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15일 목요일
미움은 내가 아직 극복하지 못한 가장 큰 약점이다. 내 기준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마주하면, 이유를 따지기도 전에 미운 감정이 먼저 치밀어 오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미운 사람과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지내는 법을 일찌감치 익혔다는 점이다. 그 기술 덕분에 나는 그럭저럭 사회인으로 살아올 수 있었다. 그게 없었다면 아마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어디서 비롯됐을까. 불우했던 가정환경을 ‘극복’이라는 이야기로 풀 때는 나 자신이 한없이 우쭐해진다. 하지만 약점의 뿌리로 파고들 때면, 나는 늘 같은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무책임했던 아버지, 배려라는 단어는 알지도 못했던 아버지 쪽 가족들. 이해나 관용보다 미움을 먼저 배운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미운 사람을 떠올리라면 끝이 없다. 이번에는 가족을 제외하고 직장에서 만난 한 사람을 떠올린다. 이전 직장에서 만난 꽤 나이 든 선배였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나 타인과의 비교를 숨기지 못했다. 인사팀 수장이던 내 앞에서는 “자신만 잘 봐달라”고 속삭이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너그러운 어른인 척 웃어 보였다. 그 이중적인 태도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면서도 남을 비난하던 그의 모습에서, 잊고 지냈던 아버지 가족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그와 술자리를 하게 됐다. 회사 앞 순댓국집에서 곱창볶음에 소주를 마셨다. 우리는 조금씩 취해갔다. 나는 밝든 어둡든 과거를 쉽게 꺼내놓는 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아주 느리게 풀어놓았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신기하게도 그의 행동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태도라도, 그의 이야기를 감정적으로 따라가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이해였지만, 분명한 건 그를 알고 나서 미움이 조금은 옅어졌다는 사실이다.
그 시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지 않았을 때다.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모습으로 살다, 오랜 시간 남처럼 지내다 떠난 직후였다. 고독사에 가까운 죽음으로 이승을 떠난 아버지를 마주하며, 그도 나처럼 불완전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 순간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때이기도 했다.
‘용서’는 누군가를 도덕적으로 판단해 면죄해 주는 행위가 아니었다. 대상 역시 나와 똑같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그 개념으로 아버지를 이해했다면, 그 사내는 그 감각을 다시 체감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여전히 내가 용서할 위치에 서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해라는 감정이 미움을 조금 느슨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각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볼 필요가 있어. 모든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법이야.”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요즘 꾸준히 참석하는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 속 문장이다. 미움이라는 감정에 유독 취약한 나에게 그만큼 더 깊숙이 다가왔다. 이 문장을 읽으며 이제는 다시 볼 일 없는 그와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두었던 수많은 미운 사람들이 겹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직 만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마주하게 될 또 다른 미운 사람들까지도.
미움이라는 감정은 과연 언제쯤 나를 완전히 놓아줄까. 그만큼 높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이해라는 감정이 미움을 조금이라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내가 비교적 잘할 수 있는 방식, 타인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통해 계속 그 방향으로 걸어가 보려 한다. 미움을 지우기보다는, 그 압력을 낮추는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