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질과 성격

by 세템브리니

어린 나는 어떤 아이였나요?

“이 아이에게는 억지로 시키지 마십시오. 하기 싫다는 일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오히려 엇나갈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가 아직 국민학교라 불리던 시절입니다. 1학년이 된 저를 바라보며 담임선생님께서 어머니에게 남긴 말입니다. 어린아이의 기질을 몇 마디로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를 두고 내린 판단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저는 그 선생님의 통찰에 놀라곤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제 성향을 읽어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말처럼 저는 의지가 분명한 아이였습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은 끝까지 하지 않았습니다. 어른들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이유를 먼저 묻곤 했습니다. 여덟 살에 불과한 아이였지만 부모님이 학교에서 ‘주의’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때의 모습은 이후의 여러 장면에도 반복해서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반항적인 모습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타고난 것일까요, 아니면 자라오며 만들어진 것일까요. 이 질문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질’과 ‘성격’이라는 구분에 닿게 됩니다.

기질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반응의 방식입니다.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몸과 마음이 먼저 보여주는 기본적인 리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낯선 환경에서 쉽게 긴장하는지, 새로운 사람에게 마음을 잘 여는지, 감정이 얼마나 빠르게 올라오는지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타고난 영향이 크고, 삶의 전반에 걸쳐 비교적 오래 유지되는 성향입니다.

반면 성격은 그 기질 위에 쌓이며 만들어지는 패턴입니다. 환경과 경험, 관계와 학습을 통해 형성되는 감정과 행동의 방식입니다. 기질이 원석이라면 성격은 그 원석이 다듬어지며 형태를 갖추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삶의 맥락 속에서 조금씩 달라질 수 있고, 개인의 선택과 태도가 개입하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이 구분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의 저를 바라보면, 당시의 반항적인 모습은 성격이라기보다 기질에 더 가까웠다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그 기질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저는 오랫동안 이 질문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감정의 파동이 큰 분이었습니다. 기쁨과 분노의 폭이 넓었고 변화도 빠른 편이었습니다. 감정이 한 번 올라가면 그 기세가 쉽게 꺾이지 않았습니다. 어린 마음에는 그 모습이 때로는 당혹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이었습니다. 말투와 행동이 차분했고 감정의 리듬이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상황이 흔들릴 때도 쉽게 동요하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부모님의 기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강한 감정의 파동을 지닌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안정된 정서의 리듬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두 흐름 가운데 아버지에게서 온 특성이 조금 더 강하게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이 아버지의 타고난 기질인지, 삶의 경험 속에서 형성된 성격인지 지금도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감정이 한 번 올라오면 쉽게 가라앉지 않는 성향,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분명하게 가르는 태도,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면 움직이기 어려운 완고함 같은 모습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기질은 성장하며 만난 환경과 경험 속에서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다듬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성격의 여러 결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흐름이 어떤 장면들을 남겼는지, 그리고 그 기질이 제 삶 속에서 어떻게 드러났는지는 이어지는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 조금 더 살펴보려 합니다.


나의 기질이 학창 시절 남긴 흔적은?

제 기질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고등학교 시절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방학을 얼마 앞두지 않은 어느 날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종이 한 장씩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방학 동안 진행되는 보충수업 신청서였습니다. 종이에는 참여 여부를 본인이 선택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방학 동안 학교에 남아 수업을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여하지 않겠다는 표시를 하고 제출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담임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우리 반에서 보충수업을 신청하지 않은 학생이 저 한 명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어제 나눠주신 종이에는 방학 보충수업을 선택할 수 있다고 적혀 있지 않았습니까?” 불만을 표현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단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묻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뒤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교무실에는 여러 선생님들이 계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는 한참 동안 꾸중을 들었습니다. 결국 눈물이 날 정도로 혼이 났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큰 잘못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말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억울함이 크게 밀려왔습니다. 선택할 수 있다고 적힌 종이에 따라 선택을 했을 뿐인데, 마치 규칙을 어긴 사람처럼 꾸중을 듣는 상황이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모든 학생이 참여해야 하는 일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안내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날 교육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게시판에 글을 남겼습니다. 그날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제가 느낀 억울함을 적었습니다. 글을 올리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 상황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학교에 도착하자 담임선생님께서 굳은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다음 날 어머니를 모시고 학교에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올린 글 때문이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제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상황이 설명되면 이해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어머니와 함께 교장실로 들어갔습니다. 교장선생님 옆에는 처음 보는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상석이 아닌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잠시 뒤 그 사람은 자신을 교육청에서 나온 장학사라고 소개했습니다.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이 그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서 분위기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장학사는 제가 올린 글을 문제 삼았습니다. 어머니에게 글을 삭제하고 앞으로 조용히 행동하도록 지도하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 말투는 제게 단호하다기보다 거만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설명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제 말을 막으며 알겠다고 답했습니다. 죄송하다는 말까지 덧붙이셨습니다.

