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자라게 한 결핍은?
나를 자라게 한 결핍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보다, 우리에게 없는 것에 의해 정의되곤 한다.”
결핍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 정리하게 되는 문장입니다. 누군가의 명언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에게 없는 것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움직이는 힘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품게 된 생각입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정확히 아는 일도 어렵고, 그것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볼 때 야무지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결핍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단순히 부족한 상태와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부족함은 채우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컵에 물이 모자란 상태와 비슷합니다. 물을 더 따르면 됩니다. 일시적이고 기능적인 문제입니다. 반면 결핍은 그보다 깊습니다. 컵에 금이 가 있거나, 컵의 모양 자체가 처음부터 비뚤어진 상태에 가깝습니다. 결핍은 채워야 할 양의 문제가 아니라, 삶이 기울어진 방식과 더 닿아 있습니다. 부족함이 해결의 대상이라면, 결핍은 이해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나를 자라게 한 결핍은 처음부터 결핍이었을 수도 있고, 처음에는 부족함이었지만 오래 방치되며 삶의 조건처럼 굳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가 아니라, 그 이후 나를 어디로 이끌었는가일 것입니다. 어떤 결이 내 가치관의 기울기를 바꾸고 선택의 기준을 만들었다면, 저는 그것을 나를 자라게 한 결핍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돌아보면 제 삶에는 비교적 선명한 두 가지 결핍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물질적 결핍이었습니다. 성장 과정 내내 가난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를 둘러싼 현실이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감의 결핍이었습니다. 자존감과 자신감은 다릅니다. 자존감이 존재 자체에 대한 감각이라면, 자신감은 내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믿음에 가깝습니다. 저는 존재 자체를 쉽게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랫동안 내가 세상 안에서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지는 못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작게 느끼는 시간이 길었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어머니라는 세계와 분리되며 근원적인 상실을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후 긴 삶 동안 그 잃어버린 충만함을 되찾고 싶어 사랑하고 배우고 성취를 꿈꿉니다. 제 경우에는 인생의 절반을 남처럼 살아온 아버지의 부재가 그 빈자리를 더 크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질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고, 정서적으로도 기대어 설 만한 자리가 부족했습니다. 결핍이 삶을 잠식하던 시기에는 원망이 앞섰고, 삶은 자주 메말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결핍은 단순히 비어 있는 구멍만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를 예민하게 만들고, 오래 생각하게 하고, 쉽게 만족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기도 했습니다. 늘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더 나아지고 싶었고,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에 더 배우려 했습니다. 남들보다 늦게 공부를 시작했던 일도, 이후 책을 붙들고 오래 살아온 시간도 어쩌면 그 결핍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결핍은 저를 멈추게 하기보다 오히려 계속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제 결핍을 단순히 불행한 조건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 삶의 태도를 만들었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고, 끝내는 저를 앞으로 밀어온 힘이 되었습니다. 늦었지만 이런 저를 만드는 데 한몫한 아버지에게도 복잡한 방식의 고마움이 생겼습니다. 결핍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제 그것은 저를 주저앉히는 빈자리라기보다, 계속 살아가게 만드는 오래된 추동력으로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결핍은 인간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결혼한 뒤 아내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보며 쉽게 익숙해지지 못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내의 관계 안에서는 선물이 자연스럽게 오갔습니다. 겨울이면 제주도에서 감귤이 도착했고, 평소에는 생필품이 오갔습니다. 생일이나 특별한 날에는 제법 값이 나가는 선물이 배달되기도 했습니다. 아내 역시 친구들에게 아끼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형제끼리도 생일 선물을 주고받지 않던 저로서는 그런 풍경이 낯설었습니다. 처음에는 따뜻한 관계라기보다 부담스러운 관계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남에게 얻어먹는 일을 편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오늘 얻어먹으면 언젠가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기 때문입니다. 여유가 있을 때는 차라리 제가 계산하는 편이 마음이 편합니다. 반대로 여유가 없을 때는 아예 약속 자체를 만들지 않는 쪽을 택합니다. 동네에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동생들 가운데 외식업으로 큰돈을 번 친구가 있습니다. 자연히 모임의 씀씀이는 커졌고, 저는 초대를 받아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자리를 피했습니다. 제가 형인데 매번 얻어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루 저녁 술값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돈을 쓰는 것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피한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내와의 연애 초반에도 비슷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결혼 전 이야기입니다. 저는 연애에서 일방적으로 지출하는 역할을 맡지 않았습니다. 그럴 형편도 아니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데이트 초반에는 대놓고 더치페이를 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대신 1차를 제가 사면 2차는 아내가 사는 식으로 균형을 맞추려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1차의 비용이 2차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이 자꾸 눈에 들어왔습니다. 결국 어느 날 저는 당시 여자친구였던 아내에게 이렇게 묻고 말았습니다. “너는 왜 1차를 안 사? 혹시 꽃뱀 그런 거야?”
