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택트>가 던진 질문
영화 <컨택트>: 언어로 열리는 세계
12개의 외계 비행선이 지구 곳곳에 착륙한다. 미국 정부는 외계 생명체와의 소통을 위해 언어학자 루이스를 파견한다. 루이스는 물리학자 이안과 함께 몬태나에 도착한 비행선 내부로 들어가고, 유리막 너머에서 외계 생명체 ‘헵타포드’를 마주한다. 그들은 먹물처럼 퍼지는 원형의 문자를 통해 의사를 전달한다. 루이스는 그들의 언어를 해석하며 구조를 이해하게 되고, 동시에 이상한 경험을 하기 시작한다. 미래의 사건들이 마치 기억처럼 떠오르는 것이다. 헵타포드의 언어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이 아니다. 시간의 비선형적 특징을 가진다. 루이스는 그들의 언어를 익히면서 시간에 대한 인식과 사고방식이 바뀌는 현상을 겪는다.
이 이야기는 드니 빌뇌브의 영화 <컨택트>의 초반부 줄거리다. 언어학자 루이스가 외계 언어를 습득하면서 겪는 시간 인식의 변화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단지 다른 언어를 배웠을 뿐인데, 그녀는 어떻게 과거와 미래를 뒤섞어 경험하고,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기억처럼 떠올리게 되었을까. 이는 단순한 SF적 상상이 아니다. 언어가 사고와 인식을 구성한다는 인문학적 물음에 가깝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라는 하이데거의 문장이 떠올랐다. 인간은 언어 안에서 사고하며, 그 구조 안에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단순히 말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루이스가 외계 언어를 통해 미래를 경험하게 되었듯, 우리도 지금 사용하는 언어가 무엇을 가능하게 하고 무엇을 지우는지 자각할 필요가 있다. 언어는 생각을 이끌고, 세계를 형상화한다. 이 영화는 언어가 인식의 세계를 어떻게 달라지게 하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고전물리학, 우리가 배운 세계의 질서
나는 학창 시절, 세상이 어떤 규칙으로 움직이는지를 배웠다. 물체에 힘을 가하면 그 힘의 크기와 방향에 따라 가속도가 생긴다는 뉴턴의 법칙. 우리는 그것을 ‘뉴턴의 제2법칙’이라 불렀다. 이 간단한 물리 법칙은 과학 교과서 속 이론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기본 틀이기도 했다. 힘이 작용하면 움직임이 생기고,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따르며, 충분한 정보를 알면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다는 믿음. 세상은 마치 하나의 정밀한 시계장치처럼, 모든 일이 정해진 순서대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가 쓰는 언어에도 깊이 배어 있다. 언어는 과학적 질서 위에 형성된 체계이며, 인간은 세상을 인식하는 틀 안에서 언어를 발전시켜 왔다. 우리가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것도, 결국 그러한 언어를 통해서다. 뉴턴이 설명한 세계의 질서를 우리는 ‘고전물리학’이라고 부른다. 이 세계관 아래에서 우리의 사고와 판단, 언어의 구조가 자리 잡았다. 우리가 배운 것은 단지 과학의 법칙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법칙에 따라 세상을 사고하고 말하는 방식을 결정했다.
현대물리학의 세계관과 헵타포드 언어
하지만 세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20세기 초, 물리학자들은 기존의 설명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들을 마주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관측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입자의 위치와 운동을 동시에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보어는 입자가 동시에 여러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의 발견은 우리가 믿어왔던 결정적이고 예측 가능하다는 세계관에 균열을 일으켰다. 세계는 정해진 흐름이 아니라, 확률과 가능성의 중첩 속에 놓여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이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물리학을 고전물리학과 구분해 현대물리학이라 부른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 현실은 관측되기 전까지 확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보냈다고 해보자. 답장이 올지 안 올진 아직 모른다. 이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아직 메시지를 읽지 못했을까?” “아니면 나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걸까?” 내가 답장을 확인하기 전까지, 상대방의 반응은 하나로 고정되지 않는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 가능성은 하나로 수렴된다. 이처럼 현실은 관측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여러 가능성의 상태’로 열려 있다. ‘관측’이 ‘결정’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관측되기 전까지 확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루이스가 겪는 시간 인식의 변화는 현대물리학의 시초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가깝다.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시간은 절대적인 흐름이 아니라, 관측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 헵타포드의 언어는 바로 이런 구조를 닮아 있다. 그들의 언어는 직선적이지 않고, 시작과 끝의 구분도 없으며, 시간 전체를 하나의 장면처럼 받아들이게 만든다.
