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54)
문승협은 정난희를 만난 이후 180도 달라졌다. 수업시간과 독서실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선생과 친구를 대하는 태도와 표정도 예전으로 돌아갔다.
현충일 다음날 추가 진학상담이 진행되었다. 문승협은 담임선생에게 사관학교지원을 권유받았다. 대입학력고사까지 시간이 있으니 고민해 보기로 했다.
김생출선생이 상담을 마치고 나온 문승협을 불러 책 한 권을 선물하였다.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얼마 전 ‘전태일 기념관건립위원회’가 출간했다. 청년노동자 전태일열사의 삶과 투쟁이야기였다. 군홧발로 광주를 짓밟은 전두환군부독재정권의 폭압정치가 계속되던 때라, 책제목에 ‘전태일’ 이름은 없었다.
서울청계천 6가에서 동대문운동장 쪽으로 600m가량 늘어선 3층 건물이 평화시장이었다. 이전엔 어설픈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은 무허가 판자촌이었고, 소규모 피복공장들이 수없이 많았다. 피복공장들이 철거됐다가 평화시장건물이 생기고 다시 들어섰다. 건물은 수백 개의 작업장과 개인점포로 나뉘었다. 어느 날 미싱사여성노동자가 폐병으로 피를 토해 해고당하였다. 이를 목격한 전태일열사가 동료재단사들을 설득해서 ‘바보회‘를 결성했다. 하루 15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는 평화시장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려 힘을 모았다. 근로기준법에 의거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받고자 노력하였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30분, 5백여 명 노동자들이 경찰들의 삼엄한 경비와 몽둥이에 밀리면서 왔다 갔다 했다. 10여분 후 전태일열사가 한 되 가량의 석유를 온몸에 끼얹고 불을 붙였다. 화염에 휩싸여 국민은행 앞길로 달려 나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 말라’.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참혹한 몰골로 마지막 남은 생명의 힘을 다해 소리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친구 두 명과 함께 인근 국립의료원으로 옮겨졌다. 전태일열사의 어머니가 ‘내 아들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장례를 치르지 않겠다’며 아들시신인수를 거부하였다. ‘주일휴가유급휴일제실시, 법으로 월급공임금인상, 8시간 노동 초과근로수당제, 정규임금인상, 정기적 건강진단 실시, 여성생리휴가, 이중다락방철폐, 노조결성지원’등 8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문승협은 짬을 내 책을 훑어봤다. 처참한 노동현실을 통감했다. 노동의 가치를 이해하고 인간적인 노동환경을 고민하는 노동인권교육이 절실해 보였다. 전태일열사의 삶과 정신이 궁금하였다.
방과 후 독서실에 가서 기간만료된 분기권 대신 월권을 끊었다. 모아뒀다 쓰고 남은 용돈이 부족해서였다. 천영기와 이담도 문승협을 따라 월권으로 바꿨다.
김영삼이 23일 만에 단식농성을 중단하고 입장을 밝혔다. ‘국민 여러분, 나는 부끄럽게 살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보다 서서 싸우다 죽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전날 김수환추기경과 재야원로인사들이 찾아가 간곡히 설득한 결과였다. 그간 함석헌, 윤보선, 강원룡, 문익환 등이 병실을 수시로 방문했었다. 김영삼은 영양실조와 탈수증세에 병원진료를 받았다.
한국은행이 새로운 5천 원과 만원 권 지폐발행을 개시하였다. 일원·오원·십 원·오십 원·백 원, 신규주화들도 유통되었다. 작년에 기존 500원권 지폐를 대체해 출시한 500원 동전의 디자인양식과 동일했다.
한국대표팀이 6월 2일 멕시코시티 에스타디오아스테카에서 개최된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를 주름잡았다. 8강전서 우루과이를 연장 끝 2-1로 꺾었다. 국민들이 잠시 시름을 잊고 열광하였다. 브라질과 4강전에 이어 폴란드와 3∙4위 결정전서 1-2로 아쉽게 졌으나, 국민염원을 담은 응원열기로 한반도가 뜰썩였다. 대한국민모두가 뛰는 바람에 자전축이 움직이고, 함께 지른 함성이 달까지 들려 토끼가 놀랐다는 과장도 나왔다.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한 주였다. 세계청소년축구대회서 4위를 달성한 쾌거로 한국축구역사에 대기록을 남겼다. 마지막 축구경기 날 미국 NASA가 우주왕복선 ‘챌린저’호를 처음발사했다.
