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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Nov 15. 2020

운동하는 여자들이 지구를 구한다

<파이팅! 대운동회>를 보던 소녀들은 어디로 갔을까


최근 들어 각종 매체에서 ‘운동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부쩍 회자되고 있다.


http://naver.me/xxaSwZtX


  20년 전에는 거식증에 걸릴 것 같은 마른 몸매를 찬양하고, 10년 전에는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 - 꿀벅지, 애플 힙 - 등을 선망하던 대중이 이제야 본격적으로 여성의 ‘근육’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최근의 홈트 챌린지나 근육 트레이닝 열풍을 보면 여자들에게 ‘근육질의’ ‘건강한’ 몸의 형태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이 시대의 또 다른 코르셋의 일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바디 프로필 사진을 찍기 위해 철저히 식단관리를 하며 운동을 하는 누군가의 모습이 힘겨워보일 땐, 2000년대 초 각광받던 비쩍 마른 모델 같은 몸을 갖고 싶어서 거식증에 걸리거나 ‘먹토’를 하던 소녀들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유독 이 화보가 반가웠던 것 같다. 화보 속 그녀들의 사진을 보면 최근에 유행하는 바디 프로필 사진들의 작위적 연출과는 다른 자연스러운 느낌이 든다. 사진에 연예인 화보같이 찍힐 수 있는 몸을 만들기 위해, 남들에게 예쁘게 비춰지기 위해 몸의 생김새를 조각하는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을 더 잘하기 위해 꾸준히 수양하다 보니 자연스레 획득한 근육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보기에도 한결 편안하고 좋아 보인다.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보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가 하나 있었다. 어렸을 때 그런 장면을 본 적 있었다. 운동복을 입은 채 20분 내내 화면을 뛰어다니던 괴력의 소녀들이 나오던 애니메이션. 어린 시절에 하루도 안 빼놓고 즐겨 봤고, 너무 좋아서 게임 CD까지 구매해서 밤낮으로 플레이했던 그것은, 그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파이팅! 대운동회>였다.


비주얼만 봐도 열혈 스포츠물..!


 나의 어린 시절은 미소녀 전사들의 시대였다. 세일러문, 웨딩 피치, 마법 기사 레이어스 등.. 슈퍼 모델 같은 비율을 자랑하는 비쩍 마른 14살의 소녀들은 애니메이션 속에서 수영복 같은 레오타드 의상을 입고 야수 같은 악당들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비록 마법 보정을 받긴 했지만, 분명히 '핵존쎄'로 보이는 무시무시한 빌런들이 타격감 제로로 보이는 종이인형 같은 소녀들의 발차기를 맞고 리타이어 될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이건 좀 비현실적이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2차 성징기의 소녀들에게 조금의 체중 증가도 허락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의상과 소품들을 보라!


그런 내게  <파이팅! 대운동회>는 여성에게도 근육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하게끔 해준 애니메이션이었다. 다른 애니메이션에서라면 평면적인 종이인형이나 보기 좋은 바비인형 같이 묘사되는 2D 속 여성들에게도 달리기 위한, 싸우기 위한 근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소녀들은 끝없이 달리고, 부딪히고, 단련한다. 그녀들의 목적은 오직 하나, 조금 더 강해져서 모든 스포츠를 섭렵한 뒤, '코스모 뷰티'라는 우주 최고의 영예로운 자리에 오르기 위함이다.


정말 빛을 뿜으며 달리는 전설의 코스모 뷰티, 미도 토모에 (한국명 : 한은영). 이렇게 강한 몸으로 그렇게 지독한 불치병에 걸려 단명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이 애니메이션은 서기 4999년이라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세계관 속에 인류는 신체의 능력을 극대화는 스포츠를 숭상한다.  조금 황당하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상당히 현실적인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고도로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그로 인해 인간의 삶이 편리해지면 질수록. 아마도 어떤 기계의 도움도 받지 않은 인간 본연의 순수한 신체적 능력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것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엄청난 풍요와 문명을 이룩한 로마 사람들이 원초적인 콜로세움의 검투사 경기를 즐겼던 것처럼 말이다. 인류는 언제나 새로운 유희 거리를 찾기 마련이다.


