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선택

by 세템브리니

어린 시절, 내가 스스로 내린 첫 번째 선택은 무엇이었나요?

제가 스스로 내렸다고 기억하는 첫 번째 선택은 조금 늦게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준비된 선택이라기보다 무모한 결심에 가까웠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될 무렵, 저는 처음으로 공부를 해보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대부분의 또래들이 훨씬 이른 시기에 고민하고 선택하는 길이었지만, 제게는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제도권 교육의 바깥에 서 있는 학생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선택은 당시의 제 삶을 정면으로 뒤집는 일이었습니다.

어릴 적 부모님은 생계를 위해 늘 바쁘셨습니다. 그 사이에서 집안 형편은 점점 기울었고, 아버지 쪽 형제들 사이의 갈등까지 겹치면서 집안 분위기는 자주 어수선해졌습니다. 저는 원래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환경 속에서 공부와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부담스러워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교실보다는 바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어느새 문제아라는 이름이 제 주변을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둘 곳이 필요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여자친구를 사귀었고,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학교 안의 음성적인 서클에도 드나들었습니다. 어른들의 행동을 흉내 내며 허용되지 않은 일들을 반복했습니다. 지금처럼 학교 폭력이 일상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학생에게 허락되지 않은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저는 나름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던 울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5년 동안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된 일이었습니다. 잠시 다투었던 사이 그녀는 제가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사귀기 시작했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몸담고 있던 서클의 동기였습니다. 그 서클에서는 친구 사이의 의리를 중요한 덕목처럼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은 단순한 연애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의지하고 있다고 믿었던 세계가 한 번에 무너지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질문이 생겼습니다. 내가 중요하다고 믿어 온 것들은 정말 중요한 것이었을까. 이렇게 졸업해도 괜찮을까. 그동안 애써 외면하던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친구들은 각자의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대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다음 단계를 향해 발을 떼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저만 제자리에 멈춰 서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방과 후 청소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늘 그랬듯이 청소를 피하고 그냥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때 부반장이던 한 친구가 저를 불러 세웠습니다.

“너도 청소야. 마무리하고 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그 친구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공부만 잘하는 모범생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눈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제 힘이 빠졌습니다. 그때 제 안에서 한 가지 감정이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이 친구를 힘으로 제압한다고 해서 제 삶이 달라질 일은 없다는 사실이 갑자기 분명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친구가 잘하는 것으로 한번 겨뤄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공부였습니다. 어쩌면 그때 처음으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더는 떠밀려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학생이라는 이름을 빌려 떠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한 번쯤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처음으로 책상 앞에 스스로 앉았습니다.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습니다. 이미 늦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은 제 의지로 선택한 길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제가 결정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제 삶에서 처음으로 스스로 방향을 정한 순간이었습니다. 결과가 어떨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 선택만큼은 누구의 기대도, 주변 환경도 아닌 제 의지에서 나온 결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그 결정을 제 삶의 첫 번째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선택이 당시의 나를 어떻게 보여주고 있나요?

그 선택은 당시 제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를 비교적 또렷하게 보여줍니다. 저는 그때까지 이어져 온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주어진 환경과 관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더는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감각이 점점 커지고 있었습니다. 그 감정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쌓여 온 거부감이 어느 순간 위기감으로 굳어졌고, 그 위기감이 결국 하나의 선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결정은 더 나은 삶을 설계한 계획이라기보다, 더 이상 지금의 상태로는 버틸 수 없다는 자각에 가까웠습니다. 참고 견디는 방식으로 이어져 온 삶을 계속 반복할 수도 없었고, 내게 허락된 좁은 범위 안에서만 만족하며 살아가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때의 마음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비유입니다. 이 책은 제가 방황하던 시기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헤세는 한 사람이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당시의 저는 그 문장 속의 새와 비슷한 상태였습니다. 저를 둘러싼 가정환경과 생활 방식, 그 안에서 형성된 관계들까지 모두 하나의 세계였습니다. 그 세계는 저를 보호해 주는 울타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저를 묶어 두는 울타리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 세계가 이미 안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안에 그대로 머문다면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그 세계를 깨고 나와야 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준비된 선택이라기보다 피할 수 없는 결심에 가까웠습니다.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오래 몸에 밴 습관들과 거리를 두어야 했고, 함께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과도 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변하려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이미 늦은 출발이라는 사실이 두려웠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각자의 길을 향해 움직이고 있을 때 저는 이제 막 시작선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도 공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공부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생각은 순진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의 저는 제가 머물던 좁은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공부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선택은 당시의 저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저는 뚜렷한 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더는 지금의 삶에 머물 수 없다는 감각만은 분명했습니다. 무엇을 향해 가는지보다, 지금 어디에서 벗어나야 하는지가 먼저 선명했던 시기였습니다. 공부를 선택한 일도 거창한 결심이라기보다,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붙잡은 첫 번째 밧줄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 선택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보다, 다른 삶이 가능할지 스스로에게 처음 물어본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 선택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나요?