문일고는 학기 초부터 교련검열을 대비하였다. 6월 본격채비에 들어가면서 수업시간을 통합했다. 매일같이 학생들을 닦달하며 숙련시켰다. 며칠째 뙤약볕서 강행된 사열준비로 학생들 몇몇이 쓰러졌다. 일사병이 염려되면 아침조회도 실내에서 하였지만 무시됐다. 교련수업이 학생들을 죽인다는 비판에도 정부검열을 피할 순 없었다. 더욱이 다음 주에 검열인지라 학생들 건강은 아랑곳없었다. 토요일수업마저 전폐하며 실제처럼 재현했다. 하필 연대장 강원종이 다리를 다쳤다. 3학년대대장 문승협이 문일고학도호국단 연대장을 승계하고, 3학년대대장은 대대참모 고승범이 맡았다. 교련주임선생이 전교생을 통솔해야 하는 문승협목청에 신경 쓰며 별도 훈련시켰다. 문승협은 땡볕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우렁찬구령을 반복하였다. 목소리보다 잦은 어지럼증이 더 걱정이었다. 전체 사열연습을 마칠 때는 선생들도 학생들도 모두 파김치가 됐다.
문승협은 지친 몰골로 독서실에 갔다. 친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끌고 나갔다. 영화‘람보’가 개봉했다며 보러 가자고 꼬드겼다. 문승협은 집에서 용돈을 주지 않아 여윳돈이 없어 망설였다. 이담과 천영기가 낌새 채고 반반 부담해 보여주었다.
람보는 ‘실베스터스탤론’ 주연의 살아있는 액션전쟁영화였다. 베트남전쟁귀환병 람보가 산간마을에 사는 옛날전우를 찾아갔다가 전쟁트라우마로 적에게 쫓겼다. 월남전서 익힌 게릴라전술과 전투본능으로 살인무기를 총동원해 자비 없이 대적하였다. 아슬하고 짜릿한 과정들이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했다.
문승협은 영화를 보고 나니 노곤하였다. 저녁 먹고 독서실로 갔으나, 졸음과의 전쟁이 기다렸다. 졸음이 문승협을 제압하는데 굳이 전략전술이 필요 없었다. 덕분에 다음날 일요일은 종일 공부에 몰입할 수 있었다.
월요일 아침조회시간, 담임선생이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김영후·유호창·문승협·김용남·조운대를 호명했다. 다짜고짜 당장 상담실로 가라고 하였다.
상담실에 공부깨나 한다는 3학년들이 영문을 모른 채 모여들었다. 잠시 후 교무주임선생이 등장했다. 다름 아닌 사관학교시험안내였다. 자의라면서도 육군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해군사관학교에 각각 5명 이상 응시하라는 학교방침이었다. 전교 50등까지 대상으로 학교전통이었다. 애초 사관학교를 목표한 학생들 표정은 밝았지만, 딱히 의사가 없는 학생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육군사관학교 장기원과 5명, 해군사관학교 조운대와 6명, 공군사관학교 이민상과 2명이 신청했다. 교무주임선생이 뚜렷한 계획이 있는 학생은 가도 좋다고 하였다. 일부 학생과 경찰대학에 뜻을 둔 명성윤이 빠져나가고 10여 명이 남았다. 공군사관학교에 지원하라는 설득작업이 진행됐다. 20여분쯤 지나 문승협과 장홍기가 손들면서 마무리되었다.
문승협처럼 ‘사관과 신사’ 영화를 본 후 사관생도를 꿈꾸는 학생들이 있었다. OST‘Up Where We Belong’을 듣기만 해도, 전투기가 발진해 석양을 배경으로 활공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하얀 해군제복을 입고 오토바이를 탄 리처드기어의 멋진 모습이 기억에 생생했다. 물론 조운대와 장기원처럼 사명감으로 사관학교에 진심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재미 삼아 시험만 보겠다는 장홍기 같은 친구도 있었다.
문승협이 교실에 들어서자, 김용남이 물었다.
“조운대는 원래 해사에 갈라고 했고, 니는 으쨌냐?”
“공사 한번 봐보려고.”
“뜬금없이야?”
“뭐 어때, 공군사관생도, 멋있어 보이잖아.”
“아야, 제복은 해군사관학교제.”
“승협이믄 몰라도, 운대 니는 키가 째깐해갖고, 해사제복을 입어도 영 볼품없을 것이다.”
“연설하네, 니가 봤냐, 봤어?”
“어허, 몽땅연필 조운대씨, 그걸 꼭 봐야 아까?”
“긍께 말이어, 사관과 신사 영화에 나온 아그들 본께는, 전부다 키 크고 늘씬하드만.”