교장실을 나오는 길에 저는 강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억울함보다 더 크게 남은 감정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왜 제가 문제를 일으킨 사람처럼 취급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모두 저를 위한 일이니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설명되지 않은 채 상황이 끝난 사실이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보충수업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던 입장이었으니 결과만 보면 문제 될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다음 학기가 시작된 뒤 담임선생님은 저를 거의 상대하지 않았고, 새롭게 편성된 보충수업 명단에서도 제 이름은 애초부터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지금 돌아보아도 제가 당시 큰 잘못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사건이 제 기억에 오래 남아 있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불리해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물러서지 않고 질문하려는 제 기질이 그대로 드러난 장면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저는 그 성향이 후천적인 성격이라기보다 타고난 기질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의 기질이 성인이 되고 남긴 흔적은?

성인이 된 뒤에도 제 기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환경이 바뀌고 역할이 달라져도 제가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은 비슷했습니다. 특히 기본적인 원칙이 흔들린다고 느끼는 순간, 제 안에 있던 성향은 더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군 복무 시절의 일입니다. 저는 카투사로 복무했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외국 생활을 경험해 볼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미군 부대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이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한국인이 드문 전방 지역에 배치된 것도 오히려 다행으로 느껴졌습니다.

병장 때의 일이었습니다. 카투사 제도는 오래전 한국과 미국의 국가 지도자들이 합의해 만든 체계입니다. 서로의 군사 계급을 존중한다는 원칙 역시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군 상사의 명령은 카투사에게도 명령이며, 반대로 카투사의 계급도 미군이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대 안에는 이상한 관례가 있었습니다. 카투사들은 미군 병장 이상의 인원을 부를 때 규정대로 계급을 붙여 불렀습니다. 그러나 미군들은 카투사에게 같은 예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규정상 ‘서전트 킴’이라고 불려야 하는 병장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군은 저를 그냥 “킴”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른 카투사 병장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군은 복무 기간이 짧기 때문에 계급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논리였습니다.

저보다 먼저 복무한 카투사 선임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이 관례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미군, 그랜트 상사에게 의견을 물었습니다. 그는 근무 중에는 엄격하지만 평소에는 친구처럼 대해 주던 상관이었습니다. 그는 제 문제의식에 공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저는 부대 안의 이 관례를 바로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도의 기본 정신이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두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소 알고 지내던 대대장 크리드 대령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며 일부러 이렇게 불렀습니다.

“크리드!”

계급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평소와 다른 제 태도에 그는 웃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저도 앞으로 당신을 이렇게 불러도 되겠습니까?”

제 질문의 의미를 그는 곧 이해했습니다. 그는 카투사의 계급을 존중하지 않는 관례가 잘못된 것임을 인정했고, 그 자리에서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조회에서 대대장의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지금부터 카투사의 계급을 존중하지 않을 경우 징계 조치를 하겠다.”

부대 분위기는 바로 달라졌습니다.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모두가 원칙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다만 제가 대대장에게 계급 없이 이름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몇몇 미군들은 저를 ‘또라이 카투사 병장’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직장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외국계 기업에서 주재원 제도를 담당하는 HR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회사는 전 세계에 사업장을 둔 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기업이었습니다. 한국에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파견된 주재원이 70명 넘게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주재원 제도 역시 상당히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모든 규정은 직급과 무관하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국에 파견된 외국인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의 공공요금을 회사가 대신 부담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집이 넓어서 비용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규정에는 전기세와 수도세 같은 개인 공공요금은 전적으로 개인이 부담한다고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규정을 설명하며 승인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전 세계 모든 주재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도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앞으로 당신과는 상대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제 상사를 찾아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잠시 뒤 상사가 저를 불러 물었습니다.

“규정을 다시 확인했는데… 혹시 예외를 만들 수는 없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이 규정은 이미 명확하게 정해져 있고 모든 주재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외를 만들면 해외에서 근무하는 한국 직원들이 역차별을 받게 됩니다.”

