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별 – 2권 2부 23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53)

by 태양을 품은 별

문교부가 서울올림픽과 국제화추세에 발맞춰 중고교 영어 듣기 평가방송을 공지했다. KBS 교육 FM을 통해 첫 전파를 탔지만, 고3수험생은 제외하였다.

며칠 전 북한군대위의 DMZ귀순으로 국민들 사이에 팽배하던 전쟁불안감이 다소 완화되었다. 북한이 지난 2월 ‘팀스피릿 83 한미합동훈련’에 대응하려 돌입한 준전시태세를 3개월 만에 해제했다.

타 지역사람들은 일상에 쫓겨 바삐 살았으나, 5월 18일을 이틀 앞둔 광주는 트라우마로 다시 비통에 빠졌다. 김생출선생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간략히 나마 5.18 민주열사들을 추모하였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 진압작전 ‘공수부대의 화려한 휴가’를 빗대어 ‘전두환의 화려한 외출’을 비판했다.


3년 전 1980년 11월 4일로 거슬러 올라갔다. ‘로널드레이건’이 ‘지미카터’와 선거를 치르고 압도적 득표로 제40대 미국대통령에 선출됐다. 축배를 든 사람 중에 전두환대통령도 있었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목표는 오직 하나, 결함 많은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미국의 승인이 필요하였다. 인권외교를 주창하는 카터와 달리, 미국국익을 우선시한 레이건당선은 전두환에게 강력한 우군이었다. 하지만 5.18 광주가 변수였다. 신군부의 유혈진압을 사실상 묵인한 미국에 대해 한국대학생들 중심으로 반미정서가 확산되었다. 광주미문화원과 부산미문화원의 방화사건원인이기도 했다. 한국 내 반미분위기가 점점 거세지자, 미국은 친미정권전복을 우려하였다. 비로소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내란음모 등 혐의로 사형선고받은 김대중구명에 나섰다. 전두환은 김대중목숨으로 미국과 흥정하려고 사형원심확정을 서둘렀다.

마침내 전두환은 레이건미국대통령에게 초청받아 1981년 1월 28일 ‘화려한 외출’을 시작했다. 국내언론들이 대통령방미를 연일 특집으로 다뤘으나, 현지 실상은 달랐다. 전두환대통령이 LA와 뉴욕을 거쳐 워싱턴앤드루스공군기지에 도착하였지만, 미국의장대와 군악대가 나타나지 않았다. 대통령해외순방에는 ‘국빈, 공식, 공식실무, 실무, 사적’등 방문명칭이 붙었다. 국빈방문StateVsit가 아닌 공식방문OfficialVsit이라, 미정부의전도 환영행사도 없는 ‘초라한 외출’이 됐다. 교포환영뉴스 또한 지시받고 동원된 연출이었다. 실제로는 재미한인들이 방미반대와 살인마 등의 피켓을 들고 곳곳에 나타나 대규모 항의를 이어갔다. 시위대로 인해 행사장마다 취소하거나 사진만 찍고 서둘러 떠나기 바빴다. 국내 신문과 방송들은 전두환 받들기에 안달 나서 그런 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이고 우롱을 넘어선 처사였다.

전두환은 한미정상회담대가로 미국에 선물보따리를 한 아름 안겼다. 무기와 쌀을 사주고, 정권취약점을 해결하려 엄청난 정권유지비를 풀었다. 한국대통령의 미국행에 빠지지 않는 현안 두 가지가 안보와 경제였다. 전임카터대통령의 미군철수정책회복이 미흡한 상황에서 한국군증강계획은 미국산 무기구매계획과 다름없었다. 미국이 줄 수 있는 것도 무기구입승인이었다. 쌀수입도 곡물수확이 형편없는 상태여서 전두환정권이 직면한 최대경제난제였다. 워싱턴도착 전날까지 추가로 쌀구매를 검토했을 정도였다. 무역할당에서 미국의 제한완화가 필요하였고, 조치를 취해주자 100만 톤 이상의 미국산 쌀수입을 결정했다.

방미기간 중 백악관친구 만들기에 무척 집착하였다. 다음 달 2월 25일 치러질 체육관선거에서 대통령당선을 따놓은 당상이라 확신하고, 3월 3일 제12대 대통령취임식에 고위급축하사절을 요청했다. 그러나 성대한 전두환대통령취임식에 9,000여 명의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미국 측 참석인사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선상님, 이런 것이 사대외교지라우?”

“응, 그렇지, 참 부끄러운 일이다.”

