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8일과 오늘의 오늘
며칠째 머릿속을 맴도는 말이 있다. “자기성(selfhood)은 하나의 여정이다.” 최근 아내와 특정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매우 확고한 사람이었고, 우리 부부의 삶에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굳건한 가치관은 때때로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 그를 떠올리며 나는 무심코 말했다. “사람은 안 바뀌어.”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정말 사람은 바뀌지 않는가?
사실 그의 단호함은 귀감이 될 만한 면모였다. 세상에는 정반대 이유로 “사람은 절대 안 바뀐다"라는 평을 듣는 이들이 많다. 멀리서 예를 찾을 것도 없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두고 그렇게 말했고, 아내 역시 가끔은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아버지를 부정적 인간의 전형으로 삼으며 살았기에, 누구보다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 때문에 ‘나 자신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물음은 내 삶의 지속적인 화두가 되었다. 그 연장선에서 ‘자기 초월’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찾던 중 마주한 문장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성은 하나의 여정이다.”
살면서 연애를 다섯 번쯤 했다. 유부남이 꺼내기 곤란한 기억일지 모르지만, 나를 가장 크게 바꾸고 성숙하게 만든 과정이 바로 그 연애의 경험이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된 교제는 평균 네 해 정도 이어졌는데, 매번 시작과 끝에서 나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내 삶에 깊숙이 들어온 사람은 연인만이 아니었다. 다양한 집단을 거치며 가까이 지냈던 친구와 동료들 역시 각자의 흔적을 내게 남겼다. 관계가 긴밀할수록 그만큼 나의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런 변화를 ‘자기 초월’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나가던 중에 나는 자기에 대한 정의가 서양 철학사 속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접하게 되었다. 그 출발점에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근대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가 있었다. 그는 자기를 단순한 실체로만 보지 않고, 철학의 출발점으로까지 끌어올린 최초의 인물이었다.
데카르트가 세상에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자기를 고립된 주체로 규정함으로써 그는 근대적 개인주의 철학의 토대를 놓았다. 동시에 자연을 수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이해하여 근대 과학의 사상적 기초를 세우기도 했다.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뒤섞여, 그의 사유는 오늘날까지 우리의 일상과 사고방식에 적지 않은 흔적을 남기고 있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사람에게 자기 초월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으로 데카르트를 다시 보게 되었다.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단순히 원망하기에는, 데카르트의 사상이 근대 세계에 남긴 유산이 너무 크다. 그는 분명 합리적인 세상의 문을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자기를 고립된 실체로 보는 관점을 강화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부작용을 넘어설 수 있는 철학은 무엇일까. 나의 경험처럼 관계 속에서 개인의 변화를 설명할 수 있는 사상은 없을까 하는 물음이 생겼다.
그 질문을 붙들고 살펴보니, 데카르트의 한계를 넘어 인간을 새롭게 이해하려 했던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사상은 내가 관계 속에서 스스로 달라진 경험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철학자가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였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단단한 섬처럼 고립된 존재로 보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언제나 길 위에 있는 사람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언어와 문화,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에 놓여 있다. 혼자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라기보다, 이미 관계와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에게 자기는 목적지에 도착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걸으며 계속 바뀌는 여행자에 가깝다. 우리는 주어진 조건 속에 던져지지만, 그 조건 속에서 새로운 선택을 하며 다른 길을 낸다. 과거의 흔적과 미래의 가능성이 얽히면서 오늘의 ‘나’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이어지는 여정으로 드러난다.
또한 하이데거는 우리가 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걷는다고 말한다. 타인의 기대와 시선은 때로는 나를 편하게 하지만, 동시에 획일화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내가 어떤 태도로 길을 걸을지다. 남들이 정한 길을 무심히 따를지, 아니면 관계를 끊지 않으면서도 내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할지. 하이데거가 보여준 자기는 결국 혼자 고립된 실체가 아니라, 세계와 타인 속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여행자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세계와 관계 속에서 이해했다면, 레비나스는 그 관계 가운데서도 타자와의 만남을 더 근본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는 “자기란 타자 앞에서 책임지는 존재”라고 말했다. 나라는 사람은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타자의 얼굴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다가와 “나를 봐 달라, 존중해 달라”라고 말하는 침묵의 요청이다. 타자를 바라볼 때, 나는 그를 해치거나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그 앞에서 나는 이미 책임을 떠맡게 된다. 이 책임은 선택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피할 수 없이 주어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기는 자기 안에서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자기는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계속 새롭게 정의된다. 친구와의 우정, 연인과의 사랑, 직장에서의 협업 같은 경험이 나를 바꾸어 놓았던 것처럼, 레비나스의 사상은 자기가 타자 앞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확장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자기는 고립된 여행자가 아니라, 타자와 함께 길을 걸으며 다시 쓰이는 여정이다.
레비나스가 타자와의 만남을 자기의 근원으로 보았다면, 불교의 연기(緣起) 사상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연기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라는 말로 요약된다.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조건 지어져 생겨나며, 그 자체로 독립된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도 예외가 아니다.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고정된 중심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이 모여 잠시 성립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내가 태어난 가정, 배우고 만난 사람들, 살아온 시대와 사회가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 조건들이 바뀌면 나 역시 달라진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라는 표현을 쓴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언제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의미다.
내 삶을 돌아봐도 이 가르침은 낯설지 않다. 연애를 통해 바뀐 취향, 친구와의 교류 속에서 달라진 말투, 직장에서의 협업이 만든 습관들은 모두 나를 변화시켰다. 어느 것도 내가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만남과 관계가 불러온 결과였다. 결국 불교의 연기론은 내가 경험으로 확인한 사실을 더 근본적으로 말해준다. 자기란 실체가 아니라 관계와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변해 가는 여정이라는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늘 변화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갈망해 왔다. 아버지처럼 고정된 실체로 머무는 것을 경계했고, 연애와 우정을 통해 새로운 나를 만나며 살아왔다. 그 경험은 나라는 존재가 단단한 토대 위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관계 속에서 흔들리고 다시 쓰이며 새롭게 형성되는 존재임을 일찍이 가르쳐 주었다.
철학자들의 사유는 이 경험을 개념으로 확인해 주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길을 걷는 존재로 설명했고,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만남이 자기를 열어가는 가장 근본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불교의 연기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존재가 관계 속에서만 성립한다는 점을 일깨웠다. 자기는 실체가 아니라, 조건과 인연으로 잠시 드러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이 아니라, ‘타인과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결론에 닿았다. 나를 바꾸어 놓은 것은 연인과 인연, 가족과 동료들이었다. 동시에 나는 내가 변화를 일으킨 순간들을 떠올린다. 누군가는 나와의 만남 속에서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내가 가까이 다가가려 애쓴 시간이 누군가에게 작은 전환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를 비추며 변화를 만들어내는 존재다. 자기는 고립된 섬이 아니라, 길 위에서 새로 발견되는 여행자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의 여정이 되어 준다. 자기 초월은 홀로가 아니라 서로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