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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Oct 25. 2020

마틴 에덴 (2019) : 타자기에 서린 열망

작가가 된 '위대한 개츠비'.


<마틴 에덴>이라는 책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던 것은, 최근에 왓챠로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봤을 때였다. 러닝타임 초반 무렵, 아직 어린 소년이었던 누들스는 화장실에서 <마틴 에덴>이라는 소설을 펼쳐본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 중에서


 편집에 편집을 거듭했음에도 러닝 타임이 4시간을 넘는 영화에서 굳이 주인공이 책을 읽는 모습을 담아내고, 심지어 관객이 그가 어떤 책을 읽는지 눈치채지 못했을까 봐 내지의 타이틀까지 정성스레 화면 한 컷에 가득 보여주는 것을 보고 '아 이건 뭔가 심상치 않은 책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영화 자체는 내가 그다지 선호하는 스타일의 영화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소년 누들스가 읽었던 <마틴 에덴>이라는 책이 자꾸만 궁금해졌다. 잭 런던이라는 작가명이 생소했기 때문에 큰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 국내에서는 그 책을 구할 수 없었다. (한 30년쯤 전에 한번 번역 출간된 적은 있었던 듯 하나, 지금은 절판된 상태인 듯했다.)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구할 수 없는 걸 뭐 어쩌겠나. 그저 나는 그 후로 한동안 이 책에 대해서 잊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달 즈음부터, 페이스북으로 <마틴 에덴> 국내 상영 소식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이 책은 이미 영화화가 진행되었고, 작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도 했던 모양이었다. 올해 10월에 정식 개봉을 앞두고 배급사에서 본격적인 홍보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마틴 에덴>에 대한 매우 희미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나는 그들이 쳐 놓은  '굿즈'라는 미끼를 단단히 물어버리고 말았다.

 


혹시 이 글을 염탐하는 알토미디어 관계자분들이 계시다면 그들의 타겟팅은 대성공이었다고, 굿 잡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알토미디어 페이스북에 올라온 이 작고 귀여운 타자기 굿즈 핀뱃지를 처음 본 순간, 내 안에서 한동안 잊고 지내던 물욕이 새삼스럽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결국 내가 오늘 충무로까지 먼 여정을 떠나서 굳이 16,000원이라는 '굿즈 패키지'로 이 영화를 보고 온 이유는, 뭐 내용이 궁금했네 뭐네 이것저것 다 차치하고서라도.. 그저 오로지 사은품으로 준다는 요 타자기 핀뱃지가 받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다. 마케팅의 노예 





 나는 '타자기' 세대가 아니다. 초등학교 때는 DOS 컴퓨터가 있었고, Windows 95를 쓸 무렵에는 컴퓨터의 키보드로 한컴 타자연습을 했었다. 타자기라는 것의 실물을 본 적도 없으며, 어떻게 쓰는 건지도 잘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타자기가 무척 좋았다. 어릴 때부터 영화 속에서 타자기를 볼 때마다 두근거렸다. 한 줄 한 줄을 정성스레 쓴 다음 줄을 내리고, 리턴 암을 사용하여 당겨서 한 줄 한 줄 활자를 흰 종이에 찍어나가는 타자기의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 가슴을 뛰게 했다. 문장이 새겨져 갈수록 위로 길게 뻗으며 휘는 하얀 종이의 모습을 보다 보면, 옛날에 베틀로 직물을 짤 때 이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호기심도 일었다. 새로운 글이든, 옷감이든. 뭔가 새로운 존재가 한 줄 한 줄 짜여가며 차곡차곡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는 것은 무척 감동적인 일이기도 했다.


 '저러다 오타가 나거나 틀리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한 자 한 자를 눌렀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짜릿했다. 백 스페이스 키가 있는 일반 컴퓨터의 키보드와는 다른 ,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타자기의 무자비한 현재성은 오타쟁이였던 내게는 오로지 타자기로 글을 쓰던 당시의 글쟁이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심어주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은 손가락이 타자기의 활자를 타이핑할 때 눌리는 자판으로부터 들리는 경쾌한 소음이었다. 타닥타닥 두드리는 소리, 살짝 스프링이 튕겨 올라가는 팅-소리. 그저 타자기에 대한 모든 것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아마도 내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주기적으로 어딘가에 계속 뭔가를 쓰고 있는 것도, 오로지 키보드를 누를 때 들리는 타닥타닥-하는 소음이 좋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마트폰도 굳이 물리키가 있는 블랙베리 KEY2를 쓰고 있다. 스마트폰으로도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저 태블릿 PC에 키보드로 이렇게 글을 끄적이는 게 전부인 나지만, 그래도 때로는 나 자신의 손가락으로부터 부지런하게 흘러나오는 키보드 소음을 들으며 타자기를 쳐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하니까. (현재 내가 브런치에서 운영 중인 매거진 중 하나인 <타자기를 치켜세움> 또한 존경하는 작가인 폴 오스터의 올림피아 타자기에 대한 일러스트와 에세이를 담은 책, <타자기를 치켜세움>이라는 책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돈을 많이 벌어서,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멸종된 빈티지 타자기 한 대를 들여서 가지고 노는 게 어느새 내 소박한 꿈이 되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올라온 저 핀뱃지를 본 순간, 그 즉시 나는 저 작고 앙증맞은 핀뱃지 형태로라도 나만의 '타자기'를 소유하고야 말겠다는 열망을 품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 줄 요약을 해 보자면, 저 핀뱃지 굿즈는 그야말로 완벽한 내 '취향 저격'이라는 말이 되겠다.)





