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첫사랑? - (44)
문승협은 여느 고3수험생처럼 공부에 매진하며 지냈다. 그나마 유일한 낙이 일요일아침에 정난희전화를 받는 것이었다. 기다리던 전화가 없으면 며칠 동안 속상했다. 오늘도 그 여러 날 중 하루였다.
“아야, 뭐뭐를 짜라고?”
“앞으로 300일간 과목별 진도하고 매일공부시간.”
“오매 머리 아픈 거.”
문승협과 친구들이 대입학력고사 300일을 앞두고 결연한 자세로 머리를 맞댔다. 천영기가 일일생활계획표를 세우면서 한탄하였다.
“에이 시벌, 자연 따라 살믄 될 것인디, 무담시 시계를 처 만들어갖고는 말이어.”
“그것이 뭔 말이대?”
“아야, 시계를 안 만들었으믄, 시방 우리가 이따구 시간표나 짜고 있겄냐?”
“하하하, 뭔 짜증이냐, 그냥 공부하기 싫다고 해라.”
“공부도 하기 싫은디, 거그다 계획까지 세울란께는 대가리가 터져 불겄다.”
“하긴, 시계가 없었으믄, 계획이라는 아리까리한 개념이 없을지도 모르제.”
“근데 영기야, 너 연경이는 만나봤냐?”
“몰라 시끼야, 대그박 아파죽겄는디, 씨잘데기 없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언제 만났어?”
“…….”
“대화는 잘 나눴고?”
“모른단께.”
“뭐라고 했어, 연경이는 괜찮아?”
“야그 나눌게 뭐 있냐, 이미 내 맴이 떠부렀는디.”
“만나기는 만났구나, 그렇지?”
“니 말 듣고 만났다가, 연경이가 울고 불고 해서 챙피해 디져분줄 알았다.”
문승협은 천영기와 류연경의 만남결과를 알고 싶었으나 더 이상 묻지 못했다. 남녀관계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라는 정난희지침 때문이었다. 그래도 천영기가 무시할 줄 알았는데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
대입학력고사 300일 작전수립이 대충 마무리될 즈음, 이담이 기념으로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하였다.
“아그들아, 내가 쏠 텐께 맘껏 묵어. 우리의 300일 작전을 위해 이 떡볶이로 건배 한번 하끄나?”
“아따, 사삭스럽게 별 짓을 다한다 진짜.”
“하하 그래, 해서 나쁠 거 없잖아.”
“우리 미래를 결정할 대입 300일 작전성공을 위하여.”
“위하여.”
“열심히 해갖고, 각자 원하는 대학에 붙어 불자잉.”
“떡볶이가 매콤하다. 아주머니, 여기 오뎅도 주세요.”
“승협아, 니 OB베어스팬이제?”
“응, 맞아.”
“OB베어스가 KBO 6개 구단 중에 최초로 실내연습장하고 잔디구장을 완공했다드라?”
“아 맞다, 오늘이 그날이네.”
문승협은 OB베어스원년팬이기에 관련뉴스를 빼놓지 않았다. 저녁시간에 가까워 허기진배를 채웠다.
너나없이 대입학력고사 300일 작전에 따라 공부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이번 주도 정난희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 문승협에게 심란한 일요일아침이었다. 2주 뒤 밸런타인데이에 만나길 기대하였지만 연락이 없어 답답했다. 정난희집에 전화해 볼까 하다 화낼게 뻔해 자포자기하였다.
2월 첫날 ‘팀스피릿 83 한미합동훈련’이 개시됐다. 북한이 준전시상태를 발령하여 대응했다. 한반도에 긴장이 감도는 가운데, 정부가 설명절을 일주일 앞두고 석유값을 조정하였다. 고급휘발유값 1,060원을 890원, 일반휘발유값 740원을 660원, 등유값 292원을 297원, 경유값 278원을 283원으로 공시했다.
정난희에게 3주째 감감무소식이었다. 민족 대명절 설날준비로 세상이 바쁘게 돌아갔다. 문승협가족은 지난해와 달리 장남 문경준이 있는 목포집에서 설을 보내기로 하였다. 할머니 박옥춘이 3일 전부터 와서 큰며느리 이항리와 시장을 다니며 음식장만에 분주했다.
설을 하루 앞두고 민족대이동이 시작됐다. 오전에 할아버지 문재환 뒤를 이어 서울작은아버지 문경빈가족과 부산작은아버지 문경철가족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설날아침 포항작은아버지 문경민가족이 들이닥쳤다.