“용남이 넌 어디 갈 거야?”
“나는 외대 영문과 갈라고.”
“영후랑 호창이 느그는?”
“나랑 호창이는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갈라고.”
“어디, 서울대냐 고대냐 연대냐?”
“모르겄다, 점수 맞춰 가야제, 방법 있냐.”
“임창열이는 서울대 건축학과에 간다드라?”
“걔는 뭐 이과에서 1등인께, 아마 가고도 남을 것이다.”
“와따 가슴 벌렁인 거, 엊그제 고등학교입학했는디, 벌써 이런 때가 와부렀다잉.”
이를 시작으로 누가 어느 학교 무슨 과에 지원한다더라는 소식이 삽시간에 퍼졌다. 사관학교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수업시간에도 교무실을 바삐 오갔다.
“승협이 니는 공사 쓴다매?”
“응, 기원이 넌 육사지?”
“잉, 나는 폴쎄 육사로 정했제.”
“알아, 너 고2 수학여행 때 설악산돌탑에 빌었잖아.”
“음마, 그걸 다 기억한다잉.”
“너는 합격할 거다, 육사만 보고 열심히 해왔으니까.”
“내가 붙으믄 니는 당연히 붙겄제 뭐.”
“난 별로 자신 없어, 공부도 하지 못했고.”
“지랄, 엄살떨기는. 나한테 선배들이 물려준 문제집 있는디, 으째, 빌려주까?”
“나중에, 나중에 필요하면 말할게.”
“나는 원서 쓰는디도 허벌라게 떨린다야.”
“다 마찬가지일 거야, 나도 그래.”
“아따 참말로, 사관학교입학을 시험 말고 제비 뽑기로 하믄 좋을 텐디 말이어.”
“운대야, 공정공평하게 시험으로 해야제 뭔 소리냐, 니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디?”
“아야,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인 민주주의가 바로 제비뽑기여, 뭘 알고나 떠들어라잉.”
“하하, 제우스가 세상의 지배권력을 나눌 때처럼?”
제우스가 예언에 따라 아버지 크로노스를 제거한 뒤, 지배자가 되도록 도운 형제들과 제비뽑기로 정하였다. 제우스는 하늘, 포세이돈은 바다, 하데스는 지하세계로 권력을 삼등분했다. 실력과 조건이 비슷하다면 제비뽑기가 가장 공정한 방법이라는 그리스신화였다.
“근디야, 사관학교시험 친디 뭔 신원조회도 한다드라?”
“하믄 으짠대, 나중에 졸업해서 장교 되믄 군사기밀을 다룰 것인디, 당연한 거 아니어?”
“그거 혹시, 연좌제 땜시 그런 건 아니겄제?”
“염병, 우리가 군인이제 우리 친척이 군인이냐?”
“그라제잉, 친인척은 우리하고 암시랑 관계없은께.”
“나라에서 어련히 알아서 할 거여. 그나저나, 시험 칠라믄 한 달 10여 일 남았는디, 다들 열심히 하자.”
육∙해∙공군사관학교 1차 시험일자는 공히 7월 30일 토요일이었다. 문일고는 인솔선생과 지원학생들의 경비를 모두 지원하기로 하였다. 시험준비와 공부분위기조성 등 물심양면 배려했다.
문승협은 신기하게도 정난희와 재회 후 아픈 증상이 완화됐다. 공부에도 집중이 잘되었다.
문교부가 교사들의 학생체벌금지방침을 각급학교에 시달하였다. 학생들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콧방귀 뀌었다. 몽둥이와 손발로 때리는 폭력을 사랑의 매로 아름답게 포장해 버린 현실에서, 선생들이 쉽게 바뀌리라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직접폭력대신 얼차려나 교묘한 체벌로 괴롭힐게 뻔하다는 것이, 대부분 학생들 인식이었다. 전국 616개 초∙중∙고에 생활지도전담교감을 신설하란 지침에는 바짝 긴장했다. 지금보다 더욱 학생들 일상을 옥죄며 간섭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6월 마지막 날 밤 10시 15분, KBS1에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전파를 탔다.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 타이틀로 이산가족 찾기를 전국에 생중계하였다. 방영되자마자 대한민국삼천리방방곡곡이 눈물과 감동의 수렁에 빠졌다. 대한민국방송역사상 최초로 기록될 만큼 국민들의 주목을 끌었다. 상상을 초월한 이산가족의 고통과 절절함에 공감하며 호응했다. 첫날부터 폭발적 반응에 당초 예정시간을 훨씬 넘겨 연장방송하였다. 한국전쟁 등 갖가지 역사적 사건으로 이산가족문제가 생겨났음에도, 국가와 언론이 문제해결에 적극적 역할수행을 하지 않고 오랜 시간 방치한 결과였다.
