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12일과 오늘의 오늘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하얀색에 가까운 노란색으로 머리를 염색했다. 부모님이 여름휴가를 떠난 틈을 타서 감행한 작은 일탈이었다. 그때 나는 눈길을 끌고 싶었다. 다른 친구들이 하지 않는 방법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싶었다. 노란 머리로 미용실을 나서자 쏟아지는 시선이 짜릿하게 다가왔다. 비록 사흘 만에 끝난 짧은 일탈이었지만, 그 경험은 내가 관심을 욕망하는 성향을 처음으로 자각한 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 이후에도 비슷한 행동은 이어졌다. 학창 시절에는 어른들의 행동을 흉내 내며 눈에 띄고 싶었고, 대학에 가서는 취향을 드러내며 관심을 기대했다. 카투사 군복을 입고 미군들과 근무할 때도, 사회인이 되어 SNS에 글을 쓰고 유행하는 운동에 몰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다. 그러다 ‘관심 종자’라는 뜻의 ‘관종’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그것이 내 삶을 가장 정확히 표현하는 말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오히려 이 단어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도, 그것이 나를 삶에 대해 조금 더 실존적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나의 모습을 철학적으로 풀어낸 사람이 있다. 독일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다. 그는 인간을 “인정받기를 원하는 존재”라고 설명하며, 우리의 삶을 인정투쟁의 연속으로 바라보았다. 인정은 단순한 칭찬이나 관심이 아니다. 가족과 친구로부터 사랑받는 경험이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고, 사회 속에서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을 때 우리는 존엄을 확인하며, 공동체 안에서 나의 기여가 존중받을 때 자긍심을 얻는다. 이 세 가지가 무너질 때 인간은 고통을 겪고, 다시 그것을 되찾기 위해 싸운다. 이것이 호네트가 말하는 인정투쟁이다. 내가 관종처럼 보였던 많은 행동들도, 따지고 보면 나만의 방식으로 인정투쟁을 벌여온 셈이다.
이 글은 단순히 나의 관종 성향을 고백하는 자전적 기록이 아니다. 관심받고 싶은 욕망이 어떻게 나의 삶을 이끌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구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 살펴보려는 시도다. 나는 이 성향을 네 가지 차원으로 정리해 보았다. 곧, 유일성의 욕망, 소속의 욕망, 유용성의 욕망, 그리고 이해의 욕망이다. 이 네 가지를 통해 나를 관찰하고, 동시에 사회를 성찰해 보려 한다.
유일하고 싶은 욕망
내가 처음으로 남들과 다르다는 감각을 의식한 순간은 노란 머리였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학창 시절 내 행동은 늘 ‘차별화’를 향해 있었다. 또래보다 빨리 어른의 행동을 따라 하고, 친구들 앞에서 당당히 흡연을 시도하거나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은 스스로에게 일종의 연극 무대였다. 나는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 어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것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다른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하는 방식을 통해 나 자신을 특별하게 드러내려는 욕망의 발현이었다.
옷차림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유명 메이커의 로고가 박힌 운동복과 운동화는 단순한 패션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사회적 계급장을 달듯 나를 돋보이게 하는 표식이었다. 남들이 흔히 입는 교복 바지 대신 약간 다른 핏의 바지를 입고, 유행에 맞춘 헤어스타일을 시도하면서 나는 스스로를 무대 위 배우처럼 느꼈다. 교실은 관객석이었고, 나는 그 앞에서 유일무이한 배역을 연기하는 중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겉모습으로 차이를 만드는 방식은 줄었지만, 욕망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변주되었다. 지금의 나는 글을 쓰거나 책을 읽고, 달리기와 같이 여러 취미를 즐기는 ‘취미 부자’다. 사람들은 나에게 “정말 다양한 걸 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 말속에서 또다시 작은 쾌감을 느낀다. 노란 머리 대신 문장으로, 브랜드 로고 대신 서가에 꽂힌 책들로, 무대는 바뀌었지만 본질은 같다. 나는 여전히 ‘남들과 다른 나’를 확인받고 싶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욕망이 단순한 허영으로만 치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악셀 호네트가 인간을 ‘인정받기를 원하는 존재’라고 말했듯, 나의 차별화 시도는 결국 인정투쟁의 한 방식이다.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내가 특별하다고 느낄 때, 비로소 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이 지점을 철학자 질 들뢰즈는 다른 언어로 설명한다. 들뢰즈는 인간이 욕망하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사람은 남과 똑같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남과 달라지려는 과정 속에서 자기 존재를 실감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차이와 반복’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냈다. 단순히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매번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며 자신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릴 때 노란 머리로 주목받았다면, 이후에는 흡연이나 패션으로, 지금은 글쓰기와 취미로 차이를 만들어냈다. 방식은 달랐지만, 그 안에는 늘 ‘나는 남과 다르다’는 반복된 선언이 있었다.
