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꾼 사람

by 세템브리니

나를 가장 많이 변화시킨 사람은 누구입니까?

“무엇보다 아이가 스스로의 생활을 스스로 꾸려나가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 공부가 진정한 공부입니다. 긴 안목으로 아이의 장래를 배려해야겠습니다. (중략) 적어도 주말엔 공부보다 책 읽기를 권해주시고, 세상 이야기, 인생 이야기도 문득 들려주셔서 아이가 공부할 필요와 의욕을 가질 수 있도록 권해주시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 글은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이셨던 고 이관희 선생님의 유고집 『선생으로 사는 길』에 실린 문장입니다. 제가 졸업한 뒤 새로 담임을 맡은 1학년 학부모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입니다. 저희를 직접 가르치던 시절의 말은 아니지만, 이 문장에는 당시 선생님이 학생들을 바라보던 태도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성적보다 삶을 먼저 보려 했던 시선, 단기간의 결과로 아이의 장래를 쉽게 판단하지 않으려던 마음이 느껴집니다.

가족을 제외하고 제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을 꼽으라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이관희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선생님은 1958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1990년 대학을 졸업한 뒤 제가 다닌 고등학교에 부임하셨습니다. 그리고 2012년 5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시기 전까지 그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셨습니다.

가정 문제로 마음이 늘 불안정했던 저는 학교에서도 문제가 많은 학생이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굳이 가까이하지 않으려는 아이가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친구는 있었지만 제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선생님은 거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이르러서도 그런 선생님들에 대한 반발심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사춘기가 끝물에 접어들었는데도 저는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 제 앞에 새 학기 담임으로 선생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고3 담임이었지만 대학 진학만을 앞세우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스스로의 삶을 어떻게 꾸려 가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저희에게 생활노트를 쓰게 했습니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과 마음속 생각을 기록하라는 과제였습니다. 몇 달만 지나면 성인이 될 나이에 일기와 다를 바 없는 글을 쓰라니, 어색하고 민망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모든 학생의 노트를 빠짐없이 읽고, 짧게라도 꼭 답장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니 저만 안 쓸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그동안 말로 꺼내지 못했던 졸업을 앞둔 두려움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조금씩 써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전 학년에서 저를 가르쳤던 교사들의 부정적인 평가에도 선입견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성적이 바닥을 기던 시기에도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저를 다르게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비교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태도가 저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처음 생겼습니다. 제게 조건 없이 관심을 보이는 남자 어른을 처음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늦게 공부를 시작한 저를 선생님은 오히려 더 크게 칭찬해 주셨습니다.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훌륭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은 지금까지도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학창 시절 마지막 1년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예전의 저를 알던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이 교실로 찾아와 달라진 모습을 보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고3이 되어서야 기본 영단어를 외우기 시작한 일이 더는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선생님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학교를 다닌 뒤로는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 교탁 앞 맨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을 기다리는 학생으로 저는 마지막 학창 시절을 마무리했습니다.


그 사람의 어떤 행동이 나를 움직였나요?

이관희 선생님은 학창 시절부터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획일적이고 비민주적인 교육 풍토에 반발해 학교를 그만두고 독학의 길을 택했다고 들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친 뒤에는 대학에 들어가 학생운동에 참여하며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후 교단에 선 뒤에는 낙후된 사립학교의 비합리적인 운영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교사 노조를 이끌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그때까지 만나온 선생님들과는 결이 전혀 다른 삶의 이력과 태도를 지닌 분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런 선생님을, 그것도 고3 시절 담임으로 만난 일은 우연이라기보다 운명에 가까웠다고 느낍니다. 당시의 저는 알을 깨고 나오기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삶의 거의 모든 장면이 어둡고 부정적으로 보이던 시기였습니다. 세상을 채 스무 해도 살지 않았지만, 삶을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닐지 진지하게 고민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 앞에 나타난 선생님은 무모할 만큼 이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는 태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선생님의 영향은 고3 교실에만 머물지 않고, 졸업 이후까지 오래 이어졌습니다.

수능이 끝난 뒤부터 선생님과의 관계는 조금 달라졌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여전히 제자로 대하셨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성인으로 존중해 주셨습니다. 철없고 서툴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에도 끝까지 귀를 기울이셨고, 학생의 마음을 쉽게 평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화 도중에는 선생님 역시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씀하셨는데, 때로는 너무 이상적이어서 제자인 제 눈에도 현실과 거리가 멀어 보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선생님은 오히려 더 맑은 표정으로 꿈과 이상, 그리고 젊음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순수함을 넘어 다소 철없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다 아는 사람이 끝까지 이상을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입니다.