 영화를 보면서 신기했던 것은, 소설에서 영화로 각색되며 배경이 이탈리아로 각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이름이 미국 스타일 그대로 '마틴 에덴'이었다는 것이다. (보통은 더 자연스럽게 '마르티노'라고 바꿨을 텐데..) 때문에 이탈리아어를 전공한 나로서는 극 중에 주인공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문득문득 왠지 모를 어색함을 느꼈다. 그러나 영화를 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뒤에는, 왜 그의 이름이 이탈리아 식으로 번안되지 않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멀티 유니버스나 AU 같은 설정처럼, '마틴 에덴'이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든 '마틴 에덴'이다. 미국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그는 '마틴 에덴'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 타당한 사람인 것이다.



 다만, <마틴 에덴>을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바로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개츠비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이 영화의 제작 배경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결국 '마틴 에덴'은 미국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완성된 또 다른 '개츠비'라는 느낌도 든다.


 이와 같은 느낌은 비단 나만 받은 것은 아닌 듯하다. 알고 보니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누들스가 <마틴 에덴>을 읽는 신을 넣은 이유도, 원래는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장면으로 연출하고 싶었지만 해당 도서의 출간 연도가 1925년으로, 화장실 씬의 작중 연도인 1923년 당시에는 미출간 된 책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영화 속 소년 누들스의 이후 여정이 위대한 개츠비의 서사와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성공을 갈구했던 개츠비와 마틴 에덴, 두 사람의 서사는 마치 동일인물을 주인공으로 세계관만 변주한 스핀 오프처럼 꼭 닮았다.


사실 이 포스터는 낚시에 가깝다. 서브 여주인 마르게리타는 거의 영화 내내 주인공에겐 아웃 오브 안중이었다..


 다만 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개츠비가 확실히 사랑을 위해 부와 명예를 손에 얻으려 악착같이 노력해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면, 마틴 에덴은 작가로 성공하여 사랑을 얻고자 했다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본 뒤 내가 포스터의 문구에 공감할 수 없었던 이유 또한 바로 그 지점이었다. 현재 이 영화를 홍보하고 수식하는 문구들은 마치 마틴 에덴을 '오직 한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펜 하나로 세상과 맞선 남자'인 것처럼 비치게 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 속에서 내가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 아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계속해서 글을 써 내려가려 했던 한 남자의 모습일 뿐이었다.


 나는 전반적으로 영화를 보며, 마틴 에덴이 엘레나를 위해 글을 쓴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마틴 에덴은 분명 그녀를 사랑했지만, 다만 그 이전에 작가로서 성공하고 싶었던 열망이 그녀를 향한 욕구보다 훨씬 강했던 것 같다. 냉정하게 말해서, 영화 속 엘레나의 존재는 마틴 에덴이 작가로서 먼저 성공한 다음에 취할 수 있는 부수적 존재일 뿐이다.


 물론 마틴 에덴의 글은 엘레나가 있기에 성장할 수 있었고 또한 완성될 수 있었다. 영화 초반에 그는 거의 엘레나를 숭배하며, 급기야는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당신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싶어요.”




 영화 초반의 마틴 에덴은 자신의 무식함에 주눅 들어있으면서도, 엘레나처럼 말하고 생각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엘레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지 않고 그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야 할 점을 꾸준히 일러준다. 그녀는 마틴 에덴의 문장을 완성시키는 뮤즈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위해 글을 쓰지 않았다.


 마틴 에덴과 위대한 개츠비의 미묘한 차이점은, '만약 개츠비가 마틴 에덴이었다면 어땠을까'를 한번 상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개츠비가 사업가가 아닌 작가였다면, 그는 데이지를 웃게 하는 희망적인 글을 썼을 것이다. 데이지의 손을 끌고 빈민가를 걸으며 그녀가 모르는 끔찍한 것을 보게 하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억지로 본인의 세계를 이해시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엔 개츠비에게 데이지가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마틴 에덴'은 본질적으로 '위대한 개츠비'와 달랐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에 자신을 찾아온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게 욕구가 있었다면 널 원했겠지만,
인생이 너무 거지 같아서 욕구가 남아있지 않아."




 마틴 에덴은 작가로서의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마지막 강연회장에서 아직까지 자신을 선원(il marinaio)이라고 부르는 기자에게 불같이 화를 낸다. 자신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앞에서 호기롭게, 동시에 위태롭게 '아무도 날 망칠 수 없다, 나는 마틴 에덴이니까!'를 외쳤던 그는 결국 바다(il mare)로 뛰어들어 그 생을 마감한다.






 이 영화는 타자기에 서린 열망에 대한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무엇인가를 써 내려가고 있는 세상의 모든 타자기들과 그들의 주인들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 속에서 낭랑하게 들려오던 고집스러운 타자기 소리에 내 마음속의 타자기도 공명하듯 울리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어서 집에 들어가서 글을 써야지, 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 가슴이 뛰었다.


 타자기의 소음이 가진 전염성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할 것이다. 손가락으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누르는 타자기의 자판의 소음에는 욕망이 서려있다. 쓰고 싶은 열망, 누군가가 내 글을 읽어줬으면 하는 욕망. 언젠가는 글로써 성공하여,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 나 또한 그런 욕망을 그득그득 담아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배급사에서 공개한 사진 중 제일 마음에 드는 사진. 결국 작가라는 것은 백지 속에 숨어 있는 실체 없는 무엇인가를 향해 하염없이 손을 뻗는 존재라는 걸.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면서 기억에 남았던 대사 몇 개를 아래에 첨부한다.


+


"열쇠가 있다면 감옥도 집이 될 수 있죠.
그 열쇠는 바로 사랑이에요"




 "나는 꿈을 꾸지 않아, 인생을 직면하며 살아가지"


 “작가 마틴 에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전설이 아닙니다. 아무도 날 망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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