이처럼 들뢰즈의 철학은 호네트의 주장과 맞닿는다. 호네트는 타인의 인정 속에서 인간이 자기를 실현한다고 말했고, 들뢰즈는 차이를 만들어내려는 욕망이 인간을 움직인다고 보았다. 나의 경험은 이 두 가지 사유를 동시에 보여준다. 관심을 끌고 싶어 했던 행동들은 사실 남과 다르다는 차이를 통해, 동시에 그 차이를 인정받음으로써 나를 확인하려는 과정이었다. 흔히 관종이라 부르는 성향은 단순히 주목을 갈망하는 허영이 아니다. 그것은 차이를 욕망하는 인간 본성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인정받고 싶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겪는 자연스러운 몸짓일지도 모른다.
큰 집단에 속하고 싶은 욕망
나는 늘 혼자가 되고 싶어 하면서도 동시에 무리에 속하고 싶어 했다. 중학교 시절 노란 머리로 차이를 만들었다면, 고등학교에 들어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존재감을 확인했다. 충암고 시절 불량서클 ‘아해’에 발을 들여놓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사실 나는 타고난 폭력적 성향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무리를 지어 다니는 게 편한 성격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집단에 속하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소속이 주는 힘, 즉 나 혼자서는 가질 수 없는 ‘큰 무대’에 오르고 싶었던 것이다.
서클에서 함께 움직일 때 느낀 감각은 혼자 있을 때와 달랐다. 집단의 이름이 나를 보호해 주는 동시에, 내 행동에 무게를 더해주었다. 나의 존재가 무리 전체의 일부로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것이 일시적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속이 주는 힘은 강했지만, 그 힘은 집단이 요구하는 규율과 맞바꿔야 하는 것이었고, 때로는 나 자신을 잃게 만들기도 했다.
이후에도 나는 나보다 큰 것에 속하고자 하는 욕망을 여러 방식으로 좇았다. 대학 진학, 편입, 카투사 복무, 그리고 대기업 입사가 모두 그러했다. 대학의 이름은 나의 정체성을 대신해 주었고, 편입이라는 선택은 더 나은 소속을 향한 또 하나의 투쟁이었다. 카투사 군복을 입고 미군들과 근무할 때, 나는 개인 홍중이 아니라 ‘카투사’라는 집단의 일원으로 보였다. 내가 즐긴 사람들의 시선은 개인이 아닌 ‘소속된 존재’에게 쏟아지는 주목이었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라는 개인이 아니라, 어떤 커다란 조직의 이름으로 세상에 불리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내가 커졌다’는 착각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이 욕망을 사회철학적 언어로 옮기면, 악셀 호네트가 말하는 ‘권리의 차원에서의 인정’과 닿는다. 우리는 제도와 규범 속에서 동등한 구성원으로 대우받을 때, 비로소 자기 존재를 안정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대학이라는 제도, 군이라는 제도, 회사라는 제도에 속함으로써 나는 그 체계의 보호를 받았고, 동시에 나의 정체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불안정한 인정이었다. 집단이 나를 배제하거나 해체되는 순간, 그 안정감은 곧바로 무너질 수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는 근대 사회를 ‘제도화된 의사소통의 장’으로 설명하며, 개인이 제도 속에서 시민으로 인정받을 때만이 진정한 참여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내가 집단에 속하려 했던 갈망은, 단순히 힘이나 안전을 얻으려는 욕망을 넘어, 제도적 틀 속에서 나를 시민으로, 구성원으로 확인받고 싶었던 욕망이었다.