지금은 웃으며 꺼내기도 하지만, 아내는 여전히 그 기억을 떠올리면 화를 냅니다. “비싸 봐야 소곱창 한 번 사 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요. 다시 생각하면 좀스러운 장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습에는 물질적 결핍이 제 인간관계에 남긴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관계를 맺으면서도 마음보다 손해를 먼저 계산하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관계를 제한하려는 태도였습니다. 친밀함보다 균형을 먼저 따졌고, 정보다 비용에 먼저 반응했습니다. 가난이 사람을 인색하게 만든다는 말이 있다면, 적어도 그 시절의 저는 그 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를 오래 붙들었던 것은 자신감의 부족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로 열등감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까이 지낸 친구들 가운데 지금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을 떠올리면, 그 시절 제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열등감도 함께 떠오릅니다.
한 친구는 외모와 체격이 저와 비슷해 자주 비교되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성장할수록 그는 점점 더 눈에 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때 저와 닮았다는 말은 나중에는 우스운 말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농구도 잘했고, 공부도 잘했고, 사람들의 관심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쏠렸습니다. 제가 나름 잘한다고 믿었던 것들마저 그 앞에서는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그런 비교를 견딜 만큼 단단하지 못했습니다. 그 열등감은 생각보다 오래 제 안에 남아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만났습니다. 재수학원에서 다시 마주친 그는 이미 대학생이었고, 더 좋은 대학으로 옮기기 위해 한 학기 휴학한 상태였습니다. 재수생이던 저와는 출발선부터 달라 보였습니다. 그 무렵 저는 같은 반의 한 여학생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듯 보이던 아이였습니다.
월드컵 시즌 어느 날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축구를 보러 갔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친구들을 만났고, 그 자리에 그 친구도 있었습니다. 경기를 보던 중 한 외국인이 다가와 영어로 자리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자연스럽게 나서서 말했습니다. “Here is occupied.” 아주 짧은 문장이었지만, 저는 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그 여학생이 그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역시 대학생은 다르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그 일을 제 부족함과 연결 지으며 힘들어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두 장면은 단지 누군가에게 뒤처졌다는 기억만은 아니었습니다. 물질적 결핍은 관계 앞에서 저를 먼저 움츠러들게 했고, 자신감의 부족은 타인과 비교하며 스스로를 쉽게 작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사람을 만날 때도 있는 그대로 관계 안에 들어가기보다, 손해를 볼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비교에서 밀릴지 모른다는 불안을 함께 들고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관계가 편할 리 없었습니다.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먼저 경계했고, 좋아하는 마음이 생겨도 쉽게 당당해지지 못했습니다. 결핍은 그렇게 제 인간관계의 바닥에 오래 깔려 있었습니다.
결핍은 지금도 나를 움직이고 있나요?
지금의 저는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했던 것에서 출발한 계기가 결국 하나의 정체성으로 굳어진 사람에 가깝습니다. 다만 과거에는 결핍이 제 선택을 대신 결정했다면, 지금은 그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중입니다. 결핍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몸의 일부처럼 남아 여전히 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제 저는 그것을 밀어내기보다 바라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합니다.
제가 결핍을 받아들이게 된 과정은 생각보다 단순했습니다. 먼저 그것이 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사실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시에 왜 그런 결핍이 생겼는지도 오래 생각했습니다. 그 원인과 결과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외면해 온 제 모습과 자주 마주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돌아본 끝에 알게 된 것은 분명했습니다. 결핍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부족함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고 해도, 그 부족함을 통과하며 만들어진 가치관과 반응 방식은 오래 남습니다.
제 안에는 지금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마음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열등감이 함께 있습니다. 아내의 넉넉한 씀씀이를 보면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움찔합니다. 나이나 위치 때문에 따라오는 지출이 부담스러울 때면, 빠져나갈 여지가 없는지 먼저 살피기도 합니다. 또래이거나 더 어린 누군가가 앞서 나가고 주목받는 모습을 보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조급해집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도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그래도 예전과는 달라진 점이 있습니다. 결핍이 더 이상 저를 무조건 숨게 하거나 방어적으로만 만들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과거의 결핍이 움츠러들게 하는 힘에 가까웠다면, 지금의 결핍은 그 구조를 한 번 더 바라보게 하고 조금 더 오래 생각하게 만듭니다. 내가 겪었던 물질적 빈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나와 타인의 가난은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되어 왔는지를 다시 묻게 합니다. 한때는 구질구질하게만 느껴졌던 가난이 이제는 타인을 이해하는 하나의 시선으로 남아 있습니다.
자신감의 부족도 비슷합니다. 예전에는 그 부족함이 저를 자꾸만 비교하게 하고 작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겉으로 드러난 태도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불안을 더 빨리 알아보게 합니다. 누군가 망설이거나 무리 속에서 유난히 고립되어 보일 때, 저 역시 한때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전보다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하고, 때로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 위해 말을 아끼기도 합니다.
결핍은 지금 이 글을 쓰게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핍에서 비롯된 예민함과 민감함은 세상을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자세히 바라보게 했습니다. 돌아보면 결핍을 안고 산다는 것은 완성되지 않은 삶을 받아들이는 일과도 닿아 있습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자리가 남아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아직도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완벽해지기를 꿈꾸지 않습니다. 대신 제 안의 금 간 틈을 따라 흘러나오는 생각과 마음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그 틈이 있기에 저는 계속해서 쓰고, 누군가를 이해하려 애쓰고, 어제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결핍은 지금도 저를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이어지는 한, 저는 앞으로도 계속 자라날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