박옥춘과 이항리가 함께면 늘 갈등이 생기는 터라, 문승협은 언제 터질지 노심초사했다. 이번엔 문경민의 설선물이 도화선이었다. 조카들을 위해 ‘롯데팔도강산 종합선물세트’를, 어른들에게 ‘센베이 선물세트’를 건넸다. 문경준이 ‘명절이면 갈비나 소고기정도는 돼야지, 애들도 다 컸는데 과자선물세트가 뭐냐’며 지나가는 말로 하였으나, 박옥춘이 그냥 넘기지 않았다.
“아야, 사 온 사람 성의가 있는디, 니는 형이 돼갖고 그따구 말을 해야 쓰겄냐?”
“허허, 장난 삼아 한마디 했그만 그라요.”
박옥춘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문경빈과 문경철에게 받은 돈봉투를 고의춤에서 꺼내 보이며 또 타박했다.
“느그가 설이라고 이렇게 용돈을 주기나 했냐, 음식장만하는데 돈을 보탰냐?”
“어머니, 뭔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요?”
“으째서야, 내가 뭐 틀린 말 했냐?”
“시장에서 제가 돈을 다 냈잖아요?”
형편 따라 고심 끝에 준비한 선물인데, 성의를 희화화시킨 문경준의 결례 있는 농담이 불을 붙였다. 박옥춘이 얄미운 마음에 돈으로 자존심을 건드렸다. 이항리가 참지 못하고 항변하면서 갈등이 폭발하였다. 남편폄하와 음식장만비용을 부담했는데도 무시한 시어머니말이 억울하였다. 박옥춘은 발끈한 며느리태도가 괘씸했다. 결국 이항리와 문경준의 약점을 꺼냈다. 박준배에게 사기당한 케케묵은 옛날이야기였다. 문경준이 자극받아 큰소리쳤다. 옆에서 지켜보던 형제자매들이 한 마디씩 하면서 확전 되었다. 치고받지만 않았지 언쟁하며 서로 상처 입히기에 바빴다. 가장웃어른 문재환은 못마땅해 혀끝만 찰뿐 방관하였다. 오랜만에 사촌들을 만나 잘 놀던 손주들이 기겁했다. 어른들의 커진 목소리에 눈치 살피기에 급급하였다. 어른들은 열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문승협이 급히 사촌동생들을 방으로 이끌었다. 우리도 알 것은 다 안다는 사촌동생들 표정을 보았다. 부모논쟁만으로도 아이들이 불행을 느낀다는 사실을 어른들은 왜 모르는지 원망스러웠다. 서울작은엄마 윤옥희가 아이들을 생각해서 그만하라 했으나 누구도 듣지 않았다. 뒤늦게 부산작은엄마 정영숙이 안심시키려고 아이들에게 갔다. 다툼양상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항상 그렇듯 부모형제자매들이 합세하여 문경준과 이항리를 다그쳤다. 문경준이 이성을 잃고 흥분해 쌍욕을 하기에 이르렀다. 문승협이 깜짝 놀라 허겁지겁 거실로 나갔다.
“아빠, 제발 그만하세요. 아빠마음 제가 잘 알아요, 그러니 이제 화 푸세요.”
“아야, 니가 뭐 안다고 끼어드냐 끼어들길.”
“작은 고모, 저 건너방에 있는 애들도 다 아는데요?”
“너는 저쪽 방에 가있어, 어른들일에 참견 말고, 얼른.”
“왜 다들 우리 아빠한테만 뭐라 하세요, 아빠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오매오매, 지도 새끼라고 즈그 애비 편든다잉.”
“할머니, 왜 아빠를 미워하세요?”
“이노무 자식, 어디 할머니한테 대드냐?”
“작은 아빠, 대드는 게 아니고 여쭤 보는 거예요, 다 똑같은 자식인데 도대체 왜 아빠가 싫은지요.”
“어허, 어디서 꼬박꼬박 말대꾸냐, 엉?”
“인자 그만들 해, 조카한테 부끄럽지도 않냐? 외숙한테 언제 가야 되는 지나 알아봐.”
할아버지 문재환이 보다 못해 나섰다. 진외가큰할아버지 박동후회장집에 전화하라는 말에 급속히 소강됐다.
문승협은 엄마아빠를 궁지에 몬 어른들에게 서운하였다. 국민학교 때 있었던 아빠친구 박준배에게 사기당한 사건까지 소환하다니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빠의 잘잘못과 상관없이 그냥 자신의 아빠니까 이해했다. 어른들에게 아빠 좀 이해해 달라는 간청이었다. 무엇보다 지켜보고 있는 아이들을 의식하길 바랐다.