공정해야 한다는 인사부의 원칙에 공감하던 상사는 결국 제 판단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분위기는 달라졌습니다. CFO의 요청을 거절한 직원이라는 이유로 저를 향한 시선이 차가워졌습니다.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는 한국인 임원도 있었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혹시 인사상 불이익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처음 내린 판단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규정이 있는데 권력자라고 해서 적용을 달리한다면 저는 다른 주재원들에게 떳떳하지 못한 담당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생각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저는 다른 회사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어 이직하게 되었습니다. 회사를 떠나는 날까지 그 규정에 예외를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두 장면은 같은 성향을 보여줍니다. 부조리를 그대로 넘기지 못하는 기질, 원칙이 흔들릴 때 질문을 멈추지 않는 성향입니다. 환경이 달라져도, 역할이 달라져도, 조직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더라도 저는 그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제가 타고난 기질이 사회생활을 할 때 남긴 가장 선명한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어떤 상황에서 나의 성향이 드러나나요?

저의 성향은 권위주의적인 분위기를 마주할 때 가장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앞에서 이야기한 기질과 성격이 자연스럽게 표면으로 올라옵니다. 제가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단순한 권위가 아니라 권위주의입니다. 제가 말하는 권위주의는 직급이나 나이, 제도 같은 외부의 지위를 근거로 복종을 요구하는 태도입니다. 질문은 불편한 것으로 취급되고,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 지시의 근거가 됩니다. 설명이나 설득보다 복종이 먼저 요구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개인이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지는 힘이 점점 약해집니다.

물론 이런 방식이 조직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결정은 빠르고 책임의 방향도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다른 문제가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보다 눈치를 보게 되고, 책임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됩니다. 결국 침묵과 무사안일이 조직을 잠식하게 됩니다. 저는 이런 구조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권위입니다. 권위는 지위에서 나오기보다 신뢰에서 만들어집니다. 강요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따르게 되는 힘입니다. 지시보다 태도에서 드러나고, 설명과 설득을 통해 형성됩니다. 이런 과정은 느리고 때로는 번거롭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지는 힘을 갖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한 직장 사례도 이런 성향이 드러난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직급이나 지위 때문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저항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직장 생활 초반에는 권위적인 문화에 익숙한 선배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습니다.

대신 후배들과의 관계에서는 갈등이 겪지 않았습니다. 제가 불편하게 느꼈던 권위주의적인 방식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후배들에게는 가능한 한 이유를 설명하고 스스로 판단할 여지를 주려 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권위에 조금 더 가까운 방식이었습니다.

권위주의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제 성향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부당하거나 모순적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보충수업 사건이나 군 복무 시절의 경험처럼, 저는 눈앞에서 부조리를 마주하면 쉽게 넘어가지 못하는 편입니다.

돌이켜 보면 제 행동에는 한 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상황이 바뀌어도 그 판단이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습관이었습니다. 저는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 어려운 행동은 가능하면 피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조직이나 사회에서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공동의 기준이 흔들리는 장면을 보면 쉽게 지나치지 못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불편한 선택이 되더라도 말입니다.

다시 만난 선생님께

저의 기질을 처음 알아보셨던 국민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은, 30여 년이 흐른 뒤 뜻밖의 방식으로 다시 제 앞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어머니가 처음으로 돌보게 된 알츠하이머 환자가 우연히도 그 선생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이미 병세가 깊어 어머니도, 저도 알아보지 못하실 정도였습니다.

그 시절 선생님은 유난히 고집이 세던 어린 저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기질이 순하지 않은 아이가 앞으로 괜찮게 자랄 수 있을지 걱정하셨을까요. 아니면 그 기질이 언젠가 개성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고 기대하셨을까요. 나이가 들고 나서야 저는 한 가지 사실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기질이 강한 사람일수록 개성이 분명해지는 대신, 쉽게 ‘모난 돌’처럼 보일 위험도 함께 안고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기질을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순간, 그 거친 면은 다른 방향으로 자라날 가능성을 갖게 됩니다.

저 역시 그런 과정을 겪었습니다. 때로는 제 성향 때문에 불편한 상황을 겪기도 했고 좌절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엄마와 아내를 비롯해 제 곁에 있던 사람들의 도움 속에서, 제 기질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다듬어졌습니다. 덕분에 비교적 온화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어떤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든, 어떤 성격으로 살아가고 있든, 삶의 과정 속에서 얼마든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엄마가 선생님을 돌보던 어느 날이었다고 합니다. 말썽 많던 어린 시절의 제 이야기를 떠올리며, 지금은 괜찮게 자라 살고 있다고 조용히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아마 그 말을 듣지 못하셨을 겁니다. 그래도 그 마음만은 닿았기를 바랍니다.

이전 02화나를 만든 첫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