루고 싶은 것 아닐까?”
“꿈을 이루는 대신이요?”
“응, 그러니 꿈을 꾸었으면 노력으로 갚아야 해, 노력이 싫으면 꿈도 꾸지 말아야겠지?”
“꿈을 꼭 가져야 하는 걸까요?”
“대부분 꿈 없이 살아, 평생 꿈 찾기만 하는 사람도 많고. 그래도 꿈을 갖고 사는 것이 보람 있지 않을까?”
“어떤 꿈을 가져야 할까요?”
“꿈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만 있진 않아, 말하기에 부끄러운 꿈도 있어. 꿈은 다양한 것 중에 하나고, 인생에서 꼭 이루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 또 여러 개 일수도 있지. 꿈은 그 자체로써 소중하다는 뜻이야.”
“선생님말씀 듣고 나니, 머리가 더 복잡해졌어요.”
“그래, 그래서 꿈을 찾기가 힘든 거야.”
“하하, 결론이 그럴싸한데요?”
“너한테 해줄 건 없고, 응원만큼은 열심히 해줄게.”
“얼마 전에 하신 말씀처럼요?”
“허허, 기억하고 있구나?”
김생출선생이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만큼 아이들에게 많은 성원과 지지가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실천하는 어른들을 볼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었다.
“저기 승협아, 혹시 네가 지금 꿈을 찾고 있다면, 내가 충고하나 해도 될까?”
“네, 뭔데요?”
“어떤 직업을 갖느냐 보다, 어떤 인생을 살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해 봐. 예를 들자면, 누구 앞에서도 억지웃음을 짓지 않는 사람이라든가.”
“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꿈 찾기가.”
“어렵다고요?”
김생출선생이 문승협머리를 쓰다듬고 교문 쪽으로 갔다. 문승협은 퇴근하는 김생출선생뒷모습을 보며 되뇌었다. ‘누구 앞에서도 억지로 웃지 않을 수 있는 사람’.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몰라 답답하였다.
언제까질지 모를 오리무중 문승협의 꿈 찾기는 계속 진행형이었다. 진학상담은 담임성향에 따라 일주일에서 이 주간 이어졌다. 끝날 때까지 고3학생들이 상담실문지방을 부지런히 넘나들었다.
문교부가 성교육교재를 초∙중∙고에 보급하고 교육지침을 하달했다. 문일고는 김생출선생에게 맡겨졌다. 3학년들이 강당으로 어슬렁어슬렁 모여들었다.
“아따, 대입시험공부 땜에 바쁜디, 뭔 성교육이어?”
“그란께 나는 단어장을 챙겨 왔어, 단어라도 외울라고.”
“우리 나이믄 알만큼 안디, 뭘 갈차줄라고 그라까?”
“긍께 말이어, 시간낭비제.”
“아야 또 아냐, 야한 포르노라도 한편 보여줄란가?”
“그라믄 또 생각이 다르제잉, 큭큭큭.”
“자, 모두 조용히 하고, 선생님한테 집중해.”
“선상님, 우리는 시방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디, 꼭 성교육을 해야 쓰까요?”
“너희들 대학입시공부도 중요한데, 오늘이 어쩌면 너희들 운명을 바꾸는 날일수도 있다.”
“성교육에 무슨 운명씩이나요, 그냥 야한 거시기나 보여주고 끝내믄 안 되까라우?”
“만약, 너희들이 욕구에 못 이겨 사랑 없이 성관계를 했는데, 아이가 생기면 어쩔 태냐?”
“떼믄 되지라, 돈 주믄 다 해준다드만.”
“하하하.”
“낙태된 너의 아이와 그 여자에게 남은 상처는?”
김생출선생이 정색하며 외쳤다. 장내에 퍼진 학생들 웃음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인간은 인간을 죽일 권리가 없으며, 뱃속에 잉태된 아기도 분명히 인간이다.”
“그라믄 까짓것 그냥 데꼬 살믄 되지라.”
“사랑하지 않는 여자랑 평생 살 수 있을까?”
“우리 엄씨압씨도 사랑 없이 잘만 살던디요?”
“맞어, 사랑이 뭐 중하다요, 일단 같이 살다가 사랑하는 여자랑 또 살믄 되지라.”
“하하하.”
“허허, 내가 죽일 놈이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윤리와 도덕을 가르쳤구나?”
“아그들아, 인자 그만해, 말하지 마 간디 성났다잉.”
학생들이 허튼소리를 자성하며 소곤거렸다. 김생출선생의 실망 섞인 근엄한 한탄에 장내가 숙연해졌다. 다들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학생들을 교육에 집중시키려는 김생출선생의도가 먹혔다.