“와따 참말로, 우리나라는 언제쯤이나 자주국방 자주외교를 할 수 있으까잉?”

“신문을 찾아보니까, 재미있는 게 또 있더라.”

“뭣인디라우?”

“국내언론들이 전두환대통령방미를 닷새 전 1월 23일에 발표했다. 그날 김대중선생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이튿날 24일 계엄령이 해제됐다. 김대중선생과 부인이 작년 1982년 12월 23일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서 미국망명길에 오를 수 있는 이유였다.

“전두환하고 미국이랑 주고받은 확실한 증거네요.”

“미국은 국익에만 맞으면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지지한 역사가 즐비하다. 동맹국인 한국군부와의 관계가 흔들려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였던 거야. 전두환대통령의 품성과 인격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신군부가 입맛에 따라 움직여주니 금상첨화였겠지. 그런 미국과 신군부정권의 밀월에 대한 반발이 미문화원방화사건들로 표출됐다고 생각한다. 당시 전두환대통령방미에 감동한 국민도 있었지만, 밑바닥 민심은 반감이 우세했어. 정치권이 신군부독재정권위세에 숨죽이면서, 반체제야권인사들의 저항에 전혀 힘이 실리지 못했다.”

수업종료종이 울렸다. 김생출선생이 손목시계를 보며 아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광주의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아 사회분위기는 여전히 흉흉하다. 내일모레가 5.18이니까, 다를 5.18의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 보자. 이상, 수업 끝.”

“차례, 경례.”

“감사합니다.”

“아야, 간디는 어뜨크롬 저런 일을 소상히 아까?”

“날자별로 언론뉴스를 하나하나 찾아보고, 미국교민들 몇 명 알믄 금방 알겄다야.”

“근디 니는 으째 모르냐?”

“난 관심도 없고, 미국에 아는 사람이 없은께 그라제.”

“그라믄, 간디말을 다 믿어도 되까”

“연설하네, 믿기 싫으믄 믿지 마, 아마 선상님이 믿으라고 한 소리도 아닐 것이다.”

“저번에 선상님이 말하디야, 역사는 기록되고, 진실은 언젠가 꼭 밝혀질 것이어.”

“나 같으믄 그냥 전두환이라고 할 것인디, 그래도 뒤에다 꼬박꼬박 대통령을 붙이드라잉.”

“말하지 마 간디가 예의는 또 무자게 바르잖애.”

학생들은 김생출선생이 아니면 역사적 사건을 알 방법이 없을뿐더러, 설명해 줄 사람도 없었다.


5월 18일, 전 신민당총재 김영삼이 나섰다. 전두환정권에 강제로 정계은퇴당하고 가택연금 중이었다. 광주민주화 운동 3주년을 맞아 ‘국민에게 드리는 글’로 성명을 발표하였다. ‘언론통제전면해제, 정치범석방, 해직인사복직, 정치활동규제해제, 대통령직선제개헌’등 ‘민주화 5개 항’을 요구했다. 곧바로 전두환정권의 야당탄압에 저항하고자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였다. 각지 재야인사들이 일제히 호응했다. 함석헌, 문익환 등이 상도동자택을 찾았다. 미국서 소식을 접한 김대중은 문동환 등과 광주민주화운동기념행사를 마친 뒤,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전두환정권을 규탄하며 김영삼을 살려내라고 구호를 외쳤다.

다음날 상도동계모임‘민주산악회’ 70여 명이 ‘김영삼 단식대책위’를 구성하고 동참하였다. 광주항쟁 3주년을 기해 야당인사들의 단결을 노린 투쟁에 힘이 실렸다. 김영삼의 부인 손명순은 일일이 전화로 외신기자들에게 알렸다. 로이터, AP, UPI, 교토통신이 신속히 타전했다. 김영삼근황이 외신을 통해 국제사회의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신군부보도통제로 다음날 19일까지 단 한 줄의 기사도 보이지 않았다. 서슬 퍼런 전두환군사정권의 1983년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단식투쟁의미가 반감될 것을 우려한 김영삼의 가신들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다방면으로 재야운동가들에게 알리는 한편, 대학가를 돌며 ‘김영삼총재 단식돌입’ 유인물을 뿌렸다. 문익환목사, 고은시인, 지학순주교를 비롯한 재야인사들의 지지와 성원은 물론이고 학생들 시위가 잇따랐다. 야당인사와 학생운동가들이 경찰에 체포와 구류를 당하면서도, 릴레이식으로 김영삼의 단식실황과 사진을 인쇄하여 각지에 살포했다.