결국 나는 늘 두 갈래의 길 위에 서 있었다. 혼자만의 무대를 원하면서도, 동시에 집단이라는 더 큰 무대 위에서 배우가 되기를 바랐다. 그 모순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이 모순 자체가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차이를 확인하고 싶어 하면서도, 혼자가 되기를 두려워하며, 나보다 큰 무대에 속하려는 갈망 속에서 살아간다. 나의 소속 욕구는 그 보편적 진실의 한 단면일 뿐이다.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싶은 욕망
내가 사회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욕망 중 하나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사람이라는 감각이다. 누군가에게 필요하고, 어떤 자리에서 기능하며, 나의 역할이 인정받는 순간 나는 존재의 무게를 실감한다. 반대로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때, 나는 스스로의 존재가 가벼워지는 듯한 불안에 휩싸인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나는 여러 차례 이 욕망을 확인했다. 주재원 도전을 준비하던 시절, 나의 영어 능력과 역량이 회사에 꼭 필요한 자원이라고 믿고 싶었다. 승진을 목표로 업무에 몰두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승진은 단순한 지위 상승이 아니라, 내가 유용한 사람이라는 사회적 보증처럼 여겨졌다. 최근에는 글을 쓰는 행위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내가 타인의 글을 읽고 그랬던 것처럼, 내 글을 읽고 누군가가 영감을 받거나 작은 위로를 얻는다면 나는 다시 한번 나의 존재가 ‘쓰임새 있는 무언가’로 확인되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 욕망을 더 분명히 깨닫게 된 계기는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면서였다. 아버지는 한때 자신의 가게를 운영하였으나, 사업 실패 이후 사회 참여의 기회를 잃고 오랜 시간을 보냈다. 나는 그 옆에서 아버지가 점차 고립되어 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가족에게서 자기 자신을 잃어가며, 사회로부터도 쓰임을 인정받지 못한 채 결국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삶을 되짚어 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사회적 유용성의 상실’은 단순히 일자리를 잃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답게 지탱해 주는 존재의 의미 자체가 흔들리는 경험이라는 것을.
이 지점을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분명하게 말했다. 아렌트는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나 ‘제작하는 존재’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을 무엇보다 ‘행위하는 존재’로 이해했다. 즉, 인간은 공적 세계 속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행동하고, 기여하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비로소 존재 의미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내가 주재원을 준비하고, 승진을 꿈꾸며,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히 성취를 쌓기 위함이 아니라, 아렌트가 말한 ‘행위하는 존재’로서 내 자리를 확인하려는 시도였다.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으로 보자면, 이 역시 연대의 차원에서의 인정과 맞닿아 있다. 공동체 안에서 내가 하는 일이 의미 있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중받을 때, 나는 자긍심을 얻는다. 그리고 바로 그 자긍심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만약 연대 속에서의 인정이 무너진다면, 인간은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심리적 추락을 경험하게 된다. 아버지의 삶이 보여준 것은 이 인정의 결핍이 어떤 고통을 낳는지에 대한 생생한 증거였다.
오늘날 사회는 성과와 효율을 중심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점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인간이 원하는 것은 단순히 성과를 내는 기계적 유용성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기여와 의미가 존중받는 경험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누군가에게 잠시라도 울림을 주는 글을 남길 때, 나는 단순히 ‘성과를 낸 사람’이 아니라, ‘함께 사는 세계에 기여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결국 유용성의 욕망은 출세욕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내가 누군가의 삶에 작게라도 영향을 주고, 사회 속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며, ‘쓸모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고 싶다는 근본적인 갈망이다. 이 갈망은 아버지의 삶에서 비롯된 슬픔과, 나 자신의 삶에서 찾은 작은 성취가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욕망을 좇으며,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회와 관계 맺고 있는지를 되묻고 있다.
이해하고 싶은 욕망
나는 단순한 지시나 결과만으로는 움직이기 힘들다. 누군가가 일을 시킬 때, 그 일이 왜 필요한지, 어떤 배경에서 비롯되었는지 설명을 듣고 싶다. 단순히‘이걸 하라’는 명령으로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일이 더 큰 흐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해할 때 비로소 의욕이 생긴다.
