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이 시작되는 장면은?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라는 제목에 이끌려 몇 년 전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그것도 막 눈을 뜬 순간에 죽음을 떠올리라는 제안은 처음에는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들립니다. 하루의 시작에 굳이 죽음을 불러올 이유가 무엇인지 쉽게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삶이 시작되는 장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이상하게도 이 제목을 함께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떠올리는 장면은 다섯 살이 되기 전의 기억입니다. 정확한 시기는 흐릿합니다. 어린 시절 저는 집에서 멀지 않은 외할머니 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방바닥에 누워 낮잠을 청하던 순간이었습니다. 창밖 공기는 따뜻했고, 옆집 피아노 학원에서 건반 소리가 은은하게 흘러들고 있었습니다. 잠에 빠질 듯 말 듯한 그 사이에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쳤습니다. 눈앞에 보이던 천장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잠든 사이 피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고, 그러면 나는 죽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어린 마음에 스며들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장면이 죽음이라는 개념을 처음 의식한 순간이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은 때였습니다. 그때 느낀 두려움은 시간이 흐르며 농도는 달라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생각의 끝에는 종종 죽음이 따라붙었습니다. 영원한 무의식으로 가라앉는 죽음이 두려워 잠이라는 짧은 무의식조차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죽음은 제 어린 시절 상상력의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던 존재였습니다.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삶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함께 떠오른다는 사실을 느낍니다. 삶의 출발을 말하면서 죽음을 함께 꺼내는 일은 어딘가 아이러니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죽음을 다루는 여러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 제가 느꼈던 감정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철학자 몽테뉴는 “죽음을 철학한다는 것은 자유를 철학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삶을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이해했고, 죽음을 삶의 바깥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느꼈던 두려움 역시 부자연스러운 반응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죽음을 의식하고 그 가능성을 마주하려 했던 태도는, 돌이켜 보면 철학이 오래전부터 던져 온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의 삶이 시작되는 장면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그 봄날의 장면으로 돌아갑니다. 죽음이 처음으로 제 의식 속에 들어왔던 그 순간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제가 삶을 자각하기 시작한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입니다. 당신 역시 언젠가는 죽을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경고에 가깝습니다. 이 표현은 고대 로마의 개선식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집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도시로 돌아오면, 국가는 그에게 최고의 영예를 허락했습니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 위에 올라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행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장면에는 한 사람이 더 함께 서 있었습니다. 장군의 뒤에 서 있던 노예였습니다. 그는 행진이 이어지는 동안 같은 말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뒤를 돌아보십시오. 당신도 한낱 인간임을 기억하십시오. 메멘토 모리.” 잠시 왕처럼 추앙받는 순간에도 인간은 유한한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경계였습니다. 영광의 순간이 교만으로 변하지 않도록 붙들어 두는 장치였습니다.
저에게도 비슷한 목소리가 마음 한편에 남아 있습니다. 외할머니 댁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죽음을 처음 떠올렸던 그 순간 이후였습니다. 살아오면서 기쁜 순간도 있었고 좌절의 순간도 적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각각의 순간은 제 삶에 나름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흔적들이 겹치며 지금의 삶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떤 순간이든 마음 한편에는 같은 생각이 따라왔습니다. 이 모든 시간에도 끝이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쁨도 오래 붙잡지 못했고 아픔도 예상보다 빨리 지나갔습니다. 들뜸과 낙담이 서로의 시간을 조금씩 깎아내리는 느낌이었습니다.