미국에 망명한 김대중도 ‘김영삼총재 단식투쟁 미국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대대적인 지지운동을 펼쳤다. 외신들과 인터뷰에서 전두환정권의 야당탄압을 호소하였다. 뉴욕타임스에 ‘Kim's Hunger Strike’ 김영삼단식투쟁보고서를 기고했다.

일본에서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 동조단식농성에 앞장섰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목표로 재일한국인들이 설립한 단체였다. 일본의 반전과 시민활동에 참가하면서 ‘한통련, 한민통’으로 불렸다.

5월 20일 단식 4일째, 동아일보가 2면 정치가십난에 암호문 같은 기사로 김영삼단식을 처음 보도하였다. ‘재야인사문제’라는 해괴한 제목이었다.

5월 25일 단식 8일째, 김영삼몸무게가 14kg이나 빠져 건강이 악화되었다. 전두환정권이 김영삼자택에 사복경찰과 정보요원을 투입했다. 치료를 거부하는 김영삼을 억지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시켰다.

김영삼은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되고서도 일체치료행위를 거부하였다. 의사들이 생명에 위험하다고 진언했으나, ‘의식이 있는 한 절대로 투쟁을 중단할 수 없다’며 의지를 꺾지 않았다.

5월 26일, 상도동계의원 23명도 단식에 들어갔다. 병원 측이 김영삼의 몸상태를 체크해 ‘오로지 물과 소금만 섭취하였다’고 발표했다

5월 27일, 민정당사무총장이 전두환의 메시지를 들고 김영삼병실에 방문하였다.

“대통령각하께서, 총재님이 단식을 끝내고,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길 바라십니다.”

“…….”

“건강이 회복되면, 일본·유럽·미국, 원하는 어디든 가셔도 좋다고 하십니다. 물론 가족동반도 가능하고, 주택과 생활비도 일체지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씰데 없는 소리. 우리 국민들이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외국에 나갈 수 있겠소? 나의 연금해제는 문제가 아니요. 내가 요구한 민주화조치가 없으면, 이 정권도 이승만과 박정희를 따라 결국 비참하게 될 것이란 말이요. 이 말을 대통령에게 꼭 전해주시오.”

전두환이 조건을 제시하며 단식중단을 촉구했지만, 김영삼은 거절하였다. 이튿날 다시 찾아온 민정당사무총장에게 일침을 날렸다.

“나를 해외로 보내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오.”

“그게 무엇입니까?”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시오.”

김영삼은 강경하게 단식투쟁을 지속했다. 전두환은 무엇보다 굶어 죽을 경우 미국반응을 두려워하였다. 이 사건이 계속되면 민심을 자극할 거라는 의견이 잇따랐다. 결국 김영삼가택연금해제를 선언했다. 공식발표전에 민정당사무총장이 직접 알렸다.

“총재님, 총재님께서 그동안 가택연금으로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오늘 밤 12시를 기해 연금이 완전히 해제됩니다, 이제 자유로운 몸입니다.”

“연금해제야 당연한 것 아니오? 내가 연금을 풀어달라 단식한 것도 아니고, 처음 제시한 민주화 5개 항을 들어주면 단식농성을 해제하겠소.”

“초 총재님 그러지 마시고, 이번 기회에 해외나 잠깐 돌고 오시죠, 경비는 저희가 다 부담하겠습니다.”

“협상은 없소, 난 죽기로 결심했소.”

민정당사무총장이 거듭하여 단식중단을 간곡히 요청하였으나, 김영삼은 완강히 거부했다.

전두환정권은 김영삼단식중단회유를 포기하고 초긴장상태에 들어갔다. 흩어져있던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이 야당계 거두 김영삼중심으로 뭉쳐 민주화를 외쳤다. 김대중과 서먹한 관계가 복원된 것도 한몫하였다.


“제다이의 귀환이 미국전역에 개봉했다드만, 김영삼이 단식 땜시 묻혀 부렀네잉.”

“그것이 뭔디야?”

“영화 스타워즈 오리지널시리즈 제3작이라고 있어.”

“연설한다 참말로, 그런 것에나 관심이고. 아야, 니는 이 시국에 뭣이 중하냐?”

“그니까, 한심하다 한심해, 누구는 목숨 걸고 나라를 위해서 단식하고 있는데.”

“와따, YS결기가 대단하드라잉?”

“YS가 뭣인디?”

“지랄, 김영삼이도 모르냐?”

“밥 굶는 것이 뭐 대단하다고 그냐, 우리 엄씨압씨는 나 굶어도 눈 하나 까딱 안 하드라.”