김영삼이 단식투쟁후유증치료뒤 서울대병원서 퇴원했다. 전두환정권은 미국과 유럽에 인권유린독재이미지로 각인됐다. 우리 사회의 병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군부독재정권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힌 민주화열망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촉매제역할을 하고, 민주화를 향한 대중의 잠자던 저항의식을 깨우는데 일조하였다. 민주화 투쟁에 불을 붙여 직선제개헌에 한 발짝 다가갔다. 안기부직원들이 단식을 저지하려 병실 앞에서 불고기를 굽는 유치한 짓까지 하고, 김수환추기경이 ‘나이는 DJ보다 젊지만 먼저 대통령 하는 게 났다’는 등 야사도 전해졌으나, 모두 확인되지 않았다.
7월 1일은 문일고학생들에게 힘든 하루를 예고했다. 3개월가량 훈련한 교련을 시범 보이고 검열받는 날이었다. 그동안 점심시간과 방과 후 연습은 당연지사였다. 불합격되면 재검열을 받아야 하니 불안하였다. 올해 교련검열시범학교로 지정된 것이 죄라면 죄였다.
교련敎鍊은 일본제국에서 비롯된 교과였다. 1949년 자유당정권의 학원 통제와 동원을 위해 만든 학도호국단이 학원병영화시초였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고등학생들이 주축이었기에 정권차원에서 재발방지차 폐지했다. 1968년 대규모 무장공비가 서울에 출현하여 군경과 교전한 사건이 있었다. 북한민족보위성정찰국소속 124부대 공작원 31명이 청와대로부터 300m 떨어진 종로구세검정고개까지 침투하였다. 나중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밝혀 온 국민을 경악케 한 1.21 사태였다. 유일 생존자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불렸다. 당장 전면전이 터질 것 같은 극도의 긴장된 사회분위기에서, 학생들에게도 군사교육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득세했다. 결국 이듬해 1969년 고교필수과목으로 부활하였다. 6.25 한국전쟁 때 학도병 징발 및 훈련이 교련과목의 모체였다. 전후에도 유사시 고등학생들을 병력으로 동원하도록 만들어진 군사학교육과목이었다. 때문에 교련선생은 전직 위관급 및 영관급 장교였다. 1975년에는 학생회가 없어지고 학도호국단이 대신했다.
교련수업에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 있었다. 남학생들은 교모와 앞가리개, 얼룩무늬 교련복과 요대, 각반을 갖췄다. 여학생들은 교련복이나 상응한 위생구호복장, 삼각건과 붕대가 든 구급낭을 구비하였다.
수업은 보통 주 2시간씩 이론과 실기로 나눴다. 이론은 국방부제작 국정교과서로 진행했다. ‘국방과 우리의 책임’의 주내용은 ‘전쟁론, 반공교육, 국방론, 대남 남침사’였다. 생존을 위한 취수취식, 불 피우기, 야전위생과 구급법, 지도 읽는 독도법도 있었다. 실기수업은 남녀차이가 뚜렷하였다. 남학생들은 제식훈련, 사격자세, 총검술 등을 배웠다. 여학생들은 지혈, 붕대감기, 환자이송 등 구호구급법과 간호술이었다. 분열식과 사열식은 남녀 공히 같았다.
특히 남학생실기수업은 실제 총 사격을 빼고 현역병 수준이었다. 군대예절, 제식훈련과 의식, 총검술, 화기학, 전술학, 화생방전과 방독면착용법을 가르쳤다. 군대예절은 경례법, 국가·국기·상급자에 대한 경례. 제식훈련과 의식은 도수각개훈련, 집총각개훈련, 부대훈련, 의식과 사열. 총검술은 기본동작과 연무형 17 개동작. 화기학은 소총분해결합, 사격술예비훈련. 전술학은 각개전투, 경계, 수류탄, 기본전술 등이었다.
총은 나무나 시커먼 고무로 만든 M1개런드와 M16 모형이었다. 무게와 강성을 맞추려고 총열부터 개머리판까지 철근을 박았다. 실제 총보다 무거워 총검술할 때 힘들었다. 총기분해실습은 공이를 제거한 M1개런드 실제총을 사용했다. 몇 정 안 되지만 학교마다 무기고가 있었다. 공이와 탄약은 없으나 실제총이어서 해당지역 예비군부대가 관리하였다. 교련선생이 분해했다가 조립하는 식이며, 학생 한두 명만 해보고 끝났다. 그것도 귀찮으면 방아쇠뭉치 빼는 데까지만 하였다. 다만 탄창삽입시 노리쇠덮개에 손이 물리기 쉬운 것이 M1개런드특징이라 반드시 보여줬다. 2차 대전 때 썼던 40년 된 골동품이지만 비중 있게 다뤘다.