문재환호통에 다들 각자 하던 일을 하러 뿔뿔이 흩어졌다. 서울작은아버지 문경빈이 문승협을 정원으로 데려갔다. 서울작은엄마 윤옥희가 뒤따랐다.
“승협아, 니 용기가 가상타잉.”
“…….”
“으째, 어른들이 아빠한테 욕한께 화나디?”
“갑자기 아빠가 불쌍했어요, 아빠가 화내는 것도 싫고.”
“잘했다, 잘했어. 아들이 아빠를 이해하고 편드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 간.”
“다 이해하는 건 아니에요, 아빠 잘못도 있잖아요.”
“허허, 그래도 느그 아빠가 쪼까 부럽다야.”
“죄송합니다.”
“그래, 알믄 됐어. 어른들이 말씀하시는데 끼어들거나 대꾸하는 것은 잘못인께.”
“괜찬해, 겉만 어른이지, 속은 승협이 니 보다 못해.”
“…….”
“어른들이라고 다 맞간디, 더 모순이 많애. 모순이 뭔 말인지는 알지?”
문경빈이 타이르는 중에 윤옥희가 옆에서 문승협을 두둔하였다. 문승협은 조금 전 어른들에게 말할 때는 엄청 떨렸지만, 문경빈과 윤옥희에게 위로받고서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점심때 시댁에서 설을 지낸 큰고모내외가 방문했다. 큰 고모부 이민현이 문승협에게 물었다.
“이제 고3인데, 대학입학시험공부는 잘하고 있나?”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서울대는 갈 수 있냐 으짜냐?”
“허허, 우리 집 장손인디 서울대는 당연히 가야제.”
“음마, 니가 그렇게 공부 잘하냐?”
“서울대는 뭐 아무나 간다우.”
“서울대는 무슨, 여그 목포대만 가도 되제.”
“등록금이랑 학비가 이만저만 아닌디, 돈은 있고?”
“대학 안 가도 산께 대충 해.”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괜히 쓸데없는 말은 삼가해.”
이민현의 격려차원질문에 너도나도 껴들었다. 아무리 좋은 충고도 시험을 앞둔 당사자에게 엄청난 부담을 준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다. 서울작은아버지 문경빈만 그만하라고 막았다. 친척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문승협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불현듯 대학입학학력고사시험이 두려웠다.
다행히 진외가큰할아버지 박동후회장집 방문시간이 되어 화제가 돌아갔다.
박동후회장집에 가서도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박옥춘이 남편 문재환험담은 기본이었다. 아들 문경준과 며느리 이항리를 흉보는 것은 필수였다. 바람, 불성실, 큰아들큰며느리 역할부족 등 변함없는 레퍼토리였다. 박동후회장내외가 문재환가족에게 세배받은 후 걱정석인 덕담과 당부도 별반차이 없었다. 특별한 소재라면 문승협의 대학입학시험으로 또 한 번 왈가왈부하였다. 문승협은 이야기 듣는 내내 숨이 막혔다.
진외가큰할아버지 박동후회장내외, 정치하는 진외가작은할아버지 박동일, 큰 당숙부부 박일환과 이숙현, 육촌동생들 박율·박욱·박철, 작은 당숙부부 박일서와 강희영, 임집사와 장씨, 해남댁과 순영까지, 진외가증조할머니만 돌아가시고 없을 뿐 태선화학의 일가와 식솔들은 여전히 탈없이 잘살았다.
진외가를 나와서 문재환과 문경준만 본가에 갔다. 친척들은 명절휴일이 짧아 각자 생활터전으로 출발했다.