“음마, 니가 굶는 거랑 같어?”

“굶는 것이 다 똑같제, 뭐가 다르대?”

“어허, 뭔 소리까잉. 시방 YS 개인이 굶는 것이 아니고, 온 국민이 다 함께 굶는 거여.”

“와, 영기 너 제법이다?”

“허허, 내가 정치는 쪼깨 알제.”

“그러면 DJ는 누군지 알아?”

“어디 DJ야?”

“염병, 김대중선생이잖애, 다 영문이니셜이그만.”

“큭큭, 나는 음악다방 DJ말한 줄 알았다야.”

“무식한 시끼, 이 정도 시사상식은 있어야제, 고3씩이나 돼갖고 그것도 모르냐?”

“아! 스읍, 아.”

“으째 그냐, 또 머리 아프냐?”

“야, 니 또 코피 난다.”

“승협아,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어?”

“아 아니야, 이러다 괜찮아져.”

문승협은 반복된 머리통증과 코피, 매스껍고 어지러움을 매번 견뎌냈다. 이담이 얼른 연습장을 뜯어 비벼서 건넸다. 천영기가 종이를 돌돌 말아 코를 틀어막는 문승협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니 코피 흘린 것이, 방금 먹은 밥 몇 그릇은 되겄다.”

“이제 괜찮아.”

“으째, 바람 좀 쐬까?”

“그라자, 그것이 낫겄다. 저녁 먹은 배가 아직 안 꺼져갖고, 독서실 들어가믄 졸려.”

“그럼 너희끼리 다녀와.”

문승협이 이담과 천영기를 뒤로하고 독서실로 올라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폈지만 공부는 되지 않았다. 깍지 낀 양손으로 턱을 받친 채 생각에 잠겼다. 오늘이 정난희와 사귄 지 1년 되는 날이었다. 이젠 뭔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메모를 적었다. ‘6월 5일 2시 독일제과, 마지막으로 만나자’.

그대로 독서실을 나와 정난희집 앞으로 갔다. 비장하게 메모를 담벼락구멍에 넣었다. 이번으로써 끝이란 서글픔에 발걸음을 쉬이 돌리지 못했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며 지난날을 회상하였다. 골목 군데군데 정난희와의 추억이 떠올랐다. 눈물이 맺혔으나 울지 않았다.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려 어금니를 깨물었다. 한 바퀴를 돌고 나니 한 번만 더 돌아보자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냉정해야 한다며 애써 외면했다. 미련한 인간이나 미련을 갖는 거라고 다독였다. 스스로 팽개쳤던 자존심을 뒤늦게라도 지키고 싶었다.

다음날, 별 기대 없이 다시 가서 확인하였다. 메모가 보이지 않아 심장이 쿵쾅거렸다. 정난희와 마주할 희망을 품고 한걸음에 독서실로 달렸다.

책상에 앉았지만 기분이 들떠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책과 씨름하다 일찍 독서실을 나와 집에 갔다.

방으로 따라 들어오는 엄마를 보니 불안했다. 혹시 또 부부싸움을 하였을까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 작은 고모 문희경이 곧 결혼할지 모른다는 소식이었다. 책가방을 든 채로 꼼짝없이 서서 일련의 과정을 들었다.

문희경혼담이 선본 지 한 달 반 만에 빠르게 진행됐다. 문승협의 예비 작은 고모부 윤중일은 경희대건축과를 졸업하고 대기업 선경종합건설에서 대리로 근무했다. 함평에 집성촌이 있는 파평윤씨가문의 장손이었다. 문희경은 이상형과 달라 불만이었으나 결혼하라는 부모강요에 체념하였다. 선본 후 겨우 세 번 만난 지라, 남편 될 사람이 어떤 성격인지조차 몰랐다. 건설회사특성상 잦은 장기출장과 술을 많이 마셔 탐탁지 않았다. 특히 어눌한 말씨와 키 작고 뚱뚱한 점이 별로였다. 결혼결심에 앞서 오빠부부와 언니내외에게 투정 삼아 자문했었다. 다들 남일처럼 이야기해서 섭섭하였다. 결정적으로 문희경결혼에 급물살탄 배경이 있었다. 외삼촌 태선화학 박동후회장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여조카일생을 좌우할 중대한 결혼을 염두하고 다방면으로 숙고한 뒤 내린 판단이었는지, 여동생 박옥춘에게 일반적인 말만 전해 듣고 내린 결론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문승협은 작은 고모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인륜지대사라는 결혼을 자포자기하듯 결정하다니 답답하였다. 내친김에 작은 고모 방문을 두드렸다.

