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하나요?
이직을 많이 했습니다. 계약직 인턴으로 시작해 회사 매각으로 인한 비자발적 이동까지, 대략 열 곳이 넘는 조직을 거쳤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이렇게 잦은 이동이 제 삶의 일부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여러 환경을 통과한 지금은 새로운 곳에 적응하는 일이 비교적 익숙해졌지만, 이직을 출산의 고통에 비유하던 옛 농담이 완전히 과장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몇 년 전에는 아내도 십 년 넘게 다닌 회사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옮겼습니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며 자기 자리를 만들어 온 사람에게 이직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도전과 익숙한 삶 사이에서 고민이 깊었습니다. 결국 이직을 선택했고, 출근을 시작한 뒤 퇴근해 돌아온 아내의 어깨는 한동안 유난히 처져 있었습니다. 국내 기업에서 외국계 기업으로 옮기며 언어와 문화, 업무 방식까지 모두 다시 배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은 결국 스스로 견뎌야 할 문제였기에, 저는 섣불리 조언하기보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쪽을 택했습니다. 다만 여러 번의 이직을 거치며 얻은 한 가지 생각만은 조심스럽게 건넸습니다.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조금 숨기게 됩니다. 아직 관계의 결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자리에서 조심스러워지는 태도는 어쩌면 예의이기도 합니다. 사회 경험이 적거나 첫 직장에 들어간 사람일수록 그런 모습은 더 두드러집니다. 그럴 때 제가 늘 하게 되는 말은 분명합니다.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되, 자신의 모습을 지나치게 감추거나 억지로 바꾸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 조직을 거치며 제가 몸으로 배운 결론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생각보다 비슷합니다. 직장뿐 아니라 연인이나 친구 관계에서도, 우리는 상대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으로 오래 기억합니다.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다툼 끝에 “당신 변했어”라는 말을 했거나 들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환경에서는 누구나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고 더 친절해집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본모습까지 왜곡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면 시간이 지나 결국 같은 말을 돌려받게 됩니다.
제가 신입으로 입사했을 당시에는 점심도 팀끼리 함께하는 것이 당연한 문화였습니다. 개인 사정으로 한두 번 빠지는 건 가능했지만, 주기적으로 혼자 먹는 일은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더구나 숟가락을 챙기고 계산을 정리해야 했던 팀의 막내에게 따로 점심을 먹는 선택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점심시간을 혼자 보내겠다고 말했습니다.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혼자 정돈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개인의 자율성이 존중되는 분위기였다면 특별할 것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당시에는 자칫 조직에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다행히 그 시절의 저는 지금 말하는 MZ 세대 못지않은 고집이 있었고, 큰 문제없이 넘어가긴 했습니다. 물론 점심시간도 사회생활의 일부라는 훈계를 듣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지나며 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일수록 개인의 영역을 분명히 남겨 두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회가 조금 더 개인주의적으로 변해 가는 흐름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개인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공동체도 제대로 살아 움직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기주의는 경계해야 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도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균형일 것입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모습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자신을 지키겠다는 마음을 어느 정도는 품고 들어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적응의 과정이 덜 소모적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말은 다소 자기애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새로운 환경에서 제 모습을 지나치게 숨기지 않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사람은 결국 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때로는 좋아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조금 유별나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존중하고, 그만큼 타인을 존중하며, 맡은 일을 분명하게 해내면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됩니다. 때로는 예상보다 더 가까워지기도 합니다. 내가 나를 존중할 수 있어야 타인도 제대로 존중할 수 있다는 원칙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사람들에게 익숙해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요?
자크 데리다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있습니다. 해체의 철학자로 더 자주 언급되지만, 저는 그의 개념 가운데 ‘환대’를 오래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이번 질문을 생각할 때도 그 개념이 가장 먼저 떠올랐습니다. 데리다 이전까지 환대는 대체로 조건부의 개념이었습니다. 질서 안에서만 허용되었고, 경계 안에서만 작동했습니다. 같은 배경을 가졌는지,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같은 조건이 먼저 제시되었습니다. 환대는 늘 주인의 판단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데리다가 말한 환대는 조금 달랐습니다. 조건 없는 환대였습니다. 이름이나 국적, 성별 같은 것을 먼저 묻지 않는 태도였습니다. 결국 환대란 누군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선의의 몸짓이라기보다, 내 기준과 질서를 잠시 뒤로 물리는 일에 더 가깝다고 저는 이해합니다.
저는 새로운 환경에 들어갈 때 이 태도를 떠올리곤 합니다. 대부분의 조직에는 그들만의 관례와 문화가 있습니다. 바깥에서 보면 낯설고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고, 때로는 세련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부조리에 가까운 관행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우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좋고 나쁨을 서둘러 판단하기보다, 그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고 먼저 그 환경의 문화를 받아들이려 하면, 적응 과정에서 생기는 불필요한 마찰이 확실히 줄어듭니다.