김생출선생이 성관계의 목적과 책임에 대해 힘주어 말하였다. 남녀 간 생물학적 구조와 차이 등을 알려줬다. 남녀성문제로 인한 사회적 갈등과 현상으로 이어갔다.
대부분 학생들이 관심 밖이라 흘려들었다. 문승협은 한참 듣다 보니 중학교 때 서수연선생의 성교육내용과 비슷했다. 그땐 안 들리던 것이 새롭게 와닿았다.
김생출선생이 마지막에 질의응답시간을 가졌다. 장기원이 자위행위가 범죄냐며 물었다. 김생출선생이 과거 범죄 시 한 역사를 장시간 할애해 설명하였다. 모든 학생들이 사뭇 진지하게 경청했다.
자위행위는 18세기 영국의 보수적 빅토리아시대에 큰 죄였다. 중세부터 근세까지 신의섭리에 어긋나는 행위이자, 악마의 속삭임에 의한 손장난이라고 비난받았다. 기독교가 유럽의 종교로 자리 잡은 이후 성을 통제하는 미시권력이 되었다. 오직 쾌락만을 추구한 죄악이고 역겨운 범죄라며 대못을 박았다. 이성의 빛으로 가득 찬 계몽주의시대에도 자위혐오는 거셌다. 위대한 철학자 ‘루소’도 그의 책 ‘에밀’과 ‘고백론’에서 정신적 강간이라고 정의하였다. 자위방지를 위한 정조대가 끊임없이 개발된 것도 이 시기였다. 코르셋모양으로 성기를 조여주는 게 있는가 하면, 날카로운 칼날이 둘러싸 음탕한 생각을 원천 봉쇄하는 정조대까지 등장했다. 다행히 생물학자 ‘해브록엘리스’가 나타나 일련의 저주를 걷어냈다. ‘건강한 개인이 자위행위를 해도 해로운 결과가 반드시 뒤따르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1948년에 미국동물학자 ‘알프레드킨제이’가 현대인의 성생활을 조명한 ‘킨제이보고서’를 발표했다. 남성과 여성에게 본능적인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분석하였다. 미국의학협회가 자위를 정상적 행위로 인정함에 따라, 로마제국멸망 이후 1,700년 동안 눈치 봐왔던 자위행위가 1972년에서야 해방된 셈이다.
“그라믄 죄책감을 안 갖어도 되겄네요잉?”
“응, 그래도 된다. 하물며 영유아도 자위행위를 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한다.”
“왐마, 인자 장기원이는 밤낮없이 딸딸이 치겄는디?”
“하하하.”
“나중에 국제 자위의 날이 제정될지도 모를 일이야.”
“우리가 성스러운 성생활을 너무 죄악시했는 갑써.”
“맞어, 아무래도 성관계 하믄, 쪼까 음탕하고 음습하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께.”
“먼 미래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성기구도 등장할 거야, 내가 장담한다.”
“근디 선상님, 자위행위하믄 안 좋다던디요?”
“나도 들은 적 있어라우. 자위를 하믄 키가 안 큰다 조루가 된다, 뭐 그런 말이 있든디요?”
“내가 의사한테 물어봤는데, 전혀 상관없다고 했다.”
“그라믄, 장점은 뭐가 있을까라우?”
“음, 성병에 걸릴 염려가 없는 것도 장점이겠지?”
“그라믄 횟수는요?”
“일주일에 한 번이믄 되까?”
“한번 갖고 되겄냐, 두어 번은 해야제.”
“아야, 수업시간에도 이러코롬 질문하고 답 좀 해라야.”
“허허, 그것도 여기 오기 전에 의사선생에게 물어봤다.”
“몇 번이라고 합디까?”
“정답이 없대, 개인차가 있어서 자위 횟수를 정의하기 어렵다더라. 일상생활에 무리가 없고, 피곤하지 않은 정도가 가장 적정한 수준이래. 물론, 자위를 하지 않는 사람도 지극히 정상이라고 했다.”
“자위도 중독 되까요?”
“너처럼 자위중독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단순히 자주 한다고 해서 중독으로 보기는 어렵대. 다만, 일상적인 일을 못한다면 중독이라고 했어.”
“허참, 애매하그만잉?”