“뭔 일이냐?”

“작은 고모, 고모가 행복할 것 같으면 결혼하고, 아니다 싶으면 절대 하지 마.”

“째깐한 니가 뭘 안다고 어른일에 끼어드냐?”

문승협은 면박만 당하고 뻘쭘히 나왔다. 어리다고 귀 기울여주지 않은 서운함보다, 할 수 있는 충고가 없어 안타까웠다. 작은 고모를 좋아한 만큼 많이 속상했다.


세상은 문희경결혼고민과 상관없이 돌아갔다. 문교부가 외래어·상용일어·한자어 등 6,800여 개 단어를 표준용어로 고쳐서 전 행정기관과 교과서에 사용토록 지시하였다. 김영삼단식이 계속되는 가운데, 함석헌 등 민주인사 5명이 ‘긴급 민주선언’ 발표 후 동조단식농성에 돌입했다. 6월 1일엔 이민우, 조윤형, 김상현, 김덕룡, 이기택, 최형우 등 전현직국회의원 33명을 포함한 58명의 인사들이 연대투쟁을 선언하였다. ‘13 소위원회’를 구성해 101명의 서명을 받고, ‘민주화 추진 범국민단체’ 구성과 김영삼단식중단을 위한 노력을 맹세했다. 서울부산에서 학생들의 집회와 데모가 연이었다. 맨발 맨주먹으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학생들에게 멕시코시티 에스타디오아스테카서 개최된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개막전은 관심밖이었다.

6월 4일 단식 17일째, 병원 측이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김수환추기경이 단식중단을 당부했다. 김대중부부와 70여 명의 교포들이 워싱턴 D.C집회에 참가하였다. ‘김영삼을 구출하라’ 플래카드를 들고 주미한국대사관과 미국국무성을 거쳐 백악관까지 가두행진장면이 외신에 생중계됐다.

문승협이 TV로 정치상황을 보면서도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일이 정난희와 만나는 날이었다.

다음날, 결연하게 약속장소로 향했다. 오늘만큼은 정난희가 약속시간에 맞춰오지 않으면, 10분만 기다리다 미련 없이 나오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독일제과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독일제과문을 열면서 긴장된 나머지 손이 덜덜 떨렸다. 과연 정난희가 나올까 반신반의하며 잘 띄는 자리에 앉았다. 시계와 제과점입구를 번갈아 보며 초조히 기다렸다. 10분이 지났지만, 정난희는 오지 않았다. 혹시나 다른 좌석에 앉았을까 봐 둘러봤다. 당초 다짐한 대로 지금 나갈지 말지 갈등하였다. 더 기다려서 상할 자존심은 중요치 않았다. 정난희를 만나야 한다는 절박함이 스스로를 쉽게 설득시켰다. 애타는 심정에 어느새 두 손을 모아 정난희가 오길 기도했다.

30분쯤 지나 입구에 반가운 실루엣이 나타났다. 정난희가 들어가길 망설였다. 문승협이 벌떡 일어나서 한걸음에 달려가 문을 열었다. 정난희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회피하며 자리로 갔다.

문승협은 재빨리 좋아할 만한 빵과 음료를 주문하고, 정난희를 빤히 바라보았다. 눈물이 왈칵하였으나 싫어할 것이 뻔해 꾹 참았다. 할 말이 많으니 오히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난희만 눈에 들어올 뿐 머릿속은 하얀 백지상태였다.

“몰골이 그게 뭐야?”

“아, 미안, 신경 못썼어.”

“내가 오빠 그런 모습 보려고 헤어진 줄 알아?”

“난희 너도 안색이.”

“왜, 내 안색이 뭐 어때서. 하여튼 변한 게 없어, 여자한테 안색이나 들먹이고.”

“…….”

“그렇게 바보처럼 웃지 마, 누가 헤실이 아니랄까 봐.”

“…….”

“으응? 정드니까 웃지 마라고.”

문승협은 오랜만에 꾸민다고 했지만 초췌함을 감추진 못하였다. 정난희도 편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리워하던 정난희가 눈앞에 있으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정난희의 표정과 말투에서 이별을 겪어내기 힘들다는 동질감을 느꼈다. 어떻게든 정난희를 설득하고픈 미련이 다시 꿈틀댔다. 웃지 말라는 말에 절제하면서도 호시탐탐 정난희빈틈 찾기에 바빴다.

“우리가 사귄 지 일 년 됐으니, 많이 정들었다, 그치?”