 사실 매년 전 우주의 인류를 대상으로 '대운동회'를 개최하여 온 우주의 인간들이 동경하는 최고의 스포츠 퀸에 오르는 영예의 자리, 코스모 뷰티를 선정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칸자키 아카리(한국명 : 금빛나)가 코스모 뷰티가 되기까지는 자세히 다루진 않지만, 사실 코스모 뷰티를 선발하는 이유는 언젠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 예고되어 있는 외계 행성의 침략에 대항할, 인류를 대표할 스포츠 전사의 대표를 뽑는 것이다. (일전에 지구를 한번 침략한 적 있었던 외계 행성의 빌런이 여자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운동선수들이 전부 여자인지라 부득이하게 대학 위성에서의 선수 육성과 선발은 오로지 소녀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육상, 사이클, 복싱, 라크로스, 장애물 달리기 등..정말 현존하는 모든 스포츠가 다 나온다. 체육 시설이나 카운팅 시스템이 미래적인 게 은근 보는 재미를 더하기도.


 이 얼마나 멋진가. 매일 강해지기 위해 훈련하고, 서로 겨루며 우정을 나누던 멋진 여자들이 지구가 위기에 처하자 함께 모여 지구를 구할 '드림팀'을 결성하고, 외계 행성의 침략에 지구의 운명을 건 스포츠 대결로 승부를 펼치다니. 이 세계에서는 마법소녀물 같은 변신도,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부여받았다는 마법 같은 것도 없다. 오로지 그간 각자 단련해 온 자신의 실력과 신체만으로 동료들과 정정당당한(?) 경기를 하며 스포츠 실력을 겨룬다. 그리고 바로 그 운동회에 지구의 미래가 걸려 있다.


 운동하는 여자들이 지구를 구한다니,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멋진 설정이었잖아.


 

 기가 막히네,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문득 그리워졌다. 어렸을 때, 일주일에 한 번씩 방영을 기다려 <파이팅! 대운동회>를 함께 보고, 매일같이 학교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방과 후에는 피부가 까맣게 타는 줄도 모르고 해가 질 때까지 놀이터에 모여 고무줄, 술래잡기, 피구, 오재미를 하며 뛰어놀던 그때 그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도 오늘 하루, 어딘가에서 각자 나름대로 이 지구와 전 인류의 운명을 위해 싸우고 있을까.






 얼마 전, 회사에서 덕력이 깊은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이 애니메이션 이야기가 나왔다. '아, <대운동회> 그거! 정말 재밌었죠~' 라며 공감해 주는 후배 앞에서 나는 이 주제가의 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읊었다. 신들린 듯한 암송이 끝나자, 후배는 '와.. 선배님 정말 진심이셨나 본데요?' 라며 감탄했다. 나 또한 나 자신에게 감탄했다. 이렇게까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니! 나 정말 어릴 때부터 덕질에 미쳤고, 진심이었나 보다 하고.


https://youtu.be/GWKvzygjfo8

썸네일.... 저 시대에는 '가라않는'이 맞는 맞춤법 표현이었길 바라본다.


 왠지 오랫동안 잊고 있던 친구가 다시 생각난 것 같은 반가운 느낌에, 그 즉시 인터넷으로 <대운동회>를 검색해 보았다. 워낙 오래된 작품인지라 애니메이션 자체를 VOD로 서비스하거나 스트리밍 해주는 곳은 없었지만, 어린 시절 얼핏 만화책을 봤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에 아쉬운 대로 만화책이라도 중고로 구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만화책은 너무도 오래전에 출간됐었고 그것도 심지어 정식 출간이 아닌 해적판이었기에 그대로 역사 속에 사라져 버리고 만 것 같았다. (마치 내가 어린 시절 독파했던 능인 출판사의 고전만화 시리즈처럼...!)


 그러다 퍼뜩, 어렸을 때 내가 <대운동회> PC게임 CD를 사서 플레이를 했었다는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아마도 Windows95였던 시절 데스크톱에서만 돌아갔던 그 조악한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 CD는, 아마도 데이터에 대한 저장 강박이 있는 나의 특성상 집의 선반에 조용히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날 귀가하자마자 나는 바로 집에 있는 CD 선반을 샅샅이 뒤졌다. 더 이상은 쓸모없기에 선반 깊숙이 겹겹이 쌓아놨던 CD 사이에서, 익숙한 비주얼을 발견했을 때, 내 마음속 어딘가가 뭉클하고 찡하게 저려왔다.


