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그냥 일기

2026년 1월 27일 화요일

by 세템브리니

아내가 타이베이로 출장을 떠났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4박 5일 일정이다. 아침 8시 비행기라 새벽부터 서둘렀다. 출장을 앞두고 어제부터 감기 기운을 보여, 나는 새벽 4시 반부터 아침을 준비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아내는 빠듯하게 일어나 놓고도 준비는 느긋하다. 결국 5시 45분이 되어서야 집을 나섰다. 추월차선으로 서둘러 달려 제2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6시 40분. 월요일이라 공항 입구부터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내는 급히 공항으로 들어갔지만 줄이 길다. 결국 수속하는 직원이 비상구를 열어줘 가까스로 비행기에 탔다. 나는 약속 시간 30분 전에 여유를 두고 움직인다. 하지만 아내는 이런 루틴을 12년간 반복한다. 연애 기간이 6개월보다 길었다면 결혼에 문제가 됐을 수도 있을, 꽤 치명적인 다름이다.


돌아오는 길은 차가 막혔다. 작년 4월까지 회사에 출근했으니, 오랜만에 겪는 월요일 러시아워다. 인천공항에서 인덕원 집까지 1시간 45분이 걸렸다. 새벽에 공항으로 갈 때보다 한 시간이나 더 걸린 셈이다. 막히는 길에서 운전하는걸, 아내의 늦은 준비보다 더 싫어한다. 중간에 휴게소라도 있으면 아침을 먹고 잠깐 눈을 붙일까 했지만, 티맵을 보니 휴게소는 거의 목적지에 다 와서야 나온다. 그냥 참고 집으로 향했다. 그나마 KBS 클래식 FM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간대에 매일 듣는 프로그램에는 같은 곡을 여러 연주자의 해석으로 들려주는 코너가 있다. 이번 주 곡은 드뷔시의 「달빛」이다. 몇 번을 반복해 들어도 지겹지 않은 곡이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만큼은 막힌 차 안에서도 잠시 희열을 맛본다.


이어 차이콥스키의 「1812년 서곡」이 흘러나왔다. 작곡 배경이 흥미롭다. 1812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퇴각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쓰였다. 도입부에는 러시아 정교회 성가가, 중반에는 프랑스 침공을 상징하는 「라 마르세예즈」가 등장한다. 이후 격렬한 흐름을 지나 러시아 황제 찬가와 종소리, 실제 대포 발사음이 울린다. 러시아의 승리를 선언하는 클라이맥스다. 다만 차르의 암살로 기념행사는 연기됐고, 연주 규모도 당초 계획보다는 축소됐다는 사연이 남아 있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전쟁을 다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고 있는 요즘이라 더욱 귀에 들어오는 음악이었다.


간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새벽에 일어나야 해서 밤 9시 반에 누웠지만 선잠을 잤다. 눈을 떠보니 새벽 2시. 다시 잠을 청했지만 뒤척이다가 결국 금방 일어났다. 알람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더 잘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거실로 나와 어제 읽다 만 박완서의 대담집을 펼쳤다. 충분히 쉬지 못한 눈이 작은 글씨를 향하는 의지에 잠시 반항을 한다. 집중하는데 평소보다 시간을 조금 더 들인다. 그렇게 새벽까지 독서를 이어갔다.


집에 도착해 아침을 만들었다. 아내가 사다 둔 쌀 베이글에 소프트 치즈를 바르고 연어를 올렸다. 작년 뉴욕 여행에서 입맛을 들인 연어 베이글 샌드위치다. 여행지에서 먹었던 그 맛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진한 커피 한 잔과 함께 허기를 달래기엔 충분했다. 긴 운전으로 지친 몸에 탄수화물과 카페인이 들어가자 기력이 서서히 돌아왔다. 대충 집을 정리하고 식탁에 앉아 맥북을 켰다.


브런치북 『자소설』 원고를 열었다. 오늘은 15화, ‘나를 바꾼 인물’을 써야 한다. 고3 때 담임이었던, 작고하신 이관희 선생님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마음먹은 터라 초안은 비교적 수월하게 나왔다. 최근 글이 잘 안 나와 애를 먹던 흐름이 이어지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소설』은 자기소개서 형식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는 자전적 에세이다. 약간의 허구도 섞여 있어 에세이와 소설의 어디쯤에 놓여 있다. 지난 40년간 쌓아온 글감을 풀어놓는 첫 작업이라 소재 자체가 부족하진 않다. 다만 형식상 경험의 핵심만 추려내다 보니, 뒤로 갈수록 이야기가 고갈될 것 같은 불안이 따라온다. 가까운 친구도 이대로 가다 보면 쓸 이야기가 다 소진되는 게 아니냐고 걱정을 한다. 좋은 작가는 경험을 바라보는 렌즈를 자유롭게 당기고 늘릴 수 있어야 한다고 어디선가 읽었는데, 나는 그 능력이 처음부터 부족한 게 아닐까 자꾸 의심하게 된다. 글을 쓸수록 자신감은 오히려 조금씩 닳아간다.


브런치에 접속하니 상단에 ‘글쓰기의 최종 목표는 책이 아니다’라는 제목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글을 쓰기도 전에 책부터 내겠다고 선언하던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 여전히 조급해하는 나에게 꼭 읽어보라고 건네는 말처럼 느껴졌다.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좇으면 안 되듯, 글쓰기의 목적을 출판으로 두지 말라는 조언이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현실을 스스로 변명하게 된다. 책을 내겠다고 직장을 그만뒀으니, 책을 내지 못하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목적이 되어야 할 글쓰기를 어느새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럴수록 글의 수준도 만족스럽지 않다.


오늘은 특별한 문장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하루를 열었던 일상과, 나를 지배하는 생각들로 일기를 대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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