“헤어지는 게 뭐가 힘들다고, 그렇게 폐인처럼 다녀?”

“너는 안 힘들었어?”

“내가 왜, 나는 무용하느라 힘들 시간이 없더라.”

“남 말하듯 그러지 마, 너도 힘들었다는 거 알아.”

“몰라, 아무튼 난 아무렇지 않았어. 오빠가 보고 싶지도 않았고, 생각조차 안 났어.”

정난희가 말로는 거리 두기를 하며 밀어냈으나, 눈은 문승협 요모조모를 열심히 살폈다. 순간순간 걱정하고 측은해하는 표정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맨날 담벼락구멍에 메모 남기면, 공부는 언제 해?”

“이전 것도 봤어?”

“그래, 다 봤다 왜.”

“그런데, 나 폐인처럼 다닌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마치 나를 지켜본 사람처럼.”

“뭘 보긴 봐, 들었지.”

“난 또, 혹시나 했네.”

“무용하기 바쁜데, 오빠 지켜볼 시간이 어디 있어?”

“그럼 누구한테 들은 거야?”

“있어, 자꾸 꼬치꼬치 캐묻지 마.”

며칠 전 천영기와 백미정이 정난희를 찾아갔다. 정난희와 이별 후 변화된 문승협의 일거수일투족을 전했다. 정난희는 거의 폐인처럼 지낸다는 말에 가슴 아팠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냥 내일만 열심히 했어.”

“뭘, 무용?”

“응, 무용.”

정난희는 지난 5월 초중순 ‘동아무용콩쿠르’ 학생부예선을 치렀고, 지난주 학생부본선에서 금상을 받았다. 무용명문 선화예고학생들과 경쟁이라 힘들었다. 대회입상은 무용명문대학진학직행권이라 할 정도로 공신력이 높았다. 정난희가 무용에 힘주어 답할 정도로 대단한 일이며 으스대고 뻐길만하였다.


동아무용콩쿠르는 동아일보주최 전국무용대회며, 1959년에서 1961년까지 3차례 거행된 ‘신인무용발표회’가 모태였다. 1964년 ‘전국무용경연대회’가 첫 시작이고, 1967년 제4회 대회부터 동아무용콩쿠르로 개칭됐다. 1970년 제6회 대회 때 격년제였지만, 올해에 매년 개최로 다시 바뀌었다. 작년 제12회 대회에서 서양무용부문을 발레와 현대무용으로 분리하고, 고등학교재학생도 참가토록 폭을 넓혔다. 매년 5월 둘째 주에 예선이 열리고, 마지막 주 월요일에 세종문화회관대극장에서 본선무대가 펼쳐졌다. 한국무용전통∙한국무용창작∙현대무용∙발레, 총 4개 부문이었다. 고등학교재학생 학생부, 대학교재학생이상 일반부, 남자∙여자로 구분하여 진행했다. 한국무용창작부문 참가자들은 한국전통춤도 포함되었다. 현대무용부문은 일반부만 자유작품 외에 주최측지정주제작품을 추가하였다. 발레부문 학생부는 예선에서 앙셴망Enchainement을 경연하고, 일반부는 컨템퍼러리Contemporary작품을 예선과 본선에서 심사받았다. 역대 동아무용콩쿠르를 통하여 배출된 인재들이 무용계스타로 활동했다. 중진들은 대학에서 가르치거나 국내외무용단을 지휘하는 등 한국무용계를 이끌었다. 우수한 인재를 양성배출함으로써 국가문화예술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정난희는 원래 작년에 참가하려 했었다. 부모와 무용선생의 강제하다시피 한 권유에 따랐다. 그러나 문승협을 만나면서 도무지 무용에 집중되지 않아 불참을 선언하였다. 무용선생과 부모의 질책은 당연했다. 동아무용콩쿠르입상이 정난희의 대학진학과 무용인생에 매우 중요하였다. 더구나 대회수상을 목표로 이화여대무용과교수에게 거액의 작품비와 레슨비를 이미 지불했기 때문이었다. 문승협과 헤어지라고 강요할 만큼 중대한 대회임은 틀림없었다. 어찌 보면 문승협으로 인하여 대회준비에 전념할 수 없었던 것이 이별을 마음먹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하지만 올해에는 달랐다.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라 무용연습에 심혈을 기울였다. 문승협과 이별의 아픔을 삼키며 심기일전한 결과였다.

