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성공의 경험은 무엇인가요?
2013년 9월 13일, 제주도에서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제주도로 이직한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2차로 들른 맥줏집에서였습니다. 1차에서 이미 얼큰하게 취한 상태였고, 제가 제주에 올 때마다 가끔 들르던 곳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아일랜드스톤’이라는 웨스턴 펍이었습니다. 술을 마시면 자연스럽게 음악을 찾는 제 취향에 잘 맞는 공간이기도 했습니다.
저와 친구들은 바텐더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아 맥주를 주문했습니다. 1차에서 소주를 적잖이 마신 탓에 친구 한 명은 거의 쓰러지듯 엎드려 졸고 있었습니다. 남자 셋이 그것도 한껏 취한 상태로 술집에 앉아 있으니, 딱히 재밌을 건 없었습니다. 여행객이었던 저는 괜히 들뜬 마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살폈습니다.
그러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생각했습니다. 말을 걸어야겠다고. 취기도 있었고, 여행지라는 분위기가 괜한 용기를 더해 주기도 했습니다. 무슨 말로 시작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그녀가 마시고 있던 술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테킬라였습니다. 그 순간 그녀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남미에서 마시는 화끈한 독주를 마시는 여성이라니! 다가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테킬라를 마실 땐, 들어야 하는 음악이 있지요.”
그 말은 영화 한 편에서 왔습니다. 토마스 얀 감독의 『Knockin' on Heaven's Door』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두 남자가 병실에서 우연히 테킬라를 마시고, 한 번도 보지 못한 바다를 향해 떠나는 영화입니다. 마지막 바닷가 장면과 함께 흐르던 음악이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테킬라를 마시는 그녀를 보자 그 영화와 노래가 동시에 떠올랐고, 저는 그 이야기를 그녀와 나누고 싶었습니다. 혹시라도 그녀가 그 영화나 노래를 안다면, 왠지 우리 사이는 운명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제 기대는 망상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그녀의 대답은 차가웠습니다. 괜찮다고 쌀쌀맞게 말하며 몸을 일행 쪽으로 틀었습니다. 거기서 물러설 법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거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등에 대고, 관심이 있으니 잠시만 이야기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다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제가 나이가 많아 보여서 부담스럽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 말 덕분에 대화의 실마리가 생겼습니다. 우리는 서로 나이를 물었고,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믿지 않았습니다. 제가 노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운전면허증을 꺼내 생년월일만 보이게 하고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는 손으로 가렸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순간 동갑이라는 사실보다도 그런 상황에서 뒷자리를 가리는 제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그 순간 ‘어, 이 섬세한 남자는 뭐지?’라는 호기심이 생겼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연락처를 받았고, 다음 날 다시 만났습니다. 다만 상황은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저와 그녀는 각자 오래 사귄 연인이 있었습니다. 관계의 끝자락에 서 있던 시기였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넘길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더구나 저는 여행지에서 잠깐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까지도 그녀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으로 다른 방식을 택했습니다. 책을 좋아한다고 했으니, 이 만남의 여운을 책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을 추천했습니다. 읽고 나면 오래 마음에 남고, 쉽게 잊히지 않을 책이었습니다. 그녀는 읽어보겠다고 했고, 우리는 그렇게 기약 없이 헤어졌습니다.
며칠 뒤 서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그녀였습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들려온 첫마디는 왜 그런 책을 추천해서 결국 자신이 먼저 연락하게 만드느냐는 말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그녀는 제 미끼를 물은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약 6개월을 연애했고, 결국 부부가 되었습니다. 극적인 만남이었고, 짧은 연애였고, 빠른 결혼이었습니다. 그 뒤의 시간을 이야기하자면 정말 책 한 권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서 중요한 것은 그 이후보다 시작의 순간입니다. 저는 첫눈에 반한 사람에게 망설이지 않고 다가갔습니다. 거절 앞에서 곧바로 물러서지 않았고, 제 방식으로 끝까지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사람은 제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일을 제 삶에서 가장 선명한 성공의 경험으로 기억합니다. 성취나 지위, 돈으로 설명할 수 있는 성공도 있겠지만, 제게 더 크게 남아 있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내 삶을 바꾸는 사람을 알아보고, 놓치지 않고, 끝내 내 삶 안으로 맞아들인 일입니다. 그보다 제 인생을 더 크게 바꾼 성공은 아직 없었습니다.
인생에서 실패의 경험은 무엇인가요?