야외교육은 수업정도가 극에 달했다. 군대식으로 정렬하여 교련선생이 나오길 기다렸다. 조금만 집합이 늦거나 줄이 틀어지면 단체기합은 다반사다. 제식훈련·총검술 동작이 틀리면 욕설과 얼차려는 애교고, 실수가 잦으면 체벌과 구타도 부지기수였다. 어린 학생들이 감당키 어려운 공포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포복훈련도 교육이라기보다 괴롭히고 굴리는 용도로 여겼다. 사격술예비훈련(PRI, Preliminary Rifle Instruction)에서 가장 큰 고통과 압박을 받았다. 교련선생이 사거리를 외치면, 학생들이 5kg쯤 되는 총을 들고 우르르 땅바닥에 엎어져 표적을 조준격발하는 훈련이었다. 군대식 표현을 빌리자면, 전진무의탁자세의 훈련병이 교관구령에 따라 엎드려쏴 하는 것. 영어 PRI훈련이 ‘피나고, 알 배기고, 이 갈린다’는 역두문자어로 탄생된 전설을 체험할 수 있다. 돌부리가 군데군데 박힌 땅바닥에 엎드렸다 일어섰다 빠르게 반복하면 뻐근하였다. 흙먼지에 뒤덮여 까진 팔꿈치서 피까지 나니 치를 떨었다. 이것만으로도 고달픈데, 가혹행위가 더해지면 울화가 치민다. 선착순, 오리걸음, 쪼그려 뛰기, 원산폭격을 당하다 보면 당장 학교를 때려치우고 싶다.
더욱이 교련과 체육수업이 겹친 날은 죽을 지경이었다. 온몸이 지쳐 다음 수업을 못 들을 정도였다. 이따금 연속 교련 또는 체육으로 조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땡볕이 내리쬔 여름날 5∙6교시 수업은 상상초월이었다. 땅바닥이 후끈후끈한 운동장에서 총검술과 제식훈련, 육군도수체조와 PT를 두 시간 연달아하면 초주검 됐다. 대입학력고사를 목전에 둔 고3이라도 교련은 열외 없었다. 음악미술교양과목시간은 자율학습으로 대체시킬지언정 교련시간만큼은 반드시 지켰다. 유사시 학생들도 근처 부대서 총을 받아 싸워야 한다는 취지였다. 실제상황이면 바로 소년병이었다.
문일고전교생들이 등교해서 교련검열실전연습을 벌써 세 번째 하였다. 김옥두교련주임주도하에 1∙2∙3학년 교련선생뿐 아니라 체육선생들도 동원되었다. 각반 담임들까지 나와 조교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내외빈과 군검열단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담임선생들이 베레모를 똑바로 씌워주었다. 얼룩무늬교련복과 각반, 요대 등 복장도 꼼꼼히 점검했다.
문승협은 초록색견장과 연대장완장, 하얀색엑스반도에 장검을 장착하고, 권총을 찬 연대참모 4명 앞에 섰다. 연대참모들 뒤에는 국기∙학교기∙학도호국단기를 든 기수단 5명과 1∙2∙3학년 3개 대대가 늠름한 자태를 뽐내며 도열하였다.
참관단이 단상에 오르자, 문승협이 학도호국단을 통솔하여 경례했다. 1,800여 명의 일치단결된 목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교련주임선생이 국민의례를 주도하였다.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4절,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에 대한 묵념이 일사천리로 거행됐다.