문승협은 떠난 사촌동생들과 가족 간 다툰 일을 떠올렸다. 서울 사는 문승희와 지적장애가 있는 문승현, 부산 사는 문승지와 간질을 앓은 문승대, 포항 사는 세 자매 문경은·문경수·문경숙, 사촌동생들이 많이 성장해서 뿌듯하였다. 여러 친척들을 오랜만에 만나 즐겁고 행복했어야 할 명절이 사촌동생들에게 어떻게 기억될지 염려됐다. 명절만 되면 벌어지는 갈등과 지나친 간섭. 가족 간 싸우고 부담을 주는 것이 풍습인지, 진정한 명절의미가 궁금하였다. 도대체 조상님들이 명절을 만든 이유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명절인지, 매번 이런 식의 명절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다음날아침 문재환과 박옥춘도 순화광산으로 떠났다. 이항리가 친정에 못 간 것을 못내 아쉬워하였다. 문승협은 오랜 기간 찾아뵈지 못한 외할머니가 그리웠다. 외갓집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치유되고 평온이 찾아왔다. 민족 대명절 설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점심때가 되자 이항리가 밥상을 차렸다. 식사하면서 명절동안 벌어진 일들에 한마디 없었다. 문승협이 조심스레 아빠에게서 별말 없었는지 물었다. 어른들 다툼에 껴들었던 행동이 내심 껄끄러웠다. 칭찬은 아니라도 나무랄 줄 알았다. 질책하면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했으나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마무리 못한 숙제를 남겨놓은 마냥 불편해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였다.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앞에 앉았다. 다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고3신분이라 명절에 친인척들에게 많은 말을 들어서였다. 심한 압박감에 머리가 지끈지끈 쑤셨다. 대학입시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뇌리 깊숙이 파고들었다. 부담감을 떨쳐보려고 머리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불쑥 정난희가 떠올랐다.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인데도 연락이 없어 섭섭하였다.
‘난희를 만나러 무용연구소 근처에 가서 기다려볼까? 아니면 무작정 난희집 앞에서 기다려볼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다짜고짜 당장 코롬방제과점으로 오라는 천영기전화였다.
문승협이 도착했을 때는 이담과 한현진이 먼저 와있었다. 곧이어 천영기가 들어왔다.
“나한테 빨리 오라고 숨넘어가더니, 너는 늦게 오냐?”
“쪼깐 일이 있어 갖고 그랬어. 다들 설은 잘 보냈냐?”
“아따, 말도 마라잉. 간데 마다 고3이라고 한 마디씩 한디, 아조 괴로워서 디저불겄드라.”
“긍께 말이어, 즈그들이 대신 대학시험 쳐줄 것도 아니믄서, 별말을 다하드란께 그냥.”
“연경이는 언제 오냐?”
“승협아, 저 느자구 없는 시끼랑 연경이랑 째졌단다야.”
“언제 적 일인디 아직도 그 가시나 이름을 들먹이냐?”
“나쁜 시끼, 넌 벌 받을 거다.”
“영기 저 시끼가 중학교 때부터 사귄 가시나들이 아마 한 트럭은 될 것이다.”
“아야 시끄럽다잉.”
“근데, 왜 오라고 한 거야?”
“아, 누구 좀 소개시켜줄라고.”
“누구?”
“쪼까 기다려봐, 곧 올 때 됐어.”
잠시 후 천영기가 손짓하였다. 옷차림새와 꾸밈이 무척 성숙해 보이는 여자가 들어오고 있었다.
“와따메, 그 유명한 헤실이를 여그서 다 본다잉.”
“내가 말 하디야, 나의 친한 친구라고.”
“느그가 빼빼로삼총사라서 알긴 하제만, 요로코롬 진짜 친한지는 몰랐어.”
“니는 으째 서방님 말을 안 믿냐.”
“서방님?”
“아, 인사해라, 이번에 나랑 사귀기로 한 내 각시여.”
“백미정이여, 명정여고3학년인디, 실은 1년 꿇었어.”
“만나서 반갑소, 저는 이담이어라.”
“그래도 나이는 같은께, 말 편하게 해.”
“저는 한현진이어요.”
“현진이도 말 편하게 해, 내서방님 친구의 각신께.”
“헤실이 니는 인사 안 하냐?”
“아 안녕하세요, 문승협입니다.”
“알제, 알다마다. 아따, 말 편하게 하란께?”
“저는 이게 편해요.”
“느그는 학교도 다른디, 으짜다가 친해졌대?”
“말하믄 길어, 오늘은 1절만 해.”
“그냥 쪼깨 아는 갑다 했는디, 느그들 셋 다 같이 본께 여간 반갑다야.”
“넌 언제부터 서방님, 각시, 그런 표현을 썼냐?”
“으째 니 말이 좀 삐딱하다?”
“그럼 내가 말에 감정을 제대로 실었네.”
문승협이 못마땅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이담이 문승협팔을 잡아 만류했다. 분위기가 급속이 냉랭해졌다. 백미정은 대수롭지 않게 밸런타인데이선물이라며 커다란 선물꾸러미를 천영기에게 건넸다. 천영기가 문승협을 향에 찡그리던 눈살을 거두고 포장을 풀었다. 안에 따로 포장된 상자 세 개가 있었다.