“본인이 자제할 수 있을 정도면 중독으로 볼 수 없고, 매일 자위해도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학생들이 평소 고민들을 거침없이 질문하며 적극 호응했다. 김생출선생이 의사전언으로 답하였음에도, 학생들은 대 만족이었다. 문승협은 문득 깨달았다. ‘운명을 바꾼 질문과 진심 어린 답이 달리 있는 게 아니라 이런 게 아닐까’. 분명 학생들 인생에 단비임은 확실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당신부터 변화된 삶을 살아라’. ‘말하지 마 간디’별명을 가진 김생출선생의 교육자로서 삶에 간디의 명언이 스며있었다. 적어도 문일고3학년학생들만큼은 ‘마하트마 간디’보다 ‘말하지 마 간디’를 더 존경하였다. 사실 문교부가 보급한 성교육교재는 말 그대로 허접한 수박 겉핥기에 무용지물이었다.
난데없는 워싱턴포스트뉴스에 한국사회가 술렁였다. 미군이 한국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하고, 휴전선에 핵지뢰를 설치했다는 보도였다.
어린이날 오후 2시 3분, 민방위본부가 수도권과 강원지역에 공중경계경보를 발령한 지 4분 만에 해제하였다. 중공민항여객기가 납치되어 강원도춘천비행장에 불시착했다. TV방송사와 라디오들이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실제상황이라며 속보를 내보냈다. 신문사들도 호외를 뿌렸다. 대한민국과 미수교적성국인 중화인민공화국비행기가 북쪽에서 남한으로 넘어오는 긴급상황이었다. 초계 중이던 F-5 전투기 2대가 춘천시내 위로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다들 전쟁이 터진 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 달여 전 이웅평의 미그기귀순을 경험한 터라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스턴항공 855편이 추락할뻔한 소식도 있었다. 바하마해상가까이 다다라 악천후에 엔진고장이 났으나, 다행히 파일럿이 엔진시동에 성공하였다.
재무부가 금융감독위원회를 설치해 은행감독원을 한국은행과 분리한다고 밝혔다.
대입학력고사시험이 200일 앞으로 다가왔다. 300일 작전을 세웠던 고3학생들이 작심삼일을 후회하며 입시스트레스에 고통받았다. 문승협은 매스껍고 어지러우면서 심한 머리통증에 코피까지 흘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편치 않은 몸을 버티고 버티다 새벽녘 독서실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엊그제 막내여동생 문윤아표정이 생각나 피식 웃었다. 아직 국민학생이라 어린이날에 조그만 지갑을 선물하였더니, 지폐를 넣어주는 거라며 입을 샐쭉댔다. 큰맘 먹고 아낀 용돈으로 사서 건넸다가 면박만당했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신기하면서도 기가 찼다. 그나마 최근 즐거운 기억이었다.
무심코 하늘을 보았다.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시간은 가버린 지 오래였다. 밝은 별 열한 개로 이뤄진 오리온별자리가 눈에 띄었다. 새벽에 보이면 여름이 온다는 신호고, 저녁에 떠있으면 겨울과 폭풍이 다가오는 징조였다. 북동쪽 ‘베텔기우스라’는 변광성황적색별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별자리를 살피다 아르테미스마음을 훔친 첫사랑 오리온신화가 떠올랐다.
‘아폴론’이 아르테미스에게 경고하였다. ‘오리온은 유부남이고 한 섬의 공주를 강간한 전과자야’. 그럼에도 아르테미스가 순결의 여신을 포기할 만큼 사랑했으나, 오리온은 새벽의 여신 ‘에오스’와 몰래 떠나버렸다. 아폴론이 실연의 아픔에 빠진 아르테미스에게 활쏘기시합을 제안하였다. 아르테미스가 바다 멀리 보이는 까만 점을 부표로 여기고 시위를 놓았다. 곧이어 화살을 맞은 오리온이 떠내려 왔다. 그녀가 쏜 과녁은 오리온의 심장이었다. 죽어가면서 아르테미스마음을 알게 된 오리온이 고백했다. ‘밤하늘의 별이 되어 당신 곁에 영원히 머물고 싶소’. 그때 에오스가 나타났다. ‘실은 오리온이 진심으로 아르테미스 당신을 사랑해서 거짓으로 떠났어요’. 아르테미스가 슬퍼하며 오리온의 소원대로 별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문승협은 아르테미스의 비극적 사랑에 눈물을 글썽였다. 오보에연주기악곡이 상상 속에서 펼쳐졌다. ‘나의 환상 속에서’라는 의미의 ‘넬라 판타지아’였다. 미래 언젠가 인간의 기술로 달탐사를 한다면, 프로젝트를 ‘아르테미스’로 정하고, 달착륙선을 ‘오리온’이라 명명하기를 바랐다. 오리온과 아르테미스가 만나는 로맨틱한 날이 꼭 오길 두 손 모아 빌었다. 결국 기승전 정난희로 파생되어 갔다. ‘아르테미스를 사랑하여 떠난 오리온처럼, 나도 정난희를 사랑해서 떠나야 하나’. 딜레마에 빠진 사이 오리온이 사라지는 시각이었다. 여명을 짊어지고 집에 들어가 두 시간여 눈을 붙였다.