운동장스피커에서 사열식음악이 울렸다. 교장선생과 검열단장이 검열단 지프차에 올라탔다. 연대장 문승협은 연습한 대로 동승했다. 사열차량이 학도호국단대열 앞을 지날 때마다, 경례소리가 쩌렁쩌렁하였다. ‘받들어 총! 충성!’. 한 바퀴 돈 사열차량이 다시 단상으로 갔다. 검열단장인사말이 끝나고, 학생들이 군가와 동시에 단상 반대편으로 부대이동을 시작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투와 전투 속에 맺어진 전우야, 산봉우리에 해 뜨고 해가 질 적에,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진짜 사나이’를 3절까지 부르면서 부대이동을 마쳤다. 흙먼지가 가라앉고 본격적 교련검열 겸 시범이 개시됐다. 교련을 배운 지 얼마 안 된 1학년이 첫 태이프를 끓었다. 경례법과 제식훈련을 중심으로 시현하였다. 2학년은 소총분해결합과 사격술동작, 화생방방독면착용 등을 보여주었다. 3학년이 비교적 난도가 높았다. 총검술기본동작과 연무형 17 개동작, 모의대련을 했다. 오뉴월뙤약볕에 땀 흘리며 훈련한 보람이 있었는지, 박수가 연이어 쏟아졌다. 비록 고등학생들이었지만, 시범을 보이는 순간은 군인이었다.
모든 시범이 끝나고, 학생들이 군가‘멸공의 횃불’을 4절까지 부르며 사열대 앞에 집결하였다.
‘아름다운 이 강산을 지키는 우리, 사나이 기백으로 오늘을 산다. 포탄의 불바다를 무릅쓰면서, 고향 땅 부모형제 평화를 위해, 전우여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멸공의 횃불 아래 목숨을 건다’
문일고학생들이 제대구성을 완료하자, 검열단장이 ‘대단히 훌륭하다’며 거듭된 찬사로 평가를 대신했다. 연대장 문승협구령에 맞춘 인사를 끝으로 교련검열이 종료됐다. 군검열단장이 내외빈과 인사를 나누고 단상아래로 갔다. 문승협과 악수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문일고학도호국단대표로 연대장에게 격려하였다.
군검열단장은 인근부대장교 십여 명을 대동한 현역 대령이었다. 그들은 타고 온 지프차와 군용차로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유유히 떠났다.
검열단차량이 교문을 빠져나감과 동시에, 문일고학생들이 주저 않았다. 홀가분하여 긴장이 풀렸다. 선생들이 교실에 가서 쉬라 해도 듣지 않았다. 교장선생이 ‘지금 교실로 들어가면 빵과 시원한 음료수를 돌리겠다’고 했다. 학생들이 환호하며 일사불란하게 뛰었다. 땡볕에 고생한 것이 짠해서 던진 교장선생말이 학생들을 쉽게 움직였다. 교련검열평가가 기대이상인 데다, 아무 사고 없이 마쳐준 고마움에 보상이었다.
“오매오매 죽겄는 거, 더워서 디져분 줄 알았다야.”
“그래도 끝난께 후련하다잉? 인자 지긋지긋한 연습 안 해도 된께, 아조 속이다 시원하다.”
“근디 말이어, 가시나들은 교련검열을 어뜨크롬 받으까? 치마 입고 총검술하까?”
“염병, 별것이 다 궁금하다. 그렇게 궁금하믄, 니가 가시나들 학교에 가서 물어보든가.”
여학생교련검열은 부상자 치료와 구급이 주였다. 가상으로 지정한 부상자의 다친 부위에 ‘옥토정기, 아까징끼’로 부르는 빨간 머큐롬을 발랐다. 부러진 팔과 다리에 부목을 대거나, 상처 난 머리에 하얀 붕대를 감았다. 들것에 옮겨 들고뛰는 환자이송 등이었다. 일반의식은 남학생들과 대동소이하였다.
“앞으로 후배들은 교련검열 신경 안 써도 될 것이다.”
“으째서야?”
“없애분다는 말이 있드라.”
교련이 미성년교과라기에 부적절했다. 남녀고교 교련과목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나저나 승협이가 고생했다야, 쨍쨍 내리쬐는 뙤약볕서 첨부터 끝까지 서있었은께.”
“긍께 말이어, 우리는 후배들 시범 보일 때, 나무그늘에 앉아서 쬐깐이라도 쉬었는디.”
“구령하느라 안 힘들디? 목은 괜찬하냐?”
“난 괜찮아, 복식호흡으로 극복했어. 이 더위에 너희들이 검열받느라 고생했다야.”
학생들은 게눈 감추듯 빵과 음료를 먹어치웠다. 몸은 피곤해도 일찍 하교하니 싱글벙글하였다.
문승협은 저녁에 자면서 악몽을 꿨다. ‘연대 차려. 받들어 총. 충성. 세워총. 연대 열중쉬어’ 구령을 무한반복했다. 어느 순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잠에서 깼다.
등교하는 학생들 표정이 밝았다. 토요일은 오전수업만 하면 학교를 벗어날 수 있어 늘 그랬다. 고3은 수험생이라 그러지 못했다. 방과 후도 공부를 해야 해서 시립도서관과 사설독서실로 향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극장을 찾았다. 홍콩영화전설이랄 정도로 인기 끈 액션코미디첩보영화 ‘최가박당’이 개봉했다.