우리 집 선반에서 유물을 출토했다!


 이거지, 이거야. 나름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PC를 꺼냈다. Windows 8.1 환경에서는 당연히 돌릴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한 덕후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트북의 CD롬에 이 CD를 한번 넣어봤더랬다.


CD 드라이브에 이렇게 아이콘이 떠서.. 혹시나 하고 눌러보니..!
상세 정보에 뜨는 시간이 무려 1998년..! 22년이나 된 CD이니 정말 유물이 맞다.


 역시... 인스톨과 오토런, 셋업 다 안 먹더라. Winodws 8.1에서 Windows95에서 돌아가는 CD를 돌릴 수 있는 유틸이 있는지 한번 알아봐야겠다, 하고 포기하려던 찰나. 왠지 게임 속에 들어가는 동영상을 모아둔 것 같은 AVI라는 폴더에 들어가 봤다.



 그랬더니... 정말 영상이 조금 나왔다!


 CD에 담겨 있던 영상들을 PC에 옮겨 확인해 보니, 대부분 게임 중간에 짤막하게 이벤트로 나오는 영상인지라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진 않았고, 저용량에 화질도 240p밖에 안 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뭔가... 감동적이었다.


대학위성에 가는 것은 여자들인데, 어쩐지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가 상징인 듯 하다. 변태 교장의 이몸등장★
<대운동회> 중에서도 가장 긴장감이 넘쳤던 것은 육상 장면의 시퀀스들이었다. 'on your mark' 를 애니메이션으로 배웠어요.
치열하게 겨루면서도, 마지막에는 스포츠 선수답게 손을 맞잡는 소녀들.


  비록 짤막한 조각 영상들이었지만, 당시에 나를 감탄하게 했던 소녀들의 강력한 의지와 시퀀스들을 보며 오랜만에 추억에 젖을 수 있었다. 1998년이라니. 정말 재미있었는데.


 문득 생각나서 너무너무 보고 싶어 진 나머지, 혹시라도 요즘의 레트로 열풍을 타고 어느 방송사에서 다시 방영해주지 않으려나, 혹은 최근의 '운동하는 여자들' 열풍을 의식해서 만화책이라도 다시 정식으로 발간해주지 않으려나.. 하는 마음에 다시 이 애니메이션에 대해 찾아보는 도중, 2021년 1분기에 <대운동회>가 애니메이션으로 부활되어 방영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포스터에 드러난 아카리의 모습에 처음에는 예전의 <파이팅! 대운동회>의 오리지널 리부트인 줄 알고 기뻐했으나.. 동일 세계관 속 다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라고 한다. 도쿄 올림픽 이후의 스포츠 붐을 예상하며 부활시킨 것으로 보이나 (....) 나는 왠지 오리지널 멤버들이 나오지 않는 <대운동회>는 그렇게 당기지 않는 것 같다. 기왕이면 재방영이나 오리지널 버전 리부트를 해달라고! (요즘 2000년대 인기 애니들 그림체 망가져서 리부트 되는 거 보면 차라리 가만히 추억 보정 속에 남겨두는 것이 현명한 것 같기도 하고..?)





 100미터 달리기 기록이 25초가 넘어가는 조악한 실력을 가진 나도, 어릴 때는 한 번쯤 <대운동회> 속 아카리나 토모에, 제시처럼 달리고 싶다는 꿈을 품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마음껏 달리고, 구르고, 점프하고, 뻗어 나가는 소녀들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몸과 마음의 근육을 획득하게 되는 여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눈에 띄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왜, 혹시 모를 일이지 않는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외계인의 침략이 발생하여 진짜 <대운동회>가 열릴지. 정말로 운동하는 여자들이 지구를 구하게 될지!



▼ 비록 올해 개최되지는 못했지만, 2020 도쿄 올림픽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스포츠 클라이밍에 대해 궁금하시다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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