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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l 30. 2020

나만 생각하면 안 되나요?

살림 밑천이 되길 거부하는 K장녀의 절규



“너는 애가 너무 이기적이야. 어쩜 항상 그렇게 네 생각만 하니?”



 눈 앞에 앉은 아버지가 내뱉는 모든 말 한마디 한 마디가 내 멘탈 구석구석을 꼼꼼히 후려치는 것 같았다. 벼락같은 호통을 내리 듣는 동안 내 영혼은 점점 작게 쪼그라들어 마치 금방이라도 없어질 것 같았다. 하염없이 흐르던 눈물에 두 뺨이 기분 나쁘게 뜨끈했다.



 ‘죽을까. 그냥 죽어버릴까. 죽으면 다 끝날까?’



 홧김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잔소리를 듣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뒤 창문에서 뛰어내렸다는 아이, 다리 위에서 차 문을 열고 가로질러 다리 아래로 몸을 던졌던 어떤 아이의 모습이 머릿속을 휑하고 스치고 지나갔다.


 이 길로 뛰쳐나가서 어두운 밤거리를 쌩쌩 달리는 차에 몸을 던지면, 그래서 내가 죽으면 아버지는 만족을 할까? 후회를 할까? 아니면 애초에 나란 사람이 나약해 빠졌다고 생각하며 그냥 잊을까.


 계속되는 추궁에 정신이 아득해졌을 무렵, 아버지는 대화를 마무리하며 이런 질문을 던졌다.



 “대체 왜 우는 거야? 서운해서? 아니면 미안해서?”



 내내 피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있던 나는 그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조차도 내가 왜 이렇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나의 아버지는 사업가다. 60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사업가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내 나이 즈음의 아버지는 이미 그 동네의 5대 부자 중 하나일 정도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유명인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거리에 나서면 마주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를 알아봤고, 정중하게 말을 건네 왔다. 시내 중심가에 갔을 땐 5걸음을 그냥 걸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당시로선 흔하지 않았던 검은색 그랜저를 끌고 다니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항상 어깨가 으쓱했었던 것 같다.


 나에게 최고의 안락함만을 제공해 주었던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정말 이 세상 최고로 위대한 사람 같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후 사업 실패와 도박으로 우리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18년..

 이후 우리는 무려 18년이라는 세월을 가난하고 불안한 상태에서 살았다.



 사업 실패 이후 부모님이 이혼하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각자 어디론가 떠나버린 상태에서, 나는 고모 댁에 맡겨져서 컸다. 그렇지만 고모도 이혼 후 외벌이로 세 아들, 딸을 돌보는 상황이라 실질적으로 나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늘 별다른 생각 없이 엄마 손이나 가정부 아주머니 손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던 나는 8살 때부터 갑자기 스스로를 챙기는 법을 익혀야 했다.


 아버지가 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가끔씩 불쑥 나타나서 얼마 안 되는 돈이 든 돈봉투를 전달해 주고, 다음을 기약하지 않은 채로 사라지곤 했다. 나는 그걸로 학교에 내야 할 돈을 알아서 내고, 내 용돈을 알아서 썼다. 아버지의 연락은 주기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아버지의 연락을 기다리는 시간은 항상 너무 불안하고 무서웠다. 이대로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이대로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없으면 난 어떡하지?


 나는 그런 생각들로 항상 불안에 떨었다. 친구들은 1천 원, 2천 원을 대수롭지 않게 썼지만 나는 돈 한 푼 쓰는 것도 너무 무서웠다. 혹시 불량한 학생들에게 뺏기기라도 할까 봐 덜덜 떨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어쩌다 돈을 뺏겨도 잠깐 혼내고 다시 용돈을 줄 부모님이 계셨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부모에게 나가는 알림장은 나 스스로 꼼꼼히 확인했고, 부모님의 확인이 필요한 숙제 검사나 성적표의 부모 확인란에 티 나지 않게 어른의 글씨를 흉내 내어 ‘검’ 자를 쓰는 것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부모와 함께 하는 행사나, 학부모가 동원되어야 하는 일들에는 애써 둘러대며 대처했다. 초중고를 나오는 동안 나의 아버지가 학부모 면담 사유로 학교를 방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온 가족이 다 오는 체육대회 때는 부모님이 바빠서 못 온 척, 친구네 돗자리에 가서 조용히 혼자 아침에 사 온 김밥을 먹었다. 학교에 부모님이 와서 들뜬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동요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나는 그렇게 유화부인의 알처럼 친구들과 나를 안쓰럽게 여긴 친구 부모님들의 도움을 받아 컸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을 때 자랑할 사람도 없었지만,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가끔 학교에서 엇나가는 친구들, 그중에서도 집안에 문제가 있어 힘들어하고 에서 겉도는 친구들을 보면서 공포심에 휩싸이기도 했다. ‘나는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라는 생각으로 그저 꾸준히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혼자 과외도 한 번 받지 않은 채로 수능을 보고, 대학도 갔다.