일요일에 문희경이 결혼하였다. 결혼예물 등으로 시가의 거침없는 불만표출에 상처받고 망설였으나, 이미 주고받은 데다 청첩장까지 나온 마당에 멈출 순 없었다. 예의 없는 시댁태도가 여전히 꺼림칙했다.
문승협은 예식장서 작은 고모 표정을 살폈다. 공주처럼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작은 고모 이삿짐이 서울동부이촌동 신혼집으로 출발하자 눈물이 났다. 문득 얼마 전 상황이 찜찜하였다. 이삿짐을 싸다 작은 고모와 엄마가 왈가왈부했었다. 구매자와 주사용자가 애매한 물건들이 문제였다. 새살림 차리면서 별 것을 다 욕심낸다고 툴툴대는 엄마 편을 들었다. 조금 심하다며 동조하였지만 작은 고모를 충분히 이해했다. 아끼던 엄마도자기그릇을 챙겨간 큰고모를 경험한 바 있었다. 고모들을 떠나보냈다고 생각하니 예전 이방인취급받던 일이 기억났다. 부모와 살기 전 할머니와 살 때 어린 마음이었다. 애지중지 예뻐해 준 이모들과 달리, 드라마에 쌀쌀맞은 고모들처럼 말 그대로 식구로만 대하는 것 같았다. 가끔 엄마아빠를 적대시하는 모습에 반감도 있었으나, 그 외 특별히 고모들에게 미움은 없었다. 8년가량 동고동락하며 음양으로 보살펴주어 무척 고마웠다. 부디 작은 고모가 행복하게 잘 살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예식장에서 작은 고모의 불편한 표정이 자꾸 떠올랐다. 함께 산 정이 있어 착잡하였다. 작은 고모와 이산하는 시간에도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은 계속되었다.
서울여의도 KBS사옥벽면에 온통 이산가족을 찾는 메모가 붙었다. KBS가 5일 간 모든 정규프로그램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찾기 단일 주제로 긴급 편성하여 릴레이 생방송했다. 최고시청률 78%를 기록하였다.
7월 2일. 스튜디오에서 만나 얼싸안은 이산가족이 실신했다. 피난길에 부모손을 놓쳐 천애고아가 되고, 식모살이를 하며 어렵게 살아온 중년의 딸이었다. 가족을 찾은 뒤 ‘왜 나만 버렸어’라며 울부짖자, 칠순이 넘은 모친이 충격에 못 이겨 쓰러졌다. 김동건아나운서가 마이크를 쥔 채 응급처치에 나섰다. ‘이게 무슨 비극입니까’라며 눈물을 흘렸다. 장면 그대로 전파를 타 전국이 울었다. 모친은 응급실로 이송돼 회복하였다.
7월 3일. 아나운서들이 어른들에게 혈압을 묻고 출연자들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상봉한 남매가 만세 부르는 광경에 눈물바다였다. 황해도출신으로 6.25 전쟁이 터지고 모든 가족이 월남했다. 1.4 후퇴 당시 한강부교를 건너 영등포역에서 기차 탈 때 헤어진 후 서로 소식을 몰랐다. 남동생이 오열하며 정신없이 외쳤다. ‘어머니아버지 다 살아 계셔 고맙습니다, KBS만세, 대한민국만세’. 다음날아침 본방송타이틀로 나왔다. 혈연의 끈끈함과 부모님 생존소식, 드라마틱한 상봉. 시청자눈물샘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7월 5일.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허씨남매가 방송되었다. 남매는 고아원서 살다 헤어졌다. 여동생이 이발소에 입양되어 김씨성으로 살면서 본명을 잊어버렸다. 나중에 오빠가 이발소를 찾아갔으나 이사 간 뒤였다. 몇 십 년간 소식이 끊겼다. 여동생이 사연확인 중에 오빠임을 직감하며 ‘오빠다’라고 외쳤다. 오빠가 깜짝 놀라 울부짖었다. ‘넌 김씨가 아니야, 허씨란 말이야. 개도 자기 이름은 아는데, 사람이 어찌 그렇게 살았어.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지, 모두들 알아야 해’. 전쟁으로 피해 입은 노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이 상봉은 제주와 대전지역국을 연결하여 만난 사례였다. 오빠가 방송 첫날 화면에 나온 여동생을 보고 대전지국으로 뛰었다. 나흘이 지난 후 가까스로 제주지국을 연결하여 대조했다. 처음에는 잠깐 상봉한 뒤, 시간관계상 다른 제주출연자들 사연으로 마이크가 넘어갔다. KBS서울본사부조정실서 사연소개를 자르고 두 지국을 다시 연결하였다. 방송담당 PD가 전쟁기록영상과 구슬픈 BGM을 삽입하면서 온통 눈물바다가 됐다. 생방송을 진행하는 이지연아나운서가 끝내 못 참고 무대뒤로 빠져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많은 사람들 기억에 혈육의 정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았다.
