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 부치는 두 번째 편지
조장희 선생님께 보내는 두 번째 편지
오늘은 한결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이틀에 한 번씩 달리기를 하다 보니 날씨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게 되는데, 오늘 아침에는 7km를 가볍게 달리며 바람이 상쾌해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께 일요일에는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일간스포츠 런서울런 마라톤 대회에 하프코스로 출전했습니다. 올해 하반기 첫 대회였는데 날씨가 무척 더워 마지막 5km는 열 걸음마다 걷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눌러가며 완주했습니다. 그래도 이 대회를 시작으로 앞으로 여러 마라톤 대회에 나설 계획이라, 이제는 더 자주 달리며 준비하려 합니다.
선생님께 첫 편지를 드린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 여름휴가로 제주도에도 두 번 다녀오고, 도서관에 앉아 글쓰기에 몰두하다 보니 회사에 다니던 때보다 더 바쁘게 지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무더운 여름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시원한 곳으로 휴가를 다녀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여름이 덥고 힘들어도 좋아하는 스포츠와 바닷가의 낭만이 있어 늘 특별하게 기억됩니다. 그래서 매년 가을이 시작되는 이맘때가 되면 여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쉽게 느껴집니다. 지금처럼 시원한 바람이 부는 순간에도 여전히 그런 마음이 듭니다.
지난주에 제홍이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제홍이도 저와 비슷한 처지였어요. 유년 시절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아버지였고, 고등학교 입학 무렵에는 집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저희 아버지보다 더 이른 시기에 가족과 헤어진 셈이지요. 이후로 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얼마 전 호스피스 병동에 계시다는 소식을 알려왔다고 합니다. 원망은 희미해졌지만 이제 와서 다시 만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는 제홍이의 고민에, 저는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뵙고 오라고 권했습니다. 장례식 때도 자신이 상주로 서는 것이 옳은지 망설이기에 다시 한번 등을 떠밀었습니다. 결국 차남인 제홍이가 상주가 되어 아버지의 형제, 자매들과 장례를 치렀고, 저는 제홍이와 함께 화장장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선생님, 제가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일을 자세히 말씀드린 적은 없지요. 사실 제홍이와 상황이 무척 닮아 있습니다. 저 역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연락을 받았습니다. 스물일곱 살 무렵부터 남으로 지내며 연락을 끊은 상태였는데, 마지막으로 만나보라는 연락을 받고도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동생 인중이가 다녀왔습니다. 며칠 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고, 저는 장례식장에는 갔지만 상주 자리는 맡지 않았습니다. 동생이 대신 장남 역할을 했지요. 심지어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예정된 일본 출장을 떠났습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출장임을 알면서도, 마지막 순간을 보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앞섰습니다. 그렇게 벌써 1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특별히 원망이 남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20년 가까이 연락을 끊고 살았고, 결혼 후에는 혹시 아버지로 인해 제 삶이나 아내의 삶이 흔들릴까 늘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직전에야 연락이 온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끼기도 했습니다. 마음속에서 오래전부터 밀어내 온 터라 막상 죽음을 마주했을 때는 담담하기만 했습니다.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혈연을 떠나 한 사람의 인생으로서, 그가 감당했을 외로움이 떠올랐습니다. 살아 계실 때는 느끼지 못하던 감정이었기에 더 어색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장남인 저에게는 어떤 마음을 가지셨을지 자꾸 궁금해졌습니다. 미안함이었을까, 원망이었을까. 직접 물어보기라도 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남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무능력하고 부족했던 아버지 덕분에 제가 빨리 철이 들어 제 삶을 주체적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1년 반을 지내다 보니, 이번에 제홍이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제 나름대로 판단이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홍이도 저에게 조금은 의지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우리 둘 다 아버지의 죽음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니까요. 그렇게 또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듯합니다.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첫 편지를 읽으며 마음이 오래 머물렀습니다. 은사님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으셨다는 대목에서는 저도 고 이관희 담임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 소식을 받아들이셨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여든다섯의 연세에도 연구서를 세 권이나 내셨다는 이야기는 제게도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저는 공부와 직접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학문이란 결국 성실한 독서와 세밀한 확인의 반복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무도하가’의 출전을 바로잡으셨던 일화 역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학문은 남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다시 살펴보고, 때로는 낯설게 바라보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습니다. 저도 요즘 도서관에서 글을 쓰며 사소한 사실 하나를 확인하기 위해 오래 머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보다 이미 주어진 것을 묵묵히 검증하고 질문하는 일이야말로 학문적 태도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은사님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는 최근 대만 소설가 천쓰홍의 장편소설 『귀신들의 땅』을 읽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새로 시작하는 동네 독서 모임에서 선정된 책인데, 대만 소설은 처음이라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귀신들의 땅』은 대만 중부의 작은 마을 용징을 무대로, 음력 7월 중원절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이 시기는 귀문이 열린다고 믿어져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때입니다. 작품은 이곳으로 귀향한 천씨 일가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막내아들 톈홍이 중심에 서 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동성 연인을 살해하고 복역한 뒤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이 귀향은 단순히 한 개인의 귀환이 아니라 억압된 가족사와 사회사의 상처가 한꺼번에 드러나는 사건으로 그려집니다.
