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는 왜 언제나 최악인가?

2026년 1월 19일 월요일

by 세템브리니

“도쿄 사람이 도쿄에 대해 쓰려면, 먼저 도쿄 바깥으로 나와야 합니다.”


작년 1월 14일, 일본의 사상가이자 평론가 우치다 다쓰루의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를 읽었다. 30년 넘게 글을 써온 저자가 좋은 글쓰기와 읽기에 대해 정리한 책이다. 읽은 지 1년이 지난 책에서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문장을 다시 만났다는 사실은, 책을 읽고 감상을 어디든 기록해 둬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십오 년 넘게 페이스북에 끄적여온 나는 ‘과거의 오늘’을 열어보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 글 역시 그런 루틴에서 시작됐다.


작가는 말한다. 세계문학은 자신이 있는 자리를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능력이 없으면 성립하지 않는다고. 내가 세계문학을 읽으며 감동하는 순간은 언제나 비슷하다. 작품 속 개별적인 상황이, 읽고 있는 내 삶의 상황과 보편적으로 맞닿는 장면을 만날 때다. 16세기에 쓰인 몽테뉴의 『에쎄』를 17세기 독자도, 18세기 독자도, 20세기 독자도, 그리고 지금의 나 역시 자신의 이야기처럼 읽는다는 사실이 그걸 증명한다. 그래서 고전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의미가 닳는 책이 아니라 계속 새로 생겨나는 책인지도 모르겠다. 완독 되기보다 재독 되는 책 말이다.


최근 내 글을 읽은 가까운 친구가 인상적인 평을 남겼다. 모든 글에 자의식이 강하게 드러나 있어서, 조금 더 객관적인 시선의 글이 궁금하다는 이야기였다. 자의식이 내 글의 장르적 특징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자의식으로 이루어진 세계 안에서 3인칭 시점으로 한 번 써보라는 제안은 솔깃했다. 음악을 하는 친구답게, 아주 감각적인 지적이었다. 다만 그런 글은 소설에 더 가까웠다. 1인칭 자전적 서사에 익숙한 나에게는 아직 거리가 느껴지는 세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내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 자체가 자의식이 강한 아웃사이더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늘 내가 속한 무대의 중심에서 성장해 왔다. 만약 현실에 쉽게 안주하는 성향이었다면, 내가 속한 제도나 문화에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내부에 충분히 속해 있으면서도, 나는 늘 외부인의 시선으로 내가 있는 세계를 바라보고 싶어 했다. 모두가 집 안에서는 냄새를 느끼지 못할 때, 나는 우리 집 냄새를 밖으로 꺼내 말하고 싶었다.


퇴사한 뒤 예전 동료들에게서 전화가 오면, 열에 여덟은 자기 회사가 최악이라고 말한다. 나 역시 그 자리에 있을 때는 같은 시선으로 현실을 바라보곤 했다. 지금 와서 보니, 우리는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사태를 실제보다 더 비관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다닌 회사에 대해 말하려면, 일단 그 회사 밖으로 나와야 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쓰는 글도 마찬가지일까. 쓰는 순간이 아니라, 한참 뒤에 다시 읽어야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일까. 그래서인지 요즘은 내 글을 꾸준히 읽어주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유난히 중요하게 느껴진다.

이전 07화늙어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