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시간

by 세템브리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저는 혼자만의 시간을 쉽게 가질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별도의 방에서 모시던 증조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까지 작은방 하나에서 네 식구가 함께 지냈습니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한 살 터울의 남동생과 그 방을 함께 썼지만, 오갈 곳이 없던 삼촌이나 사촌 누나가 한동안 머무르며 같이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제 방이 생겼습니다. 유년기의 대부분을 개인 공간 없이 보낸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인식 자체를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자랐습니다.

방이 생기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생각할 시간도 자연스럽게 늘어났습니다. 사유가 공간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몸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원래 밖에서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혼자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저는 혼자만의 시간을 하루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의 필요를 알고 나니 공간의 제약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글을 읽거나 쓸 수 있는 도서관,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보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차 안, 넓은 초원이나 끝없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산과 바다까지. 방식은 달랐지만 모두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들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공간에서 홀로 머무는 시간이 주기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특히 더 절실해지는 순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첫째는 창의성이 필요할 때입니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글을 읽고 쓰며 보낸 시간을 돌아보니 경이로운 순간이 몇 번이고 되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제게도 창의성은 그런 경이로운 순간에 가까운 감각과 함께 찾아옵니다. 창의성은 글을 읽고 쓰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회사에서 새로운 과제를 맡았을 때도, 막혀버린 아이디어 앞에 섰을 때도 필요합니다. 이상하게도 그런 실마리는 사람들 한가운데서보다 혼자 있을 때 더 자주 떠오릅니다. 조용히 떨어져 있는 시간 속에서야 생각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사회적 가면, 그러니까 페르소나가 무겁게 느껴질 때입니다. 저는 사람을 만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살아왔습니다. 그날의 기분과 무관하게 친절하고 환대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사회인의 기본적인 자세일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하루를 보내고 난 뒤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문에 비친 제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 웃고 있었는데, 거울 속 제 얼굴은 무표정하다 못해 비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진짜 ‘나’를 다시 찾고 싶어집니다. 저는 그런 순간에 혼자 있는 시간과 공간을 찾게 됩니다.

마지막은 감정이 제어하기 어려운 단계까지 흔들릴 때입니다. 저는 농담을 잘하고, 남의 농담도 잘 받아주는 편입니다. 그런데 아주 가끔, 평소 같으면 웃어넘겼을 말투나 행동이 비수처럼 꽂힐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부터는 같은 상황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그런 상태가 되면 공격적으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타인의 말과 행동을 받아들이는 제 안의 여유가 잠시 좁아지면서 감정이 이성보다 앞섰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럴 때 작동하는 제 나름의 방어 방식은 단순합니다. 타인이 없는 편안한 장소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곳은 대개 도서관이거나 자연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혼자가 되기보다, 혼자일 때 비로소 제 상태를 다시 알아차리게 되는 사람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생각이 막힐 때도, 마음이 지칠 때도, 감정이 흔들릴 때도 저는 결국 혼자에게로 돌아갑니다. 그 시간이 있어야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만의 시간에 무엇을 통해 자신을 정돈하나요?

혼자 있는 시간에는 목적을 정해두지 않은 사색을 합니다. 저는 원래 생각이 많은 편입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타고난 사람에 가깝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 아직 오지 않은 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생각까지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는 여러 갈래의 생각이 동시에 떠다닙니다. 아내는 그런 저를 두고 생각이 너무 많다며 핀잔을 주곤 합니다. 가까운 친구 하나는 저를 ‘진지 교수’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사색의 바닥에는 늘 죽음이 있습니다. 1화 「나를 만든 첫 장면」에서 썼듯이, 제 삶의 첫 기억은 외할머니 집 천장을 바라보며 마주했던 죽음이라는 개념입니다. 낡은 집이 무너지면 나는 죽게 되는 걸까 생각하며 두려워하던 장면이 아직도 떠오릅니다. 그 이후 죽음이라는 주제는 제 사유의 바닥에 오래 남았습니다. 지금도 잠들기 전이면, 여전히 그 막막한 질문 앞을 한 번은 지나야 하루가 끝납니다.

왜 인간은 태어나서 결국 죽어야 할까. 죽음이 분명한 결말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나는 무엇을 선택하며 삶을 만들어 가야 할까.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목적이 있는지를 묻고, 선택을 통해 삶을 구성해 간다는 사유를 실존주의라고 부릅니다. 저는 철학을 공부하기 전부터 이미 이런 질문을 시작했던 셈입니다. 누군가 이런 진지한 고민에 ‘실존주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사실이 저는 조금 고맙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질문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저 말고도 많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 저는 대체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처음부터 자신을 정돈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세우고 사색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생각이 시작되면 늘 이쪽으로 흘러가곤 합니다. 대신 이런 사유를 조금 더 건강하게 이어가기 위해 오래 반복해 온 행동들이 있습니다. 그 행동들은 결과적으로 제 마음을 차분히 정리해 주었습니다.

