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중요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수중에 5백만 원을 들고 결혼했습니다. 집도 차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시골에서 상경해 10년을 혼자 살던 아내의 14평 빌라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집 역시 아내가 모은 5천만 원에 대출 3천만 원을 더해 마련한 빨간 벽돌 빌라의 전세였습니다. 당시 저는 연봉 5천만 원이 넘는 회사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생이 가난했던 제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나에게 돈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회생활은 연봉 2천5백만 원을 받는 회사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입사하자마자 회사 사정이 나빠졌고, 월급이 밀리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던 저는 이직을 결심했고, 운 좋게도 세계적인 화학회사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연봉은 두 배 이상 올랐습니다.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모아 놓은 돈은 없었지만, 몇 년 뒤에는 결혼도 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나니 돈은 곧 책임이 되었습니다. 사실상 소년소녀 가장처럼 살아온 저희 부부에게 부모 부양은 피할 수 없는 몫이었습니다. 그 비용만 해도 매달 백만 원이 넘었습니다. 저는 가족을 통해 돈이 없으면 부부도 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찍 배웠습니다. 그래서 돈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게 됐고, 더 많은 돈을 주는 회사를 찾아 다시 이직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이직을 거듭한 끝에 마지막으로 다닌 회사에서는 연 소득이 1억 중반을 넘겼습니다. 신입사원 시절과 비교하면 급여가 여섯 배가 된 셈입니다. 부족함은 없었습니다. 가난을 정체성처럼 안고 자란 탓인지, 아내가 결정한 월 30만 원의 용돈에도 돈이 부족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실제로 돈을 쓰는 일보다, 수중에 충분한 돈이 있다는 사실이 더 큰 안정을 주었습니다. 예전에는 언젠가 갚아야 할 마음의 빚 때문에 밥 한 끼도 얻어먹기 어려웠지만, 그때는 누구를 만나든 자연스럽게 계산할 수 있었습니다. 부자가 된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그때 비로소 몸으로 알게 됐습니다. 다시는 가난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이유도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다 지금은 다시 소득이 없어졌습니다. 글을 쓰겠다는 이유로 잘 다니던 회사를 나왔기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라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돈보다 해보고 싶은 일을 택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때마침 오른 코스피 덕분에 생활비는 벌었습니다. 그렇다고 돈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일정한 소득이 없으니 지출에는 더욱 민감해졌습니다. 밖에서 사 먹는 점심이 아까워 도서관에 있는 날이면 30분 거리를 걸어 집에서 점심을 먹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있었던 술자리도 거의 만들지 않습니다. 백수가 되고 나니 돈은 다시 제 일상을 압박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저는 ‘돈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정신승리를 가장하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 말의 대가는 늘 불편함이었습니다. 그런 순진한 믿음에 맞서며, 저는 어린 시절부터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근면함과 성실함으로 존경하는 어머니지만, 돈 앞에서 작아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렇게 나이 들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없는 저희 부부에게 노년의 가난은 불행을 넘어 재앙에 가깝습니다. 돈만 좇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돈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돈의 자리입니다. 저에게 돈은 욕망이기 전에 삶을 무너지지 않게 붙들어주는 현실입니다.
돈 때문에 관계를 끊거나 멀어지게 된 경험이 있나요?
돈 때문에 가족을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결혼 후 몇 해가 지났을 무렵, 안양구청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를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하려 하는데, 제가 소득이 있으니 관련 서류를 제출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서류에는 ‘아버지를 부양하지 않는 사유’를 적는 항목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이십 대 중반 이후 남남처럼 살아온 아버지였지만, 언젠가 부양의 의무를 떠안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그 순간 현실이 되었습니다.
저는 서류에 상황을 빠짐없이 적었습니다. 어린 시절 가족에게 무책임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지금 아내와 제가 가까스로 부양하고 있는 어머니와 장모님의 형편까지 구체적으로 써 내려갔습니다. 누가 보아도 제 사정이 이해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문장을 완성할수록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저는 중학생 때 동네 치킨집 배달을 하며 처음 돈을 벌었습니다. 그 뒤로도 취업할 때까지 돈벌이를 쉰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제 힘으로 살아온 것도 모자라, 가정을 꾸린 지금까지도 부모의 삶을 제 몫처럼 감당해야 하는가. 그 울분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서류는 제출했지만 이후 별다른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일을 겪은 뒤 저는 다시 아버지와의 관계를 철저히 끊었습니다. 혹시라도 다시 연결되는 순간, 늙고 병든 아버지의 돌봄 비용이 어렵게 모은 우리의 재산을 흔들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소식은 임종 직전에야 전해졌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따로 마련해 두었던 장례비 천만 원을 내는 선에서 최소한의 역할만 했습니다. 약 15년 동안 이어진 외면은, 솔직히 말해 거의 전부 돈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선택이었습니다.
