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관리

by 세템브리니

예상치 못한 문제나 과도한 업무량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극복 방법은 무엇인가요?

마흔두 살에 회사에서 임원이 되었습니다. 상무부터 시작하는 이른바 순수 임원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혜택이 적용되는 준임원, 상무보 직급이었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회사는 천연 물질을 기반으로 화장품 원료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곳이었습니다. 이 회사와의 인연은 조금 특이합니다. 원래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계열사였지만, 경영난을 겪던 모기업이 자금 확보를 위해 첨단소재 사업 일부를 사모펀드에 매각했습니다. 저는 그 사모펀드 산하일 때 입사했습니다. 이후 사업부가 다시 다른 회사로 매각될 때 함께 이동했고, 최종적으로 회사를 인수한 외국계 기업에서 임원으로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변화의 국면마다 인사의 역할이 중요했고, 그 과정에서 제가 일정한 몫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최종적으로 회사의 주인이 바뀐 뒤에는 해야 할 일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야 했고, 조직문화도 다시 설계해야 했습니다. 급격한 변화로 직원들의 불안은 커졌습니다. 기존 조직에서 분리되어 새로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투쟁 의지도 강했습니다. 이런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 인사팀의 하루는 늘 빠듯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또 하나의 과제가 더해졌습니다. 회사를 인수한 기업이 이미 한국에 보유하고 있던 소규모 영업 조직까지 통합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입니다. 직원 수는 20명 남짓이었지만 각 분야의 전문가로 이루어진 별도 조직이었습니다. 인사팀은 저를 포함해 네 명뿐이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동시에 감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고난이 이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소속된 기존 조직은 대표이사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고, 인사팀에 대한 불신도 아주 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새로 편입되는 조직은 전혀 달랐습니다. 처음 만나는 관계였고, 기존보다 복지와 제도가 나아지는 방향임에도 불만과 불신은 상당했습니다. 새로운 통합 조직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는 공격적인 반응도 이어졌습니다. 일은 많고,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더 컸습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왜 하필 내가 이 자리에 있는가 하고 스스로를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럴 때는 잠시라도 물러나야 했습니다. 제가 처한 어려움을 상대적으로 작게 보이게 하거나, 이 또한 결국 지나갈 일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방식이 필요했습니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과도한 업무와 복잡한 인간관계에 매몰되면, 그 문제들이 삶의 전부처럼 느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럴 때 두 가지 방식으로 스스로를 다시 정돈합니다.

첫 번째는 대자연 앞에 저를 세워 두는 일입니다. 흔히 말하는 숭고함에 가까운 감정을 찾으러 가는 것입니다. 이 감정은 단순히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과는 다릅니다. 너무 크고 강해서 내가 이해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는 대상 앞에서 생겨나는 마음입니다. 두려움과 경외, 무력감이 뒤섞여 있지만 그 감정이 공포로만 끝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작아지는 동시에 이상한 해방감이 따라옵니다.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병풍처럼 이어지는 산맥을 바라보거나, 폭풍이 치는 제주 바다 앞에 서 있을 때 저는 그런 마음을 분명하게 느낍니다.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는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또렷해집니다. 동시에 이 세계가 나를 넘어서는 질서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함께 느껴집니다. 아름답다는 생각보다 먼저 말문이 막히는 마음이 들고, 개인의 삶은 아주 작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면 일상에 짓눌려 있던 마음도 조금 가라앉습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것 같던 문제들도, 결국은 내 삶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보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대하소설이나 역사소설을 읽는 일입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같은 작품들입니다. 이런 대작은 자연 앞에서 느끼는 숭고함과는 결이 다르지만, 제게 미치는 작용은 비슷합니다. 자연이 눈앞의 규모로 저를 압도한다면, 대하소설은 시간과 서사의 크기로 저를 멈춰 세웁니다.

이런 작품을 읽고 있으면 조급하게 살아가는 지금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수십 년, 수백 년의 시간과 수많은 인물의 삶과 죽음, 개인의 의지로는 바꿀 수 없는 역사적 흐름 앞에 홀로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웅장한 서사 앞에서는 하루의 실수나 관계의 마찰, 업무의 분량과 일상의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크기를 잃습니다. 고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고민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제 삶의 일부로서는 충분히 중요하지만, 삶 전체를 뒤덮을 정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하나는 인간사의 반복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좋은 역사소설은 오래전에 쓰였더라도 지금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인간관계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삼국지』나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사랑과 욕망, 배신과 두려움, 용기와 기대는 시대를 넘어 계속 반복됩니다. 이 사실을 보고 있으면, 지금 내 앞의 갈등과 스트레스도 아주 새롭거나 특별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인식이 저를 현재의 집착에서 한 걸음 물러서게 합니다.

저는 웅장한 자연 앞에서든, 압도적인 서사 앞에서든, 이런 마음을 넓은 의미의 숭고함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는 “나는 작지만 이 세계는 견고하다”는 생각을 남기고, 다른 하나는 “나는 흔들리지만 인간의 삶은 계속되어 왔다”는 인식을 남깁니다. 이 두 가지는 일상의 스트레스로 좁아진 제 시야를 다시 넓혀 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 방식을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법이라기보다, 저 자신을 다시 제자리에 놓아두는 자기 관리의 방식으로 오래 활용해 왔습니다.