물론 받아들인다는 것과 동의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존재 자체를 인정하되, 그것을 곧바로 내 방식으로 거부하거나 뒤집으려 하지는 않습니다. 시간을 두고 이해한 뒤, 필요하다면 조금씩 바꾸는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저는 이 또한 넓은 의미의 환대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제가 이미 속한 환경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때도 비슷한 기준을 적용합니다. 그 역시 처음의 저처럼 주변을 살피고, 긴장하고, 어떻게든 적응하려 애쓰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저는 조건 없는 환대를 먼저 내놓으려 합니다. 배경이 다르다는 이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행동이나 사고방식이 기존 문화와 맞지 않는다고 느껴져도, 일단은 그대로 환영하려고 합니다. 사람은 결국 시간이 지나며 집단의 공기와 리듬에 적응하게 마련입니다. 새로운 사람이 빠르게 자리를 잡고 한 팀이 되는 것이 모두에게 가장 좋은 일이라고 믿습니다. 군기를 잡거나 위계를 앞세우는 방식은 그런 방향과 거리가 멉니다. 저는 그런 방식으로 건강한 조직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를 평가하기보다 먼저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새로운 사람을 통해 자기 입지를 다지려 하고, 누군가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누군가는 과하게 친절하거나 지나치게 경계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가능한 한 열린 태도로, 조건 없는 환대에 가까운 마음을 먼저 내놓으려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관계는 의외로 단순해지고, 제 마음도 훨씬 편안해집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사람에게 익숙해지는 제 방식은 결국 이 환대의 태도에 가깝습니다.
낯선 환경은 나에게 어떤 인식의 변화를 남겼나요?
이직을 반복하다 보니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도 조금씩 빨라졌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익힌 태도들이 제 안에 변화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흐름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낯선 환경은 저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동시에 새로운 세계를 보게 했습니다. 겸손해진 태도와 넓어진 시야는 제 위치를 다시 조정했습니다. 고정된 자아는 끊임없이 바뀌는 환경 속에서 오래 버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결국 낯선 환경은 내가 변화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각인시켰습니다.
다소 철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낯선 환경에 반복해서 놓인다는 것은 매우 현실적인 자극입니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를 다시 보게 되는 순간, 변화는 저절로 시작됩니다. 이 변화는 어떤 개념을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경험이 쌓이며 몸으로 익힌 결과에 가깝습니다.
먼저 겸손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익숙하지 않은 장소로 떠나는 여행을 좋아합니다. 가능하다면 돈으로 쉽게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을 선택합니다. 그런 공간에 들어서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초심자가 됩니다. 아무리 준비해도 새로운 환경 앞에서는 계획이 쉽게 무력해집니다. 산티아고를 걸을 때도, 히말라야를 마주할 때도 그랬습니다. 날씨와 몸 상태, 우연한 만남은 언제든 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결국 남는 태도는 하나였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인정이었습니다. 그 겸손은 이후 새로운 회사로 옮길 때마다 비슷한 방식으로 되살아났습니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내가 가진 기준이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해졌습니다. 오랫동안 몸담은 회사를 떠나 이직했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그곳에서 업무와 관계 모두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었고, 그래서 어디를 가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직한 뒤 저는 1년도 채우지 못했습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던 구조조정과 인원 감축 업무가 제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때 비로소 제가 옳다고 믿었던 방식이 수많은 세계 가운데 하나의 방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이후 여러 조직을 거치며, 나의 기준이라는 것도 결국 특정한 환경과 위치 안에서 형성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잦은 환경 변화는 늘 저를 완전한 내부자가 아닌 위치에 세워 두었습니다. 그 자리는 불편했지만, 동시에 분명한 장점도 있었습니다. 한발 물러선 자리에서 조직의 질서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위계와 관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고, “원래 그렇다”는 말에도 쉽게 동의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 회사에서는 시간 외 근무수당을 지급하지 않는 관행이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완전한 내부자가 아닌 위치에서 이 문제에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여러 환경을 오가며 생긴 경계인의 시선이, 오래 유지되어 온 질서를 다시 보게 만든 순간이었습니다. 그 경험은 제게 중요한 인식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많은 기준은 고정된 원칙이 아니라, 특정한 환경과 위치 속에서 굳어진 선택일 뿐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회사라는 조직 역시 완성된 구조라기보다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과정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본질적인 ‘나’라는 개념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조직과 사람, 시대와 우연 속에서 매번 다르게 드러나는 존재였습니다. 변화는 더 이상 위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방식 자체라는 생각에 가까워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