톈홍의 부모와 형제자매들, 그리고 귀신들이 한자리에 모이며 이야기는 다양한 인물의 시점으로 교차됩니다. 가족마다 각자의 상처와 사연이 있고, 그 개인적 고통은 대만 현대사의 폭력과 억압과 맞물려 있습니다. 소설 속 ‘귀신’은 단순한 전설적 존재가 아니라 억압된 기억과 사회적 상처를 은유하는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귀신들의 땅』은 이렇게 한 가족의 귀향과 장례, 귀신과의 공존을 통해 개인의 삶과 사회의 역사, 억압과 기억, 그리고 치유의 문제를 드러냅니다. 가족 서사를 통해 사회적 폭력을 성찰하게 하고, 억울하게 봉인된 목소리를 다시 불러내며 독자에게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화해할 것인지를 묻는 작품입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한번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렸습니다. 저와 아버지의 관계 단절도 한국 현대사가 품지 못한 소시민의 몰락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IMF를 기점으로 아버지의 경제적 능력이 꺾이기 시작했고, 그것이 결국 가족관계에도 큰 상흔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특히 76쪽에 실린 아래 문장을 읽으면서는, 돌아가신 아버지 또한 제 기억 속에서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이관희 선생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어디선가 읽었던 “죽으면 육신은 떠나지만 영혼은 세상에 용해된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필멸하는 인간이 영원히 살 것처럼 속는 것은 세상이 만든 욕망일 뿐, 영혼이나 기억, 사랑처럼 불멸하는 가치에 조금 더 집중하는 것이 전반기를 마친 제 삶의 소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죽음을 다룬 글이나 예술을 의식적으로 찾아 읽게 됩니다.
“나는 귀신이다.
귀신인 내가 귀신에 대해 얘기하는 건 아주 적절한 일 아닐까?
나는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여기서는 그저 혼자 중얼거릴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존재’ 방식은 빛도 아니고 소리도 아니다. 그림자다. 물리 현상이 아니라서 과학으로 실증할 수 없다. 나의 ‘존재’는 계량화가 불가능하고 측량도 할 수 없다. 계산할 수 있는 단위도 없다.
기억은 나의 존재이자 순환의 매개다. 나의 기억과 타인들의 기억을 통해 나는 존재한다. 이곳에 존재하고 현장에 존재하고 여기에 존재하고 저기에 존재한다. 나는 기억에 의지하고 기억에 기생한다. 기억이 있는 곳, 말할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있는 현장이자 구전의 역사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과 구강과 혀끝에 존재한다.”
이 책을 읽으며 대만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국민당 정권이 부패와 독재로 민심을 잃고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뒤, 장제스가 정권을 타이완으로 옮겨 온 나라. 그리고 40여 년 가까운 긴 계엄령 속에서 기득권을 유지했던 나라.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 탓에 대만에 대한 호기심이나 방문 의사가 전혀 없었던 저였습니다. 다만 본토에 사회주의가 들어서면서 중국의 고급 음식 문화가 대만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식도락 여행의 매력으로 저를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 속에서 만난 대만의 소시민들은 현대사의 파고 속에서도 어떻게 인간성을 지켜왔는지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작품의 무대이자 작가의 고향인 용징이라는 장소를 직접 가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일 때문에 대만에 몇 번 다녀온 아내도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해 주었습니다. 대만은 거리가 멀지 않고 여행하기에도 쾌적하다니, 선생님과 함께 다녀오면 더 뜻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선생님, 벌써 25년도 4개월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회사를 그만둔 지도 어느덧 반년이 되었지요. 그동안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겠다며 포르투를 다녀오고, 자본주의의 최극단 뉴욕에서 살인적인 물가를 겪어보기도 했습니다. 제주 올레길을 걸었고 설악산 종주도 다녀왔습니다. 낯선 장소와 자연 속을 걸으면서, 바쁘게 일하며 쌓아온 묵은 때를 벗겨내 조금은 더 좋은 글을 쓰고, 직장인 이후의 삶을 준비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석 달 남짓, 작정하고 앉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생활을 해보니,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 행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 고개를 듭니다. 집에서 글만 쓰는 제 곁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와 지친 아내의 모습을 보면 문득 내가 그렇게 미워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글을 매개로 사회에 참여하며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커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 준비가 될 때까지는 밥벌이를 이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떠나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갈림길에 선 듯한 25년의 하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선생님은 다음에는 대학 시절 김성동 소설가와의 인연을 이야기해 주시겠다고 하셨지요. 『만다라』를 인상 깊게 읽고 원작 영화까지 감명 깊게 보았던 저라, 선생님의 이야기가 무척 기다려집니다. 편지를 받으면 김성동 소설가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어보고 싶습니다.
첫 편지를 드린 뒤 터울이 길기도 했고, 진한 여름이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 만든 탓에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속에서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곧 다시 선생님의 이야기를 읽을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2025년 9월 9일
제자 김홍중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