아버지 외에도 돈 문제로 마음속에서 밀어낸 가족이 있습니다. 외삼촌은 어머니의 동생이자 외가의 장남입니다. 외조부모는 평생 모은 재산을 외삼촌의 사업 자금으로 모두 물려주셨습니다. 아들이 우선이던 시대였다고 해도, 그 선택은 제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큰딸인 어머니와 셋째인 이모는 당시나 지금이나 생계조차 빠듯한 형편이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오랜 병환으로 요양원에 계실 때 실제 돌봄을 맡았던 사람도 외삼촌이 아니라 어머니와 이모였습니다. 그런데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외삼촌은 그동안 돌봄에 들어간 비용을 자신이 모두 부담해 왔다며 다른 가족들에게 서운함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그 태도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동시에 외삼촌에게만 유산을 남긴 외조부모에 대한 원망도 함께 시작됐습니다. 그 감정은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촌동생과도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어릴 적 외가에서 함께 지내며 비교적 가까웠던 동생입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삶의 결이 달라졌고, 지금은 가족 행사가 아니면 거의 마주치지 않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큰 어려움 없이 자라서인지, 성인이 된 뒤에도 현실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가 늘 불편했습니다. 얼마 전 그 동생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남의 돈을 빌려 코인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봤다고 했습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제게도 연락이 왔습니다. 갚을 기약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우선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처음 받은 연락이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연락을 받고 마음이 상했습니다. 동생 개인의 무책임도 그렇지만, 그런 상황으로 이어진 배경과 그 끝이 제게로 향했다는 사실이 불쾌했습니다. 저는 돈을 빌려주지 않았고 휴대전화에서 동생의 번호를 차단했습니다. 앞으로는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당장의 병원비가 부족해 불안 속에 사는 어머니나, 배우자의 장례비조차 감당하기 어려움을 겪은 이모를 생각하면, 굳이 그런 친척들과 관계를 이어가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 선택 역시 돈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만약 적지 않았던 외조모의 재산이 모든 가족에게 골고루 나눠졌다면, 사촌동생은 지금처럼 철부지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어머니나 이모도 적어도 생계 걱정까지는 하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돌아보면 돈이 관계를 직접 끊어낸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관계는 이미 오래전부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너진 관계를 끝내 복구하지 않게 만든 마지막 이유 가운데 하나가 돈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돈은 사람의 민낯을 드러내고, 오래 눌러 두었던 원망에 현실적인 명분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제가 끊어낸 것은 사람과의 관계였는지, 아니면 가난이 다시 제 삶 안으로 들어오는 가능성이었는지. 그 질문은 아직도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돈 덕분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어머니는 혈액암 환자입니다. 랑게르한스 조직구증이라는 희귀 질환으로, 면역세포가 비정상적으로 증식하며 발생하는 병입니다. 염증처럼 시작되지만 결국 암처럼 치료를 요구합니다. 2019년 발병 이후 지난 7년 동안 수술과 입원, 치료를 반복해 왔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병에 맞는 표적치료제를 찾아 정상에 가까운 일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치료제가 없었다면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약값입니다. 알약 형태로 복용하는 이 치료제는 식후 하루 세 번, 평생 먹어야 합니다. 한 번 복용에 약 3만 원이 들고, 한 달이면 2백70만 원, 1년이면 3천만 원 가까운 비용이 필요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생명과 직결된 치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자주 불편한 생각에 이릅니다. 의학은 사람을 살릴 만큼 발전했는데, 그 치료에 접근할 수 있는지는 결국 돈이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병 자체보다 약값 앞에서 먼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치료제가 있는데도 감당할 돈이 없어서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 저는, 집도 가난한데 보험을 여러 개 들어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괜히 보험료만 내다 끝날 것이라며 잔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혈액암 진단을 받고 나서야 그 말들을 후회했습니다. 진단비로 지급된 보험금이 없었다면, 어머니의 병원비는 고스란히 저와 동생의 몫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표적치료제를 제외한 병원비만 해도 지난 7년 동안 8천만 원이 들었습니다. 치료로 일을 하지 못한 기간 동안 어머니에게는 생활비가 필요했고, 제가 매달 부담하는 비용도 적지 않았습니다. 입원과 치료가 반복될 때마다 예상하지 못한 지출이 뒤따랐습니다. 그 시간을 지나며 저는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질병 앞에서 돈의 유무는 불편함의 차이가 아니라, 때로는 생과 사를 가르는 경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의지나 인내가 아니라 결국 돈이라는 현실은 잔인합니다. 병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지만, 그것을 버텨낼 수 있는 조건은 누구에게나 같은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상상해 봅니다. 지금처럼 제가 소득이 없었고, 어머니의 보험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요. 그랬다면 저와 아내의 관계는 아마 지금처럼 애틋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내가 인색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저보다 가족을 더 배려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부모 부양이 우리 삶의 기반을 흔드는 수준에 이르렀다면, 균열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질적 토대 없이 유지되는 관계는 아무리 부부라 해도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을 저는 살면서 충분히 보아왔습니다.
동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생은 저보다 경제적 기반이 약하고, 아이 둘을 키우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제가 조금 더 번다는 이유만으로 부모 부양을 전부 떠안을 수는 없습니다. 비율은 조정할 수 있어도 책임은 나누어야 합니다. 저희 부부는 아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평생 둘이 벌어 노후를 준비해야 합니다. 노년에 둘만 남았는데 돈까지 없다면 그 삶은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벌 수 있을 때 최대한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박처럼 품고 있습니다.
결국 돈 덕분에 제가 지킨 것은 어머니의 목숨이었고, 우리 부부의 관계였으며, 크게 다투지 않고 이어가는 최소한의 형제 관계였습니다. 누군가는 저를 돈에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살아오며 확인한 사실은 단순합니다. 돈이 있어야 저도, 가족도, 관계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사치스럽게 살고 싶은 욕망은 없습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돈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에게 돈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끝까지 인정해야 할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