루이스는 헵타포드의 언어를 익히며 인식의 전환을 경험한다. 그녀는 언어를 통해 시간을 직선으로 보지 않게 되고, 결국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기억처럼 경험하게 된다. 정해진 원인에서 출발해 결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이 열린 상태에서 세계와 마주하는 방식. 그것이 루이스가 헵타포드 언어와 함께 익힌 새로운 감각이었다. 이 언어적 전환은 곧 사고방식의 전환이기도 했다.
고전물리학적 세계관과 현대물리학적 세계관의 비교
과학 이론으로 언어와 사고방식을 설명하려는 접근은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조금 더 단순하게 비교해 보자. 고전물리학은 세상을 닫힌 체계로 본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고, 사건은 원인과 결과의 연결 속에 놓인다. 충분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미래도 예측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외부에서 세상을 관찰하는 존재다. 세계는 하나의 정답을 품고 있고, 우리의 역할은 그 답을 찾아가는 것이다.
반면 현대물리학은 세계를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 바라본다.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고, 사건은 관측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현상은 관측자의 위치와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현실은 관측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확정되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외부의 관찰자가 아니다. 세계의 의미를 구성하고 변화시키는 참여자다. 이 관점에서는 답을 찾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방향을 설정한다. 모든 판단은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이 두 세계관은 단지 과학적 설명의 차이를 넘어, 사고방식과 언어의 구조를 가른다. 고전적 사고는 선형적 문장을 만든다. 원인과 결과, 문제와 해결, 시작과 끝처럼 뚜렷한 구조를 따르는 방식이다. 하지만 현대적 사고는 중첩과 맥락을 요구한다. 하나의 사건에는 여러 해석이 가능한다. 모든 것은 관측자의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고전물리학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의 언어는 세상을 닫힌 체계로 설명하고, 사고방식 또한 그러한 세계관에 따른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점점 더 현대물리학의 세계에 가까워지고 있다.
다가올 언어, 다가올 사고
하이데거에 따르면 언어는 단지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사고의 구조이자, 존재를 경험하는 틀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가 변한다면, 그에 맞는 언어도 필요하다. 더 이상 원인과 결과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다면, 정답 중심의 언어로는 그 복잡함을 감당할 수 없다. 언어가 변하지 해야 사고가 현실을 따라갈 수 있다.
이미 우리는 그런 언어를 조금씩 실험하고 있다. 다의적이고, 논리를 넘어서는 시의 언어가 대표적이다. 한 문장 안에 여러 층위의 의미가 겹쳐 있고, 해석은 고정되지 않는다. 밈과 이모티콘, 맥락으로 읽는 온라인 언어 역시 기존의 문법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진화된 언어다. 예를 들어, '이게 맞아?'라는 단순한 질문 문장에 웃는 표정의 짤 하나만 첨부해도, 그것은 '진심인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의미 층위를 가진다. 언어는 점점 더 흐르고, 흔들리고, 개방된다.
다가올 언어는 이런 흐름을 더욱 확장할 것이다. 명확함보다는 여백을, 규정보다는 감응을, 통제보다는 공명을 전제로 하는 방향으로. 그것은 단지 표현의 전환이 아니다. 존재 방식의 전환이다. 어떤 언어는 세계를 고정하고, 어떤 언어는 세계를 열어준다. 우리가 말하는 방식이 바뀐다면, 우리가 느끼고 살아가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세계를 살아갈 것인가
루이스는 외계 언어를 배운다. 그러면서 사고가 바뀌고, 시간의 인식도 달라진다. 그녀는 미래를 미리 '기억'하지만, 모든 것을 알면서도 다시 그 길을 택한다. 아픔과 기쁨이 함께 있는 미래를 향해 걸어간다. 그것은 운명이 아니다. 인식의 방식이 달라지며 생겨난 선택이다. 언어가 그녀에게 준 것은 단지 새로운 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계였다.
영화 <컨택트>는 결국 이렇게 묻는다. 언어를 바꾸면, 우리가 사는 세계도 달라질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언어를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인과와 정답의 언어로 말하고, 세계를 하나의 흐름 안에 고정하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더 복잡하고, 더 다층적이며, 더 예측할 수 없다. 그 세계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말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중첩되고, 열려 있으며, 아직 정의되지 않은 말들이 바로 그 가능성을 품고 있다.
외국어를 배웠을 때 가장 크게 다가온 변화는 단순한 기능의 확장이 아니었다. 사고의 태도가 확장되는 경험이었다. 언어를 바꾼다는 것은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일이다. 어떤 말은 세계를 가두고, 어떤 말은 세계를 연다. 지금 우리가 쓰는 언어는 무엇을 가능하게 만들고,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할까. 루이스가 언어를 통해 시간을 다시 살았듯, 우리도 언어를 통해 세계를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 우리가 어떤 언어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