아내와 이어진 인연이 제 인생의 성공 경험이라면, 아버지와 끊어진 인연은 제 삶의 실패 경험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제 삶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가족이라는 자리 안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판단에 의지를 내려놓고 보니, 가족은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관계이면서도 끝내 삶의 깊은 곳까지 영향을 미치는 질긴 인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는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은 많지 않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았던 탓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자기감정에만 몰두한 채 말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도 저는 자세히 모릅니다. 대신 몇 가지 단편만 남아 있습니다. 친어머니를 일찍 여의었다는 이야기, 할아버지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중앙정보부에서 일하던 수재였다는 이야기, 국민학교 시절 자신의 생일날 서울시장이 집으로 축하를 왔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입니다.
제 기억 속의 아버지는 기본적으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너무 일찍 어머니를 잃은 탓에 정에 굶주린 채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문제는 그 외로움을 끝내 견뎌내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유망하던 건설회사를 그만두고, 제가 유치원에 다니던 무렵부터 오락실을 운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 용돈으로 돌아가는 오락실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우리 가족은 가난을 삶의 바탕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정용 게임기가 보급되고 시대가 바뀌면서 아버지의 오락실은 빠르게 기울었습니다. 결국 가진 돈마저 모두 잃고 파산에 이르렀습니다. 그 무렵부터 아버지는 술에 더 깊이 의지하기 시작했고, 분노와 좌절을 어머니에게 돌리며 폭언을 일삼았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몸도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젊은 시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다 맹장염으로 급히 귀국해 수술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종양이 발견돼 장을 많이 잘라냈다고 합니다. 그 뒤로는 평생 화장실을 자주 드나들어야 하는 몸으로 살았습니다.
문제는 술로 인해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되면서 더 선명해졌습니다. 아버지는 화장실이 아닌 곳에 대변을 흘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한 번은 막 사귀기 시작한 여자친구를 집에 데려온 적이 있습니다. 술에 취한 아버지와 마주칠까 봐 서둘러 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여자친구가 발에 물컹한 무언가를 밟았다고 했습니다. 손으로 미끈한 것을 만졌다며 놀라 떼는 순간, 그것이 아버지가 마룻바닥에 흘린 묽은 대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 분노가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와 계속 함께 사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저는 집 근처에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들도 더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버지는 집을 나갔습니다. 안양 근처에 살던 고모에게 간다는 말만 남긴 채였습니다. 간신히 이어오던 가족이라는 끈은 그렇게 끊어졌습니다. 그때는 그날이 아버지를 보는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저는 취업을 했고 결혼도 했습니다. 그런데 삶이 조금씩 안정될수록, 외면해 왔던 두려움이 오히려 또렷해졌습니다. 결혼식조차 빠듯하게 치렀던 형편이었기에, 혹시라도 부양을 목적으로 아버지가 다시 연락해 오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늘 마음 한구석에 있었습니다. 아내는 괜찮다고 말해주었지만, 저는 쉽사리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자리를 잡아갈수록 그 불안은 더 커졌습니다. 해외로 도망치듯 나가고 싶어 주재원 자리를 여러 번 알아보기도 했지만,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아버지의 연락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연락이 왔습니다. 헤어진 지 스무 해가 지나고, 제가 결혼한 지도 십 년쯤 되었을 무렵이었습니다. 다만 연락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그동안 아버지를 돌보던 고모였습니다. 병세가 위중하니 와서 뵙고 모셔가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거절했습니다. 이제 와서 아버지라는 존재를 다시 제 삶 안으로 들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형제들과 다시 엮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장남인 저 대신 마음이 약한 동생이 요양원에 누워 있던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제가 평생 머릿속으로 그려 왔던 아버지의 마지막과는 어울리지 않게, 벚꽃이 흩날리던 3월의 맑은 날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제 실패는 아버지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정도의 이해는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제 실패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끝내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 채 관계를 완전히 닫아버렸다는 데 더 가깝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미워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충분하다고 해서 그 결말까지 온전히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점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지금도 제 삶에서 가장 선명한 실패로 남아 있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지금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실패의 이야기부터 조금 더 이어가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장례는, 아버지와 헤어진 날부터 마음속으로 오래 준비해 온 일이었습니다. 수없이 각오했고, 머릿속으로는 여러 장면을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일이 현실이 되자 저는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습니다. 일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은 예상했지만, 그때 제 안에서 어떤 감정이 올라올지는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저는 아버지 상중에 예정돼 있던 출장 일정으로 일본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해 일본은 이상 기온으로 벚꽃이 늦게 피었습니다. 교토 거리를 걷다가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는데,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그 순간 울컥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닷새 동안 그 감정은 수시로 올라왔고, 저는 그것을 삼키며 가까스로 일정을 마쳤습니다.
