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 부치는 첫 번째 편지
안녕하세요. 선생님.
무더위가 한창인 여름입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요. 이렇게 서신으로 다시 인사를 드리게 되어 반갑고 설레는 마음입니다. 저의 서신 교환 제안을 흔쾌히 받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과 문학을 매개로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을 국어 과목으로 만난 것은 제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국어라는 과목을 통해 선생님은 저에게 언어와 사유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수업은 단순한 교과 지식을 넘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졸업 후에는 선생님을 직접 뵐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삶이 바쁘게 흘러갔고, 제 삶은 학창 시절과는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제 마음속에 늘 남아 계셨습니다. 선생님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저를 믿으면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실 문학을 중심에 두고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연한 바람으로만 남겨두다가, 최근 들어 글쓰기와 삶에 대한 고민이 점점 더 깊어지면서 이제는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습니다. 졸업한 지 어느덧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시절의 저는 세상이라는 무대 앞에 선 막막한 출발자였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때와는 조금 다릅니다. 삶을 조금 더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질문을 더 조심스럽게 꺼낼 수 있게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저는 비슷한 질문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선생님과 다시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제게는 깊은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이 편지 한 통이라면, 지금 이 시대에 더 필요한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는 여름휴가를 맞아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휴가를 떠나기 직전까지 혜진이가 회사 행사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고, 일정을 마치자마자 짐을 싸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사실 저희 부부에게 제주도는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특별한 인연이 깃든 곳이라, 번아웃이 찾아올 때마다 다시 찾게 되는 도피처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여행을 준비할 때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이 책입니다. 여행지에서의 여유로운 시간도 좋지만, 공항 대기 시간이나 비행기 안, 혹은 바닷가나 카페에서 흘러가는 자투리 시간들을 가장 알차게 채워주는 것이 늘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번 욕심껏 챙기다 보면 가방이 무거워지고, 그럴 때마다 혜진이에게 핀잔을 듣곤 합니다. 그래도 여행을 책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은 제겐 어딘가 허전한 일입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두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중 선생님께 꼭 말씀드리고 싶었던 책은 김성동 작가의 『만다라』입니다. 아마 선생님 세대라면 김성동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의 작품 세계에 깊숙이 들어가 본 적은 없었지만, 이번에 우연히 다시 접하게 되면서 새로운 인상을 받았습니다. 『만다라』는 출가한 두 스님의 여정을 따라가며, 깨달음과 구원에 이르는 길이 하나만이 아님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인 법운 스님은 계율을 지키며 고결함 속에서 진리를 찾고자 하고, 다른 주인공인 지산 스님은 세속에 발을 딛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면서 진실에 다가가려 합니다. 전혀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결국 두 사람의 진정성은 서로를 향해 다가가며 맞닿게 됩니다.
특히 저는 법운 스님이 지산 스님을 통해 자신의 태도를 성찰하고, 고정된 신념에서 벗어나 점차 변화해 가는 과정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 변화는 단순한 개종이나 굴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삶의 모순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성숙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번뇌와 고뇌는 제가 살아오며 품어왔던 실존적 질문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선생님, 저도 때때로는 스님이 되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세상이 너무 부조리하게 느껴지고, 그 끝에 남는 것이 허무뿐이라고 생각될 때면 그런 상상이 불쑥 떠오릅니다. 외부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닫고, 고요한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며 살아가는 삶. 때로는 그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본질에 가까운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그런 상상을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은, 제 삶에서 가장 극심한 방황의 시기였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불안과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고3이 되어서도 정신적·육체적으로 지쳐 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그 시기를 한참 지나고 마주한 『만다라』 속 스님들의 독백은, 제 안에도 오래도록 남아 있던 질문들과 묘하게 겹쳐졌습니다. 그리고 그 겹침이, 제게 작은 위로처럼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저는 그런 체험들이 있었기에 글을 쓰고, 인문학이라는 여정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책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남는 문장을 따로 모아두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그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늙는다는 것, 늙고 병들어 결국 죽는다는 것은 하나의 구원이 아닐까.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언제까지나 팽팽한 젊음 그대로 있다면 저 산 같고 바다 같고 하늘 같은 사랑과 미움과 원한과 그리고 저 욕정을 다 어쩌겠는가.”
요즘은 젊음만을 가치 있게 여기는 시대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늙는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삶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이자, 감정과 욕망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읽은 철학자의 말도 떠오릅니다. 그는 욕정에서 벗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늙는 것이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저 역시 예전처럼 격렬하게 흔들리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나이 든다는 것이 꼭 부정적인 변화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삶의 선배이신 선생님께 실례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첫 편지라 글이 곁길로 새고, 정리가 잘 되지 않아 선생님께 보내는 것이 쑥스러워집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마음을 글로 열어보니, 선생님과 나누는 이 글이 제게는 벌써 큰 위안이 됩니다. 앞으로는 종종 편지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함께 읽어주시고, 선생님의 시선으로 삶과 문학을 함께 들여다봐 주신다면 저로서는 더없이 감사하고 기쁜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다음 편지에는 선생님의 이야기, 선생님의 요즘 사유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무더위에 늘 건강 유의하시고, 평안한 나날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2025년 7월 29일
제자 홍중 올림
추신: 『만다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고 합니다. 국내외 영화제에서 불교적 사유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음에 선생님을 뵐 기회가 있다면, 책이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