한 번은 면접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원자 님의 철학은 무엇입니까?” 직장에서 ‘철학’이라는 단어를 묻는 질문은 흔하지 않습니다. 잠시 멈칫했지만 곧 한 가지 말이 떠올랐습니다. 메멘토 모리였습니다. 유한한 삶이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하려 한다는 생각. 언젠가 끝이 온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금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설명했습니다. 그 답이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 회사에 합격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남아 있던 죽음의 기억이 그 순간에는 오히려 저를 앞으로 밀어주는 말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제 삶에는 늘 죽음의 인식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비관적인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식 때문에 지금을 더 밀도 있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습니다. 유한함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유와 용기를 삶 속에서 구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외형적인 성취에만 매달리기 쉬운 일상 속에서도 삶의 본질을 묻는 질문을 놓지 않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어쩌면 그 태도는 외할머니 댁에서 천장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장면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처음 의식했던 그 순간이 제 마음속 메멘토 모리의 출발점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제 사고의 밑바닥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이 지금의 성향이나 관계 방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지금 제가 깊이 생각하는 주제는 ‘애도’입니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미리 겪게 되는 감정에 가깝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왜 벌써 애도하느냐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가 이해한 애도의 의미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애도를 관계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함께 따라오는 상실의 예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애도는 단순히 슬픔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관계를 맺는 방식과 깊이 연결된 감정입니다. 이런 생각은 강남순 교수의 해설을 통해 접했던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애도 개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언젠가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그 관계는 역설적으로 가장 현재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홀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는 타인의 상실 가능성을 의식하고 그 부재에 반응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나’라는 주체가 형성된다는 해석이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저는 아내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일을 하면서 아이 없이 지내는 삶을 흔히 딩크(Double Income No Kids)라고 부릅니다. 지금은 제가 소득이 없으니 이 표현이 정확히 들어맞지는 않겠습니다. 지난 십 년 동안 저와 아내는 아이 없이 서로에게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걱정이 하나 생겼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생을 마감하지 않는 이상 언젠가는 한 사람이 먼저 떠나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먼저 떠난다면 남겨진 아내는 어떤 시간을 견디게 될까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반대의 상황을 떠올려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 생각은 처음에는 막연한 불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데리다가 말한 애도의 개념과 겹쳐졌습니다. 아내와 관계를 맺는 순간부터 이미 애도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찾아올 부재의 가능성이 일상의 감정 속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감정은 아내에게만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혈액암으로 생사를 오가던 어머니를 간호하던 시간에도 비슷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표적치료제 덕분에 지금은 건강하게 지내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지나며 저는 이미 어머니의 일부를 떠나보내는 마음을 경험했습니다. 스무 해 넘게 관계를 끊고 살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을 때도 비슷했습니다. 러닝크루에서 함께 달리며 일상을 나누는 선배를 떠올릴 때도 같은 생각이 스칩니다. 가까운 사람, 오래된 사람, 잠시 스쳐가는 사람까지도 결국은 언젠가 잃게 될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상실의 가능성을 품고 살아가는 상태 자체가 애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겠습니다. 삶의 첫 장면을 죽음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이야기를 이어왔으니 더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이 제게 어떤 태도를 만들어 주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애도는 사라짐을 미리 떠올리는 마음이지만, 그 마음은 결국 사랑을 더 깊게 만들고 관계를 더 소중하게 느끼게 했습니다. 제가 지금의 삶을 대하는 방식도 그 인식 위에서 자라났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게 된 가치는 무엇인가요?
우선 저는 물질적 가치보다 정신적 가치가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삶이 물질적 기반 위에 놓여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잘 먹고, 잘 자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물질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인 만족을 위해 좋은 옷이나 좋은 차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저는 러닝화를 다섯 켤레나 가지고 있습니다. 각각 기능이 다르다는 이유를 붙이지만, 사실 새 신발을 보면 갖고 싶어지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 삶을 지탱하는 중심 가치를 물질에 맡기지는 않았습니다. 물질은 결국 낡고 사라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끝까지 남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인간의 삶이 길어야 백 년 남짓이라면, 내가 붙잡는 가치는 그 시간을 조금은 넘어서는 것이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제게 남은 것들이 취향이 되었고 삶의 축이 되었습니다. 예술을 향한 감각, 창작을 향한 열망, 사랑을 향한 신뢰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관심과 행동이 제 삶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든다고 느낍니다. 물질이 줄 수 없는 감각과 만족이 이 영역에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삶의 의미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더 높은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고 연봉이 크게 늘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삶은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게 되면서 시간의 폭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삶을 지금의 순간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 함께 이어진 흐름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만큼 가능성의 범위도 함께 넓어졌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삶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아픈 과거나 불안한 미래를 의식하지 않고 산다면 삶은 훨씬 단순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의 앞뒤를 함께 바라보는 일은 삶의 의미를 더 넓게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 넓어진 의미의 공간이 저를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가게 했습니다. 복잡해진 만큼 풍부해졌고, 그만큼 흥미로운 삶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 외할머니 집에서 떠올렸던 그 장면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평범한 기억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저는 그 순간을 삶의 방향을 비추는 질문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삶의 시작점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이 불쑥 찾아온 일은 어쩌면 앞으로의 길을 미리 알려주는 작은 신호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느꼈던 불안은 시간이 지나며 삶을 더 깊게 바라보게 하는 감각으로 바뀌었고, 제 선택과 시선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제 삶을 어둡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을 더 또렷하게 바라보게 했고, 관계를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돌아보면 그 어린 날의 장면은 공포의 기억이라기보다 하나의 출발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전히 그 질문 속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리고 그 인식이 앞으로의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이 질문은 지금도 제 삶의 밑줄처럼 남아 다음 장면을 향해 저를 이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