잠이 부족해 등교버스에서 졸다가 학교정류소를 놓칠뻔하였다. 교문을 통과할 때도 비몽사몽이었다. 교실에 들어서니 여기저기 노래연습하느라 바빴다. 첫 수업이 음악실기시험이었다. 시험 기준과 배점이 까다로운 데다 내신점수가 있어 중요했다. 실기곡목은 ‘오 솔레미오’와 ‘산타루치아’였다. 음정과 박자에 맞춰 노래를 잘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 원어로 두 곡을 다 불러야 최고점에 가까울 수 있었다. 한국어번역 한 곡만 해도 상관없지만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웠다. 거의 모두 번역곡을 준비하였다.
아침조회가 끝나고 음악실로 갔다. 손명옥선생이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다. 실기시험기준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공정성을 기한다며 순서를 자율에 맡겼다. 먼저 치른 학생에게 심리적 보상차원의 점수를 고려하겠다고 하자, 김용남이 제일 먼저 손들었다. 김영후에 이어 문승협까지 10여 명이 잇따랐다. 나머지는 반장 유호창주도하에 학급번호순서로 정하였다.
김용남이 피아노반주에 맞춰 번역가사로 산타루치아를 불렀다. 이어서 원어로 오 솔레미오를 열창했다. 반아이들이 유심히 지켜보았다. 오 솔레미오와 산타루치아는 이탈리아 칸초네의 나폴리민요였다. 각각 ‘오 나의 태양’과 ‘성녀루치아’로 번역되었다.
김영후는 번역가사로 두 곡을 불렀다. 부르는 중간 멈칫해 아쉬웠으나 대체로 무난히 마무리하였다. 문승협 앞순서 아이들 대부분 산타루치아 번역곡을 골라 완성도높이는 방법을 택했다. 문승협 차례가 왔다.
“얘들아, 지금처럼 부르면 안 돼. 승협이가 시범 보일 테니까, 수업시간에 배운 걸 잘 상기해, 알겠지?”
“네.”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어.”
“잠깐만, 승협이 목소리 왜 그래?”
“잠을 잘못 자서 그런지, 목이 좀 잠겼어요.”
“그럼 목 좀 풀어, 너는 원어로 불러야 되는 거 아니야?”
“아, 가사가 좀 헷갈려서요.”
“그러면 보고 불러, 대신에 원어와 번역 가사까지 해서 각 1절만 네 번 불러.”
“창공에 빛난 별 물 위에 어리어,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누나, 아름다운 동산 행복의 나폴리, 산천과 초목들 기다리누나, 내 배는 살같이 바다를 지난다, 산타 루치아 산타 루치아. Sul mare luccica L'astro d'argento, Placida e' l'onda Prospero e' il vento~Venite all'agile Barchetta mia, Santa Lucia Santa Lucia. 오 맑은 햇빛 너 참 아름답다, 폭풍우 지난 후 너 더욱 찬란해, 시원한 바람 솔 솔 불어올 때, 하늘에 밝은 해는 비치 인다, 나의 몸에는 사랑스런 오 나의 태양 비치 인다, 오 나의 나의 태양 찬란하게 비치 인다, 태양 나의 태양 너의 얼굴에 반짝인다, 너의 얼굴에 반짝인다. Che bella cosa e' na jurnata 'e sole, n'aria serena doppo na tempesta, Pe' ll'aria fresca pare già na festa, Che bella cosa e' na jurnata 'e sole, Ma n'atu sole cchiù bello oje ne', 'O sole mio sta 'nfronte a te, 'O sole 'o sole mio sta 'nfronte a te, sta 'nfronte a te.”
얼핏 보면 특혜 같았지만, 문승협노래실력을 학교에서 인정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누가 토 달기보단 문승협처럼 불러야 한다는 교범쯤으로 생각했다.
음악선생이 한 명 한 명 피아노반주를 해주느라 꽤 시간이 걸렸다. 시간관계상 노래 부르는 중간에 끊고 진행을 빨리하였다. 불안해하는 학생들에게 불이익이 없도록 공평히 점수를 줄 거라며 안심시켰다.
