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기억나는 상처는 무엇인가요?
복날 개 맞듯 맞은 적이 있습니다. 중학교 시절이었습니다. 구타는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아버지의 이복동생인 삼촌에게서였습니다. 사춘기가 시작되며 버릇이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다 큰 성인이 미성년자를 그렇게 구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더구나 저는 그의 조카였습니다. 몸에 남은 상처는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날의 폭력은 마음에 깊이 박혔습니다.
당시 삼촌은 서른을 막 넘긴 나이였을 것입니다. 직업은 스킨스쿠버 강사였지만 일이 꾸준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따로 거처가 없던 그는 한동안 저희 집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저는 잠귀가 밝고 예민한 편이라 밤늦은 귀가나 작은 소리에도 쉽게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이미 좁은 집에서 동생과 방을 함께 쓰는 것도 답답했는데, 삼촌까지 같이 지내는 일은 불편함을 넘어 부담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불편함을 끝내 숨기지 못했습니다. 삼촌에게 싫은 기색을 드러냈고, 아마 그 마음이 말로도 새어 나갔을 것입니다. 삼촌은 갑자기 옷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잠시 뒤 빗자루를 들고 돌아와 속옷까지 벗기고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집에 있었고, 방문 너머로 아버지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번 기회에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저항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밖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고,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가족 전체를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폭력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맞는 동안 저는 삼촌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중학생이 자신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점점 더 흥분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얼마 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삼촌이 스킨스쿠버를 가르쳐 준다며 저를 수영장에 데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수강생들 앞에서 그는 제게 물었습니다. “이 정도면 떳떳한 삼촌이지?” 인정받고 싶어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시큰둥하게 반응했고, 그 이유로 사람들 앞에서 머리를 맞았습니다. 그 장면이 몽둥이가 오르내리는 순간과 겹쳐졌습니다. 그때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삼촌이 때리는 이유가 단지 제 말버릇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화가 난 어른이라기보다, 어딘가에 깊이 상해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신체적인 고통은 일정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무뎌졌습니다. 맞는 아픔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때릴수록 더 흥분하는 어른을 바라보는 일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 모습이 무서웠습니다. 이 상황을 멈출 다른 어른이 필요했지만, 밖에서는 아버지의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습니다. 저는 결국 빌기 시작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싹싹 빌었습니다. 저 때문에 함께 맞던 동생도 걱정됐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성인의 폭력이었습니다.
그러다 벽에 걸린 거울에 제 모습이 비쳤습니다. 발가벗겨진 채 덜덜 떨며 매를 맞고 있는 살덩이였습니다. 사람이라기보다 짐승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끝내기 위해, 비인간적인 폭력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제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더라면 고문을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수치심이 밀려왔습니다. 몸의 고통보다 그렇게라도 상황을 모면하려는 제 모습이 더 치욕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폭력은 한동안 더 이어진 끝에, 뒤늦게 찾아온 삼촌의 죄책감과 어설픈 위로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한번 접힌 종이처럼 그 선은 마음속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선은 한동안 분노와 불안의 방향으로 저를 접어 놓았습니다.
그 상처가 남긴 흔적은 무엇인가요?
심리학에는 방어기제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불안이나 스트레스, 죄책감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심리적 반응입니다. 마음이 지나치게 아플 때, 사람은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지키는 방향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저는 어린 시절의 폭력이 제 안에 몇 가지 뚜렷한 방어의 흔적을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남자 어른에 대한 회피입니다. 삼촌뿐 아니라 작은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폭력이 행사되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며 자랐습니다. 학교에서 만난 남자 교사들의 권위적인 태도와, 무심하게 드러나는 욕망의 기색도 늘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남자 어른’이라는 범주는 제게 위협과 거의 같은 의미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그 범주에 속하기 전에 삶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접촉을 줄이고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불안을 관리해 온 셈입니다. 다행히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을 만나면서, 이 굳은 인식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둘째는 분노를 다루는 방식의 문제였습니다. 젊은 시절의 저는 분노가 치밀면 그것을 건강하게 다루지 못했습니다. 특히 저보다 약하다고 느끼는 대상이나, 제 안전이 어느 정도 보장된 상황에서 더 쉽게 화를 드러냈습니다. 운전 중 위험하게 끼어드는 차를 만나도 상대가 위압적으로 보이면 경적 한 번으로 끝냈지만, 만만해 보이는 상대에게는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힘이 약한 어머니나 아내에게 더 큰 분노를 표출했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원래 향해야 할 대상에게 가지 못한 분노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간 경우가 많았습니다.