문승협은 정난희에게 무용콩쿠르 준비와 입상하기까지 과정을 들으면서 부끄러웠다. ‘여자친구는 자신의 목표를 위해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헤어짐도 불사하고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나는 과연 뭘 생각하고 무얼 했나’. 그동안 정난희의 짜증들이 괜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용하는 여자에게 최초로 도움 되는 남자친구가 되겠다던 의욕에 찬 주장이 유명무실해졌다며 자책하였다. 그러나 왜 이별해야 했는지 알았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현실 목표추구라는 이성적 사고보다, 사랑이라는 감성이 무시될 당위성을 찾지 못하였다. 경중이 아닌 이성과 감성의 차이라 생각했다. 남자들이 감성에 휘둘려 이성을 잃으니까, 또래 여자보다 정신연령이 낮다는 주장 또한 동의할 수 없었다.

3개월여 헤어진 사이 문승협과 정난희에게 뭔가 모를 벽이 생겼다. 감정이 달라지진 않았을 텐데 왠지 서먹하였다.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서로 말을 아꼈다.

“우리 영화 볼까?”

“영화? 고3이 영화 볼 시간 있어?”

“…….”

“내가 한 말 또 까먹었구나, 내년까지는 축하일이나 기념일 같은 거 잊으라고 했잖아.”

“알아, 내년에 너 대학 갈 때까지.”

정난희가 한심하다는 듯 째려봤다. 문승협이 쥐구멍을 찾는 마냥 고개 숙였다. 정난희는 움츠러든 문승협을 보니 애처로웠다. 다정한 톤으로 바꿔 물었다.

“저번 3월 13일, 내 생일에 예매한 영화는 뭐였어?”

“사관과 신사.”

“아, 그 리처드기어하고 데브라윙거 나오는 거?”

“응, 맞아.”

“그 영화 지금도 해?”

“응, 지금도 상영하더라.”

“가자, 보러 가자.”

“진짜?”

시무룩하던 문승협이 희색만면하였다. 정난희가 어이없어하며 눈을 크게 떴다. 천진난만아이 같은 문승협이 귀여워 빙긋 웃었다.

문승협은 마음 바뀔까 싶어 서둘러 극장으로 앞장섰다. 영화를 보면서 슬며시 손을 잡으려 했다. 정난희가 살짝 뺐다가 다시 내밀었다. 문승협은 마치 처음처럼 어색하고 떨렸다. 영화는 3개월 전 혼자서 본터라 안중에 없었다. 영화상영 내내 정난희만 훔쳐봤다. 시선을 느낀 정난희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눈치 줬으나 소용없었다. 얼굴 닳겠다며 소곤소곤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난희입술을 빤히 쳐다보았다.

둘은 영화가 끝나고 관객들이 다 나갈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서로의 체온을 만끽하며, ‘제니퍼원스와 조코커’가 부르는 OST ‘Up Where We Belong’을 즐겼다.

“오빠, 오빠 먼저 나가서 건너편 뒷골목 쪽에 있어.”

“알았어.”

문승협은 아는 사람과 마주치길 두려워하는 정난희마음을 헤아렸다. 당연하게 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난희가 극장을 나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길 건너 문승협에게 다가가면서도 주위를 경계하였다.

“나 이제 집에 가야 해.”

“바래다줘도 될까?”

“그럼 집 근처까지만.”

“진짜? 네가 불편하지 않은 곳까지만 바래다줄게.”

문승협은 거절할 줄 알았는데 동행을 허락해 줘서 횡재한 기분이었다. 정난희와 이별 중임을 까맣게 잊었다.

“영화에서 나온 사관생도 있잖아, 어떻게 생각해?”

“여자들에게 제복 입은 남자가 로망이기도 하지.”

“너도?”

“응, 나도 여자잖아. 왜, 사관학교에 가려고?”

“네가 원한다면.”

“오빠, 나는 오빠가 원하는 걸 하길 바래.”

“그래도, 네가 원하면 더 좋잖아.”

“만약에 내가 원하는데, 오빠가 싫으면 어떡할 거야?”

“나는 상관없어,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이건 진심이야.”

“오빠인생은 오빠 거야,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딨어?”

“그 바보, 여기 있잖아.”

“말 같잖은 소리 마, 난 오빠에게 그런 걸 원치 않아.”

“혹시, 나를 회피하려는 건 아니고?”

“무슨 뜻이야?”

“원하는 걸 약속하면 반드시 책임져야 되니까, 나랑 헤어지려고 그럴지도 모르지.”

“오빠 실망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아니, 네가 나랑 헤어지지 않을 생각이라면, 내 꿈을 같이 만들어가도 되잖아.”

“오빠.”