음악시험이 끝나고 교실로 가는데, 3학년과 선도부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학교선후배 사이에 학년배지가 권력이었으나, 교복자율화로 사라지면서 1학년후배가 3학년선배를 알아보지 못하고 폭행했다. 3학년들이 선도부까지 동원하여 대대적인 후배교육에 나섰다. 학교에서부터 인지도가 권력인 시대가 도래하였다.
종례시간에 교무실발 국방부브리핑뉴스로 교내가 어수선했다. 북한군대위가 DMZ를 통해 귀순하고, 중공민항기납치사건의 중국협상단 33명이 방한하였다.
“염병, 불안해서 어디 살겄나 이거.”
“긍께 말이어, 세상말세다야.”
“이러다 진짜 전쟁 나는 거 아니어? 북한괴뢰군장교가 넘어오질 않나, 중공기가 납치돼서 오질 않나.”
다음날, 중국대표단과 한국정부가 논의에 들어갔다. 다행히 하루 만에 여객기납치범 6인을 제외한 승객과 기체를 조기송환하기로 양국이 합의했다.
이틀 후, 피랍항공기에 탑승한 중국 승객과 승무원 95명이 중국대표단 22명과 함께 출국하였다.
“납치범들만 냉기고 가불믄, 나중에 으짤라고 그라까?”
“냅둬 부러, 즈그 알아서 하게.”
“우리나라에서 풀려나믄 큰일인께 그라제.”
“중국대표 몇 명 남은 게 아마 납치범 때문일 거야.”
어린이날 요란했던 중공민항기납치사건실체가 알려졌다. 중화인민공화국민항총국소속여객기가 랴오닝성선양공항을 출발하여 상하이홍차오국제공항으로 비행 중에 일어났다. 여성을 포함한 6명의 비행기납치범들이 중화민국대만으로 망명을 꿈꾸며, 권총을 이용해 조종실문을 부수고 들어가 기장에게 협박하였다. 하이재킹 당한 기장이 북한으로 기수를 돌려 평양상공에서 기체를 선회시켰다. 여기가 서울이라며 착륙하자고 속이려 했지만, 알아챈 납치범들에 의해 대한민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때부터 북한상공에서 오락가락하는 수상한 비행기가 대한민국레이더에 탐지됐다. 휴전선에 접근해 오자, F-5와 F-4 전투기를 보내 위협비행을 하며 청주공항으로 유도하였다. 연료가 바닥난 중공민항기가 통신을 거부한 채 주한미육군항공기지에 착륙했다. 활주로를 50여 미터나 지나 가까스로 멈췄을 만큼 위험한 불시착이었다. 주한미육군항공기지가 사실상 미국땅이다 보니, 춘천관할 한국군군단장이 들어 가려다 위병소에서 제지당하는 수모를 겼었다.
정부대변인이 중국 측 방한요청을 수락한 공식발표에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공식국명을 처음 호칭하였다. 1953년 7월 6.25 전쟁을 휴전한 이래, 한중양국 최초의 공식외교접촉이었다. 대한민국은 중화민국대만을 중국대륙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은 북한을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로 간주한 상태였다. 납치범들을 대한민국법에 따라 처벌키로 합의했다. 국내법과 하이재킹방지를 위한 ‘헤이그협약’에 따라 재판받은 후, 인도적 차원에서 중화민국대만으로 추방이 예상되었다. 탑승자 중 한 명이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방최고기밀을 취급한 거물학자라고 세간에 돌았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아야, 느그 프로축구 슈퍼리그개막전 봤냐?”
“아, 어제 서울운동장에서 개최한 거?”
“오메오메, 니는 참말로 신간 편하다잉, 고3이 그런 걸 볼 시간이 어딨대?”
“염병, 고3은 사람 아니어?”
“지랄, 어버이날은 안 챙기믄서 축구나 챙기는 놈이.”
“승협이 니도 축구 좋아하잖애?”
“응, 구기종목은 다 좋아해.”
“그나저나, 난희랑은 으짤래?”
“왜, 아폴론이 아르테미스에게 활쏘기를 제안한 것처럼, 너도 따라 하는 거야?”
“뭔 소리대?”
“내가 정난희심장에 활을 쏴서 죽여야 되냐고? 아니면, 사랑하니까 멀리 떠나야 하나?”
“와따, 으째 뜬금없이 성내고 난리냐?”
“시끄러워 인마, 이제 학력고사가 200일도 안 남았어, 얼른 들어가서 공부나 하자.”
“나는 영어 듣기 평가나 준비해야겄다.”
문승협은 정난희와 어찌할지 갈팡질팡하며 신경이 예민하였다. 가뜩이나 이별이야기를 금기해 달라 부탁했음에도 또 언급한 천영기에게 버럭 하였다. 이담은 모른 척 넘어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