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소설과 실제 면접 사이에서

by 세템브리니

“지원자 님은 지난 15년간 인사 업무를 하면서 갖게 된 자신만의 업무 철학은 무엇인가요?”


오 년 만에 회사 면접을 봤다. 전기, 자동화, 산업 모터 등을 다루는 엔지니어링 회사다. 유럽에 모기업을 둔 외국계 기업으로 한국에는 약 400명이 근무한다. 사업부 하나가 분사하면서 양쪽을 함께 담당하던 인사 조직도 분리되었다. 그 공백을 채우는 자리였다. 산업이나 업무가 내가 경험했던 분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만에 보는 면접이었지만 크게 긴장하거나 버벅거리지 않았다.


최근 나는 자기소개서와 면접 질문 형식으로 구성된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제의 면접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선택한 내용이지만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글로 써 왔으니 실제 면접도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실제로는 반은 맞았고 반은 그렇지 않았다. 답변에 쓸 어휘를 고르는 일은 훨씬 쉬웠다. 글을 쓰며 단어 선택에 신중해졌던 습관이 도움이 됐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를 할지 고르는 일은 다시 생각해야 했다. 면접에는 합격이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글처럼 무조건 솔직할 수는 없었다.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의 포장은 필요했다. 어제는 실제 회사의 면접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답변은 이러했다.

“저는 지난 15년 동안 인사 기능의 거의 모든 영역을 경험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역할은 회사와 직원 사이의 경계에 서 있는 자리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사부가 회사의 이익만 대변하는 역할로 축소되기 쉽지만, 실제 정책과 제도를 현장에서 실행하는 입장에서는 그 영향을 받는 직원들의 관점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회사와 직원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에서도 우리 회사의 인사는 합리적이고 균형적이라는 신뢰를 갖게 된다면 역할을 훨씬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랬다. 특히 노동조합과의 협상에서 그 현실을 자주 느꼈다. 처음에는 거의 모든 노동조합이 인사부 소속인 나를 적대적으로 대했다. 노동조합뿐 아니라 일반 직원들도 인사부를 경계하는 경향이 있으니 섭섭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대했다.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물론 공개할 수 없는 정보도 있었다. 하지만 앞과 뒤가 다르지 않다는 걸 최대한 보였다. 이런 태도는 처음에는 오히려 경계를 더 키웠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졌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면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인정하게 되었고, 인간적으로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결국 조직도 사람 사이의 일이고 관계였다.


어느 회사에서는 퇴사를 앞두고 노동조합 간부 한 명이 조용히 찾아왔다. 그동안 긴장 관계였지만 솔직하고 인간적인 태도에서 배운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위원장은 인사부 직원을 칭찬하는 분위기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조합 내부에서는 오히려 좋은 평가가 많았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균형과 진정성이 노동조합 간부에게도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집에 가서 아내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경험을 면접에서도 자랑 같지 않게 전달하고 싶었다.


이후 몇 가지 질문이 더 이어졌다. “지금까지 진행했던 프로젝트 중 가장 성과가 컸던 것은 무엇인가요?” “경영진으로 일한 경험도 있는데, 시니어이긴 하지만 실무 중심의 포지션에 지원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예상했던 질문이라 비교적 쉽게 답할 수 있었다. 나는 면접을 좋아한다. 술자리도 아닌데 타인에게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게다가 나는 면접관의 입장에서 질문을 고민해 본 경험도, 면접자의 입장에서 답을 준비해 본 경험도 충분하다. 심지어 『자소설』이라는, 일종의 ‘작가 면접’에 가까운 글까지 쓰고 있다.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언제나 나에게 꽤 즐거운 순간이다.


회사는 마침 어제 새로운 사무실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내가 면접을 본 날은 새 사무실에서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리셉션부터 회의실까지 박스와 집기들이 어수선하게 쌓여 있었다.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유난히 활기차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나도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동료와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장면은 지난 일 년 동안 글을 쓰며 잠시 떠나 있었던 풍경이었다.


최근 책 한 권 쓰기를 마무리했다. 이제 막 출판사에 투고를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구직을 시작하는 것이 맞는지 고민하며 면접장에 왔다. 그런데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직원들의 모습을 보니 직장을 다니면서 글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면접 전에는 없던 합격 욕심이 회사를 나서는 순간 생기기 시작했다.


면접 장소인 삼성역에서 아내의 회사가 있는 강남역까지는 지하철 네 정거장 거리였다. 혹시라도 합격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테헤란로를 천천히 걸어 보았다. 나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거리였다. 고작 일 년 글을 쓴다고 쉬었을 뿐인데 거리의 직장인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학생 시절을 제외하면 나도 대부분의 시간을 저들과 같은 모습으로 보냈다. 그런데 지금은 외부 관찰자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글을 쓰려면 외부인이 되어라.” 지난 일 년 동안 여행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는 완전히 외부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다시 직장 생활을 생각하니 예전에 보지 못했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글을 쓰는 사람의 시선으로 다시 직장에 들어가게 된다면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일상도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았다. 이 회사에 들어가면 어떤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아내 회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오랜만의 면접 소풍은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끝났다.


집에 와서 읽고 있던 정여울 작가의 책을 펼쳤다. 정여울 작가는 이번에 처음 읽는다. 에세이를 쓰며 내가 품고 있던 여러 질문에 답을 건네는 글이었다. 무엇보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정체성이 나와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쓰는 일만큼이나 읽는 일에도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 작가 역시 비슷한 고민을 했다고 했다. 돈이 되지 않는 글을 전업 작가로 계속 쓸 것인가, 아니면 직장에 다니며 글쓰기를 병행할 것인가.


작가는 결국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나는 그럴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같은 고민에 다시 빠지는 이유가 있다. 나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지만 동시에 세상의 모든 책을 읽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 일 년 동안 글을 쓰느라 힘들기도 했지만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어서 행복하기도 했다. 그래서 책을 덮자마자 다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 취직을 해야 할 시점일까. 아니면 괜히 글을 읽고 쓴다고 들떠 있다가 직장에 돌아갈 시기를 놓쳐 평생 아내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게 될까.


하지만 그런 고민도 결국 결과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일단 합격부터 하고 나서 다시 고민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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