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 처제가 다녀갔다. 아내의 사촌 동생으로 올해 스물다섯이다. 나이로만 보면 한참 아래여서 조카뻘에 가깝다. 연년생인 남동생이나 사촌 여동생보다 훨씬 어리지만, 태도는 그들보다 훨씬 진지하고 예의 바르다. 그러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지키는 조심스러움과 가족이라는 끈이 겹쳐지니 잔잔한 애정이 생긴다. 조심성 없는 내 쪽 동생들과 비교되어 더 그런 듯싶다.
처제를 제대로 알게 된 건 십 년쯤 전이다. 처남의 결혼식을 마치고 가족들이 모여 식사하던 자리였다. 버섯처럼 동그란 머리를 한 중학생 소녀가 수줍게 자리에 앉아 있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한다며, 그때 내가 막 감명 깊게 읽었던 『화산도』를 읽고 있다고 했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고향인 제주도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가 어서 성인이 되어 친구처럼 지낼 수 있기를 은근히 기대하게 됐다.
대학을 서울로 진학한 뒤, 처제와의 교류는 자연스레 늘었다. 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사이였지만, 넓은 세상에서 세상과 부딪히며 자신을 만들어 가는 모습이 대견했다. 제주에 있을 때는 집안 사정 때문인지 늘 위축된 모습이었는데, 대학생이 된 뒤로는 자기 색깔이 분명해졌다.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아내가 보이기도 했다. 내가 직계가족은 아니지만, 처제가 잘 커나가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번 방문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합격한 회사 인턴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아는 기업이었다. 미술로 입학했다가 컴퓨터공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게 됐다. 아직 정규직 전환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었지만, 전환형 인턴이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성취였다.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아내와 함께 집으로 불러 저녁을 사주며 이야기를 나눴다.
“형부, 기분은 아직도 스무 살인데 벌써 졸업할 나이가 됐어요.”
근황을 나누다 처제가 말했다. 나이 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감정이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언니나 나도 마음은 아직 스무 살 언저리야.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어.”
처제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되물었다.
“진짜요? 두 분은 엄청 어른스러워 보이는데요.”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처제 앞에서는 의도적으로 어른인 척한 적도 없고, 오히려 철없이 장난을 치던 편이었는데. 문득, 내 눈에 어른스러워 보이는 어르신들도 사실은 나와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몽테뉴에 관한 책을 읽다가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문장을 만났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지혜가 저절로 쌓이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늙은이에게는 젊은이보다 더 많은 허영과 결점이 생기기도 한다고 했다. 사소한 일에 발끈하고, 쓸데없는 수다를 늘어놓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재산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는 경향들. 나는 그 묘사가 요즘의 나와 닮아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만약 이것이 ‘어른스럽다’는 말의 실체라면, 그건 칭찬이 아니라 안타까움을 돌려 말한 표현일지도 몰랐다. 몽테뉴의 말처럼 그것이 나이와 함께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경향이라면, 나는 그런 선배들을 덜 비난해야 했다.
몽테뉴의 결론은 이러했다. 사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결점 없이 사는 법이 아니라 결점을 지닌 채 살아가는 법을 받아들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에세』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존재에는 갖가지 역겨운 특성이 단단히 들러붙어 있다. 그러나 누군가 이런 특성의 씨앗을 인간으로부터 제거한다면 우리 삶의 근본적인 여건은 파괴될 것이다.”
나는 처제에게만큼은 ‘나이 든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 처제를 비롯해 말이 통한다고 느끼는 몇 안 되는 젊은 친구들 앞에서만큼은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몽테뉴의 말을 따라가다 보니, 그 바람 자체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욕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으며 드러나는 결점을 인정하는 태도, 어쩌면 그게 나이를 먹으면서 배우는 유일한 지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먼저, 결점 많은 어른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 처제도, 늙은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아직은 이런 걱정이 이르다고 스스로를 달래 보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