셋째는 폭력에 대한 상상이었습니다. 감정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면, 강자와 약자를 가리지 않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장면을 마음속에 그려보곤 했습니다. 다시는 당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때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상상이었습니다.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 적은 없지만, 그런 상상만으로도 순간적인 해소감을 느끼곤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폭력에 대한 욕망이라기보다, 다시는 무력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에 가까웠습니다.
마지막은 권위적인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반항입니다. 젊은 시절 조직생활에서 적지 않은 갈등을 겪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위나 힘을 앞세워 복종을 요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저는 숨이 막히는 압박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반동적인 태도를 취했고,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려 했습니다. 동시에 그런 상황에서 억눌리는 약자를 보면 과도할 만큼 의협심이 솟아오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무력함을 정반대 방향으로 뒤집어 보려는 반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네 가지 반응은 한때 저를 지키는 방식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방패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 삶을 소모시키는 칼날이 되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필요했던 방식이, 어느 순간부터는 저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까지 다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상처 자체만큼이나, 그 상처가 제 안에 어떤 방식으로 남아 작동해 왔는지를 오래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피해자인가요?
몸에 생긴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옅어집니다. 그러나 마음에 남은 상처는 그렇게 단순하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그 장면을 떠올리면 가슴이 조여 오고, 분노가 먼저 올라옵니다. 가끔은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절로 돌아가는 상상을 합니다. 어리고 약했던 저를 대신해, 그 폭력에 반격하는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런 상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저는 앞으로도 그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장면이 저를 부정적인 자리에만 붙들어 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기억을 이해하려는 시간이, 그날의 고통보다 더 오래 제 삶에 남았습니다. 겉으로는 무덤덤해진 것처럼 보여도,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이면 과거의 장면이 현재의 몸을 통과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불안해졌고, 방어는 익숙한 방식으로 작동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다시 상처를 입은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아끼는 사람들도 그 여파를 함께 겪었습니다. 왜 나는 이런 방식으로 반응하는지, 이 패턴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어떻게 해야 멈출 수 있는지를 오래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질문을 놓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보다 훨씬 극단적인 상황을 겪은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을 지켜냈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렇게 몇 사람의 삶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를 포함한 여러 나치 강제수용소를 거친 생존자입니다. 그는 가족 대부분을 잃었고, 극단적인 비인간화의 한복판을 통과했습니다. 그가 남긴 기록에서 제가 오래 붙들었던 문장은 이것이었습니다. 고통을 제거할 수 없을 때조차, 그 고통에 대한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을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고, 이후 이를 로고테라피라는 이름으로 정리했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길 수는 있어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만은 마지막까지 남는다는 그의 말 앞에서 저는 오래 멈춰 섰습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여준 인물들이 있습니다.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오랜 수감 생활을 견딘 신영복 교수는 감옥 안에서도 관계와 사유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옥중 편지를 읽으며, 폭력에 매몰되지 않는 태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수차례의 투옥과 사형선고를 겪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옥중에서 사유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피해자의 자리에만 고정하지 않았고, 민주주의와 화해라는 언어를 끝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삶은 폭력이 인간의 신체를 억압할 수는 있어도, 사유와 존엄까지 완전히 점령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통해 저는 한 가지를 천천히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상처가 사라지지 않아도, 상처에 대한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함께 서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습니다.
그 선택 가운데 하나가 글쓰기입니다. 이 글처럼 있었던 일을 왜곡하지 않고 적어 내려가고, 그때와 지금의 감정을 의식 위로 끌어올리는 일입니다. 수치심 속에 묻혀 있던 저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현실에 대한 내 태도를 스스로 정립해 보는 일입니다. “이 고통은 분명 나를 상처 입혔지만, 그 기억을 어떻게 다룰지는 이제 내 몫이다”라고 말해보는 연습입니다. 『자소설』은 어쩌면 그 연습의 한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저는 상처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 상처를 근거로 과거의 미성숙한 행동을 정당화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여전히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쓰는 일은 과거의 장면에서 조금씩 거리를 두는 연습이 됩니다. 저를 믿고 기다려준 사람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저는 그날의 피해자이면서,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상처는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그 상처에 끌려다니기보다, 그것을 이해하고 다루는 쪽으로 조금씩 움직이고 있습니다.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같은 자리에만 서 있지는 않다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