“승협이랑 담이랑 하나씩 줘, 초코렛이어.”
“난 괜찮아요, 이미 받았어요.”
“나 나도 현진이가 줘서 있어.”
“미정이가 느그 생각해서 준비했는디 그냥 받아라.”
“발렌타인데이가 아무한테나 주는 날도 아니고, 또 준다고 다 받아야 하는 날도 아니잖아?”
“니 오늘 참 거슬린다잉?”
“나는 발렌타인데이의미를 존중할 뿐이야. 담이야, 현진아, 내 말이 틀렸니?”
“아니.”
“아 아니.”
“느그들 내가 싫으냐?”
“솔직히 말하면, 싫은 것보다도 좋아하기 어렵네요.”
“으째서야?”
“이유까지 말할 정도로 우리가 친하지 않은 것 같아요.”
“승협이 니, 오늘따라 이상하게 왜 그냐?”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네가 더 이상한데?”
“미정아, 일어나라잉, 가자.”
백미정이 천영기재촉에 엉거주춤하더니, 앞장서 나가는 천영기를 뒤쫓아갔다.
“승협아, 니 맘은 알겄는디, 좀 심한 거 아니여?”
“현진아, 네가 연경이 입장이면 어떻겠어?”
“하기사, 연경이 생각하믄 맘이 쪼까 글타.”
“아야, 그래도 영기가 결정하고 선택한 것인디?”
“뭐라고야, 담이 니도 영기멩키로 저럴 거여?”
“아 아니. 현진아, 내가 그런다는 것이 아니고.”
“시끄러, 친구 따라 강남 간다드만은.”
“하하, 그렇다고 너희들이 싸울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암튼, 류연경에 대한 문승협의 의리는 인정해 주께.”
“그라고 본께 말이여, 승협이 니, 으째 아까 현진이가 준 초코렛은 받았냐?”
“현진이 마음을 아니까. 현진아, 맞지?”
“잉, 내 마음 받아줘서 허벌라게 조으다, 호호호.”
“뭣이어, 느그 시방 내 앞에서 뭐 하는 짓이여.”
“음마, 담이 니 질투하냐?”
“허허허, 질투는 무슨, 느그 하는 짓거리에 내가 사대 좀 맞춰 준거제.”
“너희들 백미정 이름은 들어봤니?”
“그 아그가 1년 꿇어서 그란가, 나는 백미정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어야.”
“나도 전혀 못 들어봤어, 그 정도 유별나면 한 번쯤 들어봄 직 한디 말이어.”
문승협은 천영기와 류연경이 결국 헤어져 씁쓸하였다. 정체를 모르는 백미정이 달갑지 않았다.
이담과 한현진이 백미정을 만난 소감을 조심스레 꺼냈다. 파마인지 고대기를 썼는지 머리가 빠글빠글했다. 화장을 하고 립스틱을 발랐다. 언니코트를 걸친 듯한 데다, 안에 입은 블라우스단추를 풀어 가슴골이 보였다. 짧은 치마에 팬티가 보일랑 말랑하였다. 정신없이 말이 많으면서 눈치가 없었다. 백미정하면 야한 단어들이 떠오른다고 했다.
문승협시선에서 바라본 백미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날라리 같은 고3여학생이었다. 외모나 선입관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되지만 어느 한 군데 호감가지 않았다. 한 살 많은 연상녀는 그렇더라도 초면에 반말을 일삼아 거부감마저 들었다. 첫 대면인데도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착하고 예쁜 류연경을 버리면서 선택한 여자친구치고는 실망스러웠다. 친구의 여자친구이고 당사자가 좋다는데 왜 신경 쓰냐고 할 수 있으나, 류연경을 잘 아는 입장에서 함께하였던 시간과 복합적인 이유로 백미정이 싫었다.
셋은 류연경과 의리에 미안함이 컸다. 오지랖을 넘어선 친한 친구에 대한 애정이었다.
문승협은 문득 천영기가 많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느꼈다. 알게 모르게 변한 천영기를 체감하지 못한 이유와 언제부터 그랬는지 곰곰이 유추해 보았다.