이후 저는 재수와 삼수를 거쳐 전문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그 과정에서 뒤늦게 공부의 재미를 알게 됐습니다. 편입을 통해 관심 있는 분야로 학업을 이어갔고, 졸업한 뒤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고등학교 시절 허송세월로 흘려보낸 시간을 만회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나 책을 통해 열리는 세계는 단순히 뒤처진 시간을 따라잡는 수단으로만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저는 스무 살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다음 이십 년을 살아왔습니다. 과장 없이 말하면, 공부와 독서에 허기진 사람처럼 책 속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책 읽는 사람으로 지내다 보니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독서 초보는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긴 시절을 보냈던 저로서는 그 막막함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그래서 실제로 제게 도움이 됐던 방법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신혼 초에 살던 동네에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중고서점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주인인 윤성근 작가는 회사를 다니다가 책에 매료되어 서점을 연 사람입니다. 책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했습니다. 그는 『나는 이렇게 읽습니다』에서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함께 읽는 방식을 이야기합니다. 하나의 주제를 소설로 만나고, 그 배경을 역사로 확인한 뒤, 다시 사유로 넓혀 가는 방식입니다. 저는 이 독서법을 임철우의 『봄날』을 읽으며 처음 제대로 체감했습니다.

『봄날』은 1980년 5월 광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사건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폭력과 학살이 한 사람의 삶과 공동체의 기억에 어떤 상처를 남기는지, 왜곡된 기억과 지워진 진실이 어떻게 오래 남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줍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저는 그 책을 읽기 전까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내 삶과 이어진 거대한 사건이 있었는데도 저는 너무 오랫동안 제 좁은 세계 안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학보사 기자였던 이모는 막 알을 깨고 나오려던 제게 이 책을 권했습니다. 그 선택은 정확했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읽은 뒤부터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소설이니 어느 정도는 꾸며진 이야기일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실제의 역사는 오히려 더 참혹했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역사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현대사가 겹겹의 비극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그중에서도 오래 마음에 남은 사건은 제주 4·3이었습니다. 제주가 고향인 아내를 만나면서 그 사건은 제게 더 이상 멀리 있는 역사가 아니게 됐습니다. 책 속의 비극이 아니라 얼굴을 가진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독서는 그렇게 제 삶에서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습니다. 소설에서 역사로, 역사에서 철학으로, 다시 다른 문학과 사유로 계속 번져 갔습니다. 더 이상 시험이나 성공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독서 자체가 삶의 한 방식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윤성근 작가가 말한 문사철 독서법을 자연스럽게 제 삶 속에 들여와 살아온 셈입니다. 그 흐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그 관심이 자연철학과 양자역학까지 닿아 있습니다.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공부와 담을 쌓고 살던 문과생이 이런 책들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이 저 스스로도 낯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학과 역사와 철학, 그리고 과학을 오가며 읽는 일이 이제는 저를 이루는 중요한 한 부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작에는 고3 여름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더는 그 자리에 머물 수 없다는 절박함 속에서 붙잡았던 공부가 결국 제 삶의 방향 자체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후의 독서와 사유도 모두 그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저는 누군가가 정해 준 길을 따라온 사람이 아니라, 필요를 느낀 순간 스스로 방향을 틀고 그 결과를 감당하며 살아온 사람에 더 가깝습니다. 늦게 시작한 공부도 그랬고, 이후의 독서도 그랬습니다. 확신이 있어서라기보다 그대로는 살 수 없다는 감각이 저를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새로운 선택 앞에 서면 그때를 떠올립니다. 처음으로 제 삶의 방향을 스스로 바꾸려 했던 순간을요. 저는 여전히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려는 태도만큼은 그때 이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첫 번째 선택의 흔적은 지금도 제 안에 남아, 다음 삶의 방향을 천천히 밀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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