그 일을 지나며 비로소 아버지를 향한 오래된 원망이 조금씩 느슨해졌습니다. 동시에 세상을 향해 품고 있던 옅은 분노도 함께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삶에서 오래 품어온 원망과 미움이 결국은 붙들고 있을수록 나만 지치는 감정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스며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 계시지만, 세상과 저를 이어주던 줄 하나가 툭 끊어진 듯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딩크로 살아가며 아이가 없다는 사실이 그 느낌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전까지의 저는 삶을 늘 높은 압력으로 밀어붙이며 살아왔습니다. 늘 긴장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음이 서서히 느슨해지는 변화를 처음 겪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 삶에서 가장 큰 실패로 남은 관계가 저를 조금씩 놓아주기 시작한 셈이었습니다.
한편 제 삶에서 가장 선명한 성공은 아내와의 결혼이었습니다. 저는 원래 비혼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겉으로는 한 사람을 평생 사랑할 자신이 없다고 했지만, 사실은 결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돈도 없었고 책임져야 할 가족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 제게 결혼은 사치처럼 느껴졌습니다. 당시 만나던 사람들에게도 연애는 가능하지만 결혼은 할 수 없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제 운명은 그런 것이라고 스스로 납득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 삶에 아내가 들어왔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주변의 걱정도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연애 기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모든 계절을 함께 보내보기도 전에, 가을에 만나 봄에 결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크게 두렵지 않았습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보고, 서로의 선택이 틀렸다면 그때 다시 판단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혼은 한 번의 선택으로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계속 함께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결혼 생활을 함께하는 시간으로 채우고 싶었습니다. 둘 다 가난한 집에서 사실상 가장처럼 자라왔기에, 결혼 후에는 아이 없이 서로에게 집중하자는 데에도 뜻이 맞았습니다. 그만큼 더 성실한 결혼 생활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아버지에게서 배우지 못했던 삶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우선 둘이 함께할 수 있는 영역을 만들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저와, 배우는 일을 좋아하는 아내였습니다. 독서는 평생 함께 가져갈 수 있는 취미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동네에서 진행하는 세계문학 읽기 모임에 등록했습니다.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둘만 있는 시간에도 대화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권한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끝까지 읽고, 자신이 좋아하던 인물인 ‘솥뚜껑’이 죽었다며 울던 아내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합니다.
운동도 함께했습니다. 아내는 결혼 전부터 마라톤 대회에 나갈 만큼 활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저 역시 농구, 수영, 마라톤, 등산처럼 몸을 쓰는 일을 좋아했습니다. 먼저 수영을 시작했습니다. 퇴근 후 매일 한 시간씩 수영장에 갔고,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던 아내는 시간이 지나 모든 영법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은 겨울만 되면 필리핀 바다로 떠날 정도로 물을 좋아합니다. 수영은 그렇게 부부가 오래 함께할 수 있는 취미가 되었습니다.
마라톤도 함께합니다. 같은 러닝 크루에 소속돼 나란히 달립니다. 2025년에는 아내가 하프 마라톤에 도전해 완주했고, 저는 그런 아내가 기특해 풀코스 우승보다 많은 상금을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등산도 함께합니다. 예전 직장 산악회에 다니며 국내외 여러 산을 올랐고, 몇 년 전에는 히말라야 5,000미터 봉우리인 체르고리에도 함께 올랐습니다. 이제는 아내를 등산 고수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거의 모든 취미를 함께하며 어느덧 12년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주말 독서모임에서 다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이야기를 나눕니다. 올해는 어떤 산에 오를지, 어떤 마라톤 대회에 나갈지를 함께 상의합니다. 이제 아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아내는 제 삶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반려자가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실패도 성공도 결국은 제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아버지와의 실패는 저를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고, 아내와의 성공은 저를 더 성실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오래 품어온 긴장을 내려놓게 했고, 다른 하나는 삶을 함께 지탱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했습니다. 그렇게 두 경험은 지금도 제 안에서 함께 움직이며 지금의 저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제 삶을 가장 건강하게 받치고 있는 힘은, 결국 아내와 함께 만들어 가는 이 시간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