이렇게 어린 시절의 나는 나 자신을 돌보고 꼼꼼히 챙기는데 무척 필사적이었다. 아버지의 사업도 불안정하고, 남동생은 아픈 상태에서 나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면 정말 인생에 희망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시기의 내겐 오직 나 자신만이 나의 유일한 보호자였고, 부모였다. 나의 관심사가 오로지 내 생존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던 것도 당연했다.


 어찌 됐든 나는 잘 살고 싶었다. 장차 뭘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의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는 않았다. 내 목표는 자연히 학창 시절에 봤던 안정적이고 좋아 보이는 친구들처럼, 매달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고, 가끔은 출장도 다니는 그 친구들의 부모님처럼 사는 것이 되었다.


 돈이 떨어질까 봐 벌벌 떨고, 언제 올지도 모를 아버지의 연락을 기다리며 속을 태우는 그 삶이 싫었다. 돈 때문에 일찍 철이 들어버린 내가 싫었다. 그저 천진한 학생으로, 아무것도 생각하고, 걱정하지 않는 친구들처럼 살아볼 기회를 박탈당한 게 슬펐다.


 아버지가 7전 8기로 사업에 재기하기까지 걸린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간절하게 안정을 바라고,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8살부터 26살까지, 초년 인생의 대부분을 말이다.








 18년 만에, 남들은 어느 정도 포기할 나이였던 50대 중반의 나이에 나의 아버지가 기어코 사업 재기에 성공했을 때. 나는 호주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 조금 여유롭게 취업 준비를 하고 싶어서, 시급이 센 호주에서 1년 간 바싹 돈을 모아 오고 싶었다.


 그렇게 1년 동안, 현금 천만 원을 모아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내가 출국하기 전과 후의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내가 출국하기 1년 전, 구상 단계에 있었던 아버지의 사업은 낸가 호주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았던 1년 간 드라마틱한 성공을 거둔 채였다. 늘 지쳐 있던 아버지의 표정에는 활기와 자신감이 넘쳤고, 마치 그동안 가장 노릇을 하지 못했던 시간을 뒤늦게 메꾸기라도 하려는 듯 내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다


 어안이 벙벙했다. 돈 걱정을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걸 천천히 생각해도 된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습관과 트라우마는 자꾸만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이룬 부는 엄청난 것이었지만, 동시에 내 눈에는 언제든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담대한 투자와 결정으로 다시 부자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가난했던 시절의 마인드를 떨쳐낼 수 없었다.


 어린 내게, 가끔 나타나서 밥을 사주고 돈봉투를 던져주는 아버지는 경제적인 후원자였지, 나의 ‘보호자’는 아니었다. 내가 위험한 곳에 가지 않게 하고, 이상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게 하고, 아플 때 병원에 데려가고, 쓸데없는 데 돈을 쓰지 않도록 착실하게 나를 키운 보호자는 결국 나 자신이었다. 어쩌면 바로 그랬기에 나의 후견인인 아버지가 이룬 부가 진정한 나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보다 실체적이고, 믿을 수 있는  ‘내 것’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에 봤던, 화목했던 가정의 친구들과 같은 ‘평범함’을 꿈꾸며 그것을 손에 쥐어 마침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기만을 소망했다. 그랬기에 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나의 보호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더듬더듬 찾아나갔다.


 그리고 30대 중반의 나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가끔 사람들과 어울리며, 꿈꾸던 ‘평범한 삶’을 안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지난 삶 내내 나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나는 이제 그런 부모 역할을 살짝 내려놓고, 독립해 나가는 자식 같은 내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나, 그래도 이만하면 꽤 잘 크지 않았나?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너무 좋잖아.
 




이런 자화자찬도 좀 해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난, 이후 이것이 우리 가족의 갈등의 씨앗이 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내가 아버지의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직장 생활을 처음 시작했을 때, 아버지는 ‘그래, 사회생활도 좀 해보면 경험도 쌓이고 나중에도 좋지 뭐’ 하는 식으로 크게 깊이 생각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내가 직장 생활을 한 지 몇 년이 지나자, 슬슬 아버지는 나의 삶의 방식에 대해 공격적인 발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너 그런 ‘푼돈’ 벌어서 뭐해 먹고살래? 평생 그렇게 살아서 부자 될 수 있을 것 같아?”

“ 회사는 결국 남 좋은 일만 해주는 거야. 그거 다 네 것 아니야.”

“ 평생 그렇게 남의 부품처럼 살다 죽을래?”



