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와 글쓰기, 나를 조금씩 바꾸는 기술에 대하여

2026년 1월 29일 목요일

by 세템브리니

미셸 푸코는 한때 권력을 연구하던 철학자였다. 감옥, 병원, 학교, 군대 같은 제도가 어떻게 사람을 길들이는지를 집요하게 분석했다. 그는 권력을 억압이나 폭력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은 사람을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무엇이 정상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힘. 그래서 우리는 강요받지 않아도 스스로를 관리하고, 스스로를 점검하고, 스스로를 탓하게 된다.


그런데 푸코는 생의 말년에 조금 다른 방향으로 관심을 돌린다. 이제 그는 묻는다. “우리는 정말 그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그리고 질문을 바꾼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다르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이 질문에서 푸코가 발견한 것이 ‘자기 배려’와 ‘삶의 기술’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배려는 흔히 말하는 자기 계발과 다르다. 더 효율적인 인간이 되자는 이야기도 아니고, 더 성과를 내자는 조언도 아니다. 푸코가 주목한 것은 아주 소소한 실천이다. 몸을 움직이는 방식, 자신을 돌아보는 글쓰기, 말하는 태도, 침묵하는 법. 이런 사소한 기술들이 반복되면서 사람은 조금씩 다른 주체가 된다고 그는 보았다.


이 맥락에서 보면 나의 달리기와 글쓰기는 전혀 특별한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해서 쉽게 오해받는 실천이다. 달리기는 곧잘 건강 관리나 자기 단련으로 환원되고, 글쓰기는 성취나 증명의 수단으로 오해된다. 실제로 그렇게 사용될 때가 많다. 기록이 목표가 되고, 목표가 기준이 되고, 기준이 나를 판단하기 시작하는 순간, 이 실천들은 곧 자기 통치의 도구로 바뀐다. 더 잘하지 못한 날은 실패가 되고, 쉬는 날은 나약함의 증거가 된다.


하지만 달리기와 글쓰기가 항상 그런 방식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푸코의 언어를 빌리자면, 중요한 것은 이 실천이 나를 ‘정상’으로 끌어당기는가, 아니면 나를 ‘다르게’ 만드는가이다.


달리기를 할 때 내가 만나는 것은 기록 이전의 몸이다. 숨이 가빠지는 순간, 보폭이 리듬을 타는 느낌, 평소보다 무거운 몸. 그 경험은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의 나를 감각으로 느끼게 할 뿐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며 나는 나를 정리하기보다 오히려 흐트러진다. 확신을 줄어들고, 질문은 늘어난다. 어떤 문장은 나를 변호하지 않고,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글쓰기는 증명이 아니라 증언이 된다. 소설가 박완서는 대담집『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에서 “소설에는 누추한 생활을 뛰어넘는 힘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소설이 누추한 생활을 뛰어넘는 힘을 갖는 이유도, 현실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를 증언하기 때문일 것이다.


푸코는 이런 실천을 ‘삶의 기술’이라고 불렀다. 삶을 정해진 틀에 맞추는 기술이 아니라, 삶을 하나의 형식으로 만들어가는 기술. 완성형 인간을 목표로 하지 않고, 매번 조금씩 달라지는 자신을 감내하는 연습. 그는 이를 포이에시스, 즉 ‘만들어내기’라고 불렀다. 삶을 소비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만들어가는 태도다.

그래서 달리기와 글쓰기는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 대신 나를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아주 미세하게,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그 차이는 분명하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완전히 같지 않다는 감각. 푸코라면 아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주체는 사유로 바뀌지 않는다. 선언으로 바뀌지 않는다. 주체는 실천 속에서만, 그것도 반복되는 사소한 실천 속에서 조금씩 달라진다. 글쓰기와 달리기는 바로 그런 자리에서 작동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쓰고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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