본인의 역량을 높이기 위해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습관이나 노력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제 삶에서 중요하게 키우고자 하는 역량은 세 가지입니다. 전체를 보는 시야, 타인에 대한 공감, 그리고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는 힘입니다.

일을 하다 보면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많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사례에서도 궁극적인 목표는 새로운 회사에서 하나의 통일된 조직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이해관계와 개별 상황에 매몰되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쉽게 흐려집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전체를 보는 시야라고 생각합니다. 부분을 이해하되 거기에 갇히지 않고, 개별 사안을 다루되 전체의 흐름 속에서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전체를 보는 시야는 사물을 하나의 요소나 단일한 관점으로 보지 않고, 여러 층위와 맥락을 함께 고려해 전체 구조 속에서 이해하려는 태도입니다. 세부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는 시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시야가 인문학과 기초과학의 독서를 통해 길러진다고 믿습니다. 문학은 한 사람의 선택이 어떤 시대적 조건과 정서 속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역사는 개인의 행동이 구조와 권력, 우연 속에서 어떻게 제약되는지를 드러냅니다. 철학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 온 전제를 다시 묻게 만듭니다. 여기에 물리학 같은 기초과학은 인문학이 넓혀준 의미와 해석이 어떤 물리적 조건과 한계 위에 놓여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네 갈래가 함께 갈 때, 어떤 현상을 곧바로 옳고 그름으로 재단하기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먼저 보게 됩니다. 제가 이해하는 총체적 시야의 출발점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책을 읽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습관입니다. 문학, 역사, 철학, 물리를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아침에는 주로 철학이나 물리를 읽습니다. 서사보다 개념과 법칙을 다루는 글은 집중력이 살아 있을 때 읽는 편이 좋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후에는 문학이나 역사를 읽습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서사를 통해 접하면 이해의 밀도가 높아집니다. 이렇게 인문학과 기초과학 독서를 병행하며 전체와 부분을 함께 바라보는 연습을 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량은 타인에 대한 공감입니다. 저는 사람과 그 욕망을 조율하는 일을 오래 해왔습니다. HR 부서에서 일했지만, 사람은 자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원은 공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적자원이라는 표현이 널리 쓰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다른 자원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는 순간 조직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복잡한 욕망을 다루기 위해서는 결국 공감 능력이 필요합니다.

공감을 기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문학을 읽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이든 시든 수필이든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타인의 생각과 감정이 담깁니다.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자소설』 역시 저자의 자의식과 시선이 강하게 스며 있는 글입니다. 이렇게 타인의 입장을 글을 통해 반복해서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 입장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게 됩니다. 저는 이 과정을 자기 객관화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이 점점 고립되는 시대일수록,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문학을 읽는 습관은 더 중요해진다고 믿습니다.

책을 읽는 것 외에도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경험이 공감의 폭을 넓혀 줍니다. 다만 아무 주제 없이 모이는 자리보다는, 독서모임이나 영화모임처럼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모임을 더 선호합니다. 주제가 분명할수록 대화는 자연스럽고 깊어집니다. 특히 문화와 예술을 중심으로 한 모임은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의 욕망과 갈등을 조금 더 떨어져 바라보게 해 줍니다. 저는 독서모임에 꾸준히 참여하며, 나와 다른 입장을 자주 접하고 공감의 폭을 넓히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역량은 건강과 활력입니다. 저는 직장생활을 하든 글을 쓰든, 사회 안에서 오래 활발한 역할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건강은 기본적인 조건이고, 현재의 에너지 수준을 유지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지혜는 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그 지혜를 충분히 쓰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순히 건강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 삶의 활력을 유지하는 것을 중요한 역량으로 여깁니다.

건강과 활력을 지키는 데에는 결국 운동이 필요합니다. 운동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옵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할 수도 있고, 저처럼 달리기를 즐길 수도 있고, 구기 종목처럼 여럿이 함께하는 운동도 가능합니다. 어떤 방식이든 꾸준히 하는 운동은 몸을 건강하고 활기차게 유지하는 데 분명한 도움이 됩니다.

저는 달리기를 20년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평일에는 주 3회, 한 번에 7km 정도를 달립니다. 주말에는 15km에서 20km를 달립니다. 분기마다 한두 차례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합니다. 이렇게 하면 한 달에 100km 이상을 꾸준히 달리게 됩니다. 달리기는 남과 경쟁할 필요가 없고,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으며, 비용도 많이 들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인지력 유지에도 효과적인 운동이라는 연구 결과들이 알려지고 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운동입니다.

역량은 습관에서 비롯되고, 습관은 필요에서 시작되며, 그 필요는 다시 욕망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모든 것을 이어주는 핵심은 결국 꾸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이런 역량들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갖추기 위해서는 일회적인 노력이 아니라, 습관처럼 반복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 시간이 쌓여 지금은 어느 정도 제 삶의 바탕이 되었다고 느낍니다.

다만 이 과정을 돌아보며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제가 뒤늦게 알게 된 것은 결과보다 과정의 즐거움이 더 오래 저를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꾸준함의 결과로 시야가 넓어지고, 타인을 더 잘 이해하게 되며, 건강을 유지하게 된다는 점도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방향을 향해 가는 과정 자체가 제게 기쁨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결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는 방향으로 계속 살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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