 아버지가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는 물론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인생을 폭싹 말아먹기는 쉽지만, 아버지와 같은 ‘진짜 사나이’가 가오와 자존심을 버려가면서 밑바닥으로부터 다시 일어서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본인과 가족의 삶을 두고 ‘사업’이라는 여러 번의 베팅을 했다. 그리고 그 새로운 도박판에서 계속해서 잃다가, 한 번을 크게 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낸 것이다. 그 자부심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비범한’ 아버지의 딸인 나는 달랐다. 나는 비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사자였다면, 나는 사자에게서 태어난 고라니였다. 사자가 사자와 결혼했다면 물론 사자를 낳았겠지만, 결혼도, 자녀에게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도 결국 두 사람이 하는 ‘랜덤 뽑기’같은 것이기에, 그 어떤 부모도 온전한 그들 자신을 낳을 순 없다.


 그렇지만 나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본인이 사자기에, 그리고 어찌 됐든 이혼한 부인이 아닌, 사자인 본인이 양육권을 가지고 영향을 미치며 키웠던 아이이기 때문에 자신의 자식은 사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봤을 때는, 당신의 딸은 분명히 사자인데. 힘들게 육식동물을 사냥하러 가지 않고 고라니처럼 고라니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풀이나 뜯는 직무 유기 중인 사자로 보이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 vs 아버지가 생각하는 내 모습


 아버지는 그런 내 모습에 너무도 자존심이 상하신 것 같았다. 아버지는 내가 언젠가 본인의 사업을 이어받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작 나로부터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은 채 나의 직장생활이 안정적으로 길게 이어지자 조금씩 초조해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사업을 할 재목이 아니었다. 사업을 할 순 있었겠지만, 내가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나는 아버지처럼 24시간을 사업만 생각하며 살며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여 이뤄낸 모든 것들을 존중하지만, 지난 세월은 우리 두 사람의 성향을 너무도 다른 방향으로 갈라 두었다. 아버지의 다사다난한 인생의 질곡을 보며, 내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는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안정적인 삶’ 이 되어 버렸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가 생각하는 ‘가장 한심한 삶의 방식’ 그 자체였다.


 아버지는 나를 향해 혐오감과 분노를 쏟아냈다. 아버지는 당신의 딸이 비범한 인물이길 바랐다. 더욱 큰 사람이 되어야 되는데, 생각하는 스케일이 너무 작고 평범하다고. 본인 자식이면 사자 같이 넓은 마음을 가지고 공격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도 모자랄 판에, 오직 제 자신의 안위밖에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화를 낼수록 나는 무척 혼란스러웠다. 나는 진심으로 아버지로부터 내가 나만 안다고 혼나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비행기의 기내 안내 방송 시청각 자료를 보면, 비상 상황에서 혹시라도 기내의 산소가 부족해졌을 때 자동으로 산소마스크가 내려오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바로 다음 내용이다.




“유사시에 산소마스크는꼭 본인이 먼저 착용한 후, 옆 사람을 도와주세요.”



 산소마스크든, 구명조끼든, 옆에 탄 게 내 연인이든, 어린 자식이든 간에. 일단은 나부터 산소 호흡기를 써야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생존이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내가 나를 먼저 선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일단 나 자신을 가장 먼저 챙겨야 다른 사람도 챙길 수 있는 상황이 되니까.


 우리 가족이 콩가루처럼 각자 떠돌던 18년 간은 우리에게는 산소가 부족한 기내 상황과 같은 ‘비상사태’였다. 그 시기에 내가 나를 최우선으로 하고 챙기며 살아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 모습이 있을 수 있었을까? 내가 나를 잘 알고, 나를 최우선으로 돌보지 않았다면 정작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의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결국은 내가 혼자서 크면서도 크게 속 썩이거나 말썽 부리지 않고 조용히 스스로를 잘 챙기며 살아왔기 때문에 아버지도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사자가 고라니를 낳아놓고, 고라니로 크게 해 놓고, 사자가 되지 않는다고 다그치니 나는 너무 미칠 것 같았다. 그저 내가 ‘나’ 답다는 이유 만으로, 내가 지밖에 모르고 집안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하자품’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괴로웠다.


내가 갖고 태어난, 그리고 지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자아와 습관으로 만들어진 ‘나’인 상태로 있는 것만으로도, 그나마 이해받고 의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가족’이라는 존재에게 문제아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내가 ‘나’인 상태로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이 심장이 아프고 숨이 가쁠 만큼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내게 윽박지르듯 말했다. 이만큼 사업이 다시 성공한 건 당신이 모든 것을 희생해서 노력했기 때문이라며. 다시 그때처럼 거지같이 살고 싶냐고.