다음날 제주도서 사는 여동생이 비행기를 탔다. 서울김포공항을 경유하여 택시로 대전으로 이동했다. 오후 5시 40분 KBS대전방송국사옥 앞 상봉상황이 중계되었다. 오빠가 긴장된 모습으로 기다렸다. 여동생이 택시가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어젖히고 뛰쳐나왔다. 시민들 박수갈채 속에 서로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오빠가 오열하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일이냐 이게, 이 기쁜 소식을 누구한테 전하면 좋으냐, 부모가 있어야 전하지’. 주변사람들도 가슴 아파하며 흐느꼈다.
“오빠, 우리는 전쟁 나도 절대 헤어지지 말자.”
“현아야, 만약에 전쟁 나면 오빠 옆에 꼭 붙어있어.”
“오빠, 나는?”
“걱정 마, 오빠가 우리 윤아도 꼭 챙길 테니까.”
일요일아침밥을 먹다가 이산가족 찾기 재방송을 보면서 목이 메었다. 문승협과 두 여동생이 상봉한 남매에 감정이입되었다. 뜻밖의 가족애로 똘똘 뭉쳤다. 이산가족들은 당연지사였다. 다른 가정도 다를 바 없었다. 다들 이산의 아픔을 겪는 이산가족마음을 헤아렸다.
“우아, 너무 안타깝고 슬프다.”
“그니까, 저거 진짜 실화야?”
“엄마, 우리 집은 이산가족 없어?”
“연설하네, 없는 이산가족 하나 만들까?”
엄마 이항리가 핀잔주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문승협은 우는 것이 창피하였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방송을 보면서 울컥해 밥 먹다 얹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화제와 체했을 때 먹는 약 ‘까스활명수’가 잘 팔렸다. 대한민국 온가정이 똑같았다.
문승협은 정난희와 헤어진 아픔을 경험한 바 있어, 조금이나마 이산가족의 슬픔을 이해하였다. 독서실에 도착할 때까지 여운이 남았다.
“아야, 온 나라가 이산가족상봉으로 난리다야.”
“말도 마라잉, 우리 엄니는 맨날 방송만 보드라. 눈물 닦느라고, 집에 휴지가 남아나질 안 해.”
“느그는 이산가족 없냐?”
“응, 우리 집은 없나 봐.”
“우리 집도 없긴 한디, 요즘 같아선 이산가족 없는 것이 쪼께 섭할 지경이여.”
“이런, 섭섭할걸 섭섭해라야.”
“아니, 그 정도로 주변에 이산가족들이 많드란께.”
“김일성이 그 노무시끼 땜시 그래, 전쟁 난 지 30년이 지났는디도 온 나라가 울음바다네.”
“김일성이도 문젠디, 소련놈들이 더 문제여.”
“지금 전쟁 나믄, 내가 학도병으로 참가해서 확 통일시켜불 것인디 말이어.”
“그렇게 전쟁으로 통일하면, 또 많은 사람들이 죽어.”
“뭔 소리여, 무조건 무찌르자 오랑캐제.”
“염병, 무찌르자 공산당이어.”
“나는 평화통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어느 세월에, 북한공산당놈들하고 대화가 되겄냐?”
“그러니까 서로 부단히 노력해야지, 그렇게 하면 언젠간 꼭 통일될 거야.”
“그래라, 니는 꼭 통일을 보고 죽어라잉?”
정부가 이산가족상봉사업을 범국민운동으로 추진하려고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일본경찰이 지문날인을 거부한 재일교포 2세를 외국인등록법위반혐의로 구속하였다. 가뜩이나 대한민국이 슬픔에 젖어있는 상황에서 분노를 샀다. 더불어 일제강제동원과 일본군위안부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일제강점기강제이산까지 더해져 국민들 아픔을 배가시켰다. 이런 와중에 국세청이 불법대출사건으로 신흥기업집단 명성그룹전반에 세무조사를 했다. 신군부의 대표적 기업 길들이기 희생양으로 공중분해될 줄은 누구도 상상치 못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