선생님과의 만남은 졸업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습니다. 제가 대학생이던 어느 날 막 사귀기 시작한 여자친구와 함께 종각역 영풍문고에서 선생님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씨네큐브에서 예술영화를 보고 나오신 선생님은 들뜬 얼굴로 서점에서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책을 사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옆에 있던 여자친구를 보며, 자신의 첫사랑을 닮았다며 얼굴을 붉히고 수줍어하셨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한없이 커 보이기만 했던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보며, 남자 어른에 대한 오래된 선입견 하나가 무너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소주를 마셨고, 선생님과 저는 얼큰하게 취해 종로 거리를 걸으며 김광석의 노래를 함께 흥얼거렸습니다. 선생님은 제게 담임이면서도 친구였고, 선배였고, 삶의 방향을 보여준 스승이었습니다.

그 만남으로부터 몇 달 뒤 선생님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새벽에 귀가하시다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저는 장례식장에서 처음으로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앞으로 보여드리고 싶은 모습이 아직 너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별은 오래 억울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선생님은 여자친구에게 저를 잘 이끌어 달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어렵게 시작한 삶의 사연을 잊지 말 것, 자만하지 말 것, 그리고 혼자만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당부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지금도 제 마음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선생님은 말로 가르치기보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으로 저를 움직인 어른이었습니다. 잔소리나 훈계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살아 있는 모습으로 저를 변화시킨 존재였습니다. 선생님은 떠나셨지만 저는 지금도 자주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존재는 사라져도 누군가의 기억 안에 오래 남아 있다면, 그 사람은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생님을 통해 배웠습니다.


지금 그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관희 선생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곳에서는 평안히 지내고 계시지요.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린 지도 어느덧 14년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 알았다면, 그날 종로에서 뵈었을 때 술을 조금 더 진하게 마실 걸 그랬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 마지막이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아쉽습니다. 아쉬움이 커서인지 꿈에서도 그날을 몇 번이고 다시 떠올리곤 합니다. 조금만 더 조심하시지 그러셨어요.

지난 14년 동안 저는 잘 살았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마음속으로 참 많이 불렀습니다. 연봉을 제법 주는 직장으로 옮겨 첫 월급을 받았을 때는, 조금은 건방진 모습으로 선생님을 찾아가 근사한 저녁 한 끼를 대접하고 싶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관계가 깊어질 때도 선생님과 소주 한 잔을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주례 없는 결혼식을 올렸지만, 선생님이 계셨다면 그 자리를 꼭 부탁드렸을 것입니다. 졸업생 출신의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의도로 달려 나가던 날에도, 제 안에서 끓어오르던 분노를 선생님과 가장 먼저 나누고 싶었습니다. 선생님이 곁에 계셨다면 세상이 잠시 거꾸로 가더라도 덜 외로웠을 것입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함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지금도 사무치게 억울합니다.

선생님과 보냈던 시간들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집으로 초대해 차려주셨던 집밥이 생각납니다. 옛 종로서적에서 사주신 책도 여전히 제 곁에 있습니다.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개해 드렸던 여자친구에게 남기셨다는 말씀 역시 잊지 않고 마음에 담고 있습니다. 결혼식에서 주례자의 자리에서 그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기를 오래 상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아내를 선생님께 보여드리지 못한 아쉬움이, 아마 그 상상을 더 오래 끌고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중에서도 제 삶을 가장 오래 따라다닌 말씀은, 혼자만 잘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당부였습니다. 그 말씀 덕분에 회사에 다니며 틈틈이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부조리한 구조 속에서 차별을 겪는 직원들을 위해 목소리를 냈습니다. 민주주의가 잠시 뒷걸음질 치거나 다시 살아나는 순간마다 광장에 나가 선생님을 떠올리며 분노와 기쁨을 함께 나눴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옆 반 담임이셨던 조장희 선생님과 만나 소주를 마시던 순간에도, 글을 쓰겠다고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을 때도 선생님은 늘 제 마음속에 계셨습니다. 제가 속으로 선생님을 부를 때마다, 다 듣고 계셨지요.

선생님. 돌아가신 뒤에 나온 유고집에서 제 글을 읽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을 떠나보내고 맞이하는 봄은 야속하지만 더 아름답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반장이었던 M군의 결혼식에 다녀오며 봄꽃을 보고 설레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이제는 봄이라는 계절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봄꽃은 제게 더 깊은 의미가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반평생을 남처럼 지냈던 제 아버지도 재작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날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나시거든 제 이야기를 한 번쯤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얼마 뒤면 또다시 봄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여기저기를 걸으며 봄을 맞이할 것입니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선생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내 역시 봄꽃을 보며 선생님을 떠올릴 것입니다. 지난 14년 동안 선생님을 잊지 못했던 것처럼, 앞으로도 봄이 올 때마다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당부하셨던 그런 어른이 되기 위해 지금도 매 순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선생님을 다시 만날 때 부끄럽지 않은 삶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제 인생에 나타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시간도 지금처럼 잘 살아가겠습니다.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선생님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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