 그렇지만 나는 아버지가 부자라서 아버지를 존경하는 게 아닌데. 그냥 가족이니까, 가족이니까 더 대단하게 생각하는 건데. 내가 아버지가 보기에 훌륭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고, 당신의 높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정말 이렇게 내 존재와 삶의 방식 자체를 부정당하며, 끊임없는 ‘교정의 대상’으로 취급받아야 하는 충분한 사유인 걸까?


 내가 사업을 하지 않으면, 돈을 많이 벌지 않으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 않으면... 나는 잘못 살고 있는 건가? 아무리 내가 열심히 아등바등 살고 있어도 그건 ‘헛된 노력’에 불과할 뿐이고 나는 지금 허송세월에 불과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것일까?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더니, 아버지의 사랑은 그토록 시혜적이고, 조건부란 말인가.


 나는 그렇지 않은데. 시간을 되돌려 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는 평범한 어린 시절을 가질 수 있다면, 비록 아버지가 당신이 그토록 무시하는 ‘푼돈 버는 월급쟁이’라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를 사랑했을 텐데.


 아버지가 건네주는 돈 봉투는 내 생존에 있어서 상당히 크리티컬 한 것이었지만, 어린 시절의 내가 아버지의 연락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것은 꼭 돈 때문만은 아니었는데. 아버지와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그리움, 그리고 밖에서지만 함께 나눌 수 있었던 식사. 그 시간들이 기다려졌던 것은 아버지가 단지 내 ‘아버지’라서였지,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주기적으로 귀에 때려 박히는 아버지의 가스 라이팅은 나로 하여금 나 스스로를 가치 없는 인간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나에겐 나 자체로 충분한데, 지금 충분히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아버지에겐 지금의 나만으로는 도저히 충분하지 않을 것 같다’는 허탈감과 무력감. 여태까지 혼자서도 인생의 ‘정도’를 벗어나지 않으려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살아왔던 내 존재가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에, 나는 무척 괴로웠다.


‘나, 왜 살지. 왜 살고 있지. 아 모르겠다. 그냥 죽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게 바로 한창 사업이 실패해서 힘든 시기에 나를 생각하며 죽지 못하고 버텼던 아버지라는 게, 우리의 지난 험난한 인생사를 비춰봤을 때 일종의 블랙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는 가난했을 때 더 애틋했고, 더 가족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 친구들이나 회사 동료들이 가끔씩 내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다.



“내 딸이 꼭 너 같았으면 좋겠다.”



 알아서 제 앞가림을 잘하기 때문에 별도로 손 갈 필요가 없어 보인다며, 너희 부모님은 딸 편하게 키워서 참 좋아하시겠다며. 그런 말을 들으면 왠지 씁쓸해져서, 난 이렇게 대꾸하고 만다.



“너무 일찍 철들어도 좀 그래요.. 애들은 의젓하고 다 알아서 하고..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애들은 좀..마냥 애다워도 되는 것 같아요.”



 ‘전 사실 그렇게 살고 싶었거든요,라는 마지막 말은 항상 속으로 삼킨 채.






 

 

 한참을 울었다. 이런 날은 어떤 말도 소용이 없다. ‘스스로를 가장 많이 사랑해 주세요.’라는 흔한 위로의 말조차 ‘아니 내가 쓰레기인데 사랑은 무슨 개뿔 사랑이야!’이라는 말로 날카롭게 받아쳐 버리고 싶어 진다. 울면서 집에 들어와서 보니, 최근의 나에게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주는 사람이 없다. ‘잘하고 있다’, ‘충분하다’, ‘너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널 믿는다’ 등등... 마지막 연애 이후로 이런 말을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들어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요즘은 일터에서든, 집에서든, 그저 나는 한없이 혼자인 것만 같다. 문득 누군가 형식적인 다정한 말 한마디만 건네줘도 왈칵 눈물이 날 정도로 나는 피폐하고 약해져 있다.


 어린 시절에 비해 비록 경제적 상황은 나아졌을지언정, 어디 한 군데 기댈 데도 없이 그저 끙끙 속으로 앓는 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다 이대로 죽겠지.어느새 나는 다시 정신 단단히 붙들고 나 스스로를 책임져야 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 아무도 내 생각을 해주지 않는데,
적어도 나는 내 생각만 하며 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라고, 잔뜩 센 척을 해 보지만. 아무래도 모르겠다.


가족이라는 존재에게도 기대를 버려야 한다, 절대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면서도, 살림 밑천이 되지 못했다는 왠지 모를 죄책감에 답답함을 느끼며 흔한 K장녀는 오늘도 절규한다.



“난 좀 나만 생각하고 살면 안 되나요?”



'이기적인' 건 나쁜 게 아니다. 일단 내가 먼저 숨은 쉬고 봐야 할 것 아닌가.


이미지 출처 : Self care : putting your own oxygen mask on first (theabak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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