이 욕망은 학창 시절부터 드러났다. 학교에서의 수업은 주로 암기 위주였다. 교과서 내용을 무조건 외우고 시험 문제를 맞히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나는 자주 의문을 가졌다. “왜 이런 걸 외워야 하지? 이 지식이 어떤 맥락에서 중요한 걸까?” 하지만 교실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결국 전체의 흐름을 모른 채 쓸데없는 지식을 강제로 쌓아가는 경험이 반복되었다. 시험이 끝나면 머릿속은 곧 비워졌고, 배운 것의 의미는 남지 않았다. 나는 그때부터 막연히 깨달았다.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면 지식은 나를 지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지원부서에 있을 때, 나는 회사의 큰 그림을 접할 기회가 적었다. 전체 사업의 방향이나 전략을 알지 못한 채, 주어진 일을 처리하기만 하면 되는 구조였다. 하지만 나는 그 방식에 만족할 수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회사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다른 부서와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지 알고 싶었다. 정보를 차단당한 채 ‘네 역할만 하라’는 지시는 오히려 나를 더 소외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내가 조직 안에서 진정으로 살아 있다고 느끼려면, 반드시 전체의 흐름을 이해해야 했다.
앞에서 언급된 하버마스는 다른 저술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을 제시한다. 바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다. 이는 단순한 제도적 소속을 넘어,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가 유지된다는 주장이다. 내가 일을 할 때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맥락과 이유를 알고 싶어 하는 것도 이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악셀 호네트의 이론으로 보자면, 이해에 대한 욕구 역시 인정투쟁의 한 모습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준다는 것은 단순한 친절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이해할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정받았음을 뜻한다. 반대로 맥락 없이 지시만 내려지는 상황은, 나를 그저 수단적 존재로 취급하는 것이다. 인정이 결핍될 때 인간이 상처받는다는 호네트의 주장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오늘날 조직은 효율성을 이유로 종종 설명을 생략한다. 하지만 설명 없는 효율은 오래 가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공동체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정보가 공유되고 맥락이 드러날 때, 일은 단순한 노동을 넘어 의미 있는 행위로 변한다. 학창 시절의 무의미한 암기식 교육이 남긴 공허함과, 회사에서의 정보 차단이 만든 소외감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맥락 없는 지식과 행위가 인간을 황폐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은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이해다. 일을 하면서도, 글을 쓰면서도,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맥락을 알고, 의미를 파악하고, 흐름을 이해하는 순간 비로소 나는 주체가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내가 단순히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부속품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인정받는다는 감각을 얻는다. 이해의 욕망은 곧 나를 나답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탁월함은 자기 이해에서 시작된다
나는 네 가지 욕망을 통해 나의 관종 성향을 살펴보았다. 남과 달라지고 싶었던 욕망, 더 큰 무대에 속하고 싶었던 갈망, 누군가에게 쓰임받고 싶었던 바람, 그리고 단순한 지시가 아니라 맥락을 이해하고 싶었던 갈증. 모두 다르게 보이지만,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들이었다. 그것은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본능이었고, 나를 나답게 확인하려는 투쟁이었다.
악셀 호네트가 말한 인정투쟁, 아렌트가 말한 행위하는 인간, 들뢰즈가 말한 차이의 욕망, 하버마스가 말한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서로 다른 철학자의 언어지만 결국 같은 지점을 가리킨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이해받고, 존중받으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 나의 관종 성향은 그 욕망의 조금 과장된 표현일 뿐이었다.
돌아보면 이런 성향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더 잘 알게 되었다. 관심을 향한 몸짓은 부끄러운 허영심이 아니라, 실존을 확인하려는 한 방식이었음을 깨달았다. 나를 이해하고, 나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속적인 탁월함에 이르는 길이다. 탁월함이란 화려한 성취의 이름이 아니라,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 성향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의미 있게 살아내는 과정에 있다.
내가 설정한 네 가지 욕망은, 톰 모리스가 『Beautiful CEO, Good Company』에서 말한 인간의 정신적 욕구에서 착안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그의 논의를 빌려와 나의 관종 성향을 분석해 보았다. 차이를 욕망하고, 소속을 갈망하고, 유용성을 추구하고, 이해를 바라는 것은 기업의 경영 철학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철학자들의 개념과 경영학자의 통찰은 결국 내 삶 속에서 하나로 만났다.
그러나 멋진 해석 뒤에는 늘 현실이 있다. 내 관종 성향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은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다. 지금은 철학자의 개념으로 점잖게 설명할 수 있지만, 함께 살아온 동생에게는 나의 유별난 성향이 때로는 짐이었을 것이다. 각자의 삶에 바빠 자주 보지 못하지만, 글을 쓰는 지금만큼은 묵묵히 나를 감내해 준 동생을 떠올리며 고마움과 미안함을 함께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