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어머니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내를 제외하면 단연 어머니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존경합니다. 저를 낳아준 부모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책임감 있는 부모가 무엇인지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주어진 환경에 무너지지 않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모습을 바꾸면서라도 삶을 건너온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삶은 제게 가족이라는 말의 무게를 가장 또렷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포항 구룡포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포항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여동생 하나와 남동생 둘을 둔 맏딸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큰딸답게 부모에게 잘하고 동생들을 돌보며 일찍 철이 든 아이였다고 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외할아버지의 소개로 당시 중앙청이던 정부기관에 하급직 공무원으로 들어갔고, 선을 통해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집의 첫째였습니다. 정확히는 어린 시절 부유한 집안의 장남으로 자랐지만, 집안 형편이 급격히 기운 경우였습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고,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성장했습니다. 학창 시절 얻은 질병과 외로움도 오래 품고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측은했다고 합니다. 결국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결혼한 다음 해에 제가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끝내 인정하지 않지만, 계산해 보면 저는 속도위반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아버지는 멀쩡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지만 생활은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 날이면 어머니에게 대신 회사에 전화해 몸이 아프다고 말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직장 생활을 해본 지금의 제 기준으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결국 직장을 오래 버티지 못한 아버지는 응암동에서 작은 청소년 오락실을 열었습니다. 오락 한 판에 10원을 내던 시절이었습니다. 부모에게 도움을 받지 못한 두 사람은 자기 힘으로 가난을 벗어나 보려 했지만, 끝내 그러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재봉틀 일을 했고, 인형 눈 붙이기 같은 부업도 했습니다. 학습지 방문교사 일도 했습니다. 한여름 하굣길에 땀에 흠뻑 젖은 채 학습지를 돌리고 있던 어머니를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의 마음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어린 저는 그 장면을 보며 막연한 안쓰러움을 느꼈고, 어른이 된 지금은 그때의 어머니가 얼마나 고단한 삶을 버티고 있었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애써도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락실은 결국 문을 닫았습니다. 빚을 떠안은 가족은 청약으로 마련했던 상계동의 15평 아파트마저 잃었습니다. 그 무렵부터 아버지는 일을 놓고 술에 더 깊이 기댔고, 어머니는 대형병원 장례식장에서 밤낮없이 음식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가까스로 유지되던 가정도 결국 무너졌습니다. 아버지의 언어폭력 끝에 두 분은 이혼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벌어오는 푼돈에 기대어 대학을 마치고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고된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사람들을 만나고 산악회 모임에 나가며 밝은 얼굴을 유지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시절에는 어떻게 그 많은 것을 견디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울 만큼, 이혼 이후의 어머니는 오히려 더 또렷한 생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어머니는 정년퇴직을 했고, 저와 동생도 결혼해 각자의 가정을 꾸렸습니다. 요양보호사로 제2의 삶을 준비하던 때에는 희귀 혈액암이 찾아왔습니다. 여러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긴 끝에 지금은 표적치료제로 안정을 찾았습니다. 동네 합창단에 참여하고 도서관에서 봉사를 하며 다시 활기 있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늘 곁에 있던 존재였기에 저는 오랫동안 어머니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혈액암으로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던 시간을 곁에서 지켜보며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삶이 어떤 모양이었는지와 상관없이, 눈앞에 주어진 현실 앞에서 번번이 물러서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불평보다 감당을 먼저 택했고, 주저앉기보다 버티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한평생을 함께 살아온 저조차,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셈입니다.
어머니에게서 어떤 문장을 배웠나요?
초등학교 때 일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동생과 함께 동네 목욕탕에 간 적이 있습니다. 물을 좋아했던 저는 가만히 있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동생과 함께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정신없이 놀았습니다. 온탕에 얌전히 앉아 있어야 때를 밀 수 있는데, 말을 듣지 않는 아들들 때문에 아버지의 짜증은 점점 커졌던 모양입니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화가 풀리지 않았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날을 세웠습니다. “네가 애들 교육을 제대로 안 시켜서 애들이 내 말을 하나도 안 듣네.”
외가댁에 방문했다가 기분이 상했을 때나, 저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아버지는 종종 어머니를 탓하곤 했습니다. 그날도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감정을 앞세워 맞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제 아내가 보여 주는 당당함과 비교하면, 그 시절의 어머니는 지나치게 순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날도 저는 어머니가 평소처럼 조용히 듣고만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날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향해 또렷하게 말했습니다. “애들이 우리 말을 잘 들으면, 커서 고작 우리밖에 더 되겠어요? 말을 안 듣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야 우리보다 나아지는 거예요.”
저는 그 말에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에게 그렇게 분명하게 반박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처음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움은 금세 다른 감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말이 이상하리만큼 옳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말을 무조건 잘 듣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 정말 좋은 교육인가. 어머니의 말은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자녀를 바라보는 현명한 생각처럼 들렸습니다.
