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너무 다 까발리는 거 아니냐?

2026년 1월 26일 월요일

by 세템브리니

“내가 너를 잘 몰랐구나.”


중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최근에 한 말이다. 비슷한 환경에서 유별난 사춘기를 보낸 탓에 우리는 서로에게 거의 모든 것을 털어놓으며 지냈다. 그런 그가 내가 쓴 글을 읽고 나를 어색하게 느꼈다고 했다. 며칠 전에는 비슷한 이유로 친하게 지내는 다른 친구도 같은 말을 했다. 말로 파악되는 나와 글로 드러나는 내가 다른 이유는 어쩌면 당연하다. 글을 쓰며 만나는 내가, 나에게도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꽤 익숙한 상황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들과 하루에 스쳐 가는 생각들을 글로 쏟아내고 있다. 언젠가는 책으로 내고 싶지만, 아직은 양도 질도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지금은 가까운 친구들을 비롯해 아내, 엄마, 이모 같은 주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준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발견하는 내가,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나와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솔깃해진다. 쓰면 쓸수록 문장으로 정리되는 나의 존재가, 쓰기 전까지는 몰랐던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만나기에 글쓰기만큼 좋은 수단이 또 있을까.


3년 전,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혈액암 투병으로 생사를 오가는 상황이 반복되던 때였다. 병원 침대에서 괴로워하는 엄마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나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인연의 끈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앞에서, 엄마에게 나를 제대로 알리고 싶어졌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다면, 그게 가장 아쉬울 것 같았다.


다행히 엄마는 기적처럼 살아났다. 표적치료제를 찾으면서 몸 상태가 정상에 가까워졌다. 지금은 암 투병 환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활동적이다. 하지만 작별을 준비했던 순간은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언젠가는 헤어질 엄마에게 나를 알려야 했다. 그래서 엄마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었고, 내 브런치북도 구독시켰다. 지금부터 엄마는 아들의 세계에 초대된 셈이다. 나는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내 글의 열성 구독자다. 매일같이 읽고 또 읽는다. 그러면서 친구들과 비슷한 말을 한다. 아들이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줄 몰랐다고. 재밌다고도 한다. 그리고 내가 외조모가 재산을 모두 아들들에게만 남긴 부당함을 적나라하게 쓰면 걱정도 한다.
“아들아, 너무 다 까발리는 거 아니냐?”


그 걱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런 내가, 엄마가 만들어낸 아들의 본모습이기도 하다. 나는 나를 드러내며 인정을 갈구하는 사람이다. 그걸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엄마를 비롯해 아내, 친구, 전 직장 동료들까지 지인들이 내 글을 읽고 있다. 언젠가 내 글들이 책으로 나오면, 나는 온 국민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친하게 지내는 작가가 한 명 있다. 나는 그에게 자기 이야기를 써보는 건 어떠냐고 권했다. 자신 안에 쌓아둔 이야기가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나와 다른 사람이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나는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나는 나의 세계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살아 있게 만드는 욕망이라는 것을. 이것 역시 글을 쓰면서 발견한 나 자신이다.


이 글도 역시 엄마가 읽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이 괜히 뿌듯해진다. 내가 목격해 온 가족은, 오히려 타인보다도 자신의 내면을 더 숨기는 관계였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종종 생색을 낸다. 아들의 속마음까지 알게 돼서 좋지 않냐고.


살아가며 타인의 내면을 알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또 소중한 일인가.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살아남는 글은 결국 정보가 아니라 개개인의 목소리일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이런 모습으로 삶을 더 구체적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그리고 그런 내가, 꽤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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