작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본가가 섬이라 목포에서 자취와 하숙하는 염기형과 윤공규를 만난 후부터였다. 순진하던 천영기가 그들과 어울리며 점점 나쁜 쪽으로 물들었다. 천영기의 적지 않은 일탈로 나쁜 소문이 돌았다. 여학생들에게 공부 잘하고 예쁘장한 착한 남자들이라 불리던 빼빼로삼총사이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문승협은 이담커플과 헤어지고 갈 곳을 잃었다. 혹시나 싶어 무용연구소 앞에서 서성였지만 그림자도 없었다.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이니 뒤늦게라도 연락 올지 모른다고 추측했다. 정난희전화를 기대하며 걷듯 뛰듯이 집으로 갔다. 여자친구가 있음에도 밸런타인데이를 혼자 보내는 서글픔에 천영기가 부러웠다.
문승협이 집에 도착해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 하며 밤늦게까지 기다렸으나, 정난희에게서 전화는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문공부가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청이전공사를 비롯해, 독립기념관, 예술의 전당, 국악당, 국립현대미술관을 연내 착공한다고 밝혔다. 시민들이 문화예술진흥소식에 쌍수를 들어 반겼다. 정부가 서울일부지역 민간아파트 채권입찰제실시 등을 골자로 ‘부동산투기억제’를 확정하였다. 국세청은 서울개포 등 36개 지역을 부동산투기억제 특정지역으로 고시했다.
문승협이 한 달째 무소식인 정난희생각에 전전긍긍하였다. 너무 보고 싶은 마음에 무용연구소 근처에서 진을 쳤다. 마침내 커다란 무용가방을 메고 버스에서 내리는 정난희를 발견했다. 작심하고 기다린 보람에 기쁨이 반, 예고 없이 나타나면 싫어할 정난희태도에 걱정이 반이었다. 다행히 정난희가 먼저 문승협을 발견하고 주위시선을 피할만한 골목으로 유도하였다. 문승협은 길 건너 먼발치서 뒤따라갔다. 정난희가 무덤덤하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주했다.
“오래 기다렸어? 언제부터 기다린 거야?”
“얼마 안 됐어. 미안, 여기서 기다리면 싫어할 줄 아는데, 달리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
“네가 전화도 안 해주고, 보고 싶어서 그랬어,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좀 그만해, 미안할만한 행동을 안 하면 되잖아, 안 그래?”
“나도 참다 참다 온 거야, 미안해.”
“또, 또 미안하다고 한다.”
“알았어, 미안해.”
“이그, 참나.”
“사랑해, 나 한번 안아주면 안 돼?”
“어쭈, 이젠 대낮에 대놓고 요구한다?”
정난희가 마지못해 주변을 살피더니 무용가방을 멘 채로 문승협을 포옹하였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사랑해.”
“…….”
“사랑해, 난희야.”
“자, 이제 됐지?”
문승협이 꽉 안으려 하자, 정난희가 밀어냈다. 문승협은 좀 더 같이 있고 싶은 욕심과 벌써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이 교차했다.
“으응, 만족해.”
“이제 가서 공부 열심히 해, 내 생각도 하지 말고.”
“응, 그럴게. 근데, 네 생각은 할 거야.”
“어허, 내 말 무슨 뜻인지 몰라?”
“알아, 그래도 네 생각까지 하지 마라는 건 너무해.”
“나 생각할 시간을 줄여서라도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알았어, 알았다니까.”
“알았으면 어서 가.”
“네가 먼저 가.”
“그래 알았어. 또다시 여기서 기다리면, 알지?”
“그럼 약속한 일요일아침 전화를 빠뜨리지 마.”
“앞으로는 전화도 자주 못할 거야.”
“왜?”
“오빠, 고3이야, 대학 안 갈 거야?”
“무슨, 전화받는다고 대학 못 가?”
“내가 오빠공부를 방해한 잡념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네가 무슨 잡념이야, 나한테 활력소지.”
“오빠가 자꾸 이런 식이면, 나 헤어질 거야.”
“여 여기서 갑자기 그런 말이 왜 나와?”
“생각이 그렇다고. 딴소리 말고 내 말대로 해. 대신 모레 일요일에 오빠집에 놀러 갈게.”
“진짜?”
“응, 그래도 되지?”
“그럼 당연히 되지.”
정난희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문승협을 뒤로하고 무용연구소로 걸었다. 문승협은 정난희를 끝까지 지켜보다 즐거운 기분으로 발길을 옮겼다. 희열도 잠시 무언가 가슴에 덜컥 걸렸다. 지나친 밸런타인데이를 내색하거나 변명이 없는 건 상관없었지만, 사랑한단 말을 몇 번하였는데도 정난희가 사랑한다고 대꾸해주지 않아 서운했다. 헤어짐을 무기로 겁주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 께름칙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