비슷한 장면은 그 뒤에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저는 일부 문제아들로 구성된 음성적인 서클에 속해 있다는 이유로 경찰서와 학교에서 조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희가 실제로 법을 어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는 저희가 몰려다닌다는 이유만으로 문제를 삼았습니다. 어느 날 저와 친구들의 부모가 학교로 불려 갔습니다. 선생님들은 저희의 행동을 마치 큰 잘못인 것처럼 몰아세웠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식당 일을 마치고 온 어머니는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들이 뭘 잘못했다는 건가요? 법을 어긴 것도 아니고, 단지 모여 다녔다는 이유로 이렇게 죄인 취급을 받는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순간 분위기가 멈췄습니다. 이미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친구들까지 모두 어머니를 바라봤습니다. 선생님들도 더는 강하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이내 예방 차원에서 한 이야기였다고 입장을 바꾸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는 저를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늘 하던 말을 조용히 건넸습니다. “엄마는 아들을 믿어.”
저는 어머니에게서 그 문장을 배웠습니다. 믿음은 누군가를 통제하기 위해 건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발로 세상 앞에 서게 만드는 말이라는 것을요. 사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붙잡아 두는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를 잃지 않도록 받쳐 주는 힘에 더 가까웠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그 문장을 오래 품고 살아왔습니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의 뜻을, 어머니는 설명이 아니라 삶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문장은 지금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아내는 저를 두고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대체 뭘 믿고 그렇게 자존감이 높으냐고 말입니다. 농담처럼 하는 말이지만, 저는 그 말이 아주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가진 것 하나 없던 시절의 저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도, 어쩌면 제가 제 자신을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의 말로 하면 저는 비교적 자존감이 안정된 사람입니다.
저는 그 바탕에 어머니의 태도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는 제 선택을 쉽게 불신하지 않았습니다. 학창 시절 문제를 일으켜 학교에 불려 갔을 때도, 남들과 다른 목소리를 낼 때도, 입시에서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삼수 끝에 편입이라는 길을 택했을 때도, 실연의 상처로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술로 시간을 보내던 때도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제 행동 하나하나를 칭찬하지는 않았지만, 제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잘했다는 말보다 괜찮다는 태도가 늘 먼저였습니다. 그 믿음이 제 안에 오래 남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태도는 제 삶에 두 가지 흔적을 남겼습니다. 하나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마음이었습니다. 실패를 하더라도 아주 오래 주저앉지는 않았고, 타인의 평가에 휩쓸려 제 가치를 함부로 의심하지도 않았습니다. 잘될 때만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잘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는 감각이 제 안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어머니는 아들을 믿어”라는 문장은, 시간이 지나며 “나는 존재만으로도 괜찮다”는 감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자존감이 성취의 결과라기보다, 누군가에게 믿음을 받아본 경험에서 자란다는 사실을 어머니를 통해 배웠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를 잃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다시 말해 관계 안에 들어가되, 관계에 휩쓸려 제 중심까지 내주지는 않는 감각입니다. 어머니는 사회성이 좋은 사람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알게 된 친구 어머니들과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아르바이트 자리와 병원 식당에서 만난 사람들과도 관계를 오래 유지합니다. 지금도 동네 복지관 도서관에서 봉사를 하고, 합창단에 들어가 공연도 합니다. 혈액암 치료를 받고 퇴원하던 날, 8인실 병실의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네며 용기와 격려를 전하던 모습은 지금도 또렷합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저는 사람과 잘 지낸다는 것이 단지 붙임성이 좋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힘, 어머니에게는 그런 자연스러운 품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대단한 이력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람도 아닙니다. 무책임한 남편을 만나 오래 고생했고, 이제야 겨우 조금의 여유를 얻은 사람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자리에서든 자신을 과장하지 않았고, 처지를 쉽게 비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왔습니다. 저는 그 모습에서 사람을 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필요할 때는 말하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때는 침묵하는 태도. 거절해도 관계가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감각. 오해가 생겨도 타인과 자신을 한꺼번에 부정하지 않는 자세를 말입니다. 결국 그것은 관계의 결과와 상관없이 나로 남는 법이었습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할수록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과장하는 사람도 많이 보았고, 상처받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거리를 두는 사람도 자주 보았습니다. 관계가 틀어지는 순간 타인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함부로 부정해 버리는 모습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보며 저는 더 분명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혼자 지내는 성향은 하나의 기질이거나 취향일 수 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나를 지킬 힘이 없어 관계 자체를 두려워하는 상태는 다른 문제라는 것을요. 저는 다행히 자존감과 사회성이라는 두 힘을 함께 지닌 어머니를 보며 자랐습니다. 그 덕분에 저 역시 큰 흔들림 없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올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한 친구가 수능을 망친 아들 때문에 깊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는 자신의 삶에서 한 번도 뒤처졌다고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 앞에서 더 쉽게 불안해진다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아이보다 먼저 불안해지는 부모의 마음이란 아마 그런 것일 것입니다. 그 친구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취의 속도보다 먼저 아이를 믿는 태도가 얼마나 오래 남는 힘이 되는지, 어머니 같은 사람의 삶이 조용한 답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바람이 하나 생겼습니다. 언젠가 북토크를 할 기회가 있다면, 어머니를 카메오처럼 한 번 모시고 싶습니다. 자녀의 자존감과 사회성을 어떻게 키워왔는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으로 들려주는 자리를 함께 만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 자리는 아마 제가 쓴 어떤 문장보다 더 오래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