첫째는 걷기입니다. 제가 사는 의왕시 포일동에서는 청계산 등산로가 가깝습니다. 학의천 산책길을 따라 평지를 걷다 보면 등산로 입구가 나오고, 거기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대략 한 시간, 5킬로미터 정도가 됩니다. 운동화를 신고 익숙한 길을 걷고 있으면 막혀 있던 생각의 실마리가 조금씩 느슨해집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도 몸의 리듬을 따라 서서히 정리됩니다. 저는 마라톤을 즐기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는 달리기보다 걷기가 더 잘 맞습니다. 달리기가 생각을 멈추게 한다면, 걷기는 생각을 흘려보내게 합니다.

둘째는 글쓰기입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지는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지난 15년 동안 소셜미디어에는 짧은 단상을 꾸준히 남겨왔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예전 글을 다시 읽어보면, 그 시기의 제가 얼마나 답답했는지, 또 얼마나 감동해 있었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한때는 자기 이야기를 지나치게 드러낸다는 시선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지난 15년의 일상이 일기처럼 보관된 기록이 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처음부터 의도하고 시작한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일상의 압력이 쌓일 때마다, 글쓰기가 자연스럽게 제 안의 감정을 밖으로 내보내는 통로가 되어주었습니다.

마지막은 집안일입니다.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하고, 간단한 음식을 만들거나, 식물에 물을 주는 일들입니다. 집안일에는 하루 단위로 반복되는 일과, 일주일 혹은 한 달 단위로 돌아오는 리듬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귀찮기만 했던 반복이 요즘은 묘하게 사람을 정돈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빨래를 가지런히 개고, 설거지를 마친 그릇이 제자리를 찾는 동안 복잡하던 머릿속과 답답했던 마음도 함께 정리되는 느낌을 받습니다. 집안일을 해보지 않으면 삶의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글쓰기와 걷기, 그리고 집안일은 모두 몸을 움직이는 행위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소하고 반복적인 행동이 쌓여 루틴이 되고, 그 루틴이 어느 순간 저만의 리추얼이 됩니다. 그리고 그 리추얼이 저를 다시 제자리로 데려다 놓습니다. 거창한 방법은 아닙니다. 말로 잘 설명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런 시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저는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습니다.


혼자 보낸 시간이 나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인가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거대한 악행은 괴물 같은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기를 멈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사유를 ‘나 자신과 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침묵의 대화’라고 설명했습니다. 악은 바로 이 자기와의 대화가 끊어질 때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아렌트에게 생각한다는 일은 지식을 더 많이 쌓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 함께 머물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저에게 아렌트는 특별한 철학자입니다. 태생적으로 생각이 많았던 저를, 성격의 결함이 아니라 하나의 성향으로 받아들이게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혼자 사색하며 보낸 시간들은 결국 저 자신과의 대화를 오래 이어온 시간이었습니다. 자신과의 대화를 계속하다 보면, 타인과 대화를 나누며 상대를 조금씩 알아가듯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점점 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내가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동기로 움직이는지가 조금씩 또렷해집니다.

이 과정은 제게 솔직해지는 연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솔직해질수록 타인 앞에서도 나를 덜 숨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힘도 커졌고, 선택 앞에서 망설이는 시간도 줄어들었습니다. 자기 인식이 깊어질수록 삶은 오히려 단순해졌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피하고 싶은지에 대한 기준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이 변화는 지금 쓰고 있는 『자소설』에서도 드러납니다. 저 자신을 글로 꺼내놓는 일이 하나의 정체성이 되었습니다. 긴 고민과 사색 끝에 받아들인 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일이 예전만큼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이어온 사유의 과정에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제 모습과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조차 부끄러운 결함이 아니라 제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불안정하고 흔들리는 상태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나누고 있는 조건이라는 점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저는 나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말을 걸고 싶어졌습니다.

혼자 보낸 시간이 제게 가져다준 또 하나의 변화는 독립성이 자랐다는 사실입니다. 예전의 저는 타인의 시선에 쉽게 흔들렸습니다. 혼자 식당에 들어가 밥을 먹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에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가면서 타인의 평가에 과도하게 기대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제 감정과 판단을 먼저 살피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 결과 주어진 상황을 조금 더 주도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삶의 균형과 질이 달라졌다고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언젠가부터 저는 혼자 며칠씩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제주 올레길도, 산티아고 순례길도 홀로 떠나 스스럼없이 걸었습니다. 아내가 바쁠 때는 혼자 식당에 들어가 삼겹살을 구워 먹는 일도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서든 자기 자신이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될 수 있다면, 혼자 있는 시간은 더 이상 견뎌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다시 나답게 만드는 시간이 됩니다. 제가 혼자만의 시간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결국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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