정난희는 자신이 알고 사랑한 문승협이 맞는지 의아했다. 예전과 너무 달라져서 깜짝 놀라 당황하였다. 적어도 의존적이기보다는 주체적이었다. 또래들 누구보다도 합리적인 사고를 가졌고,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까지 이루려는 의지가 강했었다.

문승협은 이별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혔다. 정난희와 헤어지지 않으려는 발악이었다. 고등학생 문승협인생에 전부였을 만큼 정난희가 지배하고 있었다.

문승협 스스로도 인지하였다. 어린아이처럼 왜 생떼 부렸는지 금세 후회했다. 이미 입 밖으로 뱉어버린 말이라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오빠, 왜 이렇게 변한 거야?”

“뭐가, 나 변한 거 없어.”

“내가 아는 오빠가 아니야, 옛날 문승협이 아니라고.”

“난 변한 게 없다니까, 너에 대한 사랑도 변하지 않았어, 아니 더 많이 사랑해.”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난희야, 우리 지난 과거이야기는 하지 말고, 발전적으로 미래를 생각하자?”

“뭐를?”

“우리 이별하지 말고 각자 해야 할 일 열심히 하자, 난 헤어지지 않고서도 잘할 자신 있어.”

“…….”

“그럼 우리 헤어진 거 취소된 거다, 응?”

“…….”

“왜 대답을 안 해, 우리 헤어지지 말자, 응?”

“하 한번 생각해 볼게, 근데 기대는 하지 마.”

정난희가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성격과 다르게 망설였다. 어떻게든 정난희를 잡아보려는 미련 가득한 문승협에게 빈틈으로 비쳤다. 문승협은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 공략하였다. 확실히 답변치 못한 정난희얼굴에 난감함이 배어있었다.

문승협은 기대 말라는 발언에 의미두지 않았다. 한번 생각해 보겠다는 말만 받아들였다. 둘의 만남을 다시 시작하는 것으로 기정사실화하고 그리 인식했다.

“우리 언제 만나? 아니다, 네가 만나자고 할 때까지 그냥 기다릴게.”

“오빠, 나 생각할 시간 좀 줘.”

“알았어, 그래, 그럴게.”

정난희는 생각지도 못한 문승협행동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모습이 가여웠다.

문승협이 애처로이 바라보는 정난희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어깨를 껴안으면서 입 맞추려 하였다. 정난희가 고개를 돌리며 가볍게 밀쳐냈다.

“그럼 한 번만 안아 볼게.”

“싫어.”

“한 번만, 응?”

“…….”

정난희가 냉정히 거절하지 못하고 채근하는 문승협에게 몸을 맡겼다. 꼭 끌어안은 품에 잠깐 안겼다가 곧 떨어졌다. 잘 지내라며 작별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문승협은 정난희와 다시 만난다는 기쁨에 환히 웃으며 보냈다. 골목을 돌아서는 정난희를 보고서야 발길을 돌렸다. 정난희와 완벽한 재결합이 결정되지 않았는데도 확신에 찼다. 독서실로 향한 발걸음이 전보다 훨씬 가벼웠다. 칠흑처럼 어둡고 지옥 같던 세상이 밝고 아름다워 신기했다. 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대 사랑하는 난 행복한 사람, 잊혀질 땐 잊혀진대도. 그대 사랑받는 난 행복한 사람, 떠나갈 땐 떠나간대도. 어두운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다가, 그대를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이 세상에 그 누가 부러울까요, 나는 지금 행복하니까~’

‘이문세의 나는 행복한 사람’을 흥얼거리며 온갖 상상에 빠졌다. 정난희와 키스하다 욕망을 제어하던 순간들, 대학 가서 관계하겠다며 정난희가 설득한 기억. 노래가 끝날 즈음 후회도 몰려왔다. 좀 전 정난희에게 투정 부리고 보챈 일을 반성하였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을 새삼 실감했다.

정난희는 책상 앞에 앉아 고민에 잠겼다. 잘 이겨낼 줄 알았던 문승협이 예상외로 크게 흔들렸다. 문승협친구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와 오늘 본 문승협을 생각하니 의구심이 들었다. 잘할 거야 잘 될 거야라는 확신이, 잘못되면 어쩌나 잘못될 수도 있겠다는 불신으로 기울었다.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문승협의 슬픈 눈망울이 자꾸 떠올라 가슴이 미어졌다. 앞으로 대학진학까지 1년 반 동안 참가해야 할 전국무용대회가 두세 개 있었다. 문승협과 재회할지 말지를 놓고 고뇌하였